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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턴 1세
최근 수정 시각: 2024-09-24 20:11:08
1818년 출생1880년 사망루이셤 출신 인물영국계 미국인유대계 미국인미국의 인물더 보기
노턴 1세
Norton I
노턴 1세
통칭
노턴 1세 (Norton I)
출생
1818년 2월 4일
영국 잉글랜드 켄트 뎃퍼드(Deptford)[1]
사망
1880년 1월 8일 (향년 61세)
미국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
종교
기독교
신장
180cm
1. 개요
2. 칭호
3. 생애
3.1. '즉위' 전
3.2. '즉위'
3.3. '재위' 동안의 행보
3.4. 사망
4. 평가
5. 인기의 이유
5.1. 풍자적 마스코트
5.2. 샌프란시스코의 홍보대사
6. 대중 매체에서의 묘사
7.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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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노턴 1세(Norton I), 본명 조슈아 에이브러햄 노턴(Joshua Abraham Norton)은 런던 출생의 영국계 미국인이다. 19세기 중반 골드 러시 열풍으로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였으나, 여러가지 사업 불행과 고초[2]를 겪으면서 정신적으로 매우 쇠약해져 광인이 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후 자신을 '노턴 1세'라 칭하고 다니면서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다.
그는 '자신이 미합중국의 황제이자, 멕시코 공화국의 수호자'라고 주장하며, 그에 걸맞은 기행을 보이면서 살았다. 다만 이러한 기행에는 나름대로 품격이 있어 그가 거주했던 샌프란시스코 시민들의 사랑을 받으며 유명해졌고, 나중에는 시 정부와 의회에서도 이를 인지하여 샌프란시스코 전체의 마스코트가 되었다. 오늘날에도 샌프란시스코에서는 그의 행적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그를 기리고 있다.
2. 칭호[편집]
그는 자신을 '노턴 1세(Norton I)' 라고 불렀는데, 사실 영미권의 군주제 칭호로서는 올바른 작명이라 할 수 없었다. 관습에 따라 올바르게 작명했다면 조슈아 내지는 에이브러햄 황제 같은 것이 되었어야 했다. 통상적인 방법에 따라 엄격하게 이 칭호를 분석한다면 다음 두 가지의 실수가 있다.
영미권에서 군주의 칭호를 정하는 관습을 따르자면, 우선 성씨가 아닌 본인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옳다. 예를 들어 2022년에 즉위한 영국의 국왕이 윈저 5세가 아니라 찰스 3세라고 불리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3]
또한 영미권에서는 후대에 동일한 이름으로 즉위한 군주가 있어야 전임자의 이름에 1세가 붙기 때문에, 저 혼자 왕조를 개창한 그에게 '1세'라는 대수가 붙는 것도 올바르지 않다. 예를 들어 빅토리아 여왕을 비롯한 존 왕, 앤 여왕 등은 후대에 같은 왕호로 즉위한 군주가 없기 때문에 이름에 1세가 붙지 않는다. 다만 영어가 아닌 때에는 표기 규칙이 제각각이다.[4]
이를 감안한 것인지 영어판 위키백과에는 표제어가 노턴 1세가 아닌 단순히 노턴 황제(Emperor Norton)라고만 되어 있다. 정식 호칭이 아니라 '노턴이라는 황제가 있더라' 하는 정도의 의미다. 물론, 어디까지나 노턴 1세가 스스로 생각하여 작명한 이름이므로 이러한 오류가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을 노턴 1세라고 지칭했고 당시 미국의 다른 시민들도 일종의 별명, 또는 경칭으로서 그를 노턴 1세라 불러 주었다.
3. 생애[편집]
3.1. '즉위' 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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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인 시절의 사진.
영국 런던 출신으로, 그가 어릴 때 가족이 남아프리카 공화국 케이프타운으로 이주했다. 그의 아버지는 일찍이 상업에 종사해서 돈을 제법 벌었고, 노턴 또한 그의 아버지의 항해 용품 사업에 동참했다. 1848년에 노턴은 끔찍한 일을 당했는데, 그의 일가족[5]이 사망하는 참사를 겪었다.
이후 노턴은 남아프리카를 떠나 리버풀을 거쳐 1849년에 골드 러시가 터진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했다. 노턴은 금보다는 다른 사업에 관심이 많았고 부동산에 투자하고 잡화점을 여러 개 내어 제법 성공을 거두었다.[6][7] 실제로 골드 러시 초기의 캘리포니아는 금을 캐러 온 사람들은 넘쳐나는 데 반해 그 많은 사람들이 사용할 물자는 턱없이 부족해서 물가가 살인적인 수준으로 높았고,[8] 당연히 금을 캐러 온 사람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편이 직접 금을 캐는 것보다 훨씬 수입이 짭짤했다. 계란 12개가 당시 돈으로 3달러, 지금 돈으로 100달러에 가까울 정도였다.[9] 실제로도 골드 러시를 꿈꾸며 온 광부들보다는 그 광부들을 상대로 장사하는 사람들이 더 돈을 잘 벌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청바지를 만들어서 판매한 리바이 스트라우스 같은 사람이 있다.
