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2017년 가해 8월6일 주일 [(백)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수도회] 고난을 겪고 불의에 저항하며 찾는 기쁨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다니 7,9-10.13-14
○ 제2독서 2베드 1,16-19
† 복음 마태 17,1-9
◈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실
때,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꼭 붙들고 말하였습니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마태 16,22).
실망하는 제자들의 마음을 알아챈 예수님께서는, 세상 창조 이전에
갖고 계신 당신의 영광을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타볼 산에 올라 기도하시자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변화하였습니다. 다니엘은 하느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에 대해, “그분의 옷은 눈처럼 희고, 머리카락은
깨끗한 양털 같았다.”고 증언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며
구약의 율법과 예언을 완성하시는 분이심을 모세와 엘리야도
증언합니다. 빛나는 구름 사이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증언은 예수님의 신원을 결정적으로 확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에서 내려오실 때 세 명의 제자들에게 당신의 부활
때까지, ‘거룩한 변모’에 대해 함구령을 내리십니다. 그만큼 주님의
거룩한 변모는 신비한 사건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권능과
재림을 신자들에게 주지시키면서, “그 거룩한 산에 그분과 함께
있으면서, 하늘에서 들려온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 하고 목격담을
전해 줍니다.
우리는 고통과 희생 없이 영광만을 바라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은 주님의 십자가를 충실히
따를 때 우리가 받는 영광에 대해 알려 줍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내려다 보는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2017년 가해 8월6일 주일.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제1독서
<그분의 옷은 눈처럼 희었다.>
○ 다니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7,9-10.13-14
제2독서
<우리도 하늘에서 들려온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
○ 베드로 2서의 말씀입니다. 1,16-19
복음
<예수님의 얼굴은 해처럼 빛났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7,1-9
아침에 양말을 신을 때면 가끔 “감사합니다.”라는 기도가 절로
나옵니다. 왜냐하면 예전의 기억이 하나 떠올려지기 때문이지요.
벌써 20년 전의 일이네요. 당시에는 신학생이었는데, 학교에서
테니스를 치다가 갑자기 허리의 큰 통증을 느끼면서
주저앉았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허리를 조금도 움직이기가
힘들었습니다. 심지어 양말도 혼자 신을 수가 없어서 같은 방을
쓰는 동창신부가 허리가 나을 때까지 양말을 직접 신겨주었습니다.
스스로 양말을 신을 수만 있어도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양말을 신을 때, 그때의 기억이 나면서
저절로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려다 볼 때, 그제야 비로소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를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올려다
보려고만 하지요. 즉, 더 많은 것을 가져야 하고, 더 높은 지위에
올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결과 늘 충분하지 않다고 말하지요.
특히 성공에 집착하는 사회이다 보니 평균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는
절대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평균을 유지하는 것만 해도 전
세계 인구를 생각해보면 정말로 대단한 것이 아닐까요?
하루에 1,500원 이하로 살아가는 사람이 30억이 넘는다고 합니다.
지상에서 맑은 물을 구경조차 못하는 사람이 7억 8,300명에
달합니다. 그래도 잘 산다고 하는 미국에서만도 대도시의
길거리에서 추위와 싸워야 하는 노숙자가 75만 명에 가깝습니다.
어떻습니까? 이렇게 내려다보면 분명히 내 자신이 행복한 존재라는
사실, 그래서 감사할 이유가 생기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일을 기리는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입니다. 주님의 영광스러운
모습과 함께 그 옆에 있는 모세와 엘리야를 본 제자 중의 대표격인
베드로는 그 자리가 너무나 좋았나 봅니다. 하긴 당시의
전교여행으로 무척이나 피곤했겠지요. 더군다나 예수님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기에 이에 따른 스트레스도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복잡한 세상을 뒤로 하고 영광스러운 그 자리에
계속 머물고 싶어서, 초막 셋을 짓겠다는 말을 합니다.
이렇게 영광스러운 자리에만 머물려는 제자들을 향해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라는 소리가 들립니다. 주님의 말씀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사람들을 향한 사랑의 말씀이었습니다. 올려다보는
사랑이 아닌, 내려다보는 사랑이었습니다.
내려다보는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비로소 주님의 거룩한 변모의
영광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즉, 어렵고 힘들어하는 나의 이웃에게서
주님의 거룩한 변모를 보게 될 것입니다.
