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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땅의 구별과 치리자 규례
겔 45:1-12
1 너희는 제비 뽑아 땅을 나누어 기업으로 삼을 때에 한 구역을 거룩한 땅으로 삼아 여호와께 예물로 드릴지니 그 길이는 이만 오천 척이요 너비는 만 척이라 그 구역 안 전부가 거룩하리라
2 그 중에서 성소에 속할 땅은 길이가 오백 척이요 너비가 오백 척이니 네모가 반듯하며 그 외에 사방 쉰 척으로 전원이 되게 하되
3 이 측량한 가운데에서 길이는 이만 오천 척을 너비는 만 척을 측량하고 그 안에 성소를 둘지니 지극히 거룩한 곳이요
4 그 곳은 성소에서 수종드는 제사장들 곧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서 수종드는 자들에게 주는 거룩한 땅이니 그들이 집을 지을 땅이며 성소를 위한 거룩한 곳이라
5 또 길이는 이만 오천 척을 너비는 만 척을 측량하여 성전에서 수종드는 레위 사람에게 돌려 그들의 거주지를 삼아 마을 스물을 세우게 하고
6 구별한 거룩한 구역 옆에 너비는 오천 척을 길이는 이만 오천 척을 측량하여 성읍의 기지로 삼아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돌리고
7 드린 거룩한 구역과 성읍의 기지 된 땅의 좌우편 곧 드린 거룩한 구역의 옆과 성읍의 기지 옆의 땅을 왕에게 돌리되 서쪽으로 향하여 서쪽 국경까지와 동쪽으로 향하여 동쪽 국경까지니 그 길이가 구역 하나와 서로 같을지니라
8 이 땅을 왕에게 돌려 이스라엘 가운데에 기업으로 삼게 하면 나의 왕들이 다시는 내 백성을 압제하지 아니하리라 그 나머지 땅은 이스라엘 족속에게 그 지파대로 줄지니라
9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이스라엘의 통치자들아 너희에게 만족하니라 너희는 포악과 겁탈을 제거하여 버리고 정의와 공의를 행하여 내 백성에게 속여 빼앗는 것을 그칠지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0 너희는 공정한 저울과 공정한 에바와 공정한 밧을 쓸지니
11 에바와 밧은 그 용량을 동일하게 하되 호멜의 용량을 따라 밧은 십분의 일 호멜을 담게 하고 에바도 십분의 일 호멜을 담게 할 것이며
12 세겔은 이십 게라니 이십 세겔과 이십오 세겔과 십오 세겔로 너희 마네가 되게 하라
겔 45:1-12 / [새 이스라엘의 토지 분배] 너희가 제비를 뽑아 새 땅을 나누어 갖게 되면 먼저 내 땅을 구별하여 떼어 놓아야 한다. 곧 길이가 동서로 ㄱ) 2만 5천 자요 폭이 남북으로 ㄴ) 2만 자인 땅을 내 것으로 구별하여 바쳐야 한다. (ㄱ. 약 13킬로미터. ㄴ. 약 10킬로미터) 2-3) 너희는 그것을 다시 둘로 나누어 각각 길이가 2만 5천 자요 폭이 1만 자가 되도록 하고 그 남쪽 부분에는 내 성소를 세워 더욱 거룩한 땅으로 삼아라. 내가 와서 머무는 장소는 길이와 폭이 다 같이 500백 자인 정사각형이 되게 하고 그 둘레에는 폭이 50자인 목초지를 두어야 한다. 4) 성소가 있는 이 남쪽의 구역은 나를 섬기는 제사장들이 쓸 땅이다. 제사장들은 그 땅에서 내 성소 주위에 집을 짓고 살며 나머지 땅은 성소를 위하여 거룩하게 쓸 수가 있다. 5) 그 나머지 북쪽 구역, 곧 길이가 2만 5천 자요 폭이 1만 자인 땅은 성소에서 일꾼 노릇을 하는 레위 지파의 후손들에게 주어서 그들의 상속 재산으로 삼도록 하여라. 그들은 그 땅에 거처할 집을 짓고 살 수가 있다. 6) 또 내게 봉헌된 구역과 나란히 펼쳐진 지역에 길이 2만 5천 자에 폭이 5천 자 되는 구역을 두어 예루살렘 도성의 몫이 되게 하여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은 누구나 이 성에 들어와 살면서 그 토지를 상속 재산으로 소유할 수 있다. 7) [왕의 몫] 가로 세로가 2만 5천 자인 이 정사각형의 구역 밖으로 동쪽과 서쪽에 펼쳐진 두 부분의 땅은 각각 국경선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 나라 통치자의 몫이다. 