당시 캘리포니아는 청나라로부터 쌀을 수입하고 있었다. 의외로 미국은 스페인, 프랑스 등 일부 유럽 국가의 식문화와 노예로 들어온 흑인들의 영향으로 17세기부터 쌀을 먹었는데[10], 물론 당시 미국도 동부와 남부 해안지대에서 쌀농사를 짓긴 했지만 이 당시에는 파나마 운하도 없었던데다 이 쌀을 캘리포니아로 운송해줄 철도망도 부실해서[11] 캘리포니아에서 쌀을 먹으려면 쌀을 수입해와야만 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하필 청나라에서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났고 기근이 들어 1852년 12월 청나라에서 쌀 수출금지령이 떨어지자 본래 4센트였던 쌀값이 9배인 36센트까지 폭등한다.
그러자 노턴은 페루에서 한 업자가 쌀을 수입해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쌀 시장을 자신이 장악하기 위해 2만 5천 달러를 주고 그 쌀을 모두 사들였다. 하지만 노턴의 생각과 달리 페루에서는 계속 쌀이 들어왔고 쌀값은 순식간에 36센트에서 3센트로 떨어지게 되었다. 노턴은 큰 손해를 볼 위기에 처하자 쌀 품질 핑계를 대며 급히 계약을 취소했지만 3년간의 법정다툼 끝에 1856년 캘리포니아 주 대법원에서 최종적으로 패소했고 결국 1858년 파산하게 된다.
다만 재판에서 패소하고 파산한 이후에도 샌프란시스코에서 상품 판매를 중개하면서 근근히 먹고 살았다고 한다. 물론 빈궁한 삶은 면할 수 없어서 허름한 하숙집에서 사는 신세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 당시 샌프란시스코는 골드 러시 붐이 식어가며 경제가 불황에 빠졌는데, 일설에 의하면 노턴은 이 시기부터 주변인들에게 만약 본인에게 권력이 있었다면 상황이 지금보다 나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전했다고 한다.
3.2. '즉위'[편집]
1859년 9월 17일 노턴은 어느 군인에게서 받은 허름한 미합중국 육군 군복 차림을 하고 정신이 약간 불안정한 상태로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왔다. 노턴은 샌프란시스코 지역 신문인 샌프란시스코 데일리 이브닝 불레틴에 찾아가 편집장에게 자신을 미국의 황제 노턴 1세라고 선언했다.
편집장은 속으로는 기가 찼지만 그에게 흥미를 느끼고 신문 판매 부수를 늘리려는 목적으로 그의 즉위 선언문을 신문 1면에 실어주게 된다.
그리고 즉위 선언에 뒤이어 1주일 뒤 2차 선언에서, 노턴은 버지니아 주지사 등 고위 관리들의 부패를 이유로 미국 정부의 해산을 명령하고 제임스 뷰캐넌 미합중국 대통령의 파면과 더불어 의회를 해산한 뒤, 황제인 본인이 친히 정사를 돌본다는 내용을 발표했다. 그리고 당시 부통령이던 켄터키의 존 C. 브레킨리지를 신임 버지니아 주지사로 임명한다고 했다.
그러나 당연히 워싱턴 D.C.의 행정부는 이에 대해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고, 노턴은 '육군참모총장'에게 "필요한 병력으로 의사당에 진격하여 국회를 해산시키라"고 명령했다. 물론 노턴이 진격 명령을 내린 사람은 실제 참모총장이 아니라 약 15년 전 육군 최고 사령관이던 윈필드 스콧 장군이었는데, 이 시기에 그는 이미 74살의 노인으로 당시 미래에 워싱턴 주가 되는 워싱턴 준주에 머물고 있었다.
또한, 연방 각 주에 샌프란시스코의 음악홀에 대표단을 파견하여 "황제에게 경의를 표하고 법적으로 필요한 수정조치를 취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뒤이어 노턴은 프랑스가 멕시코를 침략했을 때 자신이 멕시코의 보호자가 되겠다고 선포했으나, 후일 멕시코의 보호자 자리를 포기했다고 한다.
그는 자기가 가진 낡은 육군 대령 군복 한 벌만을 입었고, 특별한 직업은 없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빅토리아 여왕의 초상화가 걸린 낡은 하숙집에서 살았다. 그는 매일 시민들을 만나거나, 하수구와 버스의 시간표를 점검하고 매주 종교적 화합을 위해 각 교단의 종파를 바꿔가며 예배하는 활동을 했다.
샌프란시스코의 유명한 개들이었던 '버머와 래저러스'의 주인이라는 소문이 있었지만 실제로는 아닌 듯 하다. 아마도 한 때 잡종개를 길렀던 부분이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동시기에 존재했지만, 정작 본인은 왜 자신과 개들을 한 그림에 그려넣냐고 역정을 낸 적도 있다. 그 외에도 생전 이런저런 소문이 나돌았는데 나폴레옹 3세의 아들이라는 소문도 있었고, 사실은 부자라는 소문도 있었다고 한다.
실상은 그저 망상장애 환자일 뿐이나, 이 자칭 "황제"는 샌프란시스코 시민들에게서 대단한 인기를 누리는 유명인사였다. 여기에는 비록 정신질환을 앓고 있지만 인품 자체는 아주 훌륭한 사람인데다가, 이전부터 그를 알고 있던 이웃이나 동업자들이 "원래는 멀쩡했던 사람인데 사업 실패로 인해 미쳐버렸다."라고 사정을 알려주어 많은 사람들에게 동정을 산 점도 한 몫 했다.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2006년 3월 5일과 2013년 10월 6일에 노턴의 일생을 다룬 프로그램을 방영하였다.
3.3. '재위' 동안의 행보[편집]
황제 행세를 하면서 그는 샌프란시스코 내 기물들과 거리의 상태를 늘 점검하고 곤란에 빠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도와주는 행보를 보였다.
