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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경제 영역서 자치권 확대”…자본의 시대 민주주의 활로 찾다
김호기 |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로버트 달의 ‘경제 민주주의’
예일대학교에서 정치학을 강의하는 미국 정치학자 로버트 달. 달은 2차 세계대전 이후 현대 민주주의 이론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정치학자로 꼽힌다.
서구 모더니티의 양축을 이뤄온 것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였다. 자본주의가 경제적 생활을 생산·재생산하는 양식이라면, 민주주의는 정치·사회적 생활을 규율하고 향상시키는 원리다. 민주주의란 본디 ‘인민의 지배’를 뜻한다. 이 인민의 지배를 제도화한 게 대의민주주의와 참여민주주의다. 의회가 대의민주주의의 조직적 거점이라면, 사회운동은 참여민주주의의 실천적 현장이다. 이러한 민주주의가 자본주의와 협력 및 견제를 이뤄온 게 모더니티의 역사였다.
전후 민주주의 이론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정치학자는 미국의 로버트 달(Robert Dahl·1915~2014)이다. 달은 민주주의가 갖는 제도와 관행을 중시하며 이를 실제적으로 분석하고 이론적으로 구성했다. 1970년대 초반까지 달은 다원민주주의를 지지했다. 하지만 이후 그는 다원민주주의의 한계를 자각하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학문적 탐구에 주력했다.
사회과학자들의 경우 나이가 들어가면서 대체로 보수화되는 경향을 보이는 것에 반해 달은 그 반대로 진보적 성향으로 나아갔다.
달의 민주주의 사상은 크게 보아 다원민주주의에서 신(新)다원민주주의로 변화돼 왔다고 평가된다. 1972년에 발표한 <다두정: 참여와 반대>는 그의 다원민주주의 이론을 대표하는 책이다. 이 저작에서 그는 경합의 자유와 참여의 포괄성을 보장하는 체제를 다두정(polyarchy)이라고 명명하고, 이 두 기준을 충족한 체제를 민주주의로 파악했다. 이후 그는 신다원민주주의 시각에서 <다원민주주의의 딜레마> <경제 민주주의> <민주주의와 그 비판자들> <민주주의> <미국 헌법과 민주주의> <정치적 평등에 관하여> 등을 발표해 세계적 주목을 받았다.
■경제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100살에 가까울 때까지 평생 학문에 헌신한 달과 같은 학자의 경우 대표 저작을 선정하기 어렵다. 여기서 주목하려는 저작은 1985년에 발표한 <경제 민주주의>(원제: A Preface to Economic Democracy)다.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이 책은 달의 후기 사상을 잘 보여주는 저작이다. 둘째, 경제 영역의 민주주의는 현대 민주주의에 부여된 매우 중대한 과제다. 이 책에서 달은 다원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할 경제 민주주의를 민주주의의 새로운 대안의 하나로 제시한다.
경제 민주주의에 대한 달의 출발점은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의 고전적 민주주의 이론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다. 민주주의가 평등을 기반으로 확립되지만, 그 평등이 자유를 위협함으로써 민주주의를 붕괴시킬지도 모른다는 것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제시된 토크빌의 유명한 주장이다. 이 견해에 대해 달은 평등이 자유를 침해하는 게 아니라 그 평등을 통해 자유가 구현될 수 있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달에 따르면, 민주주의의 중추적 원리는 민주적 자기지배로서의 자치권이다. 문제 핵심은 이 자치권 중 경제적 자치권이 고전적 사유재산권과 대립한다는 데 있다. 사유재산권을 옹호하는 이들은 사유재산이 천부인권이며, 경제적 평등의 확산이 사유재산권을 침해한다고 주장해 왔다. 하지만 소수가 기업 정책 결정을 독점하고 대다수 노동자는 비인격체로 간주되는 경제구조에서 사유재산권은 경제 민주주의의 자기지배로서의 자치권과 양립하기 어렵다는 게 달의 주장이다.
이런 맥락에서 달은 사적 소유의 ‘형질 변경’에 입각한 종업원의 자율경영이라는 자주관리를 경제 민주주의를 위한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한다. 스페인의 몬드라곤 협동조합은 이러한 자주관리의 대표적 사례다. 이 자주관리는 공동재산과 함께 사유재산을 보장해 경제적 자유에 대한 침해를 최소화할 뿐만 아니라, 국가사회주의처럼 비효율적이지도 않다. 나아가, 종업원들에게 기업 의사결정에 대한 참여를 보장하는 참여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방안이기도 하다.
