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120
1월31일[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연중 제3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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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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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Rn2fJN7X2kQ
[살레시오회 신윤민 요셉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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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힘들면 언제든지 오라토리오로 달려오너라. 내가 네 아버지가 되어줄 테니!>
돈보스코의 제자 중에 아버지로부터 상습 폭행과 아동 학대를 받던 펠리체 레빌리오가 돈보스코의 오라토리오에 들어오게 된 스토리가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아버지는 어린 펠리체에게 하루 온종일 중노동을 시키고 먹을 것을 제대로 주지 않았습니다. 한창 성장기에 있어 밥 먹고 돌아서면 배고팠던 아이는 혹독한 굶주림에 늘 울고 다녔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돈보스코가 아버지 몰래 펠리체를 찾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펠리체! 얼마나 힘드니? 얼마나 배고프니? 혹시라도 더 이상 안되겠다 싶은 생각이 들땐, 도망쳐서 오라토리오로 달려오너라. 내가 네 아버지가 되어줄 테니.”
더 이상 아동 거듭되는 아동학대와 굶주림을 견디기 힘들었던 펠리체는 마침내 가출을 한 다음 돈보스코의 오라토리오로 달려왔습니다. 안그래도 죽을 고생을 하고 있던 펠리체를 목빠지게 기다리고 있던 돈보스코는 만면에 가득 미소를 짓고, 두 팔을 활짝 펼치며 펠리체를 온 몸과 마음으로 끌어 안았습니다. 펠리체는 그 은혜로웠던 순간을 평생 잊지 못하며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제가 죽을 만큼 힘들었던 순간 돈보스코가 보여주었던 친절과 자비와 환대는 죽어도 잊지 못할 것입니다. 제가 돈보스코에게로 달려갔을 때, 어머니 맘마 마르가리타는 굶주린 제게 따뜻한 스프와 빵을 마음껏 먹도록 준비해주셨습니다. 이어서 두 분은 손수 제 잠자리를 챙겨 주셨습니다. 이렇게 저는 돈보스코 오라토리오에 받아들여진 두 번째 아이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돈보스코의 오라토리오는 가난하고 버림받은 청소년들을 기꺼이 환대하고, 양육시키고, 성장시키고, 성화시키는 본당이요, 학교요 운동장이 되었습니다.
지난 주 광주대교구 용봉동성당 설립 25주년 기념 특강을 다녀왔습니다. 놀랍게도 용봉동성당 주보 성인이 돈보스코였습니다. 사목적 열정으로 가득한 주임 신부님께서는 본당 설립 25주년을 맞이하여 교우들과 함께, 향후 10년을 위한 시노드 작업을 하셨습니다.
8가지 실천 과제를 마련하셨는데, 그 가운데 청소년과 청년을 위한 실천 과제 첫 번째 항목이, 본당 안에 청소년과 청년을 위한 공간-오라토리오-마련하기였습니다.
점점 노쇠화되어가는 우리 가톨릭교회입니다. 청소년과 청년들 얼굴 보기가 하늘에 별따기인 우리 교회입니다. 이런 면에서 용봉동 성당에서 준비하고 있는 본당내 청소년•청년을 위한 공간(오리토리오) 마련하기는 정말이지 큰 의미로 다가옵니다.
청소년•청년들이 교회를 떠나가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일까, 성찰해봅니다. 그들이 선호하는 역동성과 활력의 심각한 부족이 아닐까요? 적극적인 환대와 배려의 부족이 아닐까요? 호감과 매력의 상실이 아닐까요?
오늘 우리 교회의 현실을 진지하게 고민해봅니다. 오늘 우리 본당과 수도회, 수녀회는 진심으로 청소년과 청년들을 환대하고 있습니까? 그들이 우리 울타리에 들어와서 신명나게 기도하고 역동적으로 뛰어놀고, 기쁨과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꺼리’들이 준비되어 있는가요?
오늘 돈보스코 축일을 맞이하며, 우리 모든 사목자들 안에 그분께서 살아생전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그 뜨거운 사목적 열정이 되살아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아이들 한명 한명에게 기울였던 그 각별하고 개별적인 사랑이 흘러넘치기를 기원합니다.
청소년을 사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앞에 그들로부터 사랑받는 교육자들이 더 많아지길 기도합니다. 오늘 우리 교육자들, 과연 아이들로부터 사랑받고 있습니까? 그런 체험을 단 한 번이라도 해본 적이 있습니까?