그는 광인이였지만 성품과 사상은 본받을만 했는데 현재의 관점에서도 진보적이고 평등주의적인 생각을 보였다. 19세기에 모든 사람들이 믿을 수 있는 만국 종교와 국제연맹, 즉 UN 같은 범세계적 정부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새로운 기술에 많은 관심을 가져 19세기에 벌써 비행기의 연구를 위해 기금[12]을 조성했고 나아가 당시 아프리카에서만 사용하던 현수교 공법으로 샌프란시스코 만에 다리를 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13] 훗날 그 자리에 지어진 현수교가 그 유명한 베이 브릿지다.
또한 본인은 유대인이었으나 모든 종교, 모든 인종을 공평하게 대우했으며, 모든 종교의 집회에 출석했다. 19세기부터 흑인, 아시아인, 아메리카 원주민과 같은 모든 인종에게 공평하게 대했기 때문에 비백인들에게도 인기가 좋았다고 한다.
참고로 이 때는 아직 미국 남부에서 흑인들이 노예로 살고 있었고 샌프란시스코가 속한 캘리포니아 주는 남북 전쟁 당시 자유주에 속했지만 흑인에 대한 인종 차별은 마찬가지였다. 또 아시아인[14]에 대한 차별도 심했으며[15], 그게 당연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노턴 1세는 이런 시대에서도 샌프란시스코에서 아시아인을 혐오하는 이들의 폭동이 발발하자, 홀로 폭도들을 가로막고 그들이 해산할 때까지 주기도문을 외웠으며 괴롭힘을 당하는 중국인들을 앞장서서 돕기까지 했다.
그리고 나라의 안위에 누구보다 관심을 가져 남북 전쟁이 터졌을 때는 전쟁을 그만두라면서 당시 미국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과 남부연맹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를 소환했다. 물론 그 두 사람은 본인이 황제라 주장하는 이 양반의 소환 명령에 응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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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그의 모습은 샌프란시스코 시민들에게 귀감이 되었고 샌프란시스코 시민들 사이에서의 인기도 매우 높았다. 한 예로 본인이 샌프란시스코의 모든 교통수단을 무료로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했으나, 어떤 기선의 선장이 무료 승선을 거부하였고 이 자칭 황제는 다음과 같은 칙명을 내린다.
아메리카 합중국의 황제이자 멕시코의 보호자인 노턴 1세는 기선 회사가 새크라멘토 항해를 거부했기 때문에 (중략) 반항하는 이 회사가 짐의 명령에 따를 때까지 새크라멘토 강을 봉쇄할 것을 선언한다. 1866년 2월 8일 샌프란시스코 노턴 1세.
그러자 시민들이 기선회사에 크게 항의했고, 놀란 기선회사는 황제에게 평생 승선권을 바쳤다고. 역시 비슷한 일이 벌어진 센트럴 퍼시픽 열차회사에도 영업 정지 '칙명'을 내린 적이 있고, 이 회사 역시 황제에게 사죄하며 종신 무료 탑승권을 제공하였다.
또 본인 제복이 낡자 신문 기사에 내려 자신의 예복이 국가적인 수치라는 글을 썼으며 이에 시 위원회에서는 '황제께서 낡은 옷을 입고 돌아다니시는 광경을 볼 수 없다'며 '황실 예복비용'을 마련해 그에게 최고급 맞춤옷을 지어 바쳤고, 이에 노턴은 매우 흡족해 하며 감사를 표하는 친서와 함께 위원 전원을 귀족 작위에 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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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름한 옷차림의 사진.
샌프란시스코의 최고급 식당들이 그에게 무료로 식사를 제공했고, 노턴의 허락을 받아 식당 입구에 "황실 인증 식당"이라는 금속 기념패를 설치했다. 식사 비용은 아래의 자체 발행 국채로 받았다. 심지어 샌프란시스코의 많은 극장들은 노턴의 전용 특석을 마련해두었다고 한다.
그를 위한 '세금'도 있었다. 상점은 주당 25~50센트, 은행은 매주 3달러로, 이것은 세금이라기보다는 그가 구걸해서 받는 생계 보조의 개념이라 당연히 강제 징수가 아니었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세금'을 내어 그의 생계를 도와주었다.
1867년에는 아만드 바비어라는 경관이 원칙주의에 입각하여 그를 정신질환 치료를 받게 할 목적으로 체포한 일이 있었다. 샌프란시스코의 주요 언론들이 일제히 이를 보도했고, 이에 격분한 시민들과 언론의 항의가 빗발쳤다. 사건 직후 샌프란시스코 경찰서장이 직접 노턴 황제를 풀어주고 공개 사죄했으며 시 의회에서는 노턴에게 '사절단'을 보내 사죄했다.
이 사죄를 받은 노턴은 '짐은 그 일을 잊어버리기로 했다'면서 자신을 체포한 경관을 직접 사면한다고 선언하였다. 이 일이 있은 후 샌프란시스코 경찰서장 패트릭 크롤리는 시의 경관들에게 길에서 노턴을 마주칠 경우 경례로 예를 갖출 것을 명령했고, 이후 샌프란시스코의 경찰들은 노턴이 지나갈 때마다 경례를 바쳤다고 한다.
노턴은 외국 통치자들과의 교류에도 관심이 있었다. 브라질 제국의 황제인 페드루 2세[16]가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하자, 샌프란시스코 시민들은 페드루 2세와 노턴 1세의 만남을 고대했지만 실현되지 않았다.
