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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산골에서 전하는 편지 원문보기 글쓴이: 다운
2012.10.04. 06:20
http://blog.naver.com/humbly_his/20168133893
힘들게 찾은 가뭄에 샘물같은 교회 - 마가교회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의 교회)의 설교입니다. 다른 목회자와는 드물게 창세기 부터 한장한장씩 빼놓지 않고 설교하시는 마가맨 채동선 전도사님의 주옥같은 설교를 요한복음과 창세기부터 연재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까지 가려면 몇년은 걸려야 할것 같은데요.. 하하.. 모든 설교를 다보시려면 마가교회 웹사이트로 가세요. http://magachurch.com
이설교에서 가장 마음에 와닿는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곳의 근본이시던 말씀이 이 세상 즉 시간을 가지고 있는 세상 안으로 들어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이글이글 타는 태양 옆에 우리가 가까이 간다고 생각해 보세요. 아마 재도 없이 타버릴 것입니다. 그런 태양 조차도 하나님에게는 우주의 점과 같은 것인데 그렇게 무한한 지혜와 힘을 가지신 그 말씀 (예수님)이 시간과 공간 안에 갇히기로 하신것은 그안에 갇혀 있는 우리에게 그것을 뛰어넘는것을 주시기 위함인것입니다. -채동선 전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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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제 1강 (10/01/2008)
본문: 요한복음 1장 1절~4절
[요1: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Ἐν ἀρχῇ ἦν ὁ λόγος, καὶ ὁ λόγος ἦν πρὸς τὸν θεόν, καὶ θεὸς ἦν ὁ λόγος.
엔아르케 엔 호 로고스, 카이 호 로고스 엔 프로스 톤 데온, 카이 데오스 엔 호 로고스
A. 로고스 (말씀)는 곧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시간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태초"라고 하면 어떤 시간의 개념으로 알고 있다. 아주 먼 옛날에 계셨다는 뜻으로. 그런 시간의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태초라는 단어는 옛날 옛적이란 이야기가 아니고 바로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는 것이다.
같은 의미로 쓰인 성경 말씀을 보면 [계시록 3:14] "라오디게아 교회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여기서'태초'라는 단어와 비슷한 단어가 14절에 쓰여있다. "근본"이다. 태초에 하는 태초는 바로 이 근본이다.
[골로새서 1: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태초에'라는 그 단어는 헬라어로 "아르케" 인데 이 아르케 앞에 엔이 쓰였다. 엔은 '~안에'라는 뜻이다. 엔 아르케하면 '태초 안에 있었다' 라는 뜻이 된다. 여기서 시제가 분명하지 않다. 미완료형으로 썼는데 태초가 어떤 시간적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2. 태초 안에 계신 말씀이 세상 안으로 오심- 십자가 사건
이 '태초 안에', '그 근본 안'에 있던 말씀이 세상 안으로 들어왔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곳의 근본이시던 말씀이 이 세상 즉 시간을 가지고 있는 세상 안으로 들어 오셨다. 하나님이 겸손해지신 것이다. 비우신 것이다.
태초 안에 계셨던 분이 세상 안에 오신 이유는 세상 안에 있는 우리에게 태초 즉 근본 안에 있는 것을 나누어주기 위함이다. 그러니까 시간과 공간을 전혀 상관하지 않으시는 분께서 시간과 공간 안으로 오신 것은 시간과 공간 안에 갇혀 있는 우리에게 그것을 훨씬 뛰어 넘는 것을 주시기 위함이다.
"말씀이 계셨다. 그 곳이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는 곳이다. 그런데 그곳에 계신 분이 지금 이 세상에 오셨다" 이것이 무엇인가? 십자가의 사건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옷을 벗으신 이유는 진짜 무엇인가 옷을 입어야 할 우리에게 다른 것들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혀주기 위해 옷을 벗으신 것이다. 이처럼 그 근본 안에 있던 말씀이 이 세상안에 오신 것은 시간과 한계에 갇혀 있는 우리에게 근본의 것을 나누어주시기 위한 것이다. 처음부터 사랑과 비움이 나온다. 하나님의 비우심.
