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육십을 넘겨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읽었다. 내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란 헤세의 메시지가 새롭고 입체적으로 다가왔다. 그가 이렇게 클래식 음악을 아꼈는지 이제야 비로소 알게 됐다.
도서출판 다빈치를 2000년 창업해 열정적으로 책을 만들던 박성식 대표가 마지막 불꽃을 태운 노벨라 전집 33권 가운데 22번째 박정미 옮김 본을 읽었다. 박 대표는 21번째 잭 런던의 '야성의 부름'을 손수 번역했는데 그 바로 다음 '데미안'을 배치했다.
지난해 마지막 날 지리산 대원사 계곡에서 백두대간 첫 일정을 시작하면서부터 틈틈이 펼쳐 읽어 22번째를 마쳤다. 그 중 '데미안'이 압권이었고, '야성의 부름'이 그 다음이었다.
바흐의 <마태수난곡>을 듣고 있으면 그 비밀스러운 세계의 음울하게 강렬한 고난의 광채가 나를 온갖 신비로운 전율로 넘치게 채웠다. 나는 오늘날까지도 이 음악과 바흐의 칸타타 <악투스 트라지쿠스>에서 모든 시와 모든 예술적 표현의 진수를 발견한다.
때로는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세상이 나 같은 사람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세상이 우리에게 더 좋은 자리, 더 수준 높은 임무를 맡기지 않는다면, 나 같은 사람들은 결국 이렇게 망가지는 거라고, 그렇게 되면 세상만 손해지!
"내게 말했었지. 자네가 음악을 좋아하는 건 음악이 도덕적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뭐, 그럴 수 있지.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까지 도덕주의자가 될 필요는 없네!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 안 되지. 자연이 자네를 박쥐로 만들어놓았는데 굳이 타조가 되려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네. 자네는 때때로 자신을 별나다고 여기고, 대부분의 사람들과 다른 길을 간다고 스스로를 비난하고 있지. 그런 생각은 그만 두게. 대신에 불을 들여다보고 구름을 바라보는 거야. 그래서 예감들이 떠오르고 자네의 마음속 목소리가 말을 하기 시작하면, 그 목소리에 자신을 내맡기게. 그리고 그것을 과연 선생님이나 아버지 또는 그 어떤 신도 탐탁해하거나 좋아할까 전혀 궁금해하지 말게! 그래봤자 자네만 손해니까. 그러면 남들과 똑같이 보도로 내려와 화석이 되는 거지. 친애하는 싱클레어, 우리의 이름은 아브락사스!"
기분이 가라앉을 때면 나는 피스토리우스더러 북스테후데의 파사칼리아를 연주해달라고 청했다. 그러면 나는 저녁 시간의 어둠이 내려앉은 교회 안에 앉아 묘하고 진심 어린, 자기 자신에게 빠져들고 자기 자신을 엿듣는 듯한 그 음악에 몰두했다. 그럴 때마다 그 음악은 내게 기쁨을 주었고, 나로 하여금 마음의 목소리를 인정할 준비가 더 잘 되게 만들었다.
"우리가 보는 것들은 말일세." 피스토리우스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것과 같은 것들이지. 우리가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것을 제외하면 현실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네. 대다수의 사람들은 외부의 모습들을 현실로 여기고 자기 내면의 세계한테는 의사 표현할 기회를 전혀 주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비현실적으로 사는 거라고. 그러면서 행복해할 수는 있겠지. 하지만 일단 다른 길을 알고 나면 대부분 사람들이 가는 길을 더 이상 선택하지 않게 돼. 싱클레어, 대다수 사람들의 길을 쉽고, 우리가 가는 길은 어렵지. 자그만 가자고."
그 시절에 가장 좋았던 때는 오르간 앞이나 벽난로 앞에서 피스토리우스와 함께 보낸 시간들이었다. 우리는 그리스어로 된 아브락사스에 대한 글을 같이 읽었다. 또한 그는 베다경에서 발췌 번역된 부분을 내게 읽어주었고 신성한 음절 '옴om'을 말하는 법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나를 내적으로 성장시켜준 것은 그런 지식들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였다. 내게 도움이 된 것은 나 자신에 내재된 진취성이었고, 나 자신의 꿈이나 생각, 예감들에 대해 갈수록 커지는 신뢰였으며, 내가 품고 있는 힘을 점점 더 의식하는 것이었다.
