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께서 노환으로 쇠약하셔서 식사를 제대로 못 하시던 기간에 요쿠르트를 줄겨드셨다.즐겼다기 보다는 겨우 그 음료로 연명하셨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작은 프라스틱 병이니 마시기에 간편하여 항상 곁에 두고 자주 드시면서 목 마름을 해결하고 나름대로 영양을 섭취하신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같이 사시는 형님 내외 분은 항상 요쿠르트를 구입하여 준비해 놓으셨고 누님들이나 누구든 어머니를 찾아 뵐 때는 기본적으로 사 들고 간 것으로 안다.
내가 뉴질랜드로 이주하면서 어머니 생애의 마지막 10년을 나라를 떠나 살았으니 거의 매년 한국 방문하여 찾아 뵈었지만 그 정도로는 불효의 죄를 씻을 수가 없다. 우리 집 냉장고에도 요쿠르트가 들어 있는 경우가 많아 자주 마시고 있는데, 그 때마다 어머니를 생각하게 된다.
또 한가지 내가 연양갱을 먹는 경우에는 우장춘(禹長春)박사님을 생각하게 된다. 해방직후 일본인들이 떠나가 텅 빈 한국 농업 연구기관을 일으켜 세우시고 불멸의 업적을 성취하신 세계적인 식물 육종학자로 많은 한국인들이 잘 알고 있는 인물이다. 1895년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사건) 에 가담한 부친 우범선이 일본으로 망명하여 결혼한 일본인 부인 사이에 태어난 우장춘은 동경대에서 공부하고 국립연구소와 민간 종묘회사에서 연구하여 세계적인 식물육종학자로 성장한다.
해방후 채소 종자 공급사업의 시급한 현안을 해결하기 위하여 이승만 대통령은 국사범의 아들임에도 우장춘박사를 불러들이게 되고 처자식을 일본에 두고 우박사는 단신으로 한국에 들어 왔다. 일본에서 잘 나가는 저명한 육종학자가 불모지대인 한국원예를 살리기위해 열악한 연구 환경에 뛰어든 것이다. 많은 생각을 하셨을 것이고 큰 결단을 내리셨을 것으로 본다. 수원의 농촌진흥청 원예시험장 본관 앞 정원에 우박사님의 상반신 동상이 있었다. 대학 졸업후에 나의 첫 직장이어서 매일 그 동상을 보면서 근무하였다. 해마다 8월에는 농진청 뒷산(여기산)의 우박사 묘소에서 제사 행사가 거행되었다. 원예시험장 전,현직 직원들로 구성된 원우회(園友會)가 주관하여 경향각지의 후학들이 함게 모여 그 분의 높은 뜻을 기리고 공적을 되새겼다. 그 제사 행사에 일본에서 친족 대표로 사위가 참석하였는데,일본에서" 요깡"을 가져와 젯상에 올렸다.우 박사께서 생전에 좋아 하셨기 때문이라고 전해 들었다. 그런 사연을 알고 부터 나는 연양갱을 보면 더 먹고 싶었고 자주 사 먹기도 한다. 위대한 식물학자이시고 애국자이시며 한국원예연구 기관의 창설자로서 존경하는 마음을 간직하고 싶어서이다.
첫댓글 안녕하세요.
며칠간 카페에
못들렀습니다.
이메일 비번변경
괸리 잘 하셔요.
들어도 가슴 훈훈한
추억의 연양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