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愛情의 姿勢]
경음악이 흐르는 오후 한길 가 다방 안은 삶의 의욕을 어지러운 페이브에 포기하고 온 듯 싶은 인간들이 어항 속의 금붕어인양 나릇나릇 느러져 있는 한 폭의 풍속화(風俗畵) ──.
새침한 표정 밑에 감정의 가시가 날카롭게 돋아 있는 은주의 모습을 묵묵히 영훈은 바라보고 있었다. 오랫동안 덤덤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제는 왜 양재점을 쉬었수?』
『…………』
『오늘은 나갔었소?……』
『…………』
『그런 건 왜 물어요?』
은주는 비로소 입을 열어 대답을 하였다.
『왜 묻다니…… 내가 물어서 안 될 사람이오?』
『물을 필요가 없을 사람 같애서 말이예요.』
『무슨 뜻이오? 도대체……』
『그런 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그럼 누구가 압니까?』
『알만한 사람이 따로 있을 거 아냐요?』
『통 모를 말이오.』
『참 모를 말이예요.』
두 사람은 또 한참 동안 대화를 상실한 채 마주 앉아 있었다.
『그저께 진고개 입구에서 나와 헤어진 후, 은주씨는 어딜 갔었소?』
『전차를 타고 오잖았어요?』
『곧장 양재점으로 돌아가지는 않은 모양이던데……마담의 말을 들으면 저녁 무렵에야 돌아왔다는데……』
은주는 잠시 영훈의 얼굴을 말똥말똥 바라보고 앉았다가
『종로에서 내렸어요.』
샹하이 양재점은 이가에서 내려야만 가깝다.
『그리곤 어딜 갔었어요?』
『왜 자꾸만 남의 행적을 더듬는 거예요? 아무델 갔댔음 영훈씨가 무슨 상관이예요?』
『허어……?』
영훈은 말 문이 막혔다. 완전히 남과 남의 대화였다.
『염려가 되니까, 묻는 게 아니오?』
『염려가 될만한 일을 하셨나 보군요.』
그러면서 은주는 훌쩍 일어섰다.
『나 먼저 갈테예요.』
『아, 은주 잠깐만……』
영훈은 은주의 손목을 잡았다.
『손 놓세요.』
은주는 영훈의 손길을 무슨 더러운 물건이라도 뿌리치는 것처럼 냉혹히 취급을 했다.
『그처럼 염려가 된다면 알으켜 드려요.』
은주는 다시 걸상에 탁 몸을 던지며
『전차를 타고 종로 네거리를 커어브하는데, 후딱 바라보니까 종각 앞에가지 비로오드 치마를 입은 여자 하나가 우두커니 서 있었죠. 그래서 다음 정류장에서 내린거에요. 영훈씨를 위하여 선을 좀 봐 드리고 싶었을 따름이예요.』
『아, 그럼 은주는……』
다소의 당황한 빛을 영훈은 보이며 말 더듬이를 했다.
『괜찮더구먼요. 영훈씨가 좋아할 타잎이던데……이쁘구, 감성적(感性的)이구, 가끔 가다가 눈꼬리 웃음도 웃을 줄 알구……취직을 한 경험도 있다니까 요염(妖艶)한 대목도 있을 법하구……』
식어 빠진 홍차를 은주는 마셨다. 마음도 갈했지만 목도 갈했다. 홍차 한잔을 더 청하고 나서
『내 뭐라고 그랬어요. 사무실 앞을 그냥 지나칠 것만 같다고 그러지 않았어요?……』
영훈은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아니나 다를가, 어슬렁어슬렁 찾아오던데……몇 년만이랬죠? 아, 참 십 년만……십 년만의 대면이 그럴듯하더군요. 카메라가 있었더람 한 컷트 집어넣고 싶었지만……여자가 울던데……오죽했음 한길 가에서 눈물을 흘린담!』
말에는 야유가 다분히 포함되어 있었지만 은주의 표정은 여전히 얼음처럼 새침하다.
『다소 비겁한 느낌을 느끼기는 했으나 약혼자의 러브·씨인이 하두 보고 싶어서 뒤를 따라 봤어요. 원앙처럼 둘이는 걸어갔지요. 노을을 바라보며 둘이는 추억의 거리를 걸어갔지요.』
홍차가 왔다. 은주는 한 입술 마시며
『뜨거워!』
찻잔을 도로 놓고
『서대문 중국 요리집까지 두 분을 모셔다드리고 나는 돌아왔어요. 그러노라니까 늦어졌을밖에……』
뜨겁다던 찻종지를 또 무심중 들고 마시다가
『아이, 뜨거!』
홍차까지 오늘은 말썽이냐고, 은주의 감정은 갈구라져 가기만 했다.