노턴은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에게 자신과 결혼해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하셨는데, 당연하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 무엇보다 편지가 정말 도착하긴 했을지 의문은 차치하더라도, 빅토리아는 남편 앨버트 공에게 일편단심이었던데다가 이역만리 타국의 망상증 환자의 편지를 진지하게 여겼을 리가 없다.
그의 이름은 하와이에도 알려졌는데, 하와이 왕국의 왕 카메하메하 5세는 편지로 몇 차례 노턴 1세와 교류했다고 하며, 재위 말년에는 미국 연방정부에 대한 신뢰를 잃고 노턴 1세만을 미국의 적법한 통치자로 여겼다고 한다.[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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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그는 자신의 빚을 갚거나 식당에서 식사하기 위하여 국채를 발행하기도 했다. 국채는 국채라 상환일이 존재하여 1880년의 모 일이었는데, 국채 발행 후 며칠 뒤 노턴이 붕어하는 바람에 상환이 불가능해졌다. 그래도 이 채권은 당대에 인기가 있었던 건 물론이고, 오늘날도 화폐 수집가들 사이에서는 구하지 못해 안달인 희귀한 아이템이라고 한다. 위 사진에 명기된 액수는 10달러.
일찍이 노턴은 국채를 발행하면서 "이 국채를 가지고 있으면 언젠가 큰 돈을 벌게 될 것"이라고 말했는데, 오늘날 이 국채는 화폐 수집가들에게 액면가에 이자율을 그대로 적용한 것보다 훨씬 큰 액수를 받고 팔 수 있다. 예를 들어서 50센트 국채에는 매년 7%의 이자가 붙을 것이라 명시되어있는데, 50센트 국채 중에서 상태가 가장 좋은 물품은 명시된 2012년 액면가(0.5*1.07^(132) = 약 3,800 달러)의 무려 5배인 18,400달러에 팔렸다. 본인 말이 어느 정도 실현된 셈이다.
다만 이 국채가 진짜로 채권으로서 기능했다고 볼 수는 없다. 국채는 일반적으로 발행 국가의 신용도에 따라 그 가치가 결정되는데, 노턴은 이 금액을 상환할 능력이 없었고 보증을 서준 사람도 없었다. 그가 발행한 '국채'는 액면가와는 관계없이 노턴이 발행한 것이라는 사실만으로 가치를 얻은 것이다. 즉 노턴의 '국채'는 채권이나 유가증권이 아닌 단순한 수집품에 가깝다.
동시대 샌프란시스코에는 자신이 조지 워싱턴이라고 주장하던 프레더릭 쿰스라는 사람이 존재했었는데, 노턴 1세처럼 유명세가 있었지만 어느날 노턴 1세와 대판 싸우고선 뉴욕으로 돌아간 일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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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모습을 묘사한 삽화.
3.4. 사망[편집]
1880년 1월 8일, 대학가에서 강연하러 가는 도중 길거리에서 쓰러져서 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병원에 도착하기 전 사망했다.[18] 노턴의 사망에 모든 상점들이 이 자칭 황제의 사망 소식을 듣고 문을 닫아 조의를 표했으며, 무려 1만 명의 조문객이 샌프란시스코의 거리를 가득 메웠는데, 부자부터 거지까지 신분과 빈부격차를 가리지 않았다.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신문사에서는 "폐하(노턴 1세)께서 붕어(崩御)하시다"라는 대서특필과 함께 호외가 전 도시에 뿌려졌다. 이게 좀 대단한 게, 이때 샌프란시스코 인구는 고작 23만 명이었다. 거기에 이 양반의 장례식 때는 일식까지 일어났다. 1880년 1월 10일이 장례식이었는데, 11일에는 개기일식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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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턴 1세. 미합중국의 황제이자 멕시코의 보호자.
노턴의 무덤. 우드론 묘지에 안장되었으며 묘비는 1934년 세워진 것이다. 그의 장례는 샌프란시스코 시 의회장으로 치러졌고, 그의 장미빛 목관은 샌프란시스코 사업가협회에서 마련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평생 아내도, 자식도 전혀 없었던 독신자였기에 후손은 없다. 다만 형제들의 후손들은 있으며, 가끔 노턴 1세 관련 행사에 참가하기도 한다.
4. 평가[편집]
샌프란시스코 시에서는 그를 기리는 의미에서 샌프란시스코와 바다 건너 오클랜드를 잇는 베이 브릿지(상술했듯, 그 자리에 현수교를 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사람이 노턴 1세였다.)의 이름을 노턴 황제 다리로 바꾸려고 했으나, 오클랜드 시의회에서 부결시켰다. 이유는 샌프란시스코에서의 유명세에 비해 오클랜드에서는 아무도 노턴 1세에 대해 몰랐기 때문이다. 또 샌프란시스코 시민 존 루미아라는 사람이 베이 브리지를 '노턴 황제 베이 브리지'로 개명할 것을 공식 청원했지만 이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존 루미아는 현재에도 '노턴 황제 협회(The Emperor Norton Trust)'라는 비영리 단체를 결성하여 베이 브릿지의 이름을 바꿀 것을 청원하고 있다.
1980년 1월에는 이 노턴의 사망 100주년을 기념하는 기념식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렸다.
샌프란시스코는 노턴의 행적과 은혜를 잊지 않고, 매년 2월 14일을 '노턴 1세의 날'이라고 하여 축제를 개최한다. 이 날 샌프란시스코 관광 안내를 전담하는 여행 가이드는 노턴 1세의 코스프레를 하고 있다.
