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3일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마태오 15,21-28
가나안 여인에게 자존심과 욕심이 없는 이유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제4화’에서는 세 형제가 재산 상속 때문에 재판을 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우영우 변호사의 절친인 동그라미의 아버지가 형들에게 속아서 100억 상속 중 20%만 받기로 했는데 상속세까지 내게 되어서 오히려 2억 정도를 더 세금으로 물어야 하는 상황입니다.
우영우는 동그라미 아버지가 도장을 찍었다던 각서를 보고 기망행위로 계약이 취소될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설명해줍니다.
그런 법은 이미 사라졌는데, 속여서 도장을 찍게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동동삼의 큰형이 상속법에 대해 거짓말을 했으며 동동삼이 평소 형들을 어려워했다는 점을 가지고 사기 및 강박에 의한 의사표시였음을 주장하려 하나 증거가 없었고 형제들의 대화를 엿들었던 유일한 증인인 이장은 동동삼의 형들에게 매수되어 법정에서 거짓 진술합니다.
피고의 기망행위를 입증할 수 없어 난항을 겪던 중 동그라미의 “그놈의 증거, 내가 만들 수도 없고!”라는 말에 힌트를 얻어 사건을 해결할 방법을 떠올립니다.
민법 제556조, 증여 계약 기간 중에 증여자에게 범죄행위가 일어났을 때는 증여 계약이 해제될 수 있다는 법조를 따라 동그라미와 동동삼이 형제의 자택에 가서 어그로를 끌어 폭행을 유도함으로써, 폭행 관련 진단서나 자료를 제출해 사건을 해결시키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피고 측 변호사가 “아, 잠깐만요! 혹시, 증여 해지를 노리고 폭행을 유도한 것은 아닙니까?”라고 말하지만, 우영우는 “그렇다는 증거 있습니까?”라고 일격을 날리며 사건을 해결합니다.
동동삼은 왜 형들의 강압에 못 이겨 도장을 찍어주었을까요? 동생으로 인정받기 위해서였습니다.
형들은 왜 더 많은 재산을 가지려 했을까요? 부모의 자녀로 인정받기 위해서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람들이 돈이 좋아서 더 가지려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살기 힘든 사람들이 더 돈에 대해 욕심을 내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부모의 상속 재산이 많아질수록 형제간의 싸움이 더 커집니다.
변호사들이 말하길 유산 30억이 넘으면 자녀는 반드시 싸운다고 합니다.
이건 그럴 재산이 없으면 굶어 죽기 때문이 아닙니다.
부모의 자녀가 될 자격이 있다고 스스로 믿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믿음이 있다면 어떨까요? 자격이 있다고 믿는 것일까요, 아니면 욕심 때문일까요?
욕심 때문입니다. 자격이 있다고 믿으면 욕심내지 않습니다.
욕심은 그럴 자격이 있다는 믿음을 가지려는 마음입니다.
이미 자격이 있다고 믿으면 욕심이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받으면 그럴 자격이 있기에 받는다고 생각하고 못 받으면 자신은 그럴 자격이라고 믿습니다.
욕심은 왜 생기는가? 돈 때문에? 천만에. 재산 싸움이 일어나는 경우는 유산이 많을 경우.
특별히 30억이 넘으면 반드시 싸움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결국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부모가 주는 재산에는 부모의 인정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재산을 통해 자녀가 될 자격이 있음을 인정받으려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하는 한 가지는 ‘인정받고 싶은 마음’입니다.
이것만 해결되면 자존심도 욕심도 낼 필요가 없습니다.
에덴동산에서 뱀은 아담과 하와에게 하느님께 인정받지 못했다고 믿게 합니다.
그래서 선악과에 욕심을 냄으로써, 또 상대를 심판함으로써 자신 스스로의 자존감을 키우려 합니다.
반면 믿음이 있었다면 자존심을 세우거나 욕심을 부릴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가나안 여인은 그런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은 자녀 취급하시며 그녀를 개 취급하여도 그녀는 기분 나빠하지 않습니다.
자기는 자녀들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음식 찌꺼기를 먹어도 괜찮다고 말합니다.
다만 딸을 악령에서만 구해달라고 합니다. 욕심도 없고 자존심도 없습니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이미 하느님께서 자신을 인정해주신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이 자존심을 세울 일도 욕심을 낼 일도 없게 합니다.
일본 강점기에 평안도 신천에 유명한 깡패가 있었습니다. 김익두입니다.
사람들은 김익두를 만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할 정도였습니다.
그런 김익두가 예수님을 믿고 지역 주민들에게 부고장을 돌렸습니다.
“김익두는 죽었다.”
사람들이 좋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매일 동네를 다니면서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합니다.
많은 사람이 말합니다.
“아, 저 사람은 얼마 전에 깡패였는데.” 그러면,
“옛날 김익두는 죽었습니다. 예수 믿으세요”하고 다녔습니다.
한 번은 부엌에서 설거지하던 아주머니가 김익두 목사를 시험합니다.
문 앞에 와서 “예수 믿으세요” 할 때, 설거지물을 얼굴에 확 뿌려버렸습니다.