『잘 알았소. 그러나 거기에는 다소의 설명이 필요하지요.』
영훈은 엄숙한 어조로 대답을 했다.
『설명을 들을 필요는 조금도 없어요. 핑계 없는 무덤은 없다지 않아요?』
『그렇지가 않소. 설명이 꼭 필요합니다. 나는 은주씨의 말처럼 사무실 앞을 그대로 지나친 것이 아니고……』
은주는 두 손으로 자기 귀를 탁 막으며
『듣기 싫어요!』
하고 뺑 소리를 쳤다.
『뭐라고 또 변명을 할려면 나 영 손을 떼지 않을테야요.』
『좋소. 그럼 거기 대한 설명은 그만두지요. 손을 떼요.』
영훈은 손수 은주의 두 팔소매를 잡아당겨 손을 떼 놓았다.
영훈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또 물었다.
『그리곤 또 어딜 갔었소? 어머니의 말씀으론 밤 늦게야 돌아왔다는데……』
『영화 구경 갔었어요.』
『혼자서요?……』
『아니오.』
『누구와 갔었소?』
『박인해씨와 같이 갔었어요.』
『박인해?……』
박인해(朴仁海)는 샹하이·마담의 동생으로서 안국동에서 개업을 하고 있는 젊은 의사였다. 작년에 상처를 한 박인해는 영훈과 약혼하기 전부터 은주와 혼인 말이 있던 사람이었다.
은주가 아직 「신여인」사의 기자로서 샹하이 양재점으로 마담 박인숙(朴仁淑)을 찾아 다니면서 기사 청탁을 하고 있던 무렵이었다. 마담이 중간에 나서서 두 사람의 접촉을 꾀하여 주었다. 셋이서 저녁도 같이 먹고 영화 구경도 같이 갔다.
박인해는 은주를 무척 요망하고 있었다. 선처가 남겨 놓고 죽은 어린것이 하나 있었으나 「인해병원」은 연조가 얕은 젊은 의사로서는 비교적 수입이 많았다. 오늘날처럼 여성들의 결혼난이 극심한 시대에서는 그만하면 좋은 자리가 아닐 수 없었다. 그것을 은주는 모나지 않도록 은근히 거절하고 영훈과 약혼을 했다.
그러한 사실을 영훈도 잘 알고 있었고 그 박인해가 아직도 후취를 맞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도 샹하이·마담에게서 언젠가 들었다. 그리고 그러한 관계에 있는 박인해와 같이 은주는 영화관에를 갔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순전히 은주의 거짓말이었다. 영훈과 연숙을 서대문까지 바라다주고 돌아오는 길에 후딱 박인해라는 하나의 존재가 은주의 기억에 떠올랐을 따름이었다. 그리고 그 기억은 비교적 오랜 시간을 두고 은주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은주는 혼자서 영화를 보면서 고영훈의 불신과 박인해의 구혼을 똑같이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영훈은 적지 않게 불쾌한 감정을 느꼈으나 그것을 노골적으로 표시할 계제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잠자코 앉았다가
『그래 어제도 양재점을 쉬고 구경을 갔었소?』
『네.』
『또 둘이서……?』
『아냐요. 어제는 혼자 갔었어요. 낮에는 환자들 때문에 병원을 비일 수가 없잖아요?』
『그래 어제밤에는……?』
『같이 저녁을 먹고……』
『박인해와……?』
『네.』
그것도 물론 거짓말이었다. 그러한 거짓말이라도 씨부려 봐야만 자기의 괴로운 감정이 다소라도 누그러질 것 같았고 또한 자기 자신의 자세도 서는 것 같았다.
『그래 오늘은 어딜 가던 길이오?』
『형사들처럼 왜 자꾸만 캐묻는 거예요? 어딜 가든 무슨 상관이예요?』
그러나 기실 은주는 그저 「신여인」사 앞 거리인 을지로를 거닐고 싶었던 것이다. 영훈을 만나는 것이 무섭기도 했고 영훈을 만나 보고 싶기도 했다. 그러한 불안정한 마음을 가지고 을지로 네거리를 건너섰던 은주였다. 그리고 그러한 은주의 눈앞에 영훈과 연숙이가 나타났던 것이다.
『잘 알았소. 그러나 서로가 다 오해는 풀어야 할 것이라고 나는 믿지요.』
거기서 영훈은 자기가 연숙을 만나게 된 관계를 있는 그대로 쭉 이야기하였다. 은주는 이미 아까처럼 귀를 막지는 않았다. 영리한 눈동자를 가끔 들어 영혼의 이야기의 진위를 가만히 가리고 있었다.