한동안 베이 브릿지에서 조금 떨어진 샌프란시스코의 클리프 하우스(Cliff House)에 노턴 1세 기념패가 존재했으나, 지금은 철거되고 개인에게 팔렸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PAUSE, TRAVELER
AND BE GRATEFUL TO
NORTON 1ST
EMPEROR OF THE UNITED STATES
PROTECTOR OF MEXICO, 1859-’80,
WHOSE PROPHETIC WISDOM
CONCEIVED AND DECREED THE
BRIDGING OF SAN FRANCISCO BAY
AUGUST 18 1869
DEDICATED BY E CLAMPUS VITUS, FEB. 25, 1939
여행자여, 잠시 걸음을 멈추고
1859년부터 1880년까지 미국의 황제이자 멕시코의 보호자이시며
예언적인 지혜로 착상하여
샌프란시스코 만에 다리를 놓으라 칙명하신
노턴 1세께 감사하라.
1869년 8월 18일
1939년 2월 25일 E Clampus Vitus가 헌정
이 사람이 워낙 좋은 대접을 받은지라, 노턴 2세를 자칭하는 사람들이 이따금씩 나타난다고 한다. 물론 그가 인기가 좋았던 것은 개인의 카리스마와 인품, 개성 덕분이였고 시간이 흘러 왕정에 대한 반감 같은 것도 사라졌다보니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5. 인기의 이유[편집]
5.1. 풍자적 마스코트[편집]
that he had shed no blood; robbed no one; and despoiled no country; which is more than can be said of his fellows in that line.
한 방울의 피도 흘리게 만든 적 없으며, 누군가를 약탈하지도 않았고, 그 어떤 나라에게도 해악을 끼치지 않았다. 그 점에서 다른 황제들에 비해 훨씬 나은 인물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데일리 알타 캘리포니아 #
노턴의 이러한 행적은 단순히 당시 미국인들이 노턴이 정신이상자인줄 몰라서 그렇게 대우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황제' 대접을 받을 수 있던 이유는, 당시 바다 건너 유럽의 여러 군주국이 드러낸 수많은 모순과 비교했을 때 미국인 자신들이 건설한 민주공화국에 대한 자부심이 상당했기 때문이다. 당시 동시대 유럽의 군주제 국가들에서 나타난 상황은 다음과 같다.
러시아 제국 : 적지 않은 국가들이 입헌군주제라도 내세우던 19세기에 여전히 전제군주제로 차르가 백성들을 농노로 부렸다. [19]
독일 제국 : 입헌군주제를 주창했으나 실상은 카이저와 귀족들이 국민들을 군국주의로 통제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준입헌군주제 체제가 유지되기는 하였지만, 합스부르크 가문의 권위 없이는 국가가 그대로 붕괴할 정도로 내부가 곪아있었다.
오스만 제국 : 나바리노 해전 패전으로 그리스를 잃는 등의 유럽의 환자 신세가 되면서도 파디샤는 여전히 권력과 사치를 누렸다.
벨기에 왕국 : 레오폴드 2세는 콩고 자유국을 개인 사유지[20]로 삼아 잔혹한 착취와 학살을 서슴치 않았다.
프랑스 제2제국 : 수십년 전 국민의 피로 얻어낸 공화정을 버리고, 나폴레옹 3세를 옹립했다.
물론 그렇다고 당시의 미국이 완전무결 하지는 않았다. 노턴 1세가 살던 시대는 지금처럼 법적으로나마 인종차별을 철폐한 미국 흑인 민권 운동의 훨씬 이전으로 인종주의와 인종차별이 만연해 있었다. 서부개척시대라는 이름 뒤에는 원주민에 대한 학살이 태연히 자행되었으며 만인은 평등하다면서도 노예제가 유지되는 등 미국 역시도 내부적으로는 문제는 많았다. 그럼에도 일단 백인들에게는 어느정도 살만한 나라였고, 유럽보다는 풍요로운 편이라 유럽에서 이주해오는 사람들도 많았다. 심지어 남북전쟁 중에도 이민자가 꾸준히 유입되었다. 그리고 미국이 근대적 입헌주의와 삼권분립이 보장되는 헌법을 만들고 세계 최초의 대통령제를 설립했을 때, 유럽의 여러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이에 자극을 받았고 이는 혁명의 도화선이 되기도 했다.
또한, 노턴 1세 본인의 행동도 일반적인 범인과는 달랐다. '미국의 안위를 걱정하고, 타인을 배려하는 행보'를 보였고, 스스로가 '황제'를 자칭하면서 얻은 인기와 명예를 범죄나 사리사욕을 채우는데 사용하지 않았다. 즉 그저 정신이 약간 이상할 뿐, 그 내면은 순박한 노인이라는 점이 샌프란시스코 시민들의 호감을 샀다고 볼 수 있다.
황제의 '지배'를 인정한 시민들의 입장에서 노턴 1세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것은 "정신은 약간 이상하지만 누구도 죽이지 않고, 누구도 차별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재산을 빼앗지 않는, 평범한 노인"이 "함부로 사람을 죽이고, 차별하고, 착취하는 유럽의 군주들"보다 '미국인들을 지배할 군주에 걸맞다'는 풍자로써의 의미로 노턴을 시의 마스코트로 인정한 것이라 볼 수 있다.