이 봉헌된 땅과 왕의 땅을 합하면 한 지파의 땅과 똑같은 넓이가 된다. 8) 이스라엘 왕이 차지할 몫은 바로 그 두 구역뿐이고 다른 토지는 절대 가질 수 없다. 그러므로 이후로는 내 백성의 왕들이 다시는 내 백성을 압제하거나 착취하지 못할 것이다. 그 나머지 땅은 이스라엘 각 지파대로 그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 9) [통치자들에게 내린 명령] 주 여호와가 말한다. 이스라엘의 통치자들아, 너희는 이제 폭력과 탄압에 종지부를 찍어라! 법을 존중하고 정의에 따라서 나라를 다스려라! 내 백성의 농토와 터전을 강탈하여 수많은 빈민들이 고향을 잃고 헤매게 하는 정치를 종식시켜라! 더 이상 그들을 내 나라의 땅에서 쫓아내지 말아라! 나 주 여호와가 하는 말이다. 10) [새 나라는 공평한 저울로부터] 너희는 곡식을 되는 말이나 물건을 다는 저울이나 포도주와 기름을 되는 그릇의 크기를 속이지 말아라. 11) 곡식을 되는 에바와 액체를 되는 밧의 크기는 꼭같게 만들어라. 그들을 다 호멜을 기준으로 삼아 한 호멜에 밧으로도 열 말이 되고 에바로도 열 말이 되게 만들어라. 12) 무게를 달 때에는 20게라는 1세겔로 하고 50세겔은 1마네로 하고 60마네는 1달란트로 하여라.
본문은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와 오랜 시련이 끝나가는 중에 선지자 에스겔에게 그들의 희망의 계시가 임합니다. 그 중심 내용은 정결하게 된 땅의 회복과 거룩한 성전의 회복입니다.
거룩한 땅으로 삼아 여호와께 예물로 드릴지니(1-3) 본문 1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복되어 약속의 땅에 돌아가서 그 땅을 제비 뽑아 나누어 기업으로 삼을 때(수 13:6; 14:2)에 한 구역을 거룩한 땅으로 삼아 여호와께 예물로 드리라고 합니다. 먼저 거룩한 땅을 측량합니다. 그리고 그 거룩한 땅 가운데에다 성소에 속한 땅을 배정하여 측량합니다(42:15-20). 성전이 세워진 그 정사각형 땅의 사방 둘레에 빈터를 둔 이유는 지리적인 공간이 생기게 하여 성전 외부로부터 올 수 있는 다양한 침입으로부터 성전을 보호하시려는 지혜로 보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서 수종드는 자들에게 주는 거룩한 땅(4-6) 지극히 거룩한 성소 네 방향 주변 거룩한 구역은 제사장들의 몫으로 하고, 그 땅의 나머지는 레위 사람들의 몫으로 주어 거주하게 합니다. 이렇게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거주지조차 구별된 것은 하나님 앞에 봉사하는 직임의 특성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거룩하게 구별된 구역에 잇댄 바로 옆 구역에는 이스라엘 백성이면 누구든지 살 수 있는 공동의 성읍이 조성되게 하였습니다.
이 땅을 왕에게 돌려..다시는 내 백성을 압제하지 아니하리라(7-12) 왕에게 돌려질 지역의 위치는 이 거룩한 구역과 성의 동서쪽 양 옆 땅이 왕의 몫입니다. 왕에게 주어진 지역의 범위는 동서쪽 경계가 이스라엘 각 지파 지역의 동서쪽 경계와 같습니다(48:1-7, 23-27). 이는 다른 지파의 경계를 넘어서면 안 된다는 뜻일 것입니다. 또한 왕은 경제 문제를 백성에게 짐 지우지 말고 자기 몫의 기업을 통해 스스로 해결하라는 의도입니다. 9-12절은 왕의 몫으로 주어진 기업에 대한 부가적 기록으로 권력의 올바른 사용과 공의로운 통치를 하라는 예레미야의 권면과 유사합니다(렘 22:3). 먼저 폭행과 탄압을 그치라는 것이고 공평과 공의를 실행하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경제적인 착취를 멈추고 정확한 저울과 정확한 에바와 정확한 밧을 쓰라는 것입니다. 이는 불공정한 상거래를 버리고 경제적 정의를 실현하라는 것입니다.
