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119
1월30일[연중 제3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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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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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ttykfetzDo8
[인천교구 정희채 안셀모(시흥안산지구 청년담당)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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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 각자의 얼굴에는 스승 예수님의 얼굴이 반영되어야 합니다!
요즘에야 찾아보기가 힘들어 골동품 가게에서나 구경할 수 있는데, 전기가 들어오지 않던 시절, 중요한 가재도구 중에 하나가 밤을 밝히는 등잔이요 등잔을 얹어두는 등경이었습니다.
제 어린 시절 전기는 들어왔지만, 전력 수급이 여의치 않아 자주 정전이 되었습니다. 그럴 때 마다 선친께서는 다락방에서 등잔을 꺼내 불을 붙이고 높은 곳에 위치한 등경 위에 올려두었습니다.
하필 그럴 때, 라디오에서는 처녀 귀신, 몽달 귀신, 달걀 귀신 등 각종 귀신들이 총 출동하는 전설 따라 삼천리가 흘러나왔는데, 듣지 말아야지 하면서 듣다가 화장실도 못가고 끙끙대던 일이 엊그제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등불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무엇을 강조하고 계시는지, 조금 아리송합니다.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느냐? 숨겨진 것도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 누구든지 들을 귀가 있거든 들어라.”(마르 4,21-23)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등불은 다른 무엇에 앞서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신 당신 존재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따라서 당신께서는 거듭되는 박해와 살해의 위협 앞에서도 당신의 신원을 드러낼 수 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또 다른 그리스도로 살아야 하는 우리도 마찬가지겠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서, 그분의 가르침으로 인해 어떤 소중한 깨달음이나 깊은 통찰을 얻게 되었다면, 그것은 나만 비밀스럽게 간직해야 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 안에 꽁꽁 숨겨 둬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그 소중한 은총을 동료 인간들, 그리고 세상과 나누고 공유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분께서 선물로 주신 복음, 즉 구원의 기쁜 소식을 자신 안에 붙들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이 세상 만민 모두가 아무런 차별없이 골고루 혜택을 받도록 그분의 복음을 적극적으로 전파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는 비밀리에 가르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회당에서, 광장에서, 공개석상에서, 공적으로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분 가르침의 진의(眞意)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분의 가르침이 종래의 지도자들과는 달리 판이하게 신선했고 파격적이었기 때문에 그랬을 것입니다.
열두 사도들 가운데서도 최측근 제자들과 아주 소수의 특정인들만 그분의 말씀을 이해했고, 하늘나라의 신비를 정확히 파악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결코 소수의 특정한 사람들만의 것이 절대 아닙니다. 복음은 이스라엘을 넘어 온 세상에 전파되어야 할 보편적인 가르침입니다. 복음은 모든 인류에게 비춰져야 할 큰 빛입니다.
‘가톨릭’이라는 용어가 지니는 의미는 ‘공번되다.’ ‘보편적이다.’ ‘두루두루 광범위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가톨릭교회 공동체가 지향하는 바는 열린 교회입니다. 너그럽고 관대한 교회입니다.
가톨릭교회는 우리끼리, 마음에 드는 소수의 사람들끼리만 비밀리에 운영되는 공동체가 결코 아닙니다. 우리 교회는 세상과 완전히 단절되거나 파벌을 형성해서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는 세상 속에서 하느님 현존의 구체적인 표지가 되어야 하며, 예수님의 인류 구원 사업을 증거해야 합니다.
주님으로부터 특별히 불림을 받은 제자들은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이해할 수 있는 선물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은 제자 자신들에게 큰 영예고 은총이지만, 그것을 자신들 안에 가둬두고 자신들의 영광으로만 돌린다면, 큰 죄악이 되고 맙니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값진 보물입니다. 그러나 그 보물은 인류를 위해 사용하라고 맡겨놓은 보물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깨달음은 공동체와 인류를 위해 봉사하라고 주신 선물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등불 같은 존재여야 마땅합니다. 활활 타올라야 하고, 동료 인간들의 어두운 삶을 환히 비춰줘야 합니다. 그들의 얼굴에는 스승 예수님의 얼굴이 반영되어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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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BnkL2SN40A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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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작은 불꽃 발견하고 키우는 법>
오늘 복음은 두 주제가 하나로 합쳐진 내용인데, 그 내용 전체의 의미를 올바로 깨닫기는 쉽지 않습니다.
첫 번째 주제는 이것입니다.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느냐? 숨겨진 것도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
두 번째 주제는 이것입니다.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이 관계 없어 보이는 두 주제를 하나로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 안에 분명 작은 빛 하나는 있습니다. 이 빛은 등경 위에 올려지면 다른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능력입니다. 그런데 만약 등경 위에 올려져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 불빛은 더 커질 수 있다는 말씀이 아닐까요? 능력이 없어 감추어두면 있는 것마저 꺼져버릴 것이란 말씀이 아닐까요?
요즘 사제가 되지 않으려는 이유 중 첫 번째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저는 자기 꿈이나 결혼을 위해서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아니랍니다. 사람들 앞에 나서기를 원치 않아서라고 합니다. 스마트폰만 보며 살던 아이들이 사람들 앞에 나서서 평가받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복음을 선포할 수 있는 것도 하나의 능력입니다. 그 빛을 감추어두면 어떻게 될까요? 사장됩니다. 마치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벙어리 삼룡이’라고 할 정도로 말을 잘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지금도 잘하는 편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이것을 꺼내어 등경 위에 두기로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조금씩 더 능력이 커지는 것을 느낍니다. 만약 불빛이 작다고 없는 것처럼 덮어버렸다면 분명 꺼져버렸을 능력입니다.