5.2. 샌프란시스코의 홍보대사[편집]
노턴이 회사나 시 단위에서 정중한 대접을 받은 데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으니, 바로 샌프란시스코는 노턴 덕에 상당한 관광 수익을 얻었다는 점이다. 노턴은 골드 러시가 시들해지며 샌프란시스코가 불황에 빠졌던 시기에 활동을 시작했다. 노턴의 기행이 널리 알려지자 많은 사람이 그를 보거나 만나려고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했는데, 이들은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한 이상 숙박, 음식, 교통 등에 돈을 써야 했다. 이 방문객들이 소비한 돈은 샌프란시스코에게는 실로 가뭄에 단비와 같았을 것이다.
식당을 예로 들자면, 노턴을 보려고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한 사람들은 식사를 하려면 대부분 노턴의 인증을 받거나 그가 직접 추천한 식당을 갔을 것이다. 최고급 식당들이 노턴에게 기꺼이 무료로 식사를 대접하고, 노턴의 허락을 받아 "황실 인증 식당"이라는 기념패를 달은 데에는 다 이유가 있던 것이다. 노턴의 전기를 쓴 윌리엄 드루리(William Drury)는 노턴이 샌프란시스코에게서 얻은 이득보다 샌프란시스코가 노턴 덕에 얻은 이득이 훨씬 컸다는 식으로 서술했다.
오늘날에도 예를 들어 한국철도공사는 명예역장 제도를 운영하는데 이 사람들이 실제로 역장 업무를 하는 게 아니라 홍보대사일 뿐이다. 심지어 점촌역은 사람도 아닌 강아지를 명예역장으로 임명해놨고, 일본에는 토끼를 역장으로 임명한 곳도 있다. 관광수입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노턴 1세와 장단을 맞춰주는 것도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6. 대중 매체에서의 묘사[편집]
이렇듯 마치 소설과도 같은 노턴 1세의 삶은 많은 창작자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1974년 이후 샌프란시스코 외곽에 있는 그의 무덤에서는 매년 기념 예배가 열리고 있다. 비록 그의 삶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들은 잊어졌을지도 모르지만, 그의 이야기는 문학작품을 통해 여전히 남아 있다.
노턴의 재위 기간 동안 샌프란시스코에 함께 살았던 소설가 마크 트웨인은 노턴을 모델로 한 자칭 왕 캐릭터를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 등장시킨다. 다만 이 인물은 노턴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사기꾼 악당이다(...). 하지만 실제로 노턴과 트웨인은 꽤나 각별한 친분이 있었다고 한다. 그 예로, 1865년에 버머(Bummer)라는 노턴 1세의 애견이 죽었을 때, 트웨인 본인이 직접 비문을 쓴 이야기가 있다. 버머와 래저러스(Bummer and Lazarus)는 원래 배척받는 유기견 출신이었지만 당시 들끓던 쥐를 고양이보다 더 잘 잡아주었기에 도시의 마스코트가 되었다. 노턴은 종종 둘에게 식사를 나눠줬는데, 이 때문에 종종 셋이 만평에 같이 묘사되기도 하였다. 더욱이 이 둘은 당시 시대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제국주의, 인종차별, 기독교 근본주의를 부정적으로 생각한 진보적 인사라는 공통점도 있었다.
또 다른 소설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도 그의 1892년 소설인 《The Wrecker》에서 노턴을 모티브로 삼은 캐릭터를 등장시킨다.
스티븐슨의 수양딸인 이저벨 오스본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노턴은 "신사적이고 친절한 남자였고, 다행스럽게도 세상에서 가장 우호적이고 감수성이 짙은 도시, '그가 황제가 되고 싶다면 황제가 되게 하라'는 생각을 지닌 도시에서 살았다. 샌프란시스코 전체가 그와 함께 게임을 한 셈이다."라고 평했다. 노턴이라는 존재는 그의 망상장애뿐 아니라 그것을 받아준 샌프란시스코 시민들의 위트와 여유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닐 게이먼이 작가를 맡은 DC 코믹스의 《샌드맨 시리즈》 6권 <우화들>에서 등장한다. 해당 단행본에 수록된 이슈 31에서 등장. 절망해서 자살하려고 하는 그를 본 절망은 꿈에게 "오빠의 꿈이 저 남자에게 할 수 있는 건 뭐가 있지?"라는 내기를 걸었고, 꿈은 "꿈이 없이는 절망도 없다"면서 그에게 꿈을 줘 자신이 황제가 되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잃어버렸던 꿈을 되찾은 노턴은 분열의 광기에 휘말리지 않고 욕망의 유혹을 이겨냈으며 죽기 전까지 절망에게로 돌아가지 않았다. 즉, 죽는 순간까지 절망하지 않았다. 모든 인종을 평등하게 대한 노턴의 마음가짐은 남들에게 차별받는 중국인 상인을 총리로 두고 진지하게 조언을 구하는 것으로 표현했다. 이 상인[21]은 자신을 무시하는 사람들에게는 비꼬는 의미에서 ~해체로 답하지만 노턴과 지인들에게는 예스러운 표준 영어를 구사하며 노턴을 존경함을 나타낸다. 사후에는 죽음을 만나 라미드우프닉스라는 암시를 받는데, 노턴 본인은 전혀 모르는 이야기이며 무슨 상관이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답하면서 노턴이 라미드우프닉스였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직후 죽음은 밝게 웃으며 노턴은 그녀가 본, 즉 우주의 모든 왕 중에서 가장 호감이 가는 왕이었다고 평가했다. 아무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상징성을 생각하면 실로 엄청난 찬사다.