사랑은 일방적이어서는 결코 오래가지 못합니다. 우리 사목자들, 교육자들이 우리에게 맡겨진 양들을 사랑하는 것도 무척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양들로부터 사랑받는 것입니다. 그 체험은 양들을 위한 더 깊은 헌신과 희생에로 우리를 인도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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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NGY-dc8Epf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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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랑은 지칠 수 없는 이유>
오늘 복음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첫 번째는 하느님 나라는 땅의 씨가 누구도 모르게 자라듯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는 내용이고, 두 번째는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아서 어떤 것보다 작지만, 땅에 뿌려지면 큰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깃들일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관한 같은 내용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행복입니다. 행복은 그 씨앗이 뿌려져 저절로 자라게 되고 그 열매를 맺게 되면 많은 이들에게 쉼과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씨앗은 사랑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들에게 사랑은 마치 씨앗처럼 떨어지고 그것이 나중에 열매를 맺게 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다가 지치는 이유는 사랑이 씨를 뿌리는 행위이지, 그것을 자라게 하는 것은 하늘이 하는 일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교사 K씨는 학급의 문제아 A군을 변화시키려 열정을 쏟았습니다. 그러나 A군이 1년 동안 변하지 않자 ‘내 능력 부족’이라 생각하며 포기했습니다.
훗날 A군은 K씨에게 “선생님이 매일 말 걸어준 게 제게 희망이었습니다.”라고 고백했지만, K씨는 이미 교직을 떠난 후였습니다. 교사 K씨는 자신이 씨도 뿌리고 열매도 맺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열매만 바라고 있으니 씨를 뿌리는 것에서부터 가치가 있었던 일이었음을 깨닫지 못하고 지쳐버렸던 것입니다. 이런 일은 부부 사이에서도, 친구 사이에서도, 모든 관계에서 일어납니다.
제임스 그레고리와 넬슨 만델라의 이야기입니다. 그레고리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교도관으로, 아파르트헤이트 정책 아래에서 흑인들을 열등하게 보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넬슨 만델라를 감시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고, 처음에는 그를 단순한 ‘범죄자’로 여겼습니다. “넌 그냥 테러리스트일 뿐이야!”라고 말하며 냉담하게 대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레고리는 만델라의 인간적인 면모를 발견하기 시작했습니다. 만델라는 그레고리에게 존중과 친절로 대하며, 그의 아들에게 줄루어를 가르쳐 주기도 했습니다.
그레고리는 점차 만델라의 리더십과 인간성에 감화받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만델라가 수감 생활 중에도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고, 동료 수감자들과 교도관들에게까지 존중과 사랑을 베푸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용서는 분노와 증오의 쇠사슬을 끊는 것이다,”라는 만델라의 말은 그레고리에게 사랑이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시간과 인내를 요구하는 실천임을 깨닫게 했습니다. 그레고리는 만델라와의 교류를 통해 자신의 편견을 완전히 버렸고, 두 사람은 평생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나는 만델라를 통해 진정한 인간성을 배웠다.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희생과 인내를 요구하는 실천임을 깨달았다.”라고 그레고리는 고백했습니다.
넬슨 만들라는 지치지 않았습니다. 그저 씨를 뿌릴 뿐이었습니다. 넬슨 만델라는 27년의 수감 생활을 마치고 남아공 대통령이 되었을 때 취임식 날 그레고리를 초대하였습니다. 그가 이런 열매를 기대하고 사랑하고 용서했다면 분명 지쳤을 것입니다. 27년을 버티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사랑은 그저 씨앗을 뿌리고 나머지는 주님 뜻에 맡기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지치지 않았고 그래서 때가 되었을 때 많은 소출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 예로, 마더 데레사와 빈민굴 청년의 이야기를 들 수 있습니다. 마더 데레사는 인도 콜카타의 빈민굴을 방문하며 가장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들을 돌보았습니다. 어느 날, 그녀는 한 청년을 만났습니다. 청년은 술에 찌들어 방탕한 삶을 살고 있었고, 방 안은 어둠에 싸여 있었습니다. 마더 데레사가 그의 방에 들어가 등잔불을 켜려 하자, 청년은 화를 내며 등불을 껐습니다. 그러나 마더 데레사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청년의 방에 등잔불을 켜 놓고 떠났습니다. 마더 데레사가 다시 방문했을 때 청년은 등잔을 창문 밖으로 던져 깨버렸습니다. 