[히브리서 7:3]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그렇다는 것이다. 멜기세댁에 대한 말씀을 하신 것인데 이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임을 설명하고 있다. 시작하는 날도 없고, 끝나는 날도 없고, 족보도 없고, 영원한 근본적인 것이 태초라는 것이다.
3. 그리스도 안, 그리스도 밖.
요한복음에는 "안"이란 말이 자주 나온다. 그리스도 안. 에베소서의 경우 "안"이 40번 이상 나온다. 그 '안' 이라는 단어가 그렇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안'과 '밖'을 잘 알아야 한다.
우리가 기도한다고 할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과 예수님의 이름 안에서 기도하는 것은 다르다. 이름으로 기도하라 그러면 그냥 이름을 주문처럼 외우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름 안에서 기도하는것은 주문이 아니라 진짜 예수님 안에서 완전히 그분 안에서 그분을 의지하는 태도와 마음으로 기도하라는 것이다.
기도의 어떤 방식이나 절차가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의 자세와 태도를 이야기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러면 어떤 장소에 있다는 육체적 개념이 아니라 내적이고 내용적이고 근본적이라는 뜻으로 '안'이란 말을 쓴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있다 내려 오시니 제자들이 쩔쩔 매고 있었다. 거품을 물고 귀신이 들려 쓰러지는데 얼마나 기도를 많이 했겠는가? 그래도 이를 고치지 못하고 예수님이 오셔서 고쳐 주셨다.
주님께서 무어라 하셨는가?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그러셨다. 제자들이 그냥 팔장끼고 쳐다만 보고 있었겠는가? 제자들이 얼마나 필사적으로 기도했을까? 그런데 거기 보면 '엔 오노마티' '기도 외'에는 이라는 뜻은 '기도 안'이 아니면 이런 뜻이다. 다른 말로 하면 기도 외에는 혹은 기도하는 것 외에는 이라는 뜻이 아니라 '기도 안에 있지 아니하면' 나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기도하는 것과 기도 안에 있는 것은 다르다. 제자들의 기도하는 그 행동이 부족해서 안된 것이 아니다. 똑같은 기도를 하더라도 기도 안에 있는 사람의 기도와 기도 밖에 있는 사람의 기도가 있다. 기도자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이 기도하는 기도가 기도 밖에서 하는 기도이다. 그 사람 자체가 기도가 되어야 한다.
기도자가 기도 안에 있는 사람이다. 우리의 태도가 "나는 주님이 아니면 죽습니다 주님이 들어 주시지 아니하시면 내 손과 발, 그리고 생각과 지혜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철저히 기도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 그 사람의 기도가 이런 유를 나가게 해 준다는 말씀이다.
우리는 부득이'안'에서 살아야 할 사람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 예수 이름 안, 하나님 안, 기도 안, 오직 그 "안"에서만 우리는 존재할 수 있다. '안에서'의 신앙 생활이다.
구원이 무엇인가? 밖에 있는 자를 안으로 끌어 들이는 것이다. 실컷 기도해도 소용없을 수 있다. 기도 시간의 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안'에 있지 않고 '밖'에 있는 사람들이 모습이다. 우리는 부단히 안에 있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채동선 전도사님의 간증
저도 처음 개척하고 엄청나게 기도했습니다. 매일 수 시간씩 그렇게 기도를 열심히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무슨 기도를 그렇게 열심히 했나? 돌이켜 보면 챙피하고 부끄러운 기도지요. 욕심의 기도지요.
오늘 밤에 성도들이 은혜 받을 수 있게 해달라는. 멋지지요. 그러나 그 안에 사람들에게 칭찬 받고 싶은 욕심이 있었습니다.
그런 것이 내 기도의 동기가 되었던 것이지요.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것, 개척교회에서 이제는 금방 부흥한다고 자랑하고 싶고 …
지금 생각하면 너무도 부끄럽지요. 그런 사람이 기도하는 기도를 그래도 하나님은 불쌍해서 들어 주시지요.