적용: 본문의 핵심 메시지는 거룩한 영토와 통치 원리입니다. 지금 우리는 내가 서 있는 그 곳에서 어떻게 거룩함과 성결함을 이룰 수 있을까요?
권력의 남용에 대하여(왕상 21:1-6), 공평한 추에 대하여(잠 11:1; 16:11; 20:10)
‘인생은 B와 D사이의 C’-장 폴 사르트르. 인생은 B(Birth-탄생)시작되어 D(Death-죽음)로 끝나지만 그 중간에 중요한 C(Choose-선택)이 있음을 뜻합니다. 마음의 중심에 따라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결정되고 이뤄질 것입니다. 거룩한 땅 중심에는 성소가 위치하여야 하며 그 의미는 온 땅의 주인이시며 통치자가 바로 하나님이신 것을 기억하고 삶의 우선순위가 언제나 하나님임을 고백하는 의미가 담겨 있었습니다. 내 삶에 중심에는 무엇이 위치하고 있습니까? 물질이나 친구, 명예, 지식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 삶의 가장 귀한 우선순위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맞춰봅시다. 삶 속에서 소중한 자리를 하나님께 드려서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바랍니다.
< 설 교 >
한 구역을 거룩한 땅으로 삼아라
겔 45:1-8 / 손재호 목사
에스겔서는 에스겔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와 있는 중에 본 환상입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이유는 그들이 약속의 땅을 더럽혔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땅만 더럽힌 것이 아니라 그 땅에 세워진 성전도 더럽혔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시기에 말씀을 순종하지 않고 그 땅을 더럽히면 그 땅이 사람을 토하여 내어버립니다. 레위기 18:24-28절을 보면 “너희는 이 모든 일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내가 너희 앞에서 쫓아내는 족속들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더러워졌고 그 땅도 더러워졌으므로 내가 그 악으로 말미암아 벌하고 그 땅도 스스로 그 주민을 토하여 내느니라. 그러므로 너희 곧 너희의 동족이나 혹은 너희 중에 거류하는 거류민이나 내 규례와 내 법도를 지키고 이런 가증한 일의 하나라도 행하지 말라. 너희 전에 있던 그 땅 주민이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였고 그 땅도 더러워졌느니라. 너희도 더럽히면 그 땅이 너희가 있기 전 주민을 토함 같이 너희를 토할까 하노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가나안 원주민들이 행한 가증한 일이란 성적인 타락과 우상숭배를 말합니다. 이런 짓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하면 그 땅이 토하여 낼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을 배반하고 그 땅을 더럽혔기에 그 땅의 토해냄을 당하여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그들에게 에스겔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계시가 주어집니다. 그 계시의 중심은 그들의 죄악을 드러내시면서 그 땅의 회복과 성전의 회복에 있습니다. 그들의 죄로 더럽혀진 땅이 70년 동안 안식하면서 땅과 성전이 다 황폐하여 집니다. 그런데 이런 땅을 새 성전을 통해서 새롭게 하시고 제비 뽑아 기업을 삼게 합니다. 그런데 그때 한 구역을 특별히 거룩한 땅으로 구별하여 정비하라고 하시는 말씀이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 말씀을 살펴보는 가운데 이 말씀을 통해서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계시가 무엇인지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너희는 제비 뽑아 땅을 나누어 기업을 삼을 때에 한 구역을 거룩한 땅으로 삼아 여호와께 예물로 드릴지니 그 장은 이만 오천척이요, 광은 일만척이라. 그 구역 안 전부가 거룩하리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복되어 약속의 땅에 돌아가서 그 땅을 제비 뽑아 나누어 기업으로 삼을 때에 한 구역을 거룩한 땅으로 삼아 여호와께 예물로 드리라고 합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하여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때에 제비를 뽑아서 그 땅을 그들의 기업으로 받았습니다. 지파별로, 가문별로 사람의 수의 많고 적음에 따라서 땅을 분배 받았습니다. 이 땅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용사가 되셔서 친히 앞장서서 싸우시고 백성들에게 무상으로 수여 하신 땅입니다. 그렇게 받은 땅은 여호와의 것이기 때문에 땅의 경계를 옮기지 말아야 하며, 그 땅을 사고 팔 수도 없었습니다. 만약 살림이 어려우면 경작권을 팔수가 있었지만 언제나 고엘이 도로 물릴 수가 있었습니다. 그것도 안 되면 희년이 되면 그 땅이 원래의 주인에게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왜 다시 제비를 뽑아야 하는 것입니까? 이미 이스라엘의 땅이 그들의 죄로 인하여 혼돈의 땅의 되어버린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땅이 공허하고 혼돈한 것처럼 약속의 땅이 혼돈된 상태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비를 뽑아서 각자의 기업을 삼을 때에 거룩한 여호와의 성소를 따로 마련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우선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께 드려질 땅의 위치는 이스라엘의 가장 중심지역입니다. 그 크기와 구조와 기능에 대해서는 에스겔서 48:8-22절에 자세히 나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말씀은 48:8-22절의 요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구역정리는 이스라엘 전체 지파의 구역입니다. 에스겔서 47:13-48:7절과 48:23-29절에 보면 이스라엘 전체 지파의 땅 분배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땅을 분배 받는데 동쪽의 국경지대로부터 남쪽과 북쪽의 국경지대와 서쪽의 바다까지 일직선으로 땅을 분배합니다. 그리고 그 중앙에는 앞에서 본 성소가 자리를 잡습니다. 