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수화가 나타나다.
산수화가 나타날 즈음은 남북조 시대로 본다
그림만이 아니고, 산수화의 이론도 나타났다.
오늘은 산수화가 중국회화에서 막 나타날 즈음에 종병이 쓴 ‘畵山水序’가 대표적인 산수 회화의 이론이 되었다. 종병의 ‘화산수서’에 道家이론을 도입하였다.
로 많이 나갔고, 道家는 관직을 거부하고 산림속에 은거하여 자아해탈을 추구하였으며, 스스로 깨우쳐 道의 경지로 나아갔다.
(중국에서 노자상이나, 공자상은 그냥 초상화가 아니고 그 사람의 행적을 우리가 본 벋아야 한다는 뜻이다. 역사적 사실이나, 도덕 등등, 그림이 내포하고 있는 이야기를 읽을 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선비 또는 교양인 대접을 받으려면 많이 알아야 했다.)
문인들이 주류를 이룰 때는 문장은 도를 싣는 수단이며, 세상의 쓰임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도가사상이 주류를 이룰 때는 性情을 즐겁게 하고, 자아를 도야하는 것을 강조했다. 유가와 도가가 함께 번성할 때는 이론적인 모순이 나타나긴 해도 함께 발전하였다.
남복조 시대는 사회가 혼란스럽자 관직에서 은퇴하여 도가 사상에 심취하여 보낸 경우가 많다. 도가 사상을 잘 나타내는 산수화가 나타나는 배경이 된다.
종병의 산수화론이 나타난 이후로는 모든 산수화가들이 도가사상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종병의 이론이 산수화를 이론적으로 뒷받침 해준다.
(왕미(415-453)의 敍畵)
왕미도 종병처럼 이론서를 남겼다.
위진시대까지는 그림 그리는 일은 노예들이나 하는 천업으로 생각하였다. 기생, 잡역부, 무당들보다 더 천한 직업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런 이유로 漢나라 이전에는 사대부들이 그림 그리는 직업에 종사는 일은 없엇다. 漢末에 이르러서야 나라가 혼란하고 민생이 도탄에 빠지자 소수의 문인 사대부들이 여가 시간을 이용하여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그림이란 官의 모습을 일반 백성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그렸다. 그러나 위진시대부터 그림 그리는 일에 사대부들의 참역가 많아지자 그림에 대한 인식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이러한 시대의 변환에 맞추어서 왕미가 나타났다. 그림 그리는 일은 천한 짓이 아니고, 성현의 경전과 본질을 같이 한다고 한껏 추켜세웠다.
처음에는 산수화를 단순히 지도의 역할을 하는 정도로만 인식하였다. 이때 왕미가 말했다.
“보이는 기물을 일일이 모두 종이 이에 옮긴다면 지도와 다르지 않지만, 산수화는 주제가 山水여야 하고, 인물이나 다른 동물은 보조 역할을 해야 한다.”
이렇게 말함으로 산수화의 품격을 격상시켰다.
그림 --
위진 시대 이전에 실용 그림에 산수 그림을 그렸다. 이때의 산수화는 지도 역할을 한다. 먼 후대애 와서도 궁굴도라든지, 등등 지도나 설계도의 용도로 그렸다.
그 전에는 인물만 그렸는데, 인물의 배경으로 산수를 그리기 시작했다. 특히 이야기 류의 ㅇ그림에는 배경에 산수를 그려 넣으니 훨씬 더 서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고개지의 ‘낙신부도’가 대표적이다.
그러다가, 위진 남복조 시대에는 사회가 극도로 혼란해지자 사대부들은 불안한 벼슬살이보다 은거하여 청담이나 나누면서 사는 것을 선호했다. 그들은 시골 마을이나, 숲속으로 은거했다. 이들은 은거 생활의 분위기를 자아내는 산수시를 지었고, 회화에서도 산수의 분위기를 즐기기 위해 순수한 산수화라는 그림을 그렸다. 이로서 산수화는 하나의 장르로 독립하는 기틀을 마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