그것이 과연 하나님 나라를 내 입술로 구하고 그 하나님의 나라가 나를 통해서 드러나느냐 하는 것입니다.
안에 있는 것을 나누어 주기 위해서 철저히 근본 밖에 있던 우리에게 우리들 속으로 그 근본을 가지고 들어 오셔서 그 귀한 안이란 것을 나누어 주신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냥 사랑 자체가 되야 한다.
B. 그리스도와의 연합
[요1:1b]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καὶ ὁ λόγος ἦν πρὸς τὸν θεόν, καὶ θεὸς ἦν ὁ λόγος.
카이 호 로고스 엔 프로스 톤 데온, 카이 데오스 엔 호 로고스
'내가 그대와 함께 있었다' 하면 서로 다른 정체성이다. 그대와 함께 있었는데 내가 곧 그대이다. 과연 이것이 어떤 정체성인가?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신다. 말씀이 하나님이다. 이 두개의 separated된 문장을 잘 생각해 보라.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하고 말씀이 곧 하나님이다. 이것이 기독교적 정체성의 본질을 설명하는 문장이다.
헬라어에 '프로스'라는 전치사적 단어가 있는데 '하나님과 함께' 라고 할 때 바로 이 "함께"가 "프로스"이다. 이것은 공간적이 아니라 방향적인 것으로 하나님을 향한다는 뜻이다. 내가 주님을 바라본다. 하나님을 향해서 (프로스 톤 데오) 라고 할 때 하나님을 향해 바라본다, 하나님을 향해서 서 있다는 뜻으로 방향성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향한 나의 방향성이 점점 깊어지면, 내적 방향성이 점점 가까워지면 연합 되어진다. 이 연합 되어 진 상태가 오늘날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니까 점점 연합 되어지는 것, 프로스 톤 데오,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 존재가 방향성을 가지고 점점 더 가까워지면 결국은 그 정체성을 내가 가지게 되고 하나가 되는 것이다.
다른 말로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진 삶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부단히 그리스도를 향한 나의 방향성, 내 존재의 방향성에 기인되는 것이다.
이 존재의 방향성이 그리스도를 향하고 그분을 향한 것이 점점 가까워지고 연합 되어지면 결국 하나가 되고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사랑이 무엇인가? 바로 하나되는 것이다. 너와 내가 없어진다.
내가 없어져야만이 네 안에 있고 네가 없어져야만이 내 안에 있다. 아직 서로 떨어져 있지만 프로스-서로를 향할 때- 바로 너와 내가 가까워져서 결국 최극점에 이르러 거리가 없어졌을 때 너와 내가 없어지는 '하나'에 이르게 된다.
1. 연합될 때 Identity도 동일해진다.
점점 주님과 내가 연합 되어져서 하나가 되는 상태,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되어져서 딱 하나가 되니 그 말씀을 하나님이라고 한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인가? 그리스도와 점점 연합 되어져 하나됐을 때 우리는 또 다른 그리스도가 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의 뜻은 바로 요한복음 1장 1절 하나님을 어떻게 소개할 때 그 identity를 오늘날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리스도를 향하고,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지고 가까워지면서 결국 하나 될 때 완전한 일치가 될 때 그때부터 "말씀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다" 곧 "말씀이 하나님이시다" 이신 것 같이 우리는 또 다른 작은 그리스도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독생자가 이제는 많은 다생자의 시대가 된다. 맏아들이 되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정체성이 대단한 것이다. 그것을 1장 1절에 말하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 했다. 하나님을 향한다. 점점 향해서 하나가 되었을 때 곧 로고스가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 차원의 identity이다. 그 정체성!