영화 ‘굿 윌 헌팅’에서 주인공 윌 헌팅은 MIT에서 청소부로 일하면서도 비범한 수학적 천재성을
가진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탁월한 지능을 숨기고, 무명의 단순한 삶을 선택합니다. 윌이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지 않는 이유는 그의 깊은 감정적 상처와 두려움에 있습니다.
학대적인 환경에서 성장한 윌은 타인에 대한 깊은 불신과 취약함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트라우마는 그가 사람들을 밀어내고, 기회를 거부하며, 자신의 재능을 드러내거나 실패와 거절의 가능성에 직면하는 상황을 피하게 만듭니다.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는 심리학자 숀 맥과이어와의 상담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숀은 윌의 고통을 이해하고, 그가 두려움에 직면하도록 도전합니다. 숀은 윌에게 그의 실패와 거절에 대한 두려움이 그를 온전한 삶으로부터 얼마나 막고 있는지 깨닫게 합니다. 특히 숀의 유명한 대사인 “네 잘못이 아니야”(It’s not your fault)는 윌의 방어막을 허물고, 그가 자신의 트라우마를 내려놓고 자신을 믿기 시작하도록 돕습니다.
우리 각자 안에는 주어진 ‘빛’이 있는데, 그것은 주님께서 쓰라고 주신 능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상 어둠을 비추는 빛처럼 자기 안에서 빛을 찾아 등경 위에 놓고 세상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사용해야 더 큰 은총을 받게 됩니다.
영화 ‘헝거 게임’은 디스토피아 세계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로, 이 세계에서 정부인 캐피톨은 ‘헝거 게임’이라는 잔혹한 이벤트를 매년 개최합니다. 이 게임은 각 지역에서 어린 소년소녀들을 ‘조공’으로 선발해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는 경기장에서 죽음의 전투를 강요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잔혹한 이벤트의 목적은 두려움을 심어 캐피톨의 지배를 유지하는 데 있습니다.
주인공인 캐트니스 에버딘은 그녀의 어린 여동생 프림이 조공으로 뽑히자 그녀를 대신해 자원하여 참가합니다. 이로써 캐트니스는 자신을 희생하며 여동생을 보호하려는 사랑과 내면의 강인함을 보여줍니다. 게임에 참가한 캐트니스는 가혹한 상황 속에서도 인간다움을 잃지 않으려는 강한 도덕성을 가지고 경기에 임합니다.
게임이 진행되는 동안, 캐트니스는 자주 이타적인 행동을 하며 다른 사람들을 돕습니다. 그녀는 어린 조공인 루와 동맹을 맺고 그녀를 자신의 여동생처럼 보호합니다. 루가 비극적으로 죽은 후, 캐트니스는 그녀의 시신을 꽃으로 장식하며 존경을 표합니다. 이 행동은 캐피톨의 잔혹함에 대한 반항으로 비춰지며, 이를 지켜보는 각 지역의 사람들에게 희망과 저항의 불씨를 심어줍니다.
게임이 계속되면서 캐트니스는 다른 사람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을 발견하고, 캐피톨의 권위에 도전하는 과감한 결정을 내립니다. 마지막 순간, 그녀와 동맹인 피타 멜라크는 서로를 죽이는 대신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고 위협하며 캐피톨이 그들 둘을 승자로 선언하게 만듭니다. 이는 캐피톨의 조종과 권위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상징적인 행동이 됩니다.
캐트니스의 여정은 여동생을 구하기 위한 이타적인 행동에서 시작되었지만, 그녀는 용기와 연민, 그리고 자신의 도덕적 불씨를 꺼뜨리지 않으려는 의지를 통해 억압받는 지역들에게 희망과 저항의 상징으로 자리 잡습니다. 그녀의 작고 선한 행동은 결국 혁명의 불씨를 지피며 거대한 불꽃으로 번져갑니다. 이는 작은 불꽃이라도 목적과 정의라는 연료를 만나면 거대한 화염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주님은 우리 안의 작은 불빛이 이렇게 키우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웃을 위해 무언가라도 도움이 되려고 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 안의 빛이 어떤 능력인지를 알아볼 수 있고 그 능력에 집중하여 더 키워나갈 수 있습니다. ‘나는 능력 없는 사람이야.’라는 패배주의에 져서는 안 됩니다. 우린 안에 누구를 막론하고 온 세상을 태울 작은 불씨가 있습니다. 그 불씨는 등경 위에서만 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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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매주 미사에 함께 나오는 부부가 있습니다. 형제님이 2년 전부터 항암 투병을 하고 있었습니다. 작년 1년을 보내면서 조금씩 건강이 나빠졌습니다. 최근에는 휠체어를 타고 미사에 왔는데 1월 첫 주를 지낸 후에는 주일미사에 나오지 못했습니다. 내심 걱정하고 있었는데 응급실에 있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병자성사를 드리기 위해서 병원으로 갔습니다. 항암 과정에서 먹는 약이 내성이 생겨, 약의 용량을 늘렸는데 부작용이 생겨서 병원으로 왔다고 합니다. 형제님을 위해서 기도한 후에 자매님에게 물었습니다. ‘보험은 어찌 됩니까?’ 미국에서는 보험이 없으면 병원비를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부부는 우체국에서 함께 근무했다고 합니다. 남편은 건강했지만, 자매님이 당뇨가 있어서 좋은 보험을 들었다고 합니다. 본인 부담 6,000불만 있으면 나머지 병원비용은 보험에서 다 해결해 준다고 합니다. 자매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다행이라 생각했습니다. 휴스턴에서 일하던 아들이 재택근무를 허락받아서 집으로 왔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크신 사랑으로 형제님이 일어날 수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평생 열심히 일했으니, 남은 시간 봉사하며 살고 싶다는 부부의 소망이 이루어질 수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유비무환(有備無患)’ 미리 준비가 되어 있으면 어려운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저는 뉴욕에 있을 때는 보험을 들지 못했습니다. 매월 내야 하는 보험료를 감당하기에는 신문사의 재정이 여유롭지 못했습니다. 다행히 몸이 크게 아프지 않았고, 교우들이 하는 병원에서 도움을 주었습니다. 달라스에 와서는 보험을 들었습니다. 교구에서 지정해 준 보험사가 있었고, 본당에서 지출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치과 치료도 안심하고 받았습니다. 우체국에서 일했던 부부가 만일 보험을 들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긴급한 상황에서 재정적으로도 큰 어려움을 겪었을 겁니다. 저도 보험 때문에 도움받은 적이 있습니다. 1995년이니까 30년 전입니다. 교우분의 권유로 우체국 보험에 가입했습니다. 2년이 지난 후에 IMF가 생겼습니다. 형님의 사업도 어려움에 직면했고, 제가 부모님을 모셔야 했습니다. 교구 신협에서 대출받았고, 동창 신부님이 도와주어서 부모님이 머물 집을 마련했습니다. 1년 후에 보험이 만기 되어서 대출금도 갚았고, 동창 신부님이 빌려준 돈도 돌려주었습니다. 그 뒤로 교우들이 권유하는 보험이 있으면 가능하면 가입했고, 시간이 흘러 제게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신앙인은 세상에 살면서 영원한 생명을 희망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데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보험처럼 돈으로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길이죠,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겁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복음을 전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아픈 사람을 치유해 주는 겁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마귀 들린 사람에게서 마귀를 쫓아내는 겁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이미 영원한 생명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갈망’에 대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새겨들어라.