하지만 마더 데레사는 다시 새로운 등잔을 사서 방에 가져가 불을 켜 놓고 떠났습니다. 10년이 지난 어느 날, 마더 데레사 사랑의 선교 수녀회의 한 젊은 수녀가 그 빈민굴을 방문했습니다. 그곳에서 수녀는 그 청년을 다시 만났습니다. 청년은 이제 깨끗한 옷을 입고 직장도 다니며 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청년은 수녀에게 말했습니다. “그 키 작은 그 수녀에게 전해주시오. 그때 그분이 내 방에 켜 놓은 빛이 아직도 내 마음 안에서 빛나고 있다고.”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시간과 인내를 요구하는 실천입니다. 우리가 상대방이 즉각적으로 변하지 않아도 꾸준히 사랑을 베풀 때, 그 사랑은 절대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라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은 나의 일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은 씨를 뿌리는 것과 같습니다. 열매가 늦게 맺어질지라도, 우리는 실망하지 말고 끝까지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만델라와 마더 데레사처럼, 우리도 상대방이 즉각적으로 변하지 않아도 꾸준히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그러면 사랑은 식을 수 없습니다. 농부는 주인이 주는 씨를 뿌리면 그만입니다. 뿌리지 않으면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인은 계속 씨를 주십니다. 그러니 주님이 지치지 않는 이상 그 씨를 뿌리는 이도 지칠 수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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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달라스는 ‘눈’이 내리면 학교도, 성당도 문을 닫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지난 1월 9일에 달라스 지역에 눈이 내렸습니다. 전날 이미 학교는 문을 닫는다고 공지했습니다. 저는 처음 경험하는 일이라서 상황을 지켜보았습니다. 오전부터 내리던 눈은 오후에도 계속 내렸고, 교우들의 안전을 고려해서 성당 미사도 중단했습니다. 달라스가 눈 때문에 성당 문을 닫아야 했다면 캘리포니아 지역에는 엄청난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많은 재산 피해가 있었고, 소중한 인명이 다치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제가 있던 뉴욕에서는 눈이 온다고 학교 문을 닫거나, 성당의 미사가 중단되는 예는 없었습니다. 눈에 대한 대비책이 잘 되어 있고, 눈이 내려도 제설차가 눈을 치우기 때문입니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라야 한다고, 달라스에 왔으니, 달라스의 상황을 따르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미사가 중단되었고, 약속도 취소되었습니다. 그렇게 이틀 동안 평소에 시간이 없어서 읽지 못했던 책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트렌드 코리아 2025’을 읽었습니다. 책 내용 중에 ‘옴니보어(Omnivore)’라는 말이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옴니보어라는 말은 형식, 세대, 성별, 나이로 구분되던 삶의 유형이 통합된다는 의미입니다.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사람의 평균 수명이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인터넷과 AI의 결합으로 세상의 모든 사람이 실시간으로 소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유년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라는 삶의 과정을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그런 삶의 과정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100세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청년기에라도 ‘스타트업’으로 큰 사업을 할 수 있습니다. 노년기에도 ‘인턴’으로 스타트업에 입사해서 자기의 경험을 나눌 수 있습니다. 맞벌이로 바쁜 부모를 대신해 조부모가 손자와 여행을 가기도 합니다. 조부모의 건강과 능력이 뒷받침되기 때문입니다. 스포츠 관람도 예전에는 남성이 많았지만, 요즘은 여성 관객이 더 많습니다. 남성이 여성이 하던 일을 즐겨하기도 하고, 여성이 남성이 하던 일을 즐겨하기도 합니다. ‘옴니보어’의 시대에 시간은 직선으로 흐르지 않고, 순환하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쉼표를 찍어 놓은 곳을 우리가 마음대로 마침표를 찍을 필요가 없습니다.
‘옴니보어’의 원조는 누구일까요?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Omnibus Omnia)’이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한때 자신이 지니고 있었던 육체적인 힘과 재능과 엄청난 에너지를 자랑하고 다녔습니다. 정통 유다인이자 동시에 로마 시민권자, 전도유망한 율법 교사로서 자부심도 대단했습니다. 바오로 사도 안에는 세상 것들에 대한 욕심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의 극적인 만남을 통해 바오로 사도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회심 이후 바오로 사도가 한 첫 번째 일은 자신 안에 가득 차 있었던 세상의 것들을 말끔히 비워내는 일이었습니다. 비워낸 그 자리에 전혀 새로운 가치관인 예수 그리스도로 가득 채우는 일이었습니다. 그 결과 바오로 사도는 ‘모든 이에게 모든 것’(Omnibus Omnia)이 될 수 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런 마음으로 ‘이방인을 위한 사도’가 될 수 있었습니다.