이런 구역으로 정리가 되는 것이 에스겔서 45장에서 48장까지의 말씀 내용입니다. 물론 그 중에 몇 번에 걸쳐서 다시 보아야 할 제사제도와 사방의 문들과 여호와 삼마에 대하여 우리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이렇게 땅이 정비되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누어진 적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서 아주 부분적으로 땅과 성전이 회복되지만 이렇게 온전하게 기업이 나누어진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말씀을 지금도 메시아를 기다리는 유대인들과 세대주의 자들의 해석은 새로운 성전이 세워지고 이렇게 문자적으로 회복될 것으로 내다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성전의 회복과 땅의 회복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이 그리스도의 피로 한 새사람이 만들어져서 여호와의 성소가 되게 하시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11-22절을 보면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고 했습니다.
더구나 이 구역정리 안에 이방인도 포함이 된다는 말씀이 에스겔서 47:21-23절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그런즉 너희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대로 이 땅을 나누어 차지하라. 너희는 이 땅을 나누되 제비 뽑아 너희와 너희 가운데 우거하는 외인 곧 너희 가운데서 자녀를 낳은 자의 기업이 되게 할지니 너희는 그 외인을 본토에서 난 이스라엘 족속 같이 여기고 그들로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너희와 함께 기업을 얻게 하되 외인이 우거하는 그 지파에서 그 기업을 줄지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는 타국인이 이스라엘에 정착하여 살게 된 자들이라고 제한합니다만 그러나 이방인이 이스라엘에 편입되는 것은 이미 구약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전과 땅의 구역정리는 문자 그대로 구역정리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언약이 완전하게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동서남북은 세상 전부를 말합니다. 이것은 이 세상 전부가 다 거룩한 성전이 된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하나님의 약속이 이 땅에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땅의 경계를 장이 이만 오천척, 광이 일만척의 직사각형으로 말하고, 성소도 장과 광이 오백척의 정사각형으로 말합니다. 요한계시록의 새 하늘과 새 땅에 이루어진 새 예루살렘도 장과 광이 정사각형으로 말씀합니다. 요한계시록 21:16절을 보면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장광이 같은지라. 그 갈대로 그 성을 척량하니 일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장과 광과 고가 같더라”고 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48장의 성문을 볼 때에 다시 자세히 보도록 하겠습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본 환상 중에 새로운 땅의 회복과 성전의 회복은 이 땅에 문자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뜻과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새로운 땅의 분배에 이방인이 참여되는 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실 때에 아브라함으로 인하여 천하만민이 복을 받을 것이라는 내용 중에 이방인도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받은 복이 무엇입니까? 땅과 후손에 대한 약속입니다. 창세기 15:12-21절을 보면 “해질 때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이 임하므로 심히 두려워하더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네 자손은 사대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애굽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곧 겐 족속과 그니스 족속과 갓몬 족속과 헷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르바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의 땅이니라 하셨더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그 땅과 후손이란 이스라엘의 땅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그 언약의 완성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나라가 이 지상에서의 땅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18:36절을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빌라도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는 심문에 예수님께서 답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땅의 회복은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이 되시기에 건물로서의 성전도 더 이상 필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땅이며 성전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아들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골 1:13). 그러므로 에스겔의 구역정리를 보면서 오늘날 어떻게 적용을 해야 합니까? 성령이 거하시는 곳이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산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구역이 정리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마음 가장 중심에 자리 잡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몸과 마음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이 우리 마음 중심에 자리잡고 있습니까? 