경제 민주주의에 대한 달의 이론화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간 긴장, 다시 말해 자본주의 내부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다원민주주의의 경제적 딜레마를 정면으로 다루고 그 실천적 대안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주목 받아 마땅하다. 자신의 이론에 대해 이토록 정직하게 자기성찰적인 사상가를 찾기란 결코 쉽지 않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간 관계
서구 정치사상의 흐름을 돌아볼 때 시장과 민주주의 간 관계는 고전적인 주제 중 하나다. 시장은 형식적 평등을 보장하고 탈중심적 명령기제라는 점에서 절차적 민주주의에 친화적이지만, 그 경쟁 메커니즘은 사회적 약자를 배제시키는 것으로 귀결되기 때문에 실질적 민주주의에 적대적이다.
이러한 딜레마에 대한 달의 대안은 정치영역에서 자치권이 정당화되듯 경제영역에서도 자치권이 정당화돼야 한다는 것으로 집약된다. 달의 해결책은 시장의 복권과 작은 정부를 강조하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을 함축할 뿐만 아니라, 생산현장에서 노동자의 적극적 참여를 주장하는 산업민주주의, 소유 및 통제의 사회화를 중시하는 시장사회주의와도 직접적으로 이어진다.
달은 민주주의에 대한 자신의 교과서라 할 <민주주의>(1998)에서 21세기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으로 경제 질서, 국제화, 문화적 다양성, 시민교육의 네 가지 문제를 검토한 바 있다. 이 가운데 특히 주목되는 것은 경제 질서다. 그에 따르면, 21세기 민주적 목표와 시장자본주의 경제 간의 긴장은 끊임없이 지속되며, 따라서 정치적 평등에 손실을 가져올 비용을 최소화시키면서 시장자본주의 장점을 최대한 살릴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민주주의에 대해 분명한 사실은 두 가지다.
첫째, 민주주의보다 더 나은 정치제도는 부재한다.
둘째, 민주주의의 가치와 자본주의의 효율을 동시에 증대시킬 수 있는 모델 개발 및 실천은 모더니티의 가장 중요한 제도적 과제다. 달의 이론은 민주주의를 이론적으로 심화시키고 실천적으로 구현하려는 시도들에 매우 유용한 출발점을 제공한다.
■한국어판 저작은
<경제 민주주의>는 정치학자 안승국과 행정학자 배관표에 의해 각각 우리말로 옮겨졌다. 배관표는 번역본 제목을 <경제 민주주의에 관하여>로 달았다.
■한국 민주주의 분석한 최장집, 정당정치·경제 민주화 강조
민주주의 이론가로 미국에 달이 있다면, 한국에는 최장집(고려대 명예교수, 정치학·사진)이 있다. 최장집은 달의 저작 <미국 헌법과 민주주의>(박상훈·박수형 옮김)에 한국어판 서문으로 ‘민주주의와 헌정주의: 미국과 한국’이라는 뛰어난 논문을 싣기도 했다.
최장집은 1980년대 민주화 시대가 열린 이후 최고의 민주주의 이론가로 평가돼 왔다. 학계에서 왕성하게 활동했던 그가 시민사회에 널리 알려진 것은 1998년에 출범한 김대중 정부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민주적 시장경제론’을 발표하면서부터였다. 그는 국가·시장·시민사회 간 생산적 균형을 중시하는 민주적 시장경제론을 한국 사회발전의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했다.
최장집의 대표 저작은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2002)다. ‘한국 민주주의의 보수적 기원과 위기’라는 부제를 단 이 책에는 한국 민주주의가 선 자리와 갈 길에 대한 그의 고민과 성찰이 집약돼 있다. 이 저작은 광복 70여년 동안 한국 사회과학이 이룬 대표적 연구 업적의 하나로 고평(高評)돼 왔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가 한국 민주주의의 분석 및 전망에 기여한 바는 세 가지다.
첫째, 한국 민주화를 분단국가 형성과 자본주의 산업화 과정 속에 위치시켜 분석했다.
둘째, 정당정치의 미성숙과 사회·경제적 민주화의 지체를 한국 정치의 현주소로 진단했다.
셋째, 시민사회 균열이 제대로 반영된 정당정치와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사회·경제적 민주화를 한국 민주주의 당면 과제로 제시했다.
이후 최장집은 ‘진보적 자유주의’를 주창해 다시 큰 관심을 모았다. 그는 자율적 결사체의 강화를 통해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고 국가·시장의 관료화에 맞서는 정당과 이들 간 경쟁을 보장하기 위한 ‘자유주의’를 강조했다. 이러한 자유주의가 양극화를 강화해온 신자유주의를 반대하고 새로운 평등을 모색해야 한다는 게 ‘진보적’ 자유주의의 핵심 아이디어였다.
요컨대, 진보적 자유주의는 정당정치의 중심성을 강조하고 경제민주화 프로그램을 구체화하며 노동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민주적 시장경제론의 새로운 버전이라 할 만하다. 외환위기 이후 노동의 위기와 불평등 증대라는 현실에 대한 최장집의 비판적 인식이 잘 반영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