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하셨습니다. 낮기를 원하느냐?, 믿느냐? 구하여라. 얻을 것이다.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찾아라. 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는 찾고 구하는 자들에게 주어질 것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오늘 화답송도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님, 이들이 주님의 얼굴을 찾는 세대이옵니다.” 바오로 사도는 오늘 독서에서 우리가 믿는 신앙이 변질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져 악에 물든 양심을 벗고 깨끗해졌습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을 굳게 간직합시다. 서로 자극을 주어 선행을 하도록 주의를 기울입시다. 우리의 모임을 소홀히 하지 말고, 서로 격려합시다.” 신앙은 결단이고, 신앙은 갈망을 통해서 성장합니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하느님과 함께 할 수 있도록 마음을 열어 하느님께로 나가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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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의정부교구 김동희 모세 신부님]
고등부 주일 학교 시절 학생 레지오 회합을 하던 교리실 한쪽 벽면에 이런 글이 붙어 있었습니다. ‘빛이 되지 못하면, 빛을 반사하는 거울이라도 되어라.’ 표현은 정확하지 않지만 핵심 내용은 같습니다. 친구들과 그 글이 매우 인상적이라는 나눔을 하였던 기억이 납니다. 한 친구는 그 말 그대로 자신은 빛은 아니지만, 적어도 빛을 반사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하였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느냐?”(마르 4,21)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최고의 등불은 예수님이십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진실과 사랑으로 밝아진 두 눈은 새 삶을 찾아 나아가게 하는 등불이 되겠지요.
오늘 독서는 우리의 등불이신 대사제 그리스도 곁에서 그 빛을 반사하는 방법을 우리에게 일러 줍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피로 지성소의 휘장을 가르시어 우리가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가 새로운 삶을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진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라 하십니다. 그분의 약속을 믿고 ‘희망’을 굳게 간직하라 하십니다. 우리의 모임(공동체)을 소홀히 하지 말고, 서로 ‘사랑’으로 격려하고 북돋워 주라 하십니다. 우리가 빛은 되지 못하지만, 등불이신 주님께서 건네주신 신망애 삼덕의 선물로 빛을 비추는 거울은 될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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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4,21-25: 등불은 등경 위에 둔다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느냐?”(21절) 등불은 감춰두지 않고, 사용하여 보게 하는 것이 그 목적이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고 산 위의 마을이라고 하셨다.(마태 5,14 참조) 우리는 어둠 속에서 빛을 비추고, 구렁텅이에 빠진 이들을 위하여 우뚝 서도록 부름을 받았다. 등불을 함지 속에 숨겨 둔다면 우리는 어둠 속에 있게 되고 사람들이 와서 부딪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등불의 구실을 제대로 못 하게 된다. 우리는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세상의 빛이 될 수 있게 하는 것은 바로 선행이다. 선은 참되고 충만한 것으로 어둠을 사랑하지 않는다.(요한 3,21 참조) 선은 드러나는 것을 즐거워하고 눈에 띄는 것을 기뻐한다. 그리스도인의 겸손은 나서지 않는 것을 좋아하지만, 있는 그대로 드러나야 한다. 왜냐하면, 선은 그 자체로 확산되기 때문이다. 선은 그냥 퍼져나간다.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24절) 우리는 가난한 형제에게 베풀어야 한다. 그 형제는 그리스도이시다. 형제에게 주는 것은 그리스도께 드리는 것이며, 영원히 찬미 받으시는 하느님께 드리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주신 것을 우리가 베풀기를 바라신다. 우리가 베푼다고 하는 것 가운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 우리는 우리에게 주라고 명령하시는 분의 것을 주는 것이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25절) 우리가 들은 말씀을 온갖 노력을 다하여 기억하고 연구하고 실천하도록 하여야 한다. 말씀을 사랑하고 실천하는 사람에게는 자기가 사랑하는 대상을 이해할 수 있는 지력이 주어지겠지만, 말씀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비록 타고난 재능이나 학문을 통하여 그 뜻을 이해하는 것 같이 보이더라도, 참된 지혜에는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말씀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가 무엇을 가졌는지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빼앗겨도 무엇을 빼앗겼는지 알지를 못한다. 말씀을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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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내가 먼저 잘 살아 있어야 남을 살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느냐? 숨겨진 것도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 누구든지 들을 귀가 있거든 들어라.’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새겨들어라.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르 4,21-25)
1)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겠느냐?”는, “등불을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지 마라. 등경 위에 놓아라.”이고, 이 말씀은 “자신의 신앙을(복음을) 감추지 마라.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고 선포하여라.”라는 명령입니다. 신앙을 감추는 것은, 신앙을 부정하거나 부인하는 것과 같고, 그래서 신앙을 감추는 것 자체가 큰 죄가 됩니다. 실제로 어떤 장소나 상황에서 자기가 신앙인이라는 것을 감추고, 신앙인이 아닌 척 행동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박해 때에는 박해받는 것이 두려워서 그런 경우가 있었는데, 요즘에는 따돌림 당할까봐 두려워서, 또는 다른 사람들이 불편해할 것이 신경 쓰여서 그렇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경우라도, 신앙을 감추는 것은 죄를 짓는 일입니다.