나는 시를 짓기 위해, 설교를 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물론이고 그 밖에 어느 누구도 그러기 위해 존재하지는 않았다. 그 모든 것은 그저 부수적으로 따르는 결과일 뿐이었다. 각자에게 맡겨진 진정한 소명이란 그 한 가지, 즉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것뿐이었다. 누구는 시인으로, 또 누구는 미친 사람이나 예언자 혹은 범죄자로 생을 마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은 결코 무의미할 수밖에 없었다. 각자의 관심사는 임의의 어떤 운명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운명을 찾아내는 것이었으며, 그 운명을 자기 안에서 온전히 불굴의 의지로 끝까지 겪어내는 것이었다. 다른 것은 모두 반쪽에 지나지 않았고, 도피하려는 시도였다. 또한 군중의 이상 속으로 되돌아가 몸을 숨기는 것이었으며 순응이자 자기 내면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중략) 나는 자연이 던진 돌이었다. 불확실함 속으로 던진 돌은 어쩌면 새로운 것이 될 수도 있고 아무것도 안 될 수도 있다. 심연으로부터 던져진 그 돌이 작용하게 하는 것, 그 돌의 의지를 내 안에서 느끼는 것 그리고 그 돌을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드는 것, 그것만이 내 소명이었다. 오직 그것뿐이었다!
데미안이 또 말했다. "연대는 멋진 일이지. 하지만 지금 어디를 가나 판을 치고 있는 것은 결코 연대라고 할 수 없어. 연대는 개개인이 서로에 대해 앎으로써 새롭게 생성될 거야. 그리고 연대가 한동안 세계의 판도를 바꿔놓겠지. 지금 연대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것도 다 무리 짓기에 불과할 뿐이야. 사람들은 서로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서로에게로 도피하는 거지. 그래서 고용주들 따로, 노동자들 따로, 지식인들 따로 무리를 짓는 거야! 그런데 그들은 왜 두려워할까? 자기 자신과 의견이 일치하지 않으면 두려울 수밖에 없어. 그들은 한 번도 자기 자신을 인정한 적이 없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거야. 순전히 자기 자신을 잘 몰라서 두려워하는 사람들만 모여 공동체를 이루는 거지! 그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이 따르던 삶의 법칙들이 더 이상 맞지 않다는 것은, 자신들이 고대의 동판법에 따라 살고 있음을 느낄 거야. 그들의 종교나 도덕, 그 어느 것도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에 걸맞지 않아. 백 년 넘게 유럽은 계속 연구만 하고 공장을 지어댔지. 그들은 한 사람을 죽이는 데 몇 그램의 화약이 필요한지 정확히 알고 있으면서 신에게 기도하는 법은 전혀 몰라. 그들은 어떻게 하면 한 시간을 즐겁게 보낼 수 있는지조차도 모르지. 저런 대학가 술집을 한 번 보라고! 부자들이 찾는 유흥 시설을 또 그렇고! 절망적이야! 싱클레어, 그 어느 곳에서도 유쾌함을 찾아볼 수 없어. 그렇게 두려워하며 무리를 짓는 사람들은 불안과 악의로 가득하고,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을 신뢰하지 않아. 그들은 더 이상 있지도 않은 이상에 매달리며 누군가 새로운 것을 내세울 때마다 돌을 던지지. 충돌이 있으리라는 느낌이 들어. 내 말을 믿어, 곧 충돌이 일어날 거야! 물론 그 충돌로 세계가 '개선'되지는 않겠지. 노동자들이 그들의 공장주를 쳐 죽인다 해도, 혹은 러시아와 독일이 서로에게 총격을 가한다 해도 주인만 바뀔 뿐이야. 그렇다고 그것이 헛일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 그로 인해 오늘날의 이상이 얼마나 가치 없는 것인지 명백히 밝혀지고, 석기시대의 신들이 싹 정리될 테니까. 지금 모습의 이 세계는 사멸하려 하고, 몰락하려 하고 있어. 그리고 그렇게 될 거야."