“죽었나 살았나 보자.”
김익두 목사는 빙그레 웃으면서 말합니다.
“내가 죽었으니 당신이 살았지, 내가 만일 살았으면 당신은 벌써 죽었을 것이오.”
믿음은 우리 자신을 죽입니다.
믿음이 없으니 자존심도 살고 욕심도 생기는 것입니다.
김익두는 돈을 좋아하고 술을 좋아하고 폭력을 좋아하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믿음이 생기고 나서 길에서 저러한 모욕당해도 기분 나빠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가나안 여인의 믿음과 같습니다.
가나안 개라는 말을 듣고도 감정이 상하지 않았던 이유는 자아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가나안 여인이 발끈하여, “아무리 그래도 당신이 창조하신 백성을 ‘개’로 비유하시는 것은 좀 아니죠?” 라고 말했다면 그 여인의 믿음은 거기까지였을 것입니다.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을 믿었기에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이해되지 못 하는 행동과 말까지도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부모에게 인정받지 못해 생기는 자존심과 욕심은 하느님께 인정받아야만 사라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8월3일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마태오 15,21-28
겸손한 사람에게만 하느님 풍요로운 은총이 폭포수처럼 내릴 것입니다!
오늘따라 예수님의 태도는 꽤나 의아합니다.
청하지도 않았는데도 알아서 척척 치유해주시던 예수님이셨습니다.
때로 이방인, 유다인 가리지 않고 즉석에서 순식간에 소원을 들어주시던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많이 다르십니다.
마귀들린 딸로 인해 절박한 처지에 놓인 가나안 부인에게 던지는 말씀도 꽤나 굴욕적입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좋지 않다.”
그 순간 제가 그 여인이었다면 정말 빈정 상했을 것입니다.
아마 저같았으면 이렇게 투덜거렸을 것입니다.
‘아니, 이거 너무한 거 아냐?
사랑과 친절, 자비와 온유의 예수님이라면서 어떻게 그런 모욕적인 말씀을 하실 수 있지?
그럼 내가 강아지보다 못한 존재란 말인가?
그래 우리 딸 상태가 정말 위중하지만 이런 수모까지 받아가면서...난 못해!’
그러나 가나안 여인은 다릅니다.
마지막 배수진을 쳤던지, 단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습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도에 지나치는 굴욕적인 발언에도 눈 하나 꿈적하지 않고 또 한 번 크게 자신을 낮춥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여인의 딸을 향한 지극한 사랑, 겸손한 자세, 예수님께서는 반드시 자신의 소원을 들어주실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이 결국 기적을 불러오게 됩니다.
가끔씩 사람을 키우는 큰 스승님들의 제자 교육방식을 눈여겨봅니다.
때로 칭찬도 필요합니다.
당근과 격려도 필요합니다.
용기와 자신감을 불어넣어주는 위로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때로 더 큰 성장, 더 큰 도약을 위해, 더 큰 완성을 위해 뼈를 깎는 노력을 해보라는 차원에서의 자극, 채찍질도 필요한 것입니다.
더 큰 사람이 되라, 스승인 나를 넘어서라는 의미에서 혹독한 과정도 의도적으로 거치게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비슷한 마음이 아니셨을까요?
여인에게 더 큰 믿음을 주시기 위해 자극을 주신 것입니다.
더 크게 한 걸음 나아가라고 살짝 튕긴 것입니다.
딸의 치유는 사실 그녀가 얻은 것 가운데 작은 선물이었습니다.
더 큰 선물, 더 큰 깨달음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 이 세상에서의 일회적인 치유와 회복뿐이 아니라 영원한 치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구세주 하느님임을 믿게 된 것입니다.
비록 짧은 순간이었지만 여인의 내면 안에서는 큰 도약과 성장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육체의 치유자를 넘어 영혼의 치유자란 사실을 굳게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주인임을 넘어 또 다른 세상의 주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기적을 불러오기 위해서는 강한 확신뿐만 아니라 철저한 겸손의 덕이 요구됩니다.
겸손은 무엇입니까?
나 자신의 처지를 아는 것입니다.
나 자신의 나약함, 나 자신의 한계, 나 자신의 무능함, 나 자신의 무기력함, 죄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비참함을 솔직히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런 부족한 나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것이 겸손입니다.
결국 내가 최종적으로 의지할 곳, 마지막으로 매달릴 곳은 하느님뿐이라는 진리를 확신하고
그분께로 나아가는 것이 겸손입니다.
겸손한 사람에게만 신앙의 진리가 명백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에게만 하느님 풍요로운 은총이 폭포수처럼 내릴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랑 믿음 희망>
2022. 08. 03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마태오 15,21-28 (가나안 여자의 믿음)
그때에 예수님께서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셨다. 그런데 그 고장에서 어떤 가나안 부인이 나와,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제자들이 다가와 말하였다.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그제야 예수님께서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러나 그 여자는 예수님께 와 엎드려 절하며,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사랑 믿음 희망>
살리고픈
이를 향한
사랑
살리시는
분을 향한
믿음
사랑과 믿음이
하나 되는
희망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