복음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인은 자신의 ‘삶’으로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입니다. 만일에 복음을 감추고 아무것도 안 한다면, 그것도 역시 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계속하십시오."(2티모 4,2)
복음을 전하는 일은 성직자들이나 선교사들만의 직무가 아니라, 모든 신앙인의 의무입니다.
2) “숨겨진 것도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라는 말씀은, “숨기거나 감추지 말고 드러내라.”라는 명령으로 읽을 수도 있고, “너희가 숨기고 감추어도 언젠가는 드러날 때가 온다.”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숨기거나 감추지 말고 드러내라.”라는 말씀은, 등불에 관한 말씀과 ‘같은 명령’입니다. “너희가 숨기고 감추어도 언젠가는 드러날 때가 온다.”로 읽으면,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구원 사업은) 언젠가 때가 되면 완성될 텐데, 동참하지 않은 사람은 그날 받을 몫이 없다.”라는 경고 말씀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그 나라 건설에 동참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에 무임승차는 용납되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안 한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복음 선포 활동은(선교활동은) 다른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사랑 실천’입니다. 그런데 하느님 나라는 사랑 없이 믿음만으로는 들어갈 수 없고, 믿음과 사랑 실천이 하나가 되어 있는 사람만이, 즉 믿음으로 사랑을 실천하고, 사랑 실천으로 믿음을 증언하는 사람만이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라고 경고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모든 사람의 구원’과 ‘사랑’입니다. 신앙을 증언하고 복음을 선포하는 ‘사랑 실천’은 우리가 실행해야 하는 ‘하느님의 뜻’ 가운데에서 첫 번째입니다.
“누구든지 들을 귀가 있거든 들어라.”라는 말씀은, “잘 새겨듣고 실천하여라.”라는 뜻입니다.
3) 복음서에서 말하는 ‘빛’은 ‘생명’을 뜻합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 1,4)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력을 받아서, 그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이고, 그 생명력을 이웃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선교활동입니다.
그런데 우선 먼저 나 자신이 그 생명력으로 건강하게 살아 있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살아 있는 사람이 남을 살리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이 먼저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어야 남에게 신앙생활을 권고할 수 있는 것입니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루카 6,39)
그 생명력은 이웃에게 나누어 준다고 해서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나누어 줄수록 오히려 더 강해지고 커집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력의 신비입니다. 신앙과 복음으로 바꿔서 말해도 마찬가지인데, 이웃에게 나의 신앙을 증언하면 할수록 나의 신앙이 더욱 튼튼해지고, 이웃에게 복음을 전해주면 줄수록 내 안에서 복음의 힘이 더욱 단단해집니다.
4) 신앙인은 세상을 밝히는 ‘등불’인 사람이고, 등불을 들고 앞장서 가는 사람이기도 합니다.(마태 5,14.16) 어둠 속에 있는 세상 사람들은 그 등불의 인도를 받아서 ‘죽음의 어둠’에서 벗어나 ‘구원의 빛’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신앙인은 올바른 길을 가리키고 안내하는 표지판 같은 존재이기도 하고, 멈추어야 할 때와 걸어가야 할 때를 알려 주는 신호등 같은 존재이기도 합니다.
만일에 ‘신앙인의 삶’이 잘못되어 있다면, 즉 믿음 없는 사람들의 삶과 다르지 않게 산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하느님과 이웃과 자신에게 아무 쓸모없는 존재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되고, 아무 쓸모가 없으면 하느님 나라의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 버려집니다.(마태 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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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
히브리서에는 “확고한 믿음”과 “고백하는 희망을 굳게 간직”하는 것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믿음, 곧 신앙이 희망입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는 우리 신앙의 내용인 하느님 없이 사는 것은 계속 어두운 세계 안에 머물고 우울한 미래를 마주하는 것과(「희망으로 구원된 우리」 2항 참조) 같다고 하십니다.
오늘 독서인 히브리서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해진 우리가 고백하는 희망을 간직하며 살아가고자 서로 도와주며 격려해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혼자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당신의 백성이 될 것을 약속하시고 우리 또한 이 공동체의 일원으로, 구원으로 초대하셨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가 우리에게 권고하듯이 서로 격려하고 염려해 주어야 합니다.