이문열의 소설 《황제를 위하여》 에서도 자칭 황제 캐릭터가 나온다. 그러나 이 소설의 '황제'는 미치광이로 모두에게 외면받은 데 반해 노턴은 오히려 모두에게 사랑(?)받았다는 점, 그리고 정감록과 같은 구태의연한 예언사상에 기대어 살아온 황제와는 달리 노턴은 시대를 앞선 혁신적인 행적을 보여주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저자인 이문열이 실제로 노턴에게서 캐릭터적 모티브를 얻었는지는 불명.
한국의 라이트 노벨 《GGG》의 소재는 이 인물이 모티브라고 작가가 1권 후기에서 밝혔다.
미국의 고전 드라마 《보난자》에서는 아예 이 인물을 다룬 에피소드가 있다. # 시즌 7의 에피소드로 방영되었다. 이 이야기에서는 현수교의 설치에 대한 노턴 1세의 탁견을 다루고 있으며 부분적으로는 다른 민족의 사람들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모습도 보여주고 있다.
크리스토퍼 무어의 《더티잡》이란 소설에서 황제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묘사가 이 분과 똑같다. 노숙을 하지만 주변 인물들에게 황제 폐하라고 불린다는 점, 개 두 마리를 데리고 다닌다는 점, 그리고 훌륭한 인품을 지녔다는 점까지 같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소설 《수용소 군도》에서도 자칭 차르[22]라는 소리를 하다가 잡혀들어온 수인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다행하게도 피도 눈물도 없는 악의 조직 NKVD[23] 요원들조차도 미친놈 취급하면서 재미있어 했다고. "폐하께서는 새로운 황궁을 어디에 지으실거죠? 여기 멋진 루비안카[24]는 어떠신가요? 한 번 관람해보시겠습니까?"라면서...
TRPG 캐슬 팔켄슈타인(Castle Falkenstien)에서는 워싱턴주-오레건-캘리포니아-바하 캘리포니아에 걸치는 곰 깃발의 제국(Bear flag Empire of California)의 진짜 황제로 군림하고 있다. 마크 트웨인이 캘리포니아 공화국의 대통령 선거에 출마시켜 당선된 뒤 4년간 훌륭한 정치를 펼쳐 전 국민들의 만장일치로 황제로 등극하게 되었다. 중국인도, 인디언들도, 백인들도, 초자연체들도 함께 공존하는 효율적이며 부유한 제국을 일구어낸 명군으로 칭송받고 있다.
샌프란시스코를 배경으로 하는 게임 와치독 2에선 노튼 1세 분장을 하고 관광객들에게 명소를 설명하고 있는 NPC를 찾을 수 있다.
Hearts of Iron IV의 모드인 End of a New Beginning에서 미국의 정치체제를 군주국으로 전환시키면 아메리카 연합왕국의 국왕 노턴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또다른 모드인 철통같은 믿음으로에서는 타임라인에서 간접적으로 언급되는데 뉴 캘리포니아 공화국 이전 캘리포니아 내전당시 왕당파의 지도자이자 왕당파가 내전에서 승리한 이후 캘리포니아 왕국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문명 6의 모드 지도자로도 출시되었다. 사실 이 문명에 등장하는 미국의 정식 국호는 미 제국[25](American Empire)이기 때문에 노턴 1세 처럼 적절한 지도자도 없을 것이다.
Victoria 3에선 미국으로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군주제를 도입해 노턴을 황제로 옹립하는 도전과제가 존재한다. 게임을 하다보면 미국에서 소시민 이해집단의 왕당파 선동가로 등장한다. 트레잇은 강렬한 카리스마, 야망가, 명예로움이다. 특성때문인지 인기가 대체로 100을 넘는다. 노턴 1세의 추가 이후 이념적으로 더 어울릴 계몽된 왕당파[26] 이념이 추가되긴 했으나 딱히 변경되지는 않았고, 정신이상 트레잇이 게임상에 있지만 디폴트로 반영되어있지는 않다. 모드를 통해 계몽왕당파로 설정해줄 순 있다
명일방주의 라테라노 사이드 스토리의 이벤트 페이지번역본에서 전 연방법원 대법관이 자칭 컬럼비아 황제로 즉위하고 감염자 해방 법령을 공표하고 다녔다는 사건 기록을 볼 수 있다. 세계관 내에서 미국을 모티브로한 국가가 컬럼비아이며 광석병 감염자는 차별과 혐오의 대상이라는것을 생각하면 꽤나 의미심장하다. 밥먹듯이 집단학살이 일어나는 등 정상적인 높으신 분이 교황 한명 정도를 제외하면 없다시피 할 정도로 부패와 선민사상이 만연한 세계다 보니 여기선 더 나아가 그가 공표한 법령이 각지에서 일어난 감염자 운동의 기반이 되는 등 상당한 영향력을 얻었다고.
붕괴: 스타레일의 페나코니 서브 퀘스트중에 노턴 1세를 본뜬 티조크 2세라는 캐릭터가 등장한다
7. 외부 링크[편집]
영어 위키백과
노턴 황제 재단
상상코칭 1:1 전문과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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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턴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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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 런던 루이셤구 소속이다.
[2] 미국으로 오기 전 일가족이 사망했고 미치기 직전에는 파산하여 모든 재산을 잃었다.
