박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밤 깊어 달은 서산으로 기울고 그렇게도 소란스럽던 풀벌레의 울음소리도 이제는 가끔 애잔히 들려 올 뿐이다.
가을이 오면 은빛 억새꽃이 무리 지어 피어나지만 바람이 일때마다 쓸쓸함이 배어 있고 달빛을 받으며 피어나는 순백의 박꽃에는 차가운 슬픔이 묻어 있다.
가난한 초가지붕위의 박은 달빛과 참 잘 어울리는 가을밤 풍경의 하나이다. 푸르스름하게 흰빛의 박은 달빛과 달과 너무도 흡사하다.
해가 뜨면 시들고 밤이 되면 피어나는 박꽃이 달빛의 영을 받아 달을 닮은 박을 잉태하였을 듯도 하다
사람도 미운정 고운정 들며 서로 닮아 가듯이 자연의 이치에서 살아가는 이치를 깨닫게 된다.
흥부네가 제비다리 고쳐주고 박씨를 얻어 심고 거두었다. 「톱질하세 톱질하세 썰근썰근 톱질하세 이 박은 타서 형님네 드리고」 자식새끼들이 굶는 것을 차마 못봐 형님댁에 양식을 얻으러 갔다가 밥 주걱으로 따귀만 맞고 돌아왔던 흥부가 형님네 드릴 박을 켜고 있다.
흥부형제가 살던 시절의 박은 나물 반찬으로 배불리 먹기도 하였지만 그릇으로 더 중요한 구실을 했다. 여물게 잘 익은 박을 골라 약간의 소금을 넣고 삶아 반으로 잘라 속을 파내고 바가지를 만들어 여러 가지 용도로 요긴하게 썼다.
밥을 지을 때 쌀, 보리등을 일궈 건지는데, 혹은 여러 가지 곡식을 담아 저장하기도 하였으며 심지어는 형편이 어려운 가정에서는 밥을 담고 비벼먹는 그릇으로도 사용하였다.
이러한 박은 박과에 딸린 한해살이 덩굴 식물로서 전체가 잔털로 덮혀 있고 가지 줄기가 변한 덩굴손이 있어 다른 물체를 잡아 감고 오르면서 뻗고 자란다. 잎은 어긋나며 둥근 심장형이고 끝은 얕게 갈라진다. 여름부터 꽃잎 다섯장의 흰꽃이 잎겨드랑이에서 한 개씩 피어나며 해질녘에 피어나 아침 햇살이 돋으면 시든다. 암수꽃이 한 그루에서 따로이 피며 가을이 되면 박이 지름 30 내외 크기의 원통형으로 자라서 익는다. 인도와 아프리카,아시아 열대지방의 원산지에서 건너와 토착화되었고 중국을 비롯한 우리 나라 전역에서 심고 가꾸어 왔다.
특히 박 김치는 예부터 별미로 담궈왔으나 요즘은 맛보기가 어렵다. 한국 전통음식 김치를 일본인들이 기무치라는 이름으로 자기네 전통식품처럼 포장 수풀한다는 보도가 있었다. 우리의 고유한 음식이며 약이 되는 박 김치를 전통을 살리면서 다양하게 재개발하여 채소 김치와 더불어 해외 시장에 판매해 봄직도 하다. 박은 호박과 더불어 농약을 전혀 사용하지 않아도 가꾸어 수확할 수 있는 무공해 식품이다.
박은 호로,호과.조롱.포 포과로 불리었으며 씨앗을 호자라 하엿다. 박은 속살이 깊어서 설익은 박을 삶아 껍질을 벗겨 나물 반찬으로 많이 애용하였고 이뇨제가 되었다. 잘 익은 박을 거두어 바가지 그릇을 만드는데 너 큰 목적을 두었다. 이러한 박은 민간에서 열매 껍지과 대나무 잎을 함께 달여 백일해 기침 멎이에 약으로 사용하였다, 박의 씨앗은 호박씨와 같이 껍질을 벗겨 속씨를 간식으로 먹기도 했다.
지난날의 가부장제와 조혼이 성행하던 시대에 박이 있어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다.
「열 일곱 여덟살의 처녀가 시집을 왔다. 신랑은 두세째 아래 동생뻘되는 여남은살 밖에 되지 않았다. 이 신랑이 얼마나 애를 태우는지 보리쌀 담는 소쿠리로 시냇가에 고기잡이를 가서 다 망가뜨리고 빨래를 해서 말리려면 흰옷에 황칠을 해대고 아니면 치맛자락을 잡고 따라다니며 말썽을 부리니 새색씨가 보다 못해 신랑을 번쩍 안아 아래채 초가지붕위에 던져 올려 버렸다. 이때 가을걷이 갔던 시부모님들이 돌아 온 것이다. 하늘같은 낭군을 감히 지붕위에 던져 올려 놓았으니 이일을 어찌할 것인가. 새색씨는 사색이 되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묻는다. 얘야 너는 지붕위에서 뭘하는가예 아버지 오늘 저녁 진지상에 올릴 나물박을 따고 있습니다」. 때마침 초가지붕위에는 박이 익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