그런데 그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것이 사실은 요한이 말하기 전에 사단이 먼저 이야기했다. "네가 이것을 먹는 날에는 하나님과 같이 된다" 라고 말했다. 똑같이 된다라는 말에는 정 반대의 두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기분 나쁘게 같이 되는 것이다. "이 친구가 나하고 같으려구 그래?" 이건 서로 대립의 같음이다. 대립적 차원의 같음. '어떻게 건방지게 나와 맞먹으려구 해?' 여기서 사단이 말하는 '네가 하나님과 같이 된다'라는 말은 서로 대립적 차원의 같음을 말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진정 하나님적 차원의 같음은 대립의 같음이 아니라 합일의 같음이다.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웃이 내 몸이 될 때만 사랑이다. 사랑은 무엇을 하는 행위가 아니라 바로 하나가 되는 하늘의 원리이다. 이웃이 아직도 이웃으로 남아 있고 아직 사랑하는 주체로 남아 있으면 결코 사랑할 수 없다. 아무리 사랑해도 저 사람으로 따로 있는 한 절대로 사랑을 할 수 없다. 저 사람과 내가 하나가 될 때만이 사랑이 하나 되는 것이다. 하나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로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요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2. 내게 실제가 되시기 위해 하나님은 나의 현재로 들어 오셨다.
하나님은 그 존재적 근본 안에서 시간이나 공간과 관계없이 영원히 있고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계신다. 그런데 이 계신 분- 로고스- 즉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영원히 계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그 계신 ‘계심’이 나에게 실제화 되어 나에게도 경험되어지려면 주님의 계심이 언제 나에게 유용한가?
하나님의 존재가, 말씀이신 그 존재가 헨(엔: 계시다의 미완료동사) 아르케- 나에게 참이 되어야 되지 않는가? 근본 안, 태초안에 계신 말씀이기에 우리와 너무 거리가 멀다.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어야 되므로. 그 분의 그 영원성과 그 존재의 신성과 위대성이 나에게 경험되어지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나님의 역사가 아무리 위대해도 나에게 그것이 한낱 책으로 읽혀지는 과거의 이야기라든가 앞으로 일어날 일, 내가 죽은 후에 일어날 수도 있고 아니면 내일 일어날지, 몇 백년 후에 있어날지.. 앞으로 일어날거라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 위대한 하나님의 존재! 그 신성과 영원성 그리고 절대성이 나에게 실제화 되려면 하나님의 시제가 어디로 들어와야 하나?
나에게 있어서 현재로 들어와야 한다. 할렐루야!
그래서 천국은 현재로부터 시작되고 미래의 천국도 현재의 연장일 뿐이다.
오늘을 놓쳐 버리면 내일은 없다. 오늘 천국을 누려야 한다. 바로 이것. 바로 오늘!
요한계시록을 읽어보면 다 내일이나 미래의 일처럼 들린다 '속히 될 것이다' 라는 말을 이천년 전부터 기다리고 있다. 그러면 그 '속히'라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적 개념이겠는가? soon, 곧 일어날 것인가? 이천년 전 사람도 그 '속히'라는 말을 시간적 개념으로 기다리다 끝났다. 아마 지금도 그러고 있을지 모른다.
모든 하늘 나라의 것들이 오늘날 나에게 경험되어지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지금 지구가 곧 이런 일이 있을거야'하면서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들이 얼마나 이 '시간' 안에 갇혀 이해력이나 상상력 조차도 시간 안에서 다 해결해 버리려고 하는가? 시간과 상관없는 그 하늘의 일들은 내일이나 모레는 아무 소용이 없다. 바로 오늘 이어야 한다. 오늘!
'천국이 너희에게 임했느니라'그러면 우리가 말하는 미래는 무엇인가? 또 다른 오늘의 연장일 뿐이다. 그래서 "오늘날 너희가 아들의 음성을 듣거든""오늘날""곧 이때라!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니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오늘이다. 오늘! 바로 이 오늘로 돌아와야 한다.
3. 십자가의 도는 태초를 "오늘 안"으로 옮겨 준 사건이다
이 작업을 주님께서 하신 것을 무어라 하는가? "십자가"이다!
그 십자가의 도는 그 "태초"를 "오늘 안"으로 옮겨 준 사건이다. 우리가 어떻게 설명할 수 없고 우리가 그 어떤 상상력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그 근본, 그 태초 - 우리는 그 안에 있을 수 없었고 오직 그분 만이 계셨다 - 그 태초에 계셨던 그 분 하나님께서 그 분만이 가지고 있었던 영역 안에서 바로 이 세상으로, 오늘이란 시간 안으로 오신 것은 우리를 그 영역 안으로 집어 넣어 주시기 위함이다.