우리의 몸과 마음을 성전 삼아 성령 하나님께서 계신다고 하셨는데 우리의 마음에 온갖 높은 산과 골짜기와 음행과 우상숭배들로 가득한 것이 아닙니까? 이런 것들을 성령 하나님께서 책망하시고 부수어내시는 것이 바로 오늘날 성전인 성도에게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택한 백성들의 마음에 있는 온갖 죄악과 우상들을 진리의 말씀으로 깨어내시는 것입니다. 환난과 징계를 통해 연단하시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 중심에 모셔 들이게 하는 것입니다. 높아진 마음을 낮추시고 상한 마음을 치료하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거하실 처소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40:1-5절을 보면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대저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이 예언이 누구를 맞이하라는 내용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누가복음 3:3-6절을 보면 “요한이 요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그리스도의 영으로 예언한 내용을 세례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증거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과 성령으로 인하여 책망을 받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오심으로 우리 속에 구역정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주와 그리스도가 아니면 우리 안에는 내가 왕이 되어 혼동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다 부수고 갈아엎어서 구역정리가 되는 것이 바로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이사야 40:6-11절을 보면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을 보라 하라.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으며 그는 목자 같이 양무리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라고 했습니다. 광야의 외치는 소리가 무엇을 전하여야 합니까? 모든 육체는 풀이라고 외쳐야 합니다. 그의 모든 아름다움이 들의 꽃과 같기에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드는 것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기운이 한번 불어버리면 우리는 하루아침에 말라서 불에 던져지는 마른 덤불과 같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소식은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다고 전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이 복음이 우리 안에 들어오는 것이 우리 안에 온갖 것들의 정리가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1-19절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흩어진 나그네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이 세상에서 택함을 입었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언약으로 미리 정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미리 정하신 자들을 성령 하나님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해 택함을 입었습니다. 이런 자들이라면 오늘 말씀이 다 은혜와 평강이 될 것입니다. 미리 정한 자들을 성령으로 거룩하게 하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는 것은 산 소망이 있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산 소망이란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유업인데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간직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스겔이 본 새 땅과 새 성전도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여러 가지 시험이 오히려 연단이 되어 하늘에 소망이 분명해 지기에 크게 기뻐한다고 합니다. 우리 육체의 영광이라는 것은 다 풀과 같습니다. 영원한 것은 오직 주의 말씀 곧 복음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의 혼동된 마음이 복음으로 정리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마음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자리잡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이 거하시는 참된 성전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십일조와 안식일의 정신, 땅은 하나님의 것
에스겔 45장 요약
제사장의 책무와 그에 따른 기업을 전하는 44장에 이어 45장은 왕과 백성의 책무와 그에 따른 기업(땅)의 분배를 전한다. 십일조와 안식일의 정신은 ‘땅은 하나님의 것’임을 선언하는데 있다. 모든 삶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고백이다. 이 믿음은 하나님의 창조를 전하는 창세기로부터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는 요한계시록까지 성서를 관통하는 근본정신이다. 에스겔이 전하는 메시지도 하나님을 삶의 주관자로 고백하는 데 있다. 사람의 지식과 힘이 하나님 노릇하는 시대, 돈과 명예가 왕 노릇하는 시대에서 하나님보다 물질을 사랑하며 돈이 행복의 기준이 된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이들, 하나님의 것을 자신의 것처럼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결코 받아들이기 힘든 말씀이다.