믿음과 희망을 온전히 간직하려면 우리는 사랑과 선행을 실천해야 합니다. 혹시 다른 이들을 위한 애덕의 실천 없이 신앙생활을 통한 개인적인 구원만 찾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모든 이를 구원하시고자 우리를 구원해 주셨으며, 또한 교회 안에서 당신 백성의 한 사람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서로 연결되고 일치를 이룹니다. 예수님께서 한 사람만을 위한 구원을 생각하지 않으시듯이 우리 또한 나만을 위한 예수님으로 차지하려 하지 말고, 다른 이들과 함께 주님 구원의 초대에 응답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애덕을 올바르게 실천하며 이웃에게 다가간다면 마치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라는 오늘 복음 말씀처럼 우리의 올바른 신앙과 희망은 다른 이들을 환히 비추는 등불과 같고, 우리는 주님의 은총을 더욱 풍요롭게 받아 기쁘게 살아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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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마르코.4,24)
빈손으로 태어난 우리는 빈손으로 언젠가 창조주께 되돌아 갑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태어났기에 우리는 나눌 수 있을 때까지 받기만 합니다. 태어나 홀로 스스로는 살 수도 없었고 아무것도 주지 않았지만 우리는 엄청난 사랑을 받고 살았습니다.
받기만 익숙한 몸에 밴 어린 시절 습관 때문에 우리는 어른이 되어도 때로 주는 것에는 여전히 낯섭니다. 어릴 때 받아야 할 사랑이 결핍되어 우리는 받으려고 애쓰기도 하지만, 때로 우리는 지나친 사랑을 받아 어른이 되어도 받아야만 하는 줄 압니다.
어릴 때 받은 지나치거나 모자라는 사랑은 나쁘거나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단지 우리가 제각기 다른 사랑을 받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사랑을 바탕으로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성장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보여 줍니다.
어린 시절 받은 사랑의 형태는 우리가 추구하는 삶의 방향에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줍니다. 어떤 사랑을 받았는지 깨달아야 우리는 어떻게 사랑을 주어야 할지를 압니다. 받은 사랑을 모르면 우리는 주는 사랑에 인색하게 됩니다.
지나치거나 결핍된 사랑에서 우리는 지혜를 발견하여야 합니다. 성숙한 사랑은 지난 경험을 단순히 되풀이하는 과거의 노예가 아니라, 성찰을 통한 통찰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통찰을 통하여 우리는 받는 사랑에서 주는 사랑으로 삶을 재창조하게 됩니다.
주는 사랑에 익숙하지 않은 것은 우리가 아직도 과거에 받은 불완전한 사랑의 노예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유로운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받은 불완전한 사랑마저도 ‘주는 사랑’을 위한 원천으로 받아 들일 줄 압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받는 사랑’을 즐기던 어린 시절에서 벗어나 ‘주는 사랑’을 더 기뻐하게 됩니다. 몸에 밴 어린 시절을 되풀이하기보다, 새로운 복음적 가치관으로, 생명까지 내어 주신 주님의 '주는 사랑'을 깨달아 실천하게 됩니다. "서로 자극을 주어 사랑과 선행을 하도록 주의를 기울입시다"
그리고 미숙한 수도자로 사는 동안 나는 아직도 주님과 이웃에게 내가 준 작은 사랑보다, 다른 사람들을 통해 주님께 내가 받은 사랑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크다는 것을 압니다. 나는 주님께 드린 것이 지극히 미소하지만, 당신은 이미 모든 것을 나에게 주셨습니다.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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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미국의 영웅 잭 루카스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군대에 가기 위해 나이를 속이고 서류를 위조해서 해병대에 입대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속한 부대는 1945년 일본 규슈의 이오지마 섬에 상륙했습니다. 그때의 나이가 겨우 열일곱 살이었습니다.
참호 옆에서 근무를 서고 있는데 수류탄 두 개가 떨어졌습니다. 그는 옆에 있던 동료를 밀어내고 수류탄 위로 몸을 던졌습니다. 폭발과 함께 그의 몸은 공중에 떠오른 뒤 바닥에 떨어졌고, 배에는 수류탄 파편이 자그마치 250개가 박혔습니다. 이런 상황이었지만 그는 살았습니다.
1961년, 낙하산 훈련 때에는 낙하산이 펴지지 않아 그냥 땅바닥에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살았습니다. 1977년 아내가 남편인 루카스를 살해하려 했지만 이번에도 살았습니다. 이 밖에도 그의 삶은 죽음이 늘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결말은 어떠했을까요? 죽음 없이 건강하게 살고 있을까요? 아닙니다. 2008년 여든 살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죽음이 피해 간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사람도 피할 수 없는 것이 죽음이었습니다. 이 죽음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약간의 시간 차이만 있을 뿐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주님께 매달리는 삶이 당연히 필요합니다. 죽지 않는다면이야 그냥 세상 틀에 맞춰 살면 되겠지만, 언젠가는 주님 곁에 갈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등불의 비유 말씀을 해 주십니다. 등불을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는 것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 것처럼, 우리 역시 공동체 안에서 열매를 맺고 주위를 밝히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관심과 자기 욕심만을 드러내는 이기심을 지니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위를 밝힐 수가 없습니다.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등불을 놓는 것과 똑같습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힘들게 됩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쉽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틀보다는 세상의 틀에만 맞춰 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주님의 이 말씀에 커다란 희망을 갖게 됩니다.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마르 4,24)
지금 삶에서 최선을 다한다고 해도, 우리의 부족함과 나약함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에는 턱 없이 부족할 수 있습니다. 이 부족함을 채워 주신다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주님의 뜻을 따르려는 노력 안에서 주님께서는 부족함을 채워서 더 보태어 받을 수 있도록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가 중요합니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을 갖고, 지금 주님 뜻에 충실한 삶. 그 삶이 우리의 최종목적지를 결정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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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리하면 그리되나니>
마르코 4,21-25 (등불의 비유)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느냐? 숨겨진 것도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 누구든지 들을 귀가 있거든 들어라.”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새겨들어라.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그리하면 그리되나니>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르 4,25)
믿음의 사람아
믿을 수 있으니
믿으시게나
믿으면
믿을 수 있게 되고
믿지 않으면
믿을 수 없게 되나니
희망의 사람아
희망할 수 있으니
희망하시게나
희망하면
희망할 수 있게 되고
희망하지 않으면
희망할 수 없게 되나니
사랑의 사람아
사랑할 수 있으니