오늘이라는 오늘이 '하나님 안'에, 즉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우리가 비록 시간 속에 갇혀 살지만 바로 그 분이 계셨고, 계시고 있고, 계시고 있는 태초 안(엔 아르케)으로 들어가게 하는 작업이다.
십자가 사건은 그냥 이천년 전 예수님이 오셔서 피 흘리고 돌아가셨다,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시간에 관계 없던 그 영원이란 근본안에 계셨던 그 분이 우리를 그 영역 안으로 초대하기 위해서 나와서 우리의 오늘이라는 시간 안으로 들어오셔서 오늘을 사는 우리 안에 태초를 조성해 주시는 사건이다. 이것이 십자가 사역이고 창조이다. 이 일을 아버지께서 지금도 하고 게신 것이다.
[요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πάντα δι’ αὐτοῦ ἐγένετο, καὶ χωρὶς αὐτοῦ ἐγένετο οὐδὲ ἓν ὃ γέγονεν
판타 디 아우투 에게네토 카이 코리스 아우투 에게네토 우데 헨 호 게고넨;
만물을 지었다고 할 때 이 만물 안에는 두가지가 있다. 만물을 지어서 우리를 그 위대한 하늘 나라의 영역 안으로 끌어 들이려는 그 하나님의 자기 비우심.
자기를 비웠다는 것은 대단한 것이다. 동양 철학에서도 '대의' 위대한 뜻이 무엇이냐? 기독교에서도 "온유"가 무엇이냐? 장자의 표현에 의하면 '독수리가 이 땅에 내려 와서 날개를 펴지 않고 날개를 접고 병아리와 함께 걸어가는 것'이다고 했다. 독수리가 한번 보여주고 싶지 않을까? '너희들 한번 볼래?' 팬텀기처럼 날아가고 싶을텐데 '대의'라는 것은 무엇을 할 수 있는데 안하는 것이 괭장히 엄청난 일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 앞에서 만일 네가 유대인의 왕이면 너를 구원해 봐라 할 때 예수님은 하실 수 있었다. 하실 수 있는데 안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그 온유, 아까 말한 우리를 당신이 살고 있던 태초 안으로 초청하기 위해서 대의를 품고 자기를 낮추시고 자기를 비우시고 아주 최 극점의 사랑을 보여 주신 것이다. 이러한 주님의 온유를 이사야 53장에서는 저가 털 깍는 자 앞에서 잠잠했다고 표현했다. 잠잠한 어린 양처럼 아픔에도 불구하고 입을 열지 않는,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시고 십자가를 지기까지 잠잠 하심이 바로 당신을 비우심이다.
그런데 그'계신 분'이 무엇 작업을 하시는가 하면 어딘가 들어와야 될 것이 아닌가? 그래서 만물을 만들고 창조하고, 즉 이 시공이 있고 우리의 육신이 있고 그런 세상을 지으셨다.
이런데 이 세상이 딱 둘로 갈라진다.
C. 실존적 어두움과 어두운 어두움
이것이 기막힌 것이다. 5절에서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두 가지가 있다. 이 빛이 비춰져서 밝아진 그 존재는 더 이상 어두움이 아니다. 그러나 그 빛이 어두움 즉 만물, 세상에 비취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다 할 때 이 두번째 있는 세상은 무엇인가? 온 세상에 빛이 비취되 아직 그 빛을 영접지 아니한 자들은 아직도 세상이다.
우리는 만물에 속해 빛이 비추어진 실존적 어두움이었었지만 그 빛을 깨달았기 때문에 더 이상 세상의 어두움이 아니다. 그래서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는 그 어두움은 처음 어두움이 아니다. 어두움 중에서도 아직 깨닫지 못한 어두움이다. 아까 어두움이 있었지만 깨달은 후에는 어느 영역으로 들어갔는가? 주님 안으로 들어가버린 것이고 더 이상 어두움이 아니다. 더 이상 이 세상이 아닌 것이다.