오직 하나님만을 경배(예배)하는 삶을 이토록 강조하는 이유는 뭘까? 모든 삶(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이 원리를 놓치면 소중한 삶을 헛된 물질에 허비하게 되는 까닭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들의 삶의 기반이 되어 주신다. 안식일과 십일조의 정신을 지키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두고 살아가는 이들은 물질의 노예로 탐욕의 노예로 살지 않을 수 있다. 신명기 6장 일명 쉐마가 전하는 정신 또한,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우상으로 섬기며 살지 말라는 경계에 있다. 오직 하나님의 통치를 최고의 가치에 두고 섬기며 살아가라는 명령이다. 쉐마를 삶의 원칙으로 삼아야 비로소 물질과 명예, 권력과 쾌락에 삶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다. 십일조와 안식일의 정신 곧 땅(생산수단)이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는, 하나님을 사랑하며 사는 이들에게 삶의 행복과 풍성함을 보장 하시겠다는 변함없는 언약이다.
1. 땅은 하나님의 것 (안식일과 십일조의 정신)
➀ (1절 전반부) “너희는 제비 뽑아 땅을 나누어 기업을 삼을 때”
▶ ‘너희는’ 이스라엘 백성들 곧 하나님께 속한 백성(ό λαος του θεου)들을 가리킨다. 누가 하나님의 백성(λαος)인가? 오직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이들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삶의 증거가 바로 예배(경배)다. ‘제비를 뽑아 땅을 나누어’ (잠언16:33) ‘사람이 제비를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땅을 분배하는 결정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말씀은 ‘땅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선언이다. 땅은 삶을 위한 기업과 생산수단을 통칭하는 은유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경배(경외, 예배)하는 백성에게 땅을 기업으로 주시고 친히 먹이시고 입히시겠다는 보증(guarant)이다. 이집트 노예들의 기업(생산수단)은 파라오였다. 충성과 노동의 보상으로 의식주를 제공했다.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라’ 출애굽기 8장과 9장에 반복되는 메시지는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백성들의 기업이 되시겠다는 보장이다. 파라오의 노예에서 하나님의 예배자로의 존재적 변화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들에게 삶의 기반이 되어 주신다는 말이다.
➁ (1절 후반부) “한 구역을 거룩한 땅으로 삼아 여호와께 예물로 드릴찌니”
▶ 백성들을 위한 땅을 나누기 전에 먼저 거룩한 땅을 구별하여 예물로 드릴 것을 명하시는 까닭은 삶의 우선순위를 증거 한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은 나중에, 남은 것, 모아둔 것이 아니라 즉시, 온전히, 기쁘게 드려야 한다. 땅은 하나님의 소유이며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은 강요나 수단이 아니라 땅은 하나님의 것이며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고백하는 이들이 하는 믿음의 선택이며 그에 따른 고백이다.
③ (마6장25절~33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 본문의 ‘너희는’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들이라는 차원에서 동일하다. (출16:20) ‘그들이 모세의 말을 청종치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 광야에서 만나를 모아둔 진짜 이유는 자기를 섬기는 백성들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내려 주시는 하나님의 신실함에 대한 불신앙 때문이었다. 오경에 반복해서 전하는 ‘안식일(안식년, 희년)의 준수’와 ‘온전한 십일조(구별된 예물)의 강조’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대표적인 상징이다. 하나님은 자기를 섬기는 백성에게 생산수단을 공급하시는 분이라는 믿음의 척도다.
▶ 구약의 십일조는 신약의 연보로 포괄되었고, 예수께서 부활하신 안식 후 첫날을 ‘주님의 날(the Lord's day)’로 정해 안식일의 정신을 지켜왔다. 안식일의 정신을 주님의 날로 지켜서 하나님의 주신 삶임을 기억하고 십일조의 정신을 연보에 담아 나에게 부여된 모든 생산수단이 본래 하나님의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안식일이든 주일이든, 십일조든 연보든 간에 그 규례에 담긴 정신은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자들이 마땅히 지켜야할 의무라는 점은 변함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것(소유)’이라는 고백은 물질과 명예, 권력과 쾌락의 노예로 살지 않을 수 있도록 자신을 경계하는 유용한 도구인 까닭이다. 안식일과 십일조의 정신을 여전히 지켜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2. 삶의 우선순위 (삶은 어디서 오나?)