"우리? 오 , 아마 우리도 같이 몰락하겠지. 우리는 우리와 같은 사람도 얼마든지 쳐 죽일 수 있으니까. 우리가 그런 식으로 끝장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지. 우리한테서 남는 것, 혹은 우리 중에 살아남는 자들 주위에 미래의 의지가 모일 거야. 우리 유럽이 한동안 기술과 과학의 연시를 열어 더 크게 외쳐대는 바람에 들리지 않았던 인류의 의지가 모습을 보이겠지. 그러면 인류의 의지가 오늘날의 공동체, 국가, 민족, 협회 그리고 교회의 의지와 절대 같을 수 없다는 사실이 드러날 거야. 자연이 인간과 더불어 원하는 게 무엇인지는 개개인 안에, 너와 나 안에 적혀 있지. 그것은 예수 안에, 니체 안에 적혀 있어. 물론 날마다 달라 보일 수 있지만, 어쨌든 유일하게 중요한 이 흐름들에게는 오늘날의 공동체가 붕괴되는 것이 기회가 될 거아."
우리의 노력은 언제나 완전한 각성을 향한 것인 반면, 다른 사람들의 노력과 행복 추구는 자신의 생각과 이상, 의무, 삶, 행복을 무리 전체의 것에 점점 더 단단히 구속시키는 것을 지향했다. 무리 전체에도 노력이 있고, 의지력과 숭고함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견해에 의하면, 표식을 지닌 우리들은 새로운것, 개별적인 것 그리고 미래의 것을 추구하는 본성의 의지를 드러냈다. 그에 반해 다른 사람들은 보수의 의지 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 인류란 (그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인류를 사랑하긴 했지만) 보호하고 지켜야 할, 완성된 존재였다. 한편 우리에게 있어 인류는 우리 모두가 향해가고 있는 먼 미래였다. 그 미래가 어떤 모습인지 아무도 알지 못했고, 어떤 법칙을 따르는지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았다.
"(중략) 싱클레어, 나는 그런 꿈들을 보면 내가 이미 너한테 말해준 그 예감이 들어. 우리 세계가 정말로 썩었다는건 우리도 알아. 그래도 아직은 그것이 세계의 종말이나 그 비슷한 것을 예언할 만한 근거가 될 정도는 아니야. 하지만 내가 수년 전부터 꾸었던 꿈들로부터 내가 얻은 결론, 혹은 느낌은 낡은 세계의 붕괴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거야. 처음에는 아주 약하고 희미한 예감들이었지만, 이제 갈수록 더 강해지고 더 뚜렷해지고 있어. 아직까지 내가 아는 거라고는 나 자신과도 관련된 뭔가 엄청나고 무서운 일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뿐이야. 싱클레어, 우리는 가끔씩 우리가 이야기하곤 했던 것을 곧 겪게 될 거야! 세계가 새롭게 태어나려 해. 죽음의 냄새가 나. 죽음 없이는 새로운 것이 올 수 없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끔찍해."
헤세가 데미안을 집필하기 시작한 것이 1917년이었다. 2년 뒤 출간해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1차 세계대전은 사라예보 사건으로 1914년 7월 28일 시작해 1918년 11월 11일까지 이어졌다. 헤세가 세계대전이란 참극을 인류의 새로운 세계가 열릴 기회로 받아들인 것은 아닌지 충격적이다. 1916년 아버지의 죽음, 아내의 조현병 발병, 막내아들의 중병이란 삼각 파고에 칼 융의 제자인 랑에게 심리 치료를 받은 뒤에 집필을 시작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꽤나 놀랍다. 어차피 독일인이라 그런 것인가, (물론 나중에 나치는 그의 저작이 불온하다며 판매 금지했다.) 유럽의 분열에 넌더리가 날 정도로 지쳐 있었기 때문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개인적으로는 절멸의 위기감이 어느 때보다 도드라지는 이즈음에 '데미안'에 담긴 헤세의 메시지와 클래식 명곡들을 접하니 음산하기 이를 데 없는 15일의 서울 아침이 새삼 무섭게 다가온다.
바흐_'마태 수난곡 (전곡). BACH_Matthew Passion BWV 244 [Harnoncourt] (youtube.com)
Bach - Cantata Gottes Zeit..., 'Actus Tragicus' BWV 106 - Van Veldhoven | Netherlands Bach Society (youtube.com)
Buxtehude, Passacaglia in D Minor, BuxWV 161 (youtub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