사랑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을 나열해 보십시오. 당신은 아무것도
쓰지 못한 텅 빈 공간만을 발견할 것입니다(앨런 코헨).
주님의 거룩한 변모 성당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
공부하려고 파견된 수녀님께서 학위를 받기로 한 날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죽음의 순간, 수녀님께서는 원장
수녀님께 물었습니다.
“왜 이토록 빨리 예수님께서 저를 부르시죠?”
원장 수녀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수녀님의 일이 아니라 수녀님을 바라십니다.”
이 말씀을 들은 수녀님께서는 행복한 표정을 지으면서 눈을
감으셨다고 합니다.
죽는 순간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가가 아니라, 그
일에 얼마나 많은 사랑을 쏟았는가에 따라 심판받게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많은 일 자체에만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세상의 많은 일에 신경 쓰기보다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뜻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어떤 상황에서도 기쁨과 감사의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 성당의 지하 성당.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고난을 겪고 불의에 저항하며 찾는 기쁨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가해 8월6일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마태 17,1-9
“예수님의 얼굴은 해처럼 빛났다.”(마태 17,2)
고난을 겪고 불의에 저항하며 찾는 기쁨
예수님께서는 수난과 부활을 처음으로 예고하며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16,24) 당신을 따르라 하십니다. 그리고는 엿새
뒤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 따로 데리고, 계시의
장소인 높은 산에 오르십니다(17,1). 예수님께서는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습니다(17,2).
그분께서는 ‘육’을 따르는 종의 모습이 아니라 참된 신성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산 아래서는 십자가를 지고 수난에
참여하는 길을 가르치시고 보여주셨지요. 이제 예수님께서는 산
위로 올라간 이들 앞에서 죽음을 이기고 드러날 영광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십니다.
주님께서 산 위에서,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은”(로마 3,12) 빛의 자녀들에게, 의로움의 태양을 비추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영광스럽게 변했다는 것은 그분의
지상에서의 삶이 ‘아버지의 영광’에 초점을 맞추었음을 말해줍니다.
그분께서는 겪게 될 수난과 죽음을 받아들이고 불의에
저항하심으로써 신성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하느님을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는 모세와 엘리야의 등장은
예수님의 변모를 절정으로 이끕니다. 그들은 수난과 십자의 죽음에
대해 예수님과 얘기를 나눔으로써 예수님에게서 그들의 옛 사명이
완수됨을 증거합니다. 곧 하느님과 백성들을 위해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있던 그들의 등장은 예수님께서 율법과 예언을
완성하시는 분이심을 암시합니다.
이 환시를 본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씀드립니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마태 17,4) 그들은 세상의 것들을 역겨워하며 주님의 영광 안에서
영원한 것을 누리기를 바란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17,5) 하는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 몹시
두려워합니다(17,6). 그들은 “두려워하지 마라." 하시는 예수님의
소리를 듣고 두려움에서 해방되어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할 준비를
마칩니다. 그렇게 그들은 산에서 내려옵니다.
주님의 변모는 제자들에게 드러내신 그분의 사랑의 표지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힘겹고 고통스러우며 불의한 세상의 바다를
헤엄치고 있는 나에게 부활의 영광과 기쁨이 기다리는 저 산 위로
올라가자고 초대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도 '지금 여기서' 참 기쁨과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영광의 주님을 알아봐야겠습니다.
또한 주님의 거룩한 변모는 영원한 생명, 곧 부활의 표지입니다. 이
사건은 산 아래 일상의 삶에서 십자가의 의로움을 받아들이고,
불의에 저항하지 않고는 산 위의 변모된 주님을 만날 수 없음을
가르쳐줍니다. 산위로 올라가는 길은 험하고 가파르지요. 그러나
오르지 않고는 수난과 저항 끝에 주어지는 아버지의 영광을 볼 수
없음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의로움을 받아들이며, 불의와 불공평한 세상에
저항할 수 있도록 위로와 힘을 주십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 주님의
손을 잡고 두려움 없이 산 아래, 내 삶의 자리로 내려가야겠습니다.