‘옴니보어’의 원조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는 선한 사람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더 기뻐하신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착한 목자는 우리에 있는 아흔아홉 마리의 양보다 잃어버린 양을 찾아 밤을 새운다. 잃어버린 양을 찾은 착한 목자는 더 기뻐한다.” 사제는 성찬의 전례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해 내어줄 내 몸이다.” 교회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해야 합니다. 교회는 모든 이의 모든 것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바로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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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의정부교구 김동희 모세 신부님]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저절로 자라나는 씨의 비유와 겨자씨의 비유, 이 두 비유의 핵심은 ‘자라나는 것’ 곧 성장에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너와 나, 우리가 하느님 안에서 성장해 가는 데 그 핵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성장에는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바로 그것이지요. 씨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자신이 죽어서 자신 안에 있는 참생명을 틔우지 못하면, 그렇게 먼저 자신이 싹을 틔우고 그 씨를 성장시키는 양분이 되지 못하면 그 씨는 돌덩이와 다름없습니다.
흙 곧 땅은 씨앗을 감싸고 그 씨앗이 스스로 열도록 수분과 온기를 건네며 기다립니다. 씨앗은 여기에 화답하여 자신을 열고, 내주며, 스스로 죽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장하기 위하여 자신을 죽인다는 것은 나 자신 그대로 있고자 하는 안온함과 익숙함을 버리는 것입니다. 나 스스로 성장하려는 터무니없는 욕심을 버리는 것입니다. 나를 참으로 감싸고 있는 땅과 나의 내밀한 이야기가 필요합니다.
내가 열리기 시작하면 나와 우리의 성장은 예측하지 못할 정도로 빠르고 거대하게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마르 4,32) 이 말씀 그대로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요한 보스코 성인은 자기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넓은 그늘을 드리우고 격려의 손길을 건넨 분입니다. 많은 젊은이를 품고 돌보았는데 모두 저마다 각별한 사랑을 체험하였다고 합니다. 풍성한 열매를 맺은 참으로 놀라운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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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4,26-34: 씨앗은 싹이 트고 자라나지만, 사람은 모른다.
우리가 우리 마음에 좋은 뜻을 품는다면, 그것은 땅에 씨를 뿌리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 씨가 어떻게 싹이 터서 자라는지 자신은 알지 못한다. 자기 안에 심어져 자라나고 있는 덕이 얼마나 성장했는지 아직 헤아릴 수 없다. 땅이 은총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열매를 맺듯이, 인간도 그렇게 스스로 선행의 열매를 맺는다. 그 열매들이 영글면 곧 낫을 댄다. 추수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31절) 하느님 말씀의 씨앗에서는 커다란 나무와 같이 자라며, 이 나무는 바로 세상 곳곳에 세워진 교회이다. 이 교회에 하늘이 새들, 곧 하느님의 천사들과 사람들이 그 가지에 깃든다. 주님은 겨자씨였다. 그러나 백성들은 그분을 겨자씨로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은 당신이 누구신지를 보여주시려고 잘게 부서지기를 원하셨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나라이다. 겨자씨처럼 동정녀의 태라는 정원에 뿌려지신 그분은 십자가 나무로 자라셨고, 그 가지들은 온 세상으로 뻗어나갔다. 수난의 절구에 빻아진 그분의 열매는 그분과 관계를 맺는 살아있는 모든 피조물이 맛을 지니고 보존될 수 있도록 넉넉한 양념이 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당신이 빻아짐으로써 당신 안에서 우리 모두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모든 것이 되셨다.
