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연의 39 사랑방과 George khim의 가발가게
메뚜기도 한 때가 있다고 했는데 미국의 가발가게도 한 때가 있었다.
혁명후 1960년도 후반 미국의 흑인 동네 네거리는 한국의 보따리 가발장사들의 가발 전성기였다
그때 가발 장사는 큰 자루나 가마니에 넣어 다니며 네거리에 멍석을 펴고 장사를 했는데 어찌나 돈이 많이 벌리는지 집에 가면 돈을 세니라 밥먹을 시간이 없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것이 한국은행에선 돈이 몇장인가 숫자가 중요하지 돈에 프린트된 얼굴이 앞에 있냐 뒤에 있냐는 문제가 안된다.
허나 미국에선 돈에 그려진 사람 그림이 앞으로 오게하여 돈다발을 묶어야 은행에서 예금을 받지 섞어오면 돈을 안 받거나 별도로 돈을 세는 사람을 고용해야 해서 요금이 추가 된다.
그 가발이 흑인사회 속에서 호떡 팔리듯 불티나게 팔려나갔는데 당시 미국의 가발업은 골고다 언덕에 신의 아들인 구세주 예수를 십자가 형틀에 도둑들과 함께하여 한 곳에 묶어 죽였다는 이유로 세계 각처를 떠돌아 다니며 사람 취급을 못받는 신세가 되고 급기야는 히틀러에 의해 몰살을 당하는 처지가 되기도 한 유대인들의 독점사업이었다.
그들은 세계를 떠돌아다녔기에 뭐가 돈이 되고 돈이 벌리는가엔 이골이 난 귀신들이어서 전당포가 세탁업이 그들의 독차지였다.
그래서 이곳 미국에서도 그것을 알고 유대인들이 가발을 꽉쥐고 있었다.
거기에 흑인들은 어떤 처지에 있었는가?
그들 특히 여자들은 백인들 같이 긴머리 한번 가져보고 죽었으면 하는게 그게 꿈이고 소원이었던 것이다
그 꿈을 그리고 그 소원을 한국 가발이 이루어 준것이다.
당시 유대인들의 가발은 주로 백인들 상대의 가발이라서 개당 2,3백불에 500불 까지 가기도 하여 그저 바라보기만 해야했다.
그 가발이 단돈 9.99불에 팔렸으니 그 가발장사가 어떠했었겠는가?
그래서 당시 국비 유학생으로 와서 공부 집어치우고 가발장사로 돌아선 학생들이 한둘이 아닐정도였다.
그런데 그 때 가발은 지금같이 공기가 통하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비닐주머니에 머리털을 붙인 가발이라 한 여름이면 비닐봉지를 뒤집어 쓴 꼴이라 땀이 비오듯 흘러내리면 눈화장에 얼굴화장이 지워지는 통에 얼굴이 어떠했겠는가 ?
모르긴 해도 당시 초반 2000년대의 흑인 여자들 대머리는 모두가 가발때문인 것으로 안다.
하여간 당시 미국에선 가장 큰것이 되기도 한 12000 square foot의 가발가게였는데 하루는 고급스런 손님이 변소를 쓰겠다고 했다.
당시 가게 주인?은 쓰게 했다가 병오른다고 하여 변소가 고장나 못쓰게 하라는 엄명이 있은지라.
"It is out of oder"라며 거절을 했다.
그리고 그때 손님이 한 말이 "그럼 똥을 내 바지에 싸란 말이냐 ?"며
(Then are you telling me to shit my pants ?)라고 묻더니
"What about you?"하며 되 묻더니 하는 말이 나를 주눅들게 하는
"이 가게는 변소가 고쳐질 때끼지 가게 문을 닫아야 한다(You can't open this this store until the toilet fixed)라고 명령하는게 아닌가?
알고보니 그 여자는 그 도시 St.Louis 시청의 위생국장이었다.
미국에서 가게를 열려면 해당 시로 부터 Occupancy permits 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그게 쉽게 자동적으로 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다가 큰코 다치게 되기도 하는데 그것은 건물주로 부터 한두달 Rent free(공짜)로 얻었다가 허가 나오기가 부지하세월이 되면 장사는 못하지 월세는 내야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참고로 미국 도시에 가게를 내려면 해당 도시 시청의 담당직원과 내통이 있는 General contractors 라는 업자를 수배 Occupancy permits을 받아주기로 하는게 좋을 것이다.
다시 이글의 제목 "농연의 39 사랑방과 George khim의 가발가게"로 돌아가 하려는 얘기는 여기 "농연의 39사랑방"이나 "George khim의 가발가게"는 39명이란 농연동지들이 있었기에 서로 교통하며 재밋게 살다가 죽자고 열어 놓은 것이지 개설한 사람이 너는 내입맛에 맞은게 와도 좋고 너는 미운게 안 오는게 좋다고 하면 그게 폭군의 행패가 아닌가?
여기 St.Louis 필자가 조직한 노인조합도 마찬가지다.대학교수도 있고 선생도, 공동묘지 무덤파던 일꾼도 있다. 그중에는 만나면 타고 다니는 자기 차 벤츠 자랑하는 사람, 얘기를 시작했다 하면 끝이 없이 지얘기만 해서 사람들이 필리버스터라는 별명을 붙여놓은 사람 그리고 알면서도 이거 어떻게 고치느냐고 묻기만 하면
"throw itaway"라 해서 "throw it away"라 별명을 부르기도 한다.
허나 사람들은 매일 아침 McDonald's 에서 같이 만난다.
여기 이 "농연의 39사랑방"도 마찬가지다. 農緣으로의 같은 운명 그래서 만나 함께 사랑해온 동지가 동지가 한 말이 그리고 동지가 쓴 글이 잘 쓰면 어떻고 또 못 쓰면 어떤가 ?
또 맘에 들면 어떻고 맘에 안 들면 또 어떻단 말인가 ?
그 ㄴ이 싫으면 clicks을 안하면 되고 사랑방을안들어 오면 되고 안 읽으면 되는것 아닌가?
農緣 그것은 피를 서로 나눈 형제와 같은 것으로 좋다고 형제고 안좋다고 형제가 아닐 수 없듯 우리 농연동지도 마찬가지다.
이 39사랑방은 누가 개설을 했어도 open한 이상 자기 개인 소유가 아닌 공동체의 소유란것을 알아야 한다.
상기의 "George khim의 가발가게"도 자기 것이니 돈벌기 싫으면 닫아버릴 수 있다. 허나 고객손님을 위한 최소의 편의시설이기도 한 toilet이 거짓말로 고장났다고 못쓰게 하는 것에 시청은 변소가 고쳐질 때끼지 가게 문을 못열게 하는 행정명령이 내려지기도 하는 것이다.
바로 지켜져야 하는 공익이 위해 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농연동지 백승부는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
자기가 생각 하는대로, 그것을 말 하는것은 자유다.
이 말 할수있는 자유를 , 통제 당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다른사람을 인정하고, 다른사람의 의견을 판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서로 나란히 모여 살수있 다.
송 죽. 2026. 6. 14"
라고 항변한 것 아닌가?
우린 우리의 자연 "農硏"으로 돌아가야 한다.
거기에 우리가 좋아도 만나야 하고 싫어도 만나야 하는 소이(所以)가 거기에 있고 그리고 목적이 또한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