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4, 5세부터 외조부인 밀암(密菴.재령 李栽.갈암 이현일의 아들) 선생을 따라 금수(錦水.안동의 지명) 북쪽에서 학업을 배웠다. 선생은 나를 불초(不肖)하다고 여기지 않고 고인(古人)이 학문하던 방도를 정성스럽게 일러 주셨다. 하루는 조용히 더 가르쳐 줄 것을 청하였더니, 함양(涵養)하고 진학(進學)하는 요점을 손수 적어 주시어 종신토록 지침으로 삼게 하였다. 내가 삼가 받아서 잘 간직하고 감히 잊지 않았지만, 어리석고 지식이 없어서 밝은 가르침을 받들어 따르지 못하였다. 얼마 뒤에(이상정이 20살 때) 선생이 돌아가시자 아득히 갈 길을 몰라 경서(經書)를 품고 나아가 질정(質正)할 곳이 없었고, 바야흐로 또 사장(詞章)을 익혀 과거로 진취할 길을 엿보았기에, 이 마음은 이미 삭막하게 밖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상중(喪中.부친의 상을 말함)이라 다시 외물(外物)의 유혹이 없기에 비로소 방향을 바꿔서 옛날의 학업을 공부해 보려고 살펴보다가 우연히 옛 상자 속에서 이 첩(帖)을 찾아냈다. 삼가 읽어 보건대 선생의 수택(手澤.손때)이 아직도 새롭고 반듯한 의표(儀表.태도)가 어제 같건만 세월을 손꼽아 보니 어느덧 20년이 흘렀다. 처음 가졌던 뜻을 조용히 더듬어 보면 고인에 대한 그리움을 위안할 만한 학문의 진보가 조금도 없으니, 놀랍고 두려워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이후로는 피곤하고 노둔한 몸을 권면(勸勉)하여 한 푼 한 치라도 진보해서 하늘의 은혜 덕분에 혹 과거의 허물을 보충하고 처음 품었던 뜻을 늘그막에 거둘 수 있기를 바라지만, 질병이 침범하고 생각도 부족하니 모르겠구나, 끝내 이룰 바가 있겠는가. 선생의 글에 삼가 배접(褙接)을 붙여 책을 만들고 《중용(中庸)》의 운을 차운(次韻)한 시를 첨부하고, 나름대로 마음에 느낀 바를 이와 같이 적어서 언제나 갖고 다니며 반성할 자료로 삼고자 한다.
무진년(1748) 9월 초하루에 외손 (한산) 이상정(李象靖)이 절하고 삼가 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