그분은 당신 정원, 교회에 씨를 뿌리셨다. 교회는 온 세상으로 퍼져가는 정원이다. 복음의 쟁기로 갈고, 가르침과 규율의 말뚝으로 울타리를 치고, 사도들의 노고로 온갖 해로운 잡초를 제거한 정원이다. 이 정원에 향기롭고 사랑스러운 영원한 꽃들인 동정녀들의 백합과 순교자들의 장미꽃이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모든 이의 푸른 풀밭과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의 부드러운 초목 가운데 자리 잡은 아름다운 정원이다. 이들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당신 정원에 뿌리신 겨자씨이다. 그분은 성조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씨를 뿌리셨고, 예언자들은 싹을 틔웠고, 사도들은 크게 자라게 하였다. 그 씨앗은 교회 안에서는 큰 나무가 되어, 선물 즉 은총을 실은 수많은 가지를 뻗었다. 우리에게 있는 씨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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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하느님은 ‘모든 것’의, 또 ‘모든 일’의 주님이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또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 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 수확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이처럼 많은 비유로 말씀을 하셨다.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당신의 제자들에게는 따로 모든 것을 풀이해 주셨다."(마르 4,26-34)
1)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는 하느님 나라의 건설 과정에 초점을 맞춘 비유이고, ‘겨자씨의 비유’는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었을 때의 모습에 초점을 맞춘 비유입니다. 그리고 두 비유 모두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의 위대함을 강조하는 비유입니다.
여기서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열매를 맺게 하시는데”라는 뜻입니다. 인간의 눈으로 볼 때에는 저절로 열매를 맺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라는 말씀의 뜻은, “인간은 하느님의 일을 알아보지 못할 때가 많다.”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들 모르게 일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들이 보려고 하지 않고, 믿으려고 하지 않아서 못 알아보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이 창조된 때부터,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본성 곧 그분의 영원한 힘과 신성을 조물을 통하여 알아보고 깨달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변명할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을 알면서도 그분을 하느님으로 찬양하거나 그분께 감사를 드리기는커녕, 오히려 생각이 허망하게 되고 우둔한 마음이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지혜롭다고 자처하였지만 바보가 되었습니다."(로마 1,20-22)
<여기서 ‘그들’은 ‘불의로 진리를 억누르는 사람들’입니다.(로마 1,18)>
2)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는, ‘일’은 하느님께서 하시고, 인간은 협력자일 뿐이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의 주님이신 분이고, ‘모든 일’의 주님이신 분입니다. 주님께서 주님 뜻대로 하실 것이니, 우리가 걱정하거나 불안해 할 이유가 없습니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이 잘 되고 있다고 교만해도 안 되고, 잘 되지 않는다고 좌절해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또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을, 최선을 다해서 하면 되고, 결과는 주님께 맡겨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믿는 사람들의 올바른 태도입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마태 6,31-34)
<이 말씀은 먹고사는 문제에 관한 말씀만은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 건설에 관한 일과 교회 운영에 관한 일도 모두 포함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당신의 나라이고, 교회는 당신의 집이니, 당신이 알아서 하실 것입니다.>
3) ‘겨자씨의 비유’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인간의 생각을 초월한다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눈으로 볼 때에는 작고 초라하고 보잘것없더라도, 하느님께서는 그런 것에서 위대한 결과를 만들어 내십니다.
<우리 눈에는 놀랍게만 보이지만, 하느님께는 당연한 일입니다. 반대로, 인간의 눈으로 볼 때에는 대단하게 보이는 것이라도, 하느님께는 아무것도 아닌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마태 10,16)
이 말씀은, 이리 떼 가운데로 들어가서 하나의 겨자씨가 되라는 명령입니다. 두려워하지도 말고, 결과를 미리 예단하지도 말고, 각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묵묵히 수행하면 됩니다.
“뱀처럼 슬기롭고”라는 말씀에서 ‘뱀’은 지혜를 상징합니다. 그 지혜는 세속의 처세술 같은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따르는 신앙인의 지혜입니다.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는 말씀에서 ‘비둘기’는 평화와 온유함의 상징입니다.
이리 떼 같은 세상 한가운데에서 하나의 겨자씨가 되는 일은 갈등과 분열과 싸움을 일으키는 일이 아니라, 이 세상에 ‘주님의 평화’를 심고 키우는 일입니다. 겨자씨가 아주 작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위한, 주님의 겨자씨’ 라는 점이 중요할 뿐입니다.
신앙인은 언제나 어디서나 항상 ‘주님의 겨자씨’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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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비유는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 사용하셨던 가르침의 한 방식입니다. 오늘 첫째 비유는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로 불립니다. 땅에 뿌린 씨는 저절로 자랍니다. 농부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것이 어떻게 자라는지도 모릅니다. 씨가 자라 수확 때가 되면 열매를 거두어들일 뿐입니다.
