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부주보 No.1019(2023.6.5.)
103위 성인_성녀 김장금 안나(1789-1839)
서울에서 태중 교우로 태어난 김장금은 어려서부터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중년에 이르러 과부가 되자 노모를 모시면서 이광렬 요한 가족과 돈독히 지내게 되었다. 두 집은 사이가 좋고 화목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1839년 4월, 이광렬, 이광헌 일가가 체포되었을 때, 김장금도 함께 붙잡혔고,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끝까지 신앙을 지켰고, 결국 7월 20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순교하였다. 그의 나이 51세였다.
■ 성지에서 만나는 성경 말씀_주님의 이름_김명숙 소피아
이집트의 시나이산 아래 자리한 카타리나 수도원에는 떨기나무가 있습니다. 이 나무는 잎이 푸르러 금방 인식하기는 어렵지만 가시나무의 일종입니다. 탈출 3,1-6에 따르면, 주님의 천사가 이 나무 사이에서 모세에게 발현하였습니다. 모세를 부르신 건 처음에는 천사였지만, 이후에는 주님으로 나옵니다. 천사가 하는 일은 모두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믿음이 반영된 것으로 보입니다(창세 22,1.11-18;판관 6,11,14 등). 불에 타면서도 사그라지지 않은 떨기나무는 이집트에 내린 열 가지 초자연적 재앙(탈출 7, 14-12,36 등)과 홍해 사건(14,15-31)과 더불어, 하느님이 천지의 창조주이심을 잘 드러내 줍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무슨 이유로 세상 만민 가운데 이스라엘을 콕 집어 종살이에서 구해 주신 걸까요?
그 까닭은 당신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에 있습니다. 탈출 2,24에는 하느님께서 그들의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맺으신 당신의 계약을 기억하셨다 라고 합니다. 여기서 기억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자카르는 단순히 잊었던 것을 떠올려낸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보다 더 깊은 의미로 고려하다 주의를 기울이다 라는 뜻입니다. 곧 위 구절은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체결하신 계약에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하셨다는 걸 의미합니다. 그래서 모종의 조치가 따르는데요, 바로 모세를 예언자로 택하시어 당신의 존재를 드러내신 것입니다.
이때 주님께서 알려주신 이름은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입니다. 히브리어로는 에히예 아셰르 에히예 인데, 알파벳과 발음으로 보아 야훼와 관련되는 듯합니다. 야훼라는 이름을 풀이하는 설은 여럿 있는데, 존재하게 하는 분이라는 해석이 가장 이해하기 쉽고 적합해 보입니다. 모든 생명의 주관자이심을 암시해 주는 이름이지요.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당신의 계신 곳은 거룩하니 신발을 벗어야 한다(탈출 3,5)고 말씀하신 이유도 이와 관계있어 보입니다. 당시에 백성이 신고 다닌 샌들은 가죽, 곧 죽음 짐승의 껍질로 만들었지요. 그런데 레위 11,39에는 저절로 죽은 짐승의 시체를 만지면 안된다는 금령이 나옵니다. 이 규정이 성소에서 신발을 벗어야 하는 이유가 된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생명의 주님이시므로 죽음과 관계된 것은 그 거룩함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뜻일 터입니다.
다만 주님의 이름, 나는 있는 나다는 일인칭 주어와 동사로 되어 있는데, 이는 하느님께서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임을 암시해 줍니다. 성경에서 이름을 지어주는 행위는 해당자에 대한 지배를 상징하지만(2열왕 24,17 등),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일인칭으로 알려주시어 누구도 당신을 창조하거나 그 위에 있지 않음을 계시하셨습니다. 그분의 모습 역시 당신께서 지으신 만물 그 무엇에도 온전히 담길 수 없기에, 십계명에서는 신상 제조를 금하였습니다(탈출 20,4). 이후 예수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오시어 하느님 당신을 완전하게 드러내실 때까지 말입니다.
■ 교회 복음화 사명의 도구인 사회교리_회생활의 근본 가치들 18 거부할 능력으로서의 자유
진리에 토대하고 정의의 안내를 받아, 자유로 성장하며 사랑의 활력이 충만한 사회(지상의 평화 35항 참조)_박동호 안드레아 신부_서울대교구,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위원
지난 몇 주에 걸쳐 자유를 행사할 권리에 관하여 소개하면서 무엇보다 자유의 행사가 무제한일 수 없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자유의 행사에는 책임이 수반됩니다. 그것은 개인의 자유 행사가 타인과 공동체, 더 나아가 창조 질서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거부할 능력으로서의 자유를 살펴보겠습니다.
자유는 제아무리 그럴싸하게 포장된 것이라도 도덕적으로 그릇된 것은 무엇이든 거부할 수 있는 능력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간주린 사회교리 200항). 독자들의 성찰과 정직한 대화에 도움이 되기를 소망하면서, 교회가 명백하게 거부한 도덕적으로 그릇된 몇 가지를 그대로 소개합니다.
온갖 살인, 집단 학살, 낙태, 안락사, 고의적인 자살과 같이 생명 자체를 거스르는 모든 행위; 지체의 절단, 육체와 정신을 해치는 고문, 의지 자체를 억압하려는 시도와 같이 인간의 온전함에 폭력을 자행하는 모든 행위; 인간 이하의 생활 조건, 임의의 감금, 추방, 노예화, 매매춘, 부녀자와 연소자의 인신매매와 같이 인간의 존엄을 모욕하는 모든 행위; 또한 사람들이 자유와 책임을 지닌 인간이 아니라 이윤 추구의 단순한 도구를 취급당하는 수치스로운 노동 조건; 이 모든 행위와 이 같은 다른 행위들은 참으로 파렴치하다. 이는 인간 사회를 부패시키는 한편, 권리의 침해로 고통을 겪는 사람보다도 그러한 행위를 자행하는 사람을 더 더럽히며, 창조주의 영예를 극도로 모욕하는 것이다(사목헌장 27항)
오랫동안 합법적인 권위(국가)가 공명정대한 재판 절차에 따라 사형을 선고하는 것은 비록 극단적이긴 하지만, 일부 범죄의 중대성에 대한 적절한 대응이자 공동선 수호를 위하여 용납될 수 있는 수단으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교회는 복음의 빛에 비추어 사형을 개인의 불가침과 인간 존엄에 대한 모욕이기에 용납될 수 없다.고 가르치며 단호히 전 세계의 사형 제도 폐지를 위하여 노력한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2267항)
프란치스코 교황은 복음의 기쁨에서 세상이 제기하는 몇가지 도전, 곧 배제와 불평등의 경제(53-54항), 돈이 라는 새로운 우상955-56항), 사람과 사회를 섬기기보다는 지배하는 금융 체제(57-58항), 폭력을 양산하는 불평등(59-69항)에 관하여 언급합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볼 수 있는 몇 가지 유혹, 곧 이기심과 정신적 나태함(81-83항), 헛된 염세주의(84-86항), 영적(정신적) 세속성(93-97항), 싸움(98-101항 참조)에 대해서 단호하게 NO라고 응답합니다. 특히, 전쟁과 관련해서는 모든 형제들에서 다음과 같이 거부의 뜻을 천명합니다.
이른바, 정당한 전쟁의 가능성에 관해 이야기하기 위해 지난 수 세기 동안 정성을 들여 만들어 낸 그 합리적 척도들을 내세우는 것은 오늘날 대단히 어려워졌습니다. 절대로! 다시는! 전쟁은 안됩니다(Never again war! 258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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