불의에 저항하고 고통에 신음하는 순간마다 주님께서 함께 해주실
것입니다. 하여 골치 아픈 현세에서 도피하여 십자가의 의로움을
외면하지 말아야겠지요. 그제야 예수님의 신성을 만나는 행복에
이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마태 17, 2)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가해 8월6일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마태 17, 2)
끝내 우리또한 하느님께로 돌아갈 것입니다.
산중의 달빛이 참 곱습니다.
피었다가 사라지고 또 피어나는 꽃처럼 변모또한
우리가운데서 일어나고 있는 아름다운 삶의 신비입니다.
소녀는 어머니가 되고 어머니는 할머니가 되어있습니다.
예수님의 변모는 예수님의 일생인 탄생과 성장
십자가와 무덤 부활을 모두 포함하고 있습니다.
또한 조약돌이 모래가 되고 끝내 바다와 하나되듯
변모는 일치입니다.
그래서 변모는 나눔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모두 우리에게 나누어주십니다.
죽지 않고서는 결코 거룩한 변모를 맞이할 수 없습니다.
거룩한 변모는 아버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아름다운 부활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안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변모를 통해 우리자신을 다시 보는
은총의 시간되시길 기도드립니다.
거룩한 변모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를 향한 그 사랑을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제자들은 그분의 사랑을 체험한 것입니다.
그 사랑이 모두를 빛나게 만듭니다.
하느님 사랑으로 돌아가는 은총의 주일 되십시오.
우리의 본모습을 되찾으십시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수원] 그리스도인의 매력 / 전삼용 요셉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가해 8월6일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제1독서 : 다니엘 예언서 7,9-10.13-14
제2독서 : 베드로 2서 1,16-19
복 음 : 마태오 17,1-9
유학하면서 몸이 썩지 않는 여러 성인들을 직접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먼저 란치아노에 가면 예수님의 성체와 성혈이 1,200년이 지나도
썩지 않고 있고, 로마 바티칸 베드로 대성당엔 요한 23세의 시신이
50년 전 돌아가실 때의 모습 그대로 전시되어 있으며, 시에나의
카타리나 성녀는 몸은 로마에 머리는 시에나에 전시되어있고,
파도바의 안토니오 성인은 워낙 설교를 잘 하셔서 몸이 다 썩었는데
혀와 성대만 썩지 않아 전시되어 있고, 베네치아에 가면 루치아
성녀가 유리관에 모셔져 있습니다. 이 외에도 몸이 썩지 않는
성인들이 수 없이 많습니다. 이들은 죽어서도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시는 분들입니다.
그 중에도 가장 놀라웠던 것은 아씨시 옆에 있는 몬떼팔코란
산동네에 모셔져있는 사람들에게 잊혀진 십자가의 글라라
성녀입니다.
저의 친구 신부가 거기에 다녀오더니 저에게 “성녀 심장에서
십자가가 나왔어!”하는 것입니다. 저는 심장에서 뭔 십자가가
나오냐고 의아해 했지만 보고나서 그 친구의 말이 사실이었음을
알았습니다.
심장에서 다른 십자가가 나온 것이 아니라 심장 근육이 뭉쳐져서
예수님 못 박히신 모습 그대로 십자가가 만들어졌습니다. 그
십자가를 자세히 보면 예수님의 형체까지 자세하게 보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수난하셨던 도구들 즉, 매 맞으실 때
묶이셨던 기둥, 가시관, 채찍, 해면, 못 등이 심장에 새겨진
것입니다. 그리고 심장 안에서는 삼위일체를 상징하는 같은 모양과
무게의 세 개의 돌이 나왔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다른 성인들은 수백 년 지나면 물이 빠져나가고
몸이 굳어 옷을 갈아입힐 때 아래에 천을 놓고 위에 덮어서 중간을
꿰매는 방법을 쓰는데, 이 성녀는 800년이 지난 지금도 옷을 입힐
때 산 사람처럼 앉혀놓고 몸을 이리저리 굽혀가며 직접 옷을
입힌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몸이 잘 썩어야 후손이 잘된다는 말이 있는데, 왜
어떤 성인들은 저렇게 몸이 썩지 않는 것일까요?
몸이 썩게 된 것은 인간의 죄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하느님께서 “너는 흙에서 났으니 흙으로 돌아가라. 땅도 너 때문에
저주를 받을 것이다.”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몸은 흙에서 왔고 흙으로 돌아갑니다. 인간이 영혼과
육신으로 이루어졌다면 영혼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이고 육신은
부모로부터 물려받는 것입니다.