자연의 변화는 위대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위하여 아무런 수고도 들이지 않지만, 봄이 되면 싹을 틔워 꽃을 피우고 여름에는 무성한 잎을 보여 주며 가을에는 열매를 맺습니다.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을 만큼 놀랍거나 화려하지 않아 그들에게는 이 모든 일이 저절로 일어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늘 그렇기 때문에 당연하다고 여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늘 그렇게, 당연하게, 저절로 이루어지는 일은 없습니다. 그 변화를 일상에서 느끼지 못할 정도로 우리의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하고 있을 뿐입니다. 사람들은 없던 싹이 나고 잎이 나며 꽃이 피고 열매를 맺을 때만 관심을 가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싹이 자라는 과정을 하느님 나라에 비기십니다. 놀라운 변화이고 생명의 성장이지만, 우리는 농부처럼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모릅니다. 하느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상의 매 순간에 현존을 알아채지 못하지만 그렇게 우리 안에서 “저절로”, 곧 하느님의 섭리로 충만해집니다.
지금 우리는 다른 여느 때보다 우리를 포함한 창조물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공동의 집’인 우리 삶의 터전이 오염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눈을 돌려 주위의 모든 것에 관심을 가지고 ‘더불어’ 살아가는 것을 고민하며 실천해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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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신우식 토마스 신부 신부님]
마르코 복음서의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 자체를 말합니다. 하느님 나라에 인간의 욕심과 욕망, 이기적인 삶으로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의 노력만으로 하느님 나라가 우리에게 온 것이라고 여겨서도 안 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고, 겨자씨가 뿌려져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를 뻗듯 모든 민족들에게 퍼져 갑니다.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는 우리 모두 그 완성을 기다리듯이 그분의 나라를 위하여 성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저절로 자라나는 씨앗의 비유’와 ‘겨자씨의 비유’는, 하느님 나라의 시작은 비록 작고 보잘것없을지라도, 씨앗이 다 자란 뒤에는 그 어떤 나무와도 견줄 수 없을 정도로 풍성하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하느님 나라의 끝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말씀을 통하여 활동하는 하느님 나라의 거역할 수 없는 힘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세상에 뿌려진 씨앗인 하느님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씨앗이 우리 안에 뿌려지고, 모든 민족들에게 뿌려져 자라납니다. 이 씨앗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곧 모든 민족들이 어떻게 변화되고 성장하는지, 우리는 모르는 신비 안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은 하느님 나라의 거역할 수 없는 힘이 작용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려 줍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느님 나라를 믿고 희망하며, 애덕을 실천하며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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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마르코.4,27)
일상의 말이나 행동, 그리고 태도를 통하여 우리는 많은 씨를 뿌리고 삽니다. 그리고 우리가 뿌린 행동과 말과 태도의 씨들은 이 세상 어디에선가 자라고 있습니다.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더라도 어디에선가 자라고 있습니다.
우리가 뿌린 씨가 싹이 터서 자라는 것을 우리가 사는 동안 보기도 하지만, 어떤 것들은 우리가 죽고 나서 자라기도 합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뿌린 씨들이 다 자라 맺은 열매는 언젠가 주님 앞에서 대낮처럼 환하게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는 주님의 정원을 꾸미려고 씨를 뿌리는 사람들입니다. 씨는 우리가 뿌리고 주님께서는 키우십니다. 우리가 뿌린 삶의 씨들은 주님께서 비추시는 햇빛과 신선한 바람과 공기와 물을 먹고 자랍니다. 주님께서는 선과 악의 씨를 구별하지 않고 골고루 비추십니다.
주님의 자녀는 좋은 씨를 뿌리지만 악의 자녀는 나쁜 씨를 뿌립니다. 하지만 우리는 선과 악 모두의 씨를 모두 뿌립니다. 때로는 사랑의 씨를 뿌리지만 때로는 미움과 질투와 시기의 씨도 뿌립니다. 희망의 씨를 뿌리기도 하지만 절망의 씨도 뿌립니다.
불완전한 인간이기에 끊임없는 회개를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위한 좋은 씨를 뿌려야 합니다. 사랑과 선, 정의와 평화, 진실과 희망의 씨를 뿌려야 합니다. 뿌린 씨들이 자란 것을 우리가 사는 동안 볼 수 없더라도 꾸준히 씨를 뿌려야 합니다. 우리가 뿌린 씨는 언젠가 주님 앞에서 모두 거두기 때문입니다.
뿌린 사랑의 씨를 우리가 사는 동안 그 열매를 보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함께 사는 사람들의 고정 관념과 신입견과 편견으로 인해 사랑의 열매는 자주 가려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뿌린 씨가 맺은 열매는 우리가 죽은 후, 주님 앞에서 드러나게 되는 진리입니다.