사랑하시게나
사랑하면
사랑할 수 있게 되고
사랑하지 않으면
사랑할 수 없게 되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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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어둠을 탓하기보다 등불이 되어라>
등불은 등경 위에 놓아야 제대로 비출 수 있습니다.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아는 사실을 제대로 활용하는 사람이 있고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믿음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삶이 빛나야 합니다. 세상의 어둠이 깊을수록 우리의 소명은 더 커집니다. 그러나 어둠을 탓하며 절망하는 이도 있습니다. 세상의 어둠을 탓하기보다 하나의 등불이 될 수 있도록 주님의 말씀으로 준비하는 이가 참 신앙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4.16)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가슴에 새겨 실천함으로써 주님을 증언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빛으로 선한 영향력을 지녔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면 그 기운이 이웃에게 전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좋은 기운이 감싸면 악한 기운은 서서히 떠나가게 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모든 사람의 기준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그 말씀을 더욱 깊이 깨닫게 되고 기 기쁨을 전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정령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르 4,25)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곧 말씀을 믿고 행하는 사람은 풍요로워지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 믿음을 잃게 될 것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간수 하지 않는 것은 곧 잃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의 삶을 비관하고 우울해하며 남을 비판하고 불평불만 하면서 아무런 생산적 활동을 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 모든 것을 잃고 맙니다. 움켜쥐면 빼앗기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먼저 주면 빼앗길 것이 없습니다. “쌓아 놓으면 쌓아 놓을수록 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면, 줄수록 줄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 무엇이든 먼저 줄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부유한 사람이고, 주지 않는 사람은 가지지 못한 사람입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쌓아 놓았다 할지라도 이웃과 나누지 못하면 그것은 있으면서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참으로 부유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음의 부자가 되어서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차고 넘치도록 받으시고 이웃과도 잘 나눌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가진 것만큼 남에게 줄 수 있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줄 수도 있고, 물질이 될 수 있으며 재능기부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 우리의 삶이 바뀌게 될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추기경으로 서임 받을 때의 일입니다. 로마에서 있었던 서임식에 참석하여 축하하기 위해 로마로 가려고 한 지인에게 “비싼 돈 들여 나를 보러 오지 말고, 그 돈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기부해 주세요.”하였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서로 자극을 주어 사랑과 선행을 하도록 주의를 기울입시다.”(히브 10,24) 마무리하겠습니다. “너희는 새겨들어라.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마르 4,24)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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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어제 <복음>인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는 말씀이 ‘씨앗’에 비유되었다면, 오늘 <복음>인 ‘등불의 비유’에서는 말씀이 ‘등불’에 비유됩니다.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느냐?”(마르 4,21)
여기에서, ‘등불’은 하느님 말씀을 비유하고 있습니다.곧 ‘말씀’이 세상을 비추는 등불이요 빛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리게네스는 ‘함지’는 영혼의 능력을, ‘침상’은 몸을, ‘등경’은 거룩한 교회를 표현한다고 해설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선포되면 그것은 세상 만민을 비추고, 진리의 빛으로 집 안에 있는 이들을 밝히며, 모든 사람의 마음을 거룩한 지식으로 채우게 된다.”
말씀을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아두지 말라는 말씀은 “함지”(루카; 그릇)인 우리의 능력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덮거나, “침상”인 우리의 몸으로 말씀을 가리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곧 말씀을 자기의 능력이나 몸으로 가두지 말고, 오히려 드높이라는 말씀입니다.
‘산상설교’에서 주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백성’의 사명을 ‘세상의 빛’과 ‘산위의 마을’(5,14)에 비유합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은 ‘세상의 빛’이 되고 ‘산 위의 마을’이 되어 비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숨겨진 것도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마르 4,22)
물론, 빛 아래서는 모든 것이 밝히 드러나게 되므로 거짓은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은 빛이 되어 우리를 비추고 하늘나라의 신비는 드러날 것입니다. 세상을 환히 비추고, 빛과 진리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실을 깊이 새겨듣도록 촉구하십니다.
“누구든지 들을 귀가 있거든 들어라.”(마르 4,23)
이 말씀은 중요한 말이니, 그 의미를 깊이 새겨들으라는 각성의 촉구와 경고입니다.(마태 11,15;13,9;루카14,35). 또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마르 4,25)
사실, 우리는 그릇만큼 받는 것이 아니라, 그릇이 비워진 만큼 받게 됩니다. 사실은 나누는 만큼 비워지는 것이니, 결국은 나누는 만큼 받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는 나누어주면 나누는 것보다 더 보태어 주신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입니다.”(마르 4,25)
이는 나누는 것이 더 많이 소유하는 것이라는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결국 베푸는 사람은 베풀수록 더 많이 받고 덤까지 받지만, 베풀지 않는 사람은 있는 것마저 잃게 될 것입니다.(마태 13,12;25,29;루카 19,26)
그처럼, 말씀을 가진 자가 더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말씀의 등불은 거룩한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진정, 말씀의 비추임을 받은 영혼은 더욱 더 많은 열매를 맺고, 더 밝게 빛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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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마르 4,21)
주님!
말씀을 제 안에 가두어 두거나 제 발 아래에 두지 않게 하소서.
제 한량한 능력으로 당신 말씀의 권능을 덮지 않게 하소서.
당신 말씀보다 아무 것도 낫게 여기지 않게 하소서.