[요1:10]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결국 어두움은 두가지가 있다.
첫째, 실존적 어두움
이것은 요한복음 설교를 하며 만들어 낸 말이다. 원래 세상 즉 우리의 어두움이다.
두번째, 어두운 어두움
이것은 무감각의 어두움이다. 실존적 어두움 즉 우리의 연약함에 그리스도의 빛이 들어와 연합되어지면 우리는 빛의 세계로 들어간다. 그런데 아직 어두움에 있는데 빛을 비추어도 그 빛을 보지 못하면 이것은 더한 어두움에 빠지는 것이다.
심각한 것은 연약하고 죄를 많이 짓고 죄성을 가진 우리 실존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 우리의 연약함과 죄성을 모르는 것이 심각하다. 소경이기 때문에 심각하기 보다는 네가 본다고 착각하는게 더 심각하다고 하셨다. 소경이 심각한 것이 아니다. 너는 본다고 하지만 너는 보지 못하고 있다. 본다고 여기는 그 어두움이 진짜 소경이다. 내가 알지 못하는데 안다고 여기는 것이 진짜 모르는 것이다.
마음이 가난한데 가난한 것을 모르는 사람은 그 마음이 의로운 사람이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자기가 진짜 연약하고 부족하고 진짜 나에게는 아무 가능성이 없다고 여기는 사람이 진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다. 어떤 사람이 진짜 마음이 가난한가? 나는 모른다고 하는 사람이다.
날마다 갈급하고 그 부족성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오는가? 바로 그 상태를 보고 네게 천국이 임했다고 하는 것이다. 네가 진짜 모르느냐? 그렇게 연약하냐? 그런 네가 사실은 진짜 알고 있는 것이다.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진짜 심각한 것은 안다고 여기는 것이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듣는 자는 복이 있다. 그러면서 나중에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있는것도 빼았기리라. 없는 자는 있는 줄로 여기는 것까지도 빼았기리라. 없는데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없는데 있다고 여기는 것 그것까지 빼앗기리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실존적 어두움이 빛으로 인해서 환해지면 더 이상 어두움이 아니다. 그런데 빛이 어두움에 비췄는데 그 빛을 어두움이 모르면 그것은 더 깊고 심각한 어두움이다.
우리가 너무 어렵게 됐나? 나에게서는 힘이 없을 때 전능하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겨 보자. 이 불가능은 오히려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는 불가능이다. 너무 연약하니까.
우리의 존재적 어두움은 하나님의 빛, 생명을 받아 드리는 그러한 어두움이었을 때 그 어두움은 은혜를 머무르게 하는 강보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어둡다 어둡다 그러지 말고 바로 어두움에 빛을 비추는 하나님의 역사를 기다리게 될 때 우리의 실존적 어두움은 더 이상 우리를 어둠이라 칭하지 아니하고 우리를 그분의 영역으로 합하게 만들어 주는 은혜의 강보가 되는 것이다.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을 지었고 세상이 그로부터 지은 바 되었는데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한다. 그러기 때문에 그는 계속 세상이다. 우리는 그로 말미암아 지어졌고 그분이 나와 함께 계시므로 우리가 그분을 깨달았다. 알았다,연합 하였다, 영접 하였다, 그로부터 낳았다,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지면 우리는 더 이상 세상도 아니요 더 이상 만물 안에 있지도 아니하고 바로 태초와 근본 안으로 우리의 존재가 옮겨지는 것이다.
D. 빛이 내적으로 소유된 사람의 정체성은 비춰진 빛과 동일해진다.
1. 너희가 빛이다
[요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말씀이 들어갔다는 것은 그 안에 생명이 들어갔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빛이라' 할 때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그 빛은 곧 그 사람의 생명이다. 그럴 때 그 사람을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갔다고 한다. 그 말씀 안에 생명이 있고 그 생명이 그 사람 안으로 쏙 들어간 상태를 "사람들의 빛이다"고 한다.