살면서 뿌린 사랑의 씨는 우리가 주님을 만나기 위한 열매가 되고, 추운 밤에 밝혔던 작은 촛불은 신랑이신 주님을 맞이하기 위한 등불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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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성당 꼬마들이 제게 다가와서는 “신부님, 로제 알아요? 에스파는 알아요? BTS는 아시죠? 세븐틴 멤버 이름 알아요?” 등의 질문을 하곤 합니다. 이 질문에 저는 “당연히 모르지.”라고 답합니다. 진짜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모르는 저를 이해하기 힘들다면서 이런 말도 하더군요.
“장원영 모르는 사람, 처음 봤어요.”
제 나이 또래에게 물어보면 앞서 꼬마들의 질문에 다 안다고 말할까요?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꼬마들이 연예인들을 잘 아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관심이 있고, 그래서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관심 없으면 좋아할 수도 또 재미도 없습니다. 연애하는 이유도 상대방에게 관심을 갖고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알아가는 재미를 갖습니다.
학창 시절에 공부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책을 읽어야 한다는 말을 들어도 독서는 재미없었고, 나와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책상 앞에 앉아 있음이 행복하고, 책 읽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당연히 공부도 재미있습니다. 왜냐하면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에 대해서도 관심이 있으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가 재미있고 여기서 기쁨을 갖게 됩니다. 하느님을 조금씩 알아가면서 설레기도 합니다. 스스로 하느님과 맞지 않는다고 단정 지어서는 안 됩니다. 내 쪽에서 관심을 두려고 하지 않았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없는 관심이 영원히 없을까요? 아닙니다. 자기에게 꼭 필요한 분임을 깨닫는 순간, 관심이 생기고 그 관계에 기쁨을 갖게 됩니다.
성인이 된 자녀들이 냉담한다고 걱정하는 부모님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 걱정도 주님께 맡기십시오. 부모님보다 더 열심한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의 힘을 우리는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불가능한 일도 가능한 일로, 또 당연한 일도 당연하지 않은 일로 만드실 수 있는 분이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대해 말씀해 주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자고 일어난 사이에 싹을 틔우고 자라는 것처럼 커진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어떻게 그리되는지 잘 모른다고 하시지요. 맞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하느님만이 아실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면서 고통과 시련을 참고 견뎌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앞서 말씀드렸던 하느님을 알려는 관심입니다. 그 관심 안에서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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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런 것이니 그리 되더이다>
마르코 4,26-34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 비유를 들어 가르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 수확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이처럼 많은 비유로 말씀을 하셨다.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당신의 제자들에게는 따로 모든 것을 풀이해 주셨다.
<그런 것이니 그리 되더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마르 4,31-32)
믿으니
더욱 더 굳게
믿게 되더이다
믿음이란 그런 것이니
희망하니
더욱 더 하얗게
희망하게 되더이다
희망이란 그런 것이니
사랑하니
더욱 더 뜨겁게
사랑하게 되더이다
사랑이란 그런 것이니
일어나니
더욱 더 가뿐히
일어나게 되더이다
일어남이란 그런 것이니
나아가니
더욱 더 힘차게
나아가게 되더이다
나아감이란 그런 것이니
품으니
더욱 더 따뜻하게
품게 되더이다
품음이란 그런 것이니
나누니
더욱 더 아낌없이
나누게 되더이다
나눔이란 그런 것이니
어울리니
더욱 더 갈림없이
어울리게 되더이다
어울림이란 그런 것이니
섬기니
더욱 더 정성껏
섬기게 되더이다
섬김이란 그런 것이니
살리니
더욱 더 오롯이
살리게 되더이다
살림이란 그런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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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지금 여기서 하느님 나라를 살아야 한다>
한 유치원 원장님이 아이들에게 꽃씨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제일 예쁜 꽃을 피워온 아이에게는 멋진 선물을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아이들은 서로 ‘내가 제일 예쁜 꽃을 피워야지!’ 하며 신이 났습니다. 그리고 몇 달 후 아이들은 꽃이 활짝 핀 화분을 들고 왔습니다. 그러나 원장님의 표정은 이상하게도 밝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중 한 아이가 빈 화분을 들고 울먹이며 말했습니다. “저는 게을러서 꽃을 못 피웠어요!” 원장님은 그제야 환하게 웃으시며 그 아이에게 멋진 선물을 주었습니다. 나누어준 씨앗은 싹이 나지 않는 가짜였던 것입니다.