➀ (4절~8절) “그 땅의 거룩한 구역이라 여호와께 가까이 나아가서 성소에서 수종드는 제사장에게 돌려 그 집을 위하여 있는 곳이 되게 하고...그 나머지 땅은 이스라엘 족속에게 그 지파대로 나눠 줄찌라”
▶ 땅을 구역에 따라 순차적으로 나누는 순서가 중요하다. ‘하나님의 거하시는 성소’와 ‘제사장’, ‘레위인’, ‘기지(공유지)’, ‘왕’, 그리고 ‘나머지 땅을 그 지파들에게’ 차례로 나누고 있다. 성소를 중심으로 밖으로 점차 확장되는 모양새다. 특권이나 지위에 따른 순서나 배치가 아니다. 삶의 우선순위와 삶의 중심이 하나님께 있음을 거듭 강조한다.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유는 이 원리를 거꾸로 살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회복은 이 원리를 복원하는 데 있다. 신대륙개척자들인 청교도들이 교회를 먼저 세우고 정착했던 삶의 방식과 전통적인 유럽의 도시들이 광장과 중앙에 교회를 세운 모습이 실 예다. 백성들에게 지파별로 땅을 나누는 장면은 이후 48장에 자세히 기록된다.
➁ (신6:4~5)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 쉐마 이스라엘(שמע ישראל)의 정신은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곧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우상으로 섬기지 말라는 말씀에 초점이 있다. 하나님만을 최고의 가치로 섬기며 살아가라는 준엄한 명령이다. 예수께서는 사단이 천하만국의 영광으로 유혹하며 자신에게 경배하라는 시험을 물리치실 때 이 말씀을 인용하셨다. (마4:10) ‘주 너의 하나님을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쉐마를 삶의 원칙으로 삼을 때 하나님의 주신 소중한 삶을 물질과 명예, 권력과 쾌락에 빼앗기지 않는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척도가 바로 ‘예배(경배)’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최우선에 가치에 두는 쉐마는 오늘날까지 유대인들의 변함없는 교육철학이다. 자녀들을 위해 물질적인 풍요를 유산으로 남겨주는 것은 복이 아니라 독이다.
③ (겔 47장 12절)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실과 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실과가 끊치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실과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로 말미암아 나옴이라 그 실과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
▶ 왜 성소로부터 백성들의 순으로 분배하는가? ‘그 물이 성소로 말미암아 나옴이라’ 성소로부터 나온 물이 강이 되고 바다로 흘러가며 생명을 공급하는 장엄한 비전을 통해 생명(Life, 삶)이 성소로부터 흘러나옴을 증거 한다. (잠4:23)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모든 삶(생명)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 모든 삶은 예배에서 시작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존재가 의식을 결정 한다’는 신념으로 산다. 이런 의미에서 공산주의의 원리인 사적 유물론과 자본주의의 원리인 물질만능주의는 샴쌍둥이다. 행복한 삶의 조건을 물질에서 찾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경은 ‘의식이 존재를 결정 한다’고 끊임없이 역설한다. ‘창조신앙과 진화론’, ‘유물론과 관념론’, ‘무신론과 유신론’, ‘인간중심주의와 신중심주의’와의 근본적인 차이는 바로 여기에 있다.
3. 왕과 백성의 책무
➀ (9절~12절) “이스라엘의 치리자들아 너희에게 족하니라. 너희는 강포과 겁탈을 제하여 버리고 공평과 공의를 행하여 내 백성에게 토색함을 그칠찌니라”
▶ 백성들의 치리자인 왕의 본분은 관리자인 청지기(steward)다. 하나님의 통치권을 위임 받은 섭정(攝政:regent)일 뿐이다. 백성들은 우상숭배로 도탄에 빠지고 치리자인 왕은 백성들을 수탈하는 데만 급급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삶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경외하고 삶의 기반이 되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본분을 망각해서 벌어진 참담한 결과물이다. 부정한 저울과 불공평한 추로 인한 빈익빈 부익부는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소위 경제민주화로 대변되는 공평과 공정은 하나님의 뜻이다. 이를 실현하는 것이 ‘왕의 본분’ 곧 위임받은 왕의 책무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에 왜 가난한 이들이 존재하는가? 하나님이 허락하신 만물은 모든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기에는 충분하지만 특권층의 탐욕을 채우기에는 한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➁ (13절~17절) “이 땅 모든 백성은 이 예물로 이스라엘 왕에게 드리고 왕은 본분대로 번제와 소제와 전제를 절기와 월삭과 안식일과 이스라엘 족속의 모든 정한 절기에 드릴찌니”
▶ 왕과 백성의 새로운 역할과 책무를 규정한다. 백성은 왕에게 예물을 드리고 왕은 그 예물로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데 사용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을 떠나 우상숭배를 자행했고 왕은 백성들을 강포하고 수탈하는데 급급했다. 하나님의 통치에 따라 이제 백성과 왕의 역할이 달라진다. ‘이 땅 모든 백성은...왕은 본분대로’ 백성과 왕의 본래적인 사명이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경배 곧 예배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겔34:23) ‘내 종 다윗을 보내리니’ 다윗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왕을 가리키는 은유다. 하나님의 통치로 새롭게 세워질 왕은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 예배의 주관자로, 공평과 정의를 실현하는 중보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이는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인간 사이에 참된 중보자가 되신 예수그리스도의 통치를 예표 한다.