영혼이 하느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에 영혼이 육체 안으로 들어 올
때는 죄 없이 깨끗한 상태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부정한 것이 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육체는 부모의 육체를 반반씩 물려받기
때문에 부모의 죄가 아이의 육체를 통하여 옮겨집니다. 이것이
원죄입니다.
성모님이 원죄가 없으셔야 했던 이유, 또 동정이셔야 하는 이유는
죄에 물들지 않은 깨끗한 육체를 아들에게 물려주어 흠 없는
희생제물이 되게 하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원죄가 없는
성모님과 예수님의 육체는 죄 때문에 받을 썩어 없어질 운명을
지니지 않았고 그래서 두 분은 당신의 깨끗한 육체를 지니고
하늘나라에서 사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 분들이
승천하셨어야 하는 당연한 이유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랑하면 서로
닮는 것처럼 성인들은 그리스도의 육체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썩지 않는 성인들이라도 그 육체를 지니고는
하늘나라에서 사실 수 없습니다. 그 몸 안에 원죄의 뿌리가
남아있고 그래서 아주 천천히 썩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죄로
물든 영혼을 정화하니 육체까지도 정화 되어 썩는 것이 아주 더딘
것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타볼산에서 당신의 본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예수님은 본래,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말씀이시고
빛이십니다. 당신 빛을 인간의 육체 안에 감추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베드로가 두려워 이상한 말을 한 것처럼 어떤 인간도
그 분의 빛을 감당해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 안에서도 빛이 너무 강한 전구는 불투명한 유리나 종이
등으로 가려 사람의 눈을 보호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 때
언 듯 불투명한 유리나 종이가 빛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은
그 안에 더 밝은 빛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옷이 어떤 마전장이도 희게 할 수 없을
정도로 빛났다고 합니다. 사실 사람이 만든 옷이 빛날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 내면이 빛나니 밖에 자신을 가리고 있는
것까지 빛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옷은 인간의 영혼을
가리고 있는 육체를 상징합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예수님 안에 계시는 성령님께서 예수님을 빛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까지도 그 안에 아버지의 성령님을 모시고
있지 않으면 껍데기에 불과하게 됩니다.
저만 그런지 모르겠지만 화장을 하고 잘 꾸미고 다닐 때보다도
수녀님이 되어 수도복을 입고 화장을 하지 않은 얼굴이 더 예뻐
보입니다. 그 이유는 그 안에 성령의 빛을 더 포함하게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수도자라고 하여 극기의 삶을 살고 속세를 떠났다는 의미로
일부러 정돈되지 않은 모습을 보이려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누가 예수님과 성모님을 보면서 아름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님을 당신이 선택한 세 제자들에게 당신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시고 당신이 죽었다가 다시 부활할 때까지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
마음속에서 당신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십자가의 뭉개진 모습
속에서도 찾을 수 있기를 희망하셨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가장 처참하게 달려계신 십자가 사형 틀을 성당마다 중앙
높은 곳에 걸어놓고 그 모습을 바라보며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그
모습이 타볼산에서 보여주었던 영광스러운 모습과 실제적으로는
같은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지 않으면
누구도 타볼산의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하늘나라로 승천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성인들은 자신들을 죽이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랐기 때문에 죽어서도 그리스도처럼 몸이
썩지 않고 아름다운 향기를 풍기를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자아를 못 박는 것이 성령님께서 들어와 사실 공간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그렇게 뭉개진 그리스도에게 다시 영광스러운
육체를 돌려주셨고 예수님은 그 육체로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사시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매력은 바로 우리 안에 머무시는 성령님에 의해
발산되게 해야 합니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서 지나치게 꾸미지
않아도 우리 겉모습을 호감스럽게 변화시키십니다. 그리고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 사람을 보며 교회에 끌리게 됩니다. 그저 믿는
사람의 겉모습만이라도 선교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변화되신 것이, 당신 십자가 죽음과
연관이 있듯이, 함께 나타난 모세와 엘리야도 자신을 죽이는
십자가의 삶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영광스럽게 한 인물들입니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 그 모습을 지니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교구 영성관 관장 전삼용 요셉신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