정말 싹을 틔워야 할 것은 우리의 진실한 마음입니다. 사실, 씨앗이 생명력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면 아무리 기다려도 싹은 트지 않습니다. 또한 씨앗 자체의 신비로운 힘을 믿지 않는다면 씨앗에서 싹이 트고 새싹이 돋아나도록 땅을 가꿀 이유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를 희망하면서도 지금 여기서 하느님 나라의 삶을 살지 않는다면 그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희망하는 만큼 오늘을 최선으로 살아야 합니다.
씨앗이 땅에 묻혀 모든 것이 끝나고 정지된 것처럼 보일 때 땅속에 있는 씨앗은 은밀하게 싹을 틔우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내가 행하는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면 지금 당장 밝히 드러나지 않는다 해도 그것은 싹을 틔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좋든 나쁘든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지금 여기서 하느님 나라를 가꾸어야 합니다. 사랑은 사랑을 낳고, 사랑이 있으면 천국이고 사랑이 없으면 지옥입니다. 나의 수고와 땀, 희생 봉헌이 미약해 보일지라도 결코, 작지 않음을 기뻐해야 합니다.
겨자씨가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씨의 크기는 0.95-1.6밀리미터=보니까 아주 먼지 같아요!)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되듯이(마르 4,32) 우리의 정성도 선한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저절로 자라나는 씨앗의 비유’와 ‘겨자씨의 비유’는‘하느님 나라의 시작은 비록 작고 보잘것없는 것처럼, 보여도 그 끝은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가르침을 줍니다.
실제로 예수님과 그 제자들의 무리는 작고 초라하게 시작되었지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을 포함하는 교회공동체로 성장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 선을 행하고 진리 안에 자유로워야 하겠습니다. 겨자씨 한 알이 눈에 잘 띄지 않지만 무한한 가능성이 들어있듯이 우리의 사랑과 희생도 무한한 가능성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실 참으로 “사람은 하늘이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받을 수 없습니다.”(요한 3,27)
“누가 먼저 무엇을 드렸기에 주님의 답례를 바라겠습니까? 모든 것은 그분에게서 나오고 그분으로 말미암고 그분을 위하여 있습니다.”(로마 11,35-36)
불신이 가득한 이 세상에 빈 화분을 들고 눈물을 지을 수 있는 진실함으로 하늘나라를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이 있으면, 진실함이 있으면 바로 그 자리가 하느님의 나라요, 불신과 거짓으로 서로를 경계하면 그곳이 지옥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 우리 마음 안에 하느님의 나라가 쑥쑥 자라길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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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함승수 세례자요한 신부님]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에서 ‘저절로’ 자라난다는 뜻으로 ‘땅에 뿌려진 씨앗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일단 농부가 땅에 씨를 잘 심어놓기만 하면, 그가 의식하지 않고 있는 사이 씨앗이 싹을 틔우고 크게 자라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언제 어떻게 일어나는지 농부는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벌레를 잡아주고 잡초를 뽑아주며 물이 잘 흘러가도록 고랑을 잘 파주기만 하면, 나머지는 ‘땅’이 알아서 한다고, 즉 하느님께서 당신 섭리의 손길로 그 씨앗이 열매 맺도록 이끄신다고 하십니다.
그 뒤에 바로 겨자씨의 비유가 이어집니다. 너무 작아서 눈으로는 알아보기 힘든 겨자씨처럼 눈으로는 알아보기 힘든 하느님의 뜻을, 보다 정확히 말하면 그분께서 뜻하시는 바를 이루는 말씀의 씨앗을 우리가 마음의 정원에 심기만 하면, 하늘의 새들이 깃들일 수 있을 정도로 너른 품을 지닌 크고 당당한 나무로 자란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그 줄기와 잎이 비를 막아주고, 그 그늘이 따가운 햇볕을 가려주며, 우리에게 여러 가지 유익한 것들을 내어줄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 말씀을 따르기만 하면 여러 행복한 일들이 얼어나는데도 왜 우리는 그 말씀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할까요? ‘그걸 믿어서 나한테 뭐가 좋은데?’라는 의구심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대로 따르면 경쟁에서 뒤쳐지고 손해를 볼 것 같은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구심과 두려움을 이겨내고 하느님 말씀의 씨앗을 우리 마음에 심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하느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크고 대단한 믿음이 필요한 게 아닙니다. 겨자씨만큼 작아보이는 말씀의 