4. 속죄제와 유월절
➀ (18절~20절) “정월 초하룻날에 흠 없는 수송아지 하나를 취하여 성소를 정결케 하되...모든 그릇 범죄한 자와 부지중 범죄한 자들을 위하여 역시 그렇게 하여 속죄할찌니라”
▶ 정월 초하룻날(유대력이 시작되는 아빕월)에 성소와 죄인을 정결케 하는 속죄제를 먼저 드릴 것을 명하신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서는 반드시 회개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제사보다 긍휼을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나가는 유일한 길 곧 예배의 참된 자세는 긍휼과 회개뿐이다. ‘주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예배의 본질은 희생 곧 자기부인이다. 자기부인이 아니라 자기과시로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 앞에 가증한 일이 될 뿐이다.
▶ 이스라엘의 타락은 예배를 안 드린 것이 아니라 예배를 오용해서 잘못 드렸기 때문이다. 오늘날 십일조와 안식일의 규례에 대한 형식적인 논쟁 보다 그 규례가 전하는 내용을 밝히고 그 정신을 온전하게 지키는 것, 즉 ‘온전함’에 힘써야 한다. 구약의 십일조이든 신약의 연보이든 그 정신은 하나다. 물질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섬기며 살겠다는 고백이다. 구약의 안식일을 지키든 신약의 주일을 지키든 그 정신도 하나다. 오직 하나님의 통치와 그 뜻을 추구하며 살겠다는 고백이다.
➁ (21절~25절) “정월 십 사일에는 유월절 곧 칠일 절기를 지키며 누룩 없는 떡을 먹을 것이라”
▶ (신16:1) ‘아빕월을 지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유월절 예식을 행하라 이는 아빕월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밤에 너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이라’ 유월절로부터 아빕월이 시작된다. 유월절 어린양을 잡아 문지방과 문설주에 바르고 머리와 내장과 정강이를 불에 구워 먹고 나머지는 태웠다. 죽음의 사자로부터 출애굽의 구원을 누린 유월절 사건은 구약에서 제시된 모든 예배의 시초이자 표상이다.
▶ (신16:3) ‘유교병을 그것과 아울러 먹지 말고 칠일 동안은 무교병 곧 고난의 떡을 그것과 아울러 먹으라 이는 네가 애굽 땅에서 급속히 나왔음이니 이같이 행하여 너희 평생에 항상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온 날을 기억할 것이니라’ 유월절의 핵심은 기억(기념, Memorial)이다. ‘과거’에 노예로 살던 애굽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마음에 새겨 ‘지금’ 이 순간에 기억하는 것이다. 죄악으로부터 삶을 구원하는 능력은 나의 공덕과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 (눅12:1) ‘그 동안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누룩 없는 떡에 담긴 메시지는 뭘까? 예수께서 고발하신 바리새인들의 누룩은 ‘외식’이다. 외식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자기 의를 드러내는 신앙행위를 가리킨다. 자기부인이 아니라 자기과시로 드려진 예배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가 아니라 도리어 살아계신 하나님을 멸시(무시)하는 일이다. 자기자랑과 자기영광을 위해 외식하는 신앙행위(예배, 기도, 찬양, 봉사, 헌금 등)는 제 아무리 크고 화려해도 가인의 제사처럼 결코 하나님께 열납 될 수 없다. 하나님은 외모가 아니라 우리의 중심을 감찰하신다. 모든 신앙행위는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 날마다 중심을 그분 앞에 반듯하게 세우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우리의 물질이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마6:21)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이 말씀은 모든 시대를 넘어 변함없는 진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