사무실로 돌아가 보니 연숙이가 찾아왔었다는 말, 퇴사하여 지나가는 길에 종각 앞에 서 있는 연숙을 보았다는 말, 서대문 중국 릿집에서 간단한 식사를 하고 곧 헤어졌다는 말, 알고 보니 김석호 사장의 본처라는 말, 그리고 오늘 실로 뜻밖에도 김석호 사장과 대치되어 「신여인」사 사장의 자격으로 사원 일동에게 취임 인사를 하고 김사장과 세 사람이서 점심을 먹으며 나왔던 길이라는 말을 쭉 이야기하였다.
은주는 무엇보다도 놀란 것은 연숙이가 「신여인」사의 사장으로서 영훈을 지배할 수 있는 사회적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은주에게 있어서 한층 더 불리한 사례가 아닐 수 없었다.
『잘 됐군요! 인제부터는 매일 만날 수가 있겠으니까 말이예요.』
은주는 토라지게 말했다.
『이거 봐요. 비꼬아서 말할 때가 아니오. 좀 더 내 입장을 이해하여 주면 어떻소?』
영훈은 사실 은주의 그러한 태도가 싫었다. 약혼자를 위하여 그만한 정조를 지키는 남성도 그리 쉽지는 않을 것이라고, 영훈은 자기의 그러한 노력이 점점 서글퍼졌다.
『비꼬는 게 아니고 사실대로 이야기했을 따름이예요. 그 백연숙이라는 여자가 어째서 갑자기 「신여인」사 사장이 됐는지는 모르지만요. 어쨌든 잘되지 않았어요?……』
백연숙의 사장 취임의 배후에는 필경 백연숙과 영훈의 암암리에 합치된 의욕이 도사리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고 은주는 굳게 믿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둘이가 만나자 사흘만에 그러한 급작스런 변동이 생길 리는 만무한 일이 아닌가!
더럽다! 은주는 그 이상 더 영훈의 옆에 앉아 있을 수 없는 더럽다는 생각이 갑자기 가슴에 복바쳐 올라 훌쩍 걸상에서 일어서 나오고 싶은 감정을 누르며
『여러 말 할 필요는 없어요. 나는 지금, 저번 날 광교 다리에서 저희들이 만났을 때, 영훈씨가 내게 대해서 취한 그 태도를 문제 삼고 있는 거니까요. 그때만 해도 적어도 나는 영훈씨의 약혼자였지요. 내 입으로부터 질문을 받기 전에 왜 종각 앞에서 기다리는 백연숙의 이야기를 내게 해 주지 못했느냐 말이예요.』
『아, 그건 결국 은주를……』
영훈은 뒷말을 잇지 못했다.
『뭐가 그건이예요?……탈로가 나지만 않았음 영원히 거기 대한 이야기를 내게는 숨길 셈였어요……내가 그날도 무어라고 했어요?……약혼은 애정의 자유를 속박해서는 안 된다고 그러지 않았어요?……내가 영훈씨에게 관심하고 있는 건 그러한 이야기의 줄거리나 뼛대는 아니예요. 그 여자와 만나 보고 싶어 하는 그 마음의 자세였으니까요.』
은주는 훌쩍 몸을 일으키자 획 다방을 나가 버렸다.
『은주!』
영훈이가 계산을 하고 밖으로 뛰쳐나왔을 때는 은주는 이미 택시 한 대를 잡아타고 있었다.
『은주, 잠깐만……』
영훈은 택시 옆으로 뛰어갔다. 그러나 택시는 그러한 영훈은 무시하고 종로를 향하여 획 달아났다.
돌아다 보아도 좋을 만한 들창이 등 뒤에 있었으나 앞을 향하여 꼳닥 앉아있는 은주는 다방 앞에서 어린애처럼 날뛰는 영훈을 완전히 피아마의 뒷통수로 무시하면서 사라져 갔다.
다방 앞에 영훈은 오랫동안 서 있었다. 은주의 뒤를 그냥 따라갈 수는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은주가 배앝고 간 최후의 한 마디가 영훈에게는 아팠다.
『그렇다! 연숙을 만나 보고 싶어 하던 마음의 자세!』
그 마음의 자세를 은주는 지금 무자비하게 꼬집어내어 영훈의 낯작에다 보기 좋게 내동댕이를 치고 사라져 간 것이다. 은주의 그 매서운 감정의 돌팔매 앞에 영훈은 어리둥절해졌다.
『일이 공교롭게 되어 버렸다!』
정말로 공교롭게 얽혀져 버린 오늘의 사태였다.
영훈이가 아무리 성실한 변명을 꾀하여 보았댔자 은주의 마음을 돌이키기에는 상당한 시일의 경과를 요할 것 같았다. 은주의 눈에는 영훈의 성실이 인제는 조금도 믿기워 지지가 않을 것이다. 영훈은 하는 수 없이 터벅터벅 「신여인」사를 향하여 걸어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