빛에 의해 소유되어지고 연합되어져서 그 안에 들어 가 있다 즉 연합되어졌다 할 때 그 사람을 "빛"이라 한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그러는데 우리가 어떻게 빛이 되는가? 바로 빛을 소유한 자가 될 때 빛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이 말씀을 계속 소유하고, 말씀 (=생명=안에 있는 빛)을 계속 우리의 양식으로 받아 들이면 이 말씀이 "너희들의 빛"에서 "너희가 빛"이 된다. 어두움에 빛이 비췄을 때 그 빛이 내적으로 소유된 사람은 그 사람의 정체성이 바로 그 비춰진 빛과 동일해진다.
2. 내적으로 소유된 빛과 외적으로 비추는 빛
그런데 그 빛이 아직 내적인 빛으로 임하지 않고 외적으로 비치는 빛은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러므로 빛은 두가지가 있다.
사람들의 빛이라 할 때 그 빛은 사람들을 비춰 주는 빛이 있고 사람 안에 속한 빛이 있다.
그럼 우리는 누구인가? 사람들에게 쪼어주던 빛이 우리 안에 소유되어져서 바로 내가 가지고 있는 빛이 되고 연합되어져 내가 바로 그 빛이 되는 것이다. 이 빛이 먼저 어디서부터 들어 와야 하나? 비춰 주어야한다. 그래서 먼저 자기의 연약과 나의 불가능, 나의 실존적 어두움이 고백되어져야 되는 것이다.
그 빛이 어두움에 내리 비춰야지 빛이 빛에 내리 비추면 아무 소용이 없다. 이 방 안에 형광등 하나 더 켠다고 달라질 것이 없는 것이다. 다 깜깜한 상황에서 빛이 켜지면 어둠이 없어지고 어두움에 빛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3. 인자의 날, 그 날, 오늘 날
그러면 나에게 비쳐지는 빛을 내가 소유할 수 있는 방도는 무엇인가? 철저히 어두움에 처해야 한다. 철저히 어두워져야 한다. 이것을 성경이 무어라 하는가? 자기 부인이라 한다. 그래서 이 빛이 자기를 철저히 부인하는 자, 자기의 어두움을 철저하게 아는 자들에게 비쳤을 때 그 어두운 자가 빛으로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어두움이 아니다' 라고 하면 그 빛은 더 이상 빛이 아니라 그 사람은 계속 알지 못한다.
누가복음에 이런 말이 있다 "인자의 날에는 동쪽에서 번쩍, 서쪽에서 번쩍 번개치듯이.." 우리는 여기 저기서 기근이 나고 여기 저기서 번개가 치고 그런 생각을 한다. 이 '번쩍'이 무엇이겠는가? 인자의 날, 우리가 말하는 그 날이 무엇인지 아는가? 빛이 역사하는 날이다. 거기에 빛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빛이 역사하던 날이 언제부터인가? 이미 요한복음 1장부터 있었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는 날, 인자의 날 이 요한 복음 1장에도 이미 있었다.
우리는 그 날이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언제든지 실존적 어두움에 빛이 비춰지는 날, 그날이 바로 그 사람에게는 인자의 날이 되는 것이고 바로 그날이 오늘이라는 것이다.
진짜 하나님께서 사랑을 주신다 라는 것이 무엇인가? 그 사랑이 무엇인가? 태초를 우리에게 소개해 주시고 태초 안에서 우리를 영접해 주시려는 그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가 바로 무엇인가? 다름 아닌 말씀의 역사이다.
오늘 이 말씀으로 빛이 되어 여러분의 머리가 번개를 맞아야 된다. 빛이 되어서 번쩍 번쩍 해야 된다. 그 날이 바로 이 날이고 그 날이 바로 오늘날이다. 이 날이야 말로 오늘날 인자의 날에 지금 여기 저기서 빛이 번쩍 번쩍 거리는 것이다. 이 날에 어떤 일이 일어 나는가? 이 세상 안에 있던 자가 태초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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