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뚜라미 웃음소리에
노병철
“귀뚜라미 울음소리에 가슴 깊이 파고드는데” 갑자기 귀뚜라미 울음소리에 살짝 감성적으로 된 모양이다. 이 노래를 아직 기억하고 있는 걸 보니 노래로 인한 어떤 가슴 아픈 사연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귀뚜라미랑 같이 울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만드니 말이다. “나 이렇게도 슬픈 노래를 간직할 줄 몰랐어요.” 혼자 흥얼거리며 가슴 아프게 헤어진 옛 여인을 그려 본다. 하지만 이내 생각을 접었다. 기억나지 않는다. 너무 많다.
귀뚜라미 울음소리는 수컷이 암컷을 유혹하기 위해 내는 소리란다. 이래서 ‘우는 소리’가 아니라 ‘웃는 소리’라고 표현해야 맞지 않나 싶다. 암컷은 소리 내지 못한다. 아니, 내지 않는다. 누구랑 짝짓기해야 할지 만연의 웃음기를 머금은 채 주판을 튕긴다. 수놈 귀뚜라미는 목청 높여 입으로 울부짖는 것도 아니고 얍삽하게 겨드랑이로 뽁뽁 거리며 낸단다. 매미나 별반 다를 게 없다. 이 소리로 성적 매력을 한껏 뽐내며 암컷을 꼬드긴다는 이야기인데 여기에 말려드는 암컷 수준이 의심스럽다. 말똥구리처럼 엄청난 먹이를 가져와 꼬시는 것도 아니고 기껏 겨드랑이 날개 비비는 소리에 눈이 돌아간다니 어찌 한심하다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주로 밤이나 새벽에 귀뚜라미 소리를 듣게 된다. 낮부터 사랑을 나눌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밤이나 새벽에 대기의 온도가 낮아져 소리 전달이 쉽고 다른 포식자 눈을 피한다는 곤충학자의 가설은 가설일 뿐 그 누구도 귀뚜라미에게 물어보지 않았을 것이다. 귀뚜라미도 교양이란 게 있고 나름 도덕성을 갖추고 산다고는 생각지는 않는가. 인간의 상식으로만 해석할 일은 아니다. 낮에 모텔 엘리베이터에서 서로 모르는 남녀가 어색한 표정으로 있는 걸 상상해 본다. 얼마나 쪽팔리겠는가. 미물인 귀뚜라미도 알 껀 안다. 난 아직 모텔 ‘대실’이 ‘큰방’으로 알고 있는 순진한 사람이라 경험에서 나오는 이야기라는 근거 없는 추측은 삼갔으면 싶다.
중국에서는 귀뚜라미를 키우는 집이 많다고 한다. 귀뚜라미의 발정 소리가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일본에선 우리나라처럼 인생의 허무함과 쓸쓸함을 느끼는 곤충 소리로 인식하고 있다. 별로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그 옛날 학창 시절에 배운 셰익스피어의 ‘맥베스’가 생각난다. 던컨 왕이 살해된 직후 맥베스 부인이 “I heard the owl scream and the crickets cry.”라고 말한다. 귀뚜라미 소리가 올빼미와 함께 불길한 밤의 소리로 인식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두보의 ‘촉직'이란 시를 보면 "귀뚜라미는 무척 작은데 슬픈 소리는 어찌 그리도 사람을 뒤흔드는가"라는 구절이 나온다. 며칠 동안 암컷을 만나지 못한 수컷 귀뚜라미의 절규였으리라. 결론은 귀뚜라미는 울지도 않고 웃지도 않는다는 이야기다.
’인간만이 웃을 수 있다.‘라는 명제 아래 모든 미물의 소리는 ’울다‘가 되어 버린다. 그래서 남자들은 가을을 ’슬픈 계절‘로 확정 짓고, 나 이렇게도 슬픈 노래를 여태껏 간직할 줄 몰랐다면서 바바리 옷깃을 올리며 폼 잡을 준비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천고마비의 계절. 하늘은 높고 말만 살찐다는데 어째 인간인 내배는 꺼질 줄 모른다. 정말 울고 싶다. 맞는 바바리 한 벌이 없다. “남기고 간 뒹구는 낙엽에 난 그만 울어버렸네”
제목을 정정한다. 배 나온 귀뚜라미는 웃는 게 아니라 우는 것이 맞다.
첫댓글 슬픈 계절에 우리 만나요.
강촌사람들이 불렀지요?
오랫동안 잊고 있었는데
오늘은 진종일 이노래 들어야겠네요.
재미와 일반상식을 알게 해 주신 글을
읽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상식이 부족하거든요. 누굴 기다리다
짬 나서 읽었는데 기대에 늘 부응해 주시니 감사합니더. 또 써 주시소.
귀뚜라미가 귀뚜라미가 된 것은 그 내는 울음소리를 듣고 있으면 귀를 꿇는 정도로 영혼이 맑아지기 때문에 귀뚜라미가 된 것인데, 가을이 깊어 가니 저절로 영혼이 맑아져서 저 먼 첫사랑까지 생각나는가 봅니다. 다 망가진 몸매로 바라리코트 입어봐도 낭만이 살아날리가 없으니 더 슬프기도 하겠지만, 그래도 혹시 압니까 눈 먼 귀뚜라미가 있을지. 이태리의 유명한 성악가들을 보면 전부 배 나온 풍체 좋은 귀뚤이들 뿐이던데 이 가을에 한 곡조 쫙 뽑아 보시지요~^^ 좀 있으면 가을이 오지 않아도 귀에서 귀뚤이 소리가 들릴 것입니다. 귀를 뚫어서 영혼 저 깊은 곳 까지 소리를 전하려는 신이 예비한 길이니 놀라시지 말고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진짜 가을의 정취를 푹 느끼실 것입니다. 구양수의 <추성부> 처럼~
“이게 무슨 소리냐.”
“별과 달이 밝게 빛나고 하늘엔 은하수가 걸려 있으며 사방에는 인적이 없으니 그 소리는 나무 사이에서 나고 있습니다.”
“아 슬프도다. 이것은 가을의 소리구나.”
하찮은 잡글에 이렇게 고매한 댓글까지 달아주시니 그 황송함에 몸 둘바를 모르겠습니다. 구양수가 지은 ‘가을 소리 수필(秋聲賦)’까지 인용해 주시니 실로 감탄할 노릇입니다.
이 그림이 김홍도가 그린' 추성부도'라는 그림입니다. 보물이지요. 이그림을 부채에 한번 옮겨볼까하고 노력 중입니다. 잘될지 모르겠지만....ㅎ
기대하겠습니다.^^
유당 선생님 귀뚜라미에 대한 글 어찌 이리도 잘 쓰셨단 말입니까?
우리 집 마당에는 말복이 채 다가오기도 전 부터 울어 댑니다만
귀뚤이가 암컷을 유혹하기 위에 우는 게 아니고 웃을 지도 모른다는 기발한 상상력이 저를 놀라게 합니다.
오늘 저녁 뿌터 울어재끼는 귀뚤이에게 동정은 하지 않겠습니다.
어여 암컷을 만나 짝짓기 하라고 정안수 떠 놓고 기도 하리니~~~^*^
참 괜찮은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