[3] 당연한 것이 세습군주제에서는 하나의 왕조에서 모든 군주들의 성씨는 동일하므로 개별 군주의 칭호로는 성씨보다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적절하기 때문이다. 물론, 알바니아 유일의 왕인 조구 1세(본명: 아흐메트 조구)나 부탄 왕실처럼 성씨에서 따와서 왕명을 정한 사례가 없지는 않지만, 알바니아의 경우는 이슬람교 분위기가 강한 나라에서 강경한 세속주의 정책을 펴기 위해 일부러 이슬람 풍의 이름을 피한 경우라서, 일반적인 사례는 아니다.
[4] 서양에서 군주에게 붙이는 N세 표현이 '군주스러움'을 표현하는 일종의 스테레오 타입이 되었기 때문에 그도 1세를 자칭한 듯하다. 실제로 현대에 초소형국민체의 군주들이 후대가 없음에도 그냥 1세를 자칭하는 경우가 많았고, 현대 창작물에서도(특히 동양에서) 서양인 군주를 표현할 때는 거의 모두 N세를 붙이는 경우가 많다.
[5] 아버지, 어머니, 2명의 형제
[6] 노턴이 양친의 가산 4만 달러를 갖고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했다거나, 1853년까지 25만 달러를 모았다는 풍설이 도나, 이는 동시기 어느 기록에서도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 물론 이와 별개로 노턴이 캘리포니아에서 사업을 하면서 큰 돈을 벌었던 것은 사실이다.
[7] 링크의 글에 따르면 노턴의 아버지는 죽기 불과 4년 전에 자신의 형에게 "완전히 망했다(I am totally Ruined)."라면서 신발 살 돈도 없다고 푸념을 하는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1849년 당시 4만달러라면 2023년 기준으로는 150만달러 이상에 해당하는 상당한 거액인데, 죽기 얼마 전까지 파산 위기에 몰려있던 아버지가 저 정도 유산을 물려줬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두 번째로 노턴이 파산했을 당시인 56년에 새크라멘토 유니온 신문에는 은행이 그의 재산을 가압류한 내용이 나와있는데, 이 내용에 따르면 그의 자산(assets)는 1만5천 달러(2023년 기준으로 약 53만 달러)에 불과했다. 그가 사업과 변호사비로 날린 돈을 감안하더라도 25만 달러에는 턱없이 모자란 액수였을 것이다. 참고로 당시 25만 달러면 현재 가치로 970만 달러가 넘는 거액이고 백만달러는 3천500만 달러에 달한다. 실제로 노턴의 재산이 25만달러에 달했다면 쌀 계약 실패로 타격을 입었을지언정 파산하진 않았을 것이다. 노턴의 재산이 저것의 10분의1 수준이라고 하더라도 지역사회에서 꽤나 여유있는 축에 속했을 것이다.
[8] 동시기 캘리포니아에서 금을 캔 사람들 중 하나인 에드워드 굴드 범(Edward Gould Buffum)이 쓴 수기 <금광에서의 6개월(Six Months in the Gold Mine)>에서도 친구와 함께 먹은 아침식사 한 끼가 지금 돈으로 무려 1,200달러, 한화 150만원에 달했다는 믿기 힘든 내용이 나온다.
[9] 동시기 뉴욕의 노동자들이 받는 일당이 1달러에서 2달러 정도였다.
[10] 때문에 미국에는 잠발라야 같은 쌀 요리도 있다.
[11] 참고로 파나마 운하는 1914년, 미국의 동부와 서부를 이어주는 대륙횡단 철도는 1869년에 가서야 완공되었다.
[12] 라이트 형제가 비행기를 발명한 해는 세기를 넘긴 1903년이었다.
[13] 현수교 얘기는 즉위선언을 한 신문 기사에서 밝힌 내용이다. 즉 오래 전부터 이미 그런 생각을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한때 남아공에서도 살았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 때의 경험이 영감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14] 주로 "쿨리"라고 불렸던 중국 화교들
[15] 당시 미국에서 흑인은 노예, 하인취급이었다면 황인종은 사람이라기 보단 말하는 유인원 취급이었다.
[16] 브라질 제국의 마지막 군주로, 이 사람 또한 내치를 다지고 노예제 폐지를 선언하여 당대와 후세의 평가가 좋은 사람이다.
[출처] Forbes, David. Emperor Norton & Hawaii.
[18] 그의 주머니에서 발견된 돈은 당장 사용할 4달러 정도가 전부였다. 그는 마지막까지 소탈하였다.
[19] 단 알렉산드르 2세의 개혁으로 농노문제는 조금 개선되었다.
[20] 당시의 콩고 자유국은 법적으로 벨기에의 '식민지'가 아닌 레오폴드 2세의 '개인 사유지'였고, 벨기에의 식민지로 편입된 것은 나중의 일이다.
[21] 처음에는 자신을 총리로 삼은 노턴을 안쓰럽게 여겨 어울려주는 정도였으나, 그의 훌륭한 인품과 상대가 누구든 진심으로 배려하고 위해주는 노턴을 보고 그에게 진심으로 충성하게 되었다.
[22] 러시아 황제
[23] KGB의 전신
[24] 악명 높은 KGB 본부가 위치한 곳으로 정치범들을 수용하는 감옥이 있다.
[25] 이 게임에 등장하는 모든 문명이 제국으로 나온다. 이는 보편 국가에 대한 제작사의 존중의 의미에 가깝다.
[26] 다문화와 여성 참정권과 군주제를 지지한다. 소시민의 기본이념인 민족주의와는 대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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