당신 말씀의 빛으로 살고, 빛에 속한 이로 살게 하소서.
제 삶이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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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된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세상의 빛, 세상의 소금”-
“주님 말씀은 제 발에 등불, 저의 길을 밝히는 빛이옵니다.”(시편 119,1)
오늘 만나는 옛 현자의 말씀도 새롭게 마음에 와닿습니다.
“어제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는 공부에는
끝이 없다.”<다산>
“일은 충실하게, 맡은 일은 신중하게 하며 도를 체득한 사람을 보고 자신을 바로 잡는다면 ‘학문을 좋아한다’라고 할 수 있다.”<논어>
이런 사람되는, 참사람되는 공부가 진짜공부요, 해도해도 끝이 없는 평생공부라 할 수 있습니다.
저절로가 아니라 평생 하느님의 자녀, 빛의 자녀,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평생학인이 참으로 믿는 우리들의 신원입니다.
오늘 복음은 네 다른 짧은 단절어, 즉 속담 모음집이지만 참 신자의 삶이라는 목표에 하나로 모아집니다. 사람은 섬이 아니듯 참으로 믿는 이들은, 믿는 이들의 공동체는 결코 닫혀 있는 고립단절된 삶이 아니라, 세상에 활짝 열려 있는, 세상의 중심이 됩니다. 말그대로 세상의 빛, 세상의 소금이 됩니다. 바로 믿는 이들의 신원이자 존재이유입니다.
세상이 없는 빛, 세상이 없는 소금은 존재이유의 상실입니다. 요셉 수도 공동체의 경우가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고립된 섬이 아니라 세상에 활짝 열려 있는 세상의 중심이 되고 있는 가톨릭교회의 요셉 수도공동체입니다. 오늘 복음은 참으로 믿는 이들의 신원을 잘 밝혀주고 있습니다.
누구도 등불을 켜놓고 그것을 가리지 않습니다. 우리 그리스도교의 신앙은 세상을 위한 빛이기에 감추어져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메시지는 비밀로 간직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알려져 공유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 예수님과 그분의 복음에 대한 지식은 우리만이 간직해야할 사적인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가톨릭 신자’는 모든 계명을 지키고, 자주 미사에 참석하고 은총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 아니라, 발광체인 주님을 반사하는 반사체처럼 자신의 신앙을 발산하고, 다른 사람과 관대하게 나누며, 자신처럼 다른 사람도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는 경험을 하는데 관심을 갖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의 내면이 아무리 좋더라도 우리는 어떻든 실패한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저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도가, 복음 선포자가, 말과 행동으로 신앙을 나누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은 우리 자신이 받는 것과 같으며, 아니 그보다 더 많이 받습니다. 있는 자에게는 더 주어질 것이요, 없는 자에게는 있는 것 마져 빼앗길 것입니다. 영성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역설의 진리가 나누면 나눌수록 부요해지는 삶, 부익부 빈익빈의 진리입니다.
바로 주인의 돈을 잃지 않기 위해 땅에 묻은 사람에게 일어난 일이 바로 그 좋은 예입니다. 그는 있는 것 까지 빼앗겼지만 투자한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돌려 받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우리는 ‘받는 것’(by getting)이 아니라, ‘주는 것’(by giving)으로 이득을 얻습니다. 우리는 줄 때만 얻을 수 있고, 모든 이가 줄 때 모든 이가 얻습니다. 바로 이런 이들이 참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 탁월한 사랑의 실천으로 세상의 빛이, 세상의 소금이 된 존재요 공동체입니다.
이래야 세상에 속화되지 않고 세상을 성화하는 개인이나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다른 네 속담이 궁극으로 주는 하나의 가르침이자 깨우침입니다. 얼마나 중요한 내용인지 주님은 “누구든지 들을 귀가 있거든 들어라, 너희는 새겨 들어라.” 강조하십니다.
오늘 복음의 진리를 며칠전 공동체 형제들의 환대를 통해 체험했습니다. 인간적 법인 단식이나 침묵 수행의 우위에 있는 하느님 법인 환대의 사랑이니 바로 이웃을 통해 주님을 환대하기 때문입니다. 수도공동체의 정주영성과 함께 가는 환대영성입니다. 사랑의 환대가 수도원이 섬이 아닌 세상에 열려 있는, 세상의 중심이 되게 합니다. ‘발없는 말이 천리간다’는 속담처럼 환대의 사랑, 환대의 빛, 환대의 향기는 등불처럼 세상을 밝히고 숨겨져 있는 듯 하지만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얼마전 다섯분의 타 수도원 형제들이 요셉수도원에 머무르는 동안, 몇 수도형제는 서울 관광에 최선을 다해 환대의 사랑을 실천했고 피곤한 기색은 커녕 활력이 넘치는 모습에서 주는 것보다 받는 축복이, 하느님 주시는 환대의 축복이 대단함을 깨달았습니다. 옆에서 바라보면서 환대에 소홀했던 자신이 내심 많이 미안했었는데, 3박4일후 떠날 때, 4시 새벽 산책후 주님 은총으로 떠나는 다섯 형제들의 차를 발견하고 즉시 달려가니 이미 이들을 환대했던 우리 세 수도형제가 전송차 나와 있었습니다.
급히 도착하여 떠나기 직전 차에 탄 다섯 형제들과 악수를 나누고 작별인사를 하니 말그대로 ‘구원의 마지막 열차’를 탄 듯 마음이 마냥 홀가분하며 자유로워지는 느낌이었습니다. 떠나는 모습 보지 못했다면 정말 아쉬웠을 것입니다. 이들과 작별인사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주신 주님께 감사했고, 하루종일 가벼운 마음으로 지낼 수 있었습니다. 새삼 환대의 사랑 실천에 오늘 복음의 진리가 압축 요약되어 있음을 깨닫습니다.
오늘 히브리서는 충실한 신앙생활의 원리를 가르쳐 줍니다. 실제적인 지침 5가지를 소개합니다. 세상의 빛이자, 세상의 소금과 같은 삶을 지향하는 교회공동체에 속한 모든 형제자매들이 준수해야 할 가르침입니다.
1.진실한 마음과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께 나아갑시다.
2.우리가 고백하는 희망을 굳게 간직합시다. 약속해 주신 분은 성실하신 분이십니다.
3.서로 자극을 주어 사랑과 선행을 하도록 주의를 기울입시다.
4.우리의 모임을 소홀히 하지 맙시다.
5.서로를 격려합시다. ‘오늘이 그날’인 것처럼 더욱더 이렇게 합시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하느님의 집을 다스리시는 위대한 대사제이자 새롭고도 살아 있는 길을 열어주신 주님께서 우리 모두 세상의 빛, 세상의 소금으로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누가 주님의 산에 오를 수 있으랴? 누가 그 거룩한 곳에 설 수 있으랴?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결백한 이, 헛된 것에 정신을 팔지 않는 이라네.”(시편 24,3-4ㄱㄴ)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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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오늘 복음은 전혀 상관없는 두 가지 말씀을 모아놓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왜 전혀 상관없는 말을 한 데 엮어 놓았을까 생각해보니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곧 천조자조(天助自助)라는 뜻에서 공통적인 면이 있습니다.
도무지 아무것도 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소극적인 것을 넘어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사람입니다.
힘이 싹 빠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도 있겠지만 아무런 의욕이 없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등불을 등경 위에 올려놓고 비추려는 의욕이 없어서 아무 데나 방치해 함지 속에 두기도 침대 밑에 두기도 하고, 돈이 제법 있어도 그것으로 선행을 하려는 마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남에게 빛이 되지 못할 뿐 아니라 자기 방도 어둡고, 남에게 주지도 않지만 받지도 못하고 은총도 받지 못합니다.
사실 하려는 사람에게 은총도 주어집니다. 사실 아무것도 할 생각이 없는 사람에겐 은총도 필요 없고, 그래서 은총을 바라지도 청하지도 않겠지요.
그러고 보니 이런 사람에게는 은총을 주시는 하느님도 아니 계십니다. 이런 사람은 눈 들어 하느님을 보는 것조차 하려 하지 않는 자입니다.
어제저녁 성무일도 기도 시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산들을 우러러 눈을 드노라 * 어디서 구원이 내게 올런고.” “구원은 오리라 주님한테서 * 하늘땅 만드신 그님한테서.”
할 힘이 없으면 기도라도 열심히 하면 될 텐데 기도조차 하려 하지 않습니다. 선행을 할 사랑의 힘이 도무지 없고 의욕도 없어 그저 늙어 아무 힘이 없다고 나이 타령이나 하는 내가 아닌지 돌아볼 것입니다.
어제는 설 명절인데
새해 인사도 드리지 못하고,
인사를 받기만 했네요.
너무 죄송했습니다.
하루 늦었지만
이제라도 새해 인사 올립니다.
새해 주님께서 주시는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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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느냐?"(마르 4,21)
<등불의 의미!>
오늘 복음(마르 4,21-25)은 '등불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등불의 비유를 통해 하느님의 나라를 설명하십니다. 등불은 어둠을 밝히는 빛입니다.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는다는 것은 어둠을 밝히는 빛으로서의 등불이 될 수 없습니다.
등불의 비유에서 등불은 말씀을 의미하고, 복음을 의미합니다. 복음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이 등불로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양식으로 삼는 사람들입니다. 복음과 복음이신 예수님을 생명의 양식으로 삼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 양식을 또한 너에게도 나누어 주어야만 하는 사람들입니다.
"너희는 새겨들어라.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르 4,24-25)
'가진 자의 의미'가 '이웃에게 잘 나누는 사람의 의미'로, 그리고 '가진 것이 없는 자의 의미'가 '가진 것을 이웃과 나누지 않는 사람의 의미'로 다가옵니다.
베풀고 나누면 그것도 넉넉하게 베풀고 나누면, 그 이상으로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되돌아올 것을 바라지 않으면서 기쁘게 잘 나누면 하느님께서 그 이상으로 베풀어 주신다는 것을 삶의 자리에서 종종 체험하곤 합니다. 이 체험을 한 사람들이 더 잘 베푸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은총의 은총을 입게 되는 것이지요. '인색'은 죄의 뿌리이면서, 그 자체로 죄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져 악에 물든 양심을 벗고 깨끗해졌으며, 우리의 몸은 맑은 물로 말끔히 씻겼습니다."(히브 10,22)
등불이 됩시다!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그리스도의 등불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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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등불은 등경 위에 놓지 않느냐?"(마르 4, 21)
등불은
등경 위에
놓아야 합니다.
신앙의 빛이
있어야 할 자리는
언제나 우리 삶의
자리입니다.
등불은
삶의 방향을
깨닫게합니다.
어둠을 밝히는
등불은 이미
우리 삶안에
있습니다.
어김없이 등불은
우리 삶을
비추어줍니다.
등불은
일상 생활과
신앙 생활을
하나로
결합시킵니다.
거짓과 허위
자존심과 고집에서
벗어나 진실된
나와 너를
만나게 합니다.
등불은
등경이라는
현실에서 빛을
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또한
등불로서의 삶을
살길 바라십니다.
등불의
이 불빛은
타오르는 아픔을
기꺼이 감수하는
등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등불이 되는
실천을 오늘도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십니다.
어리석음을
일깨워주는
등불이 있습니다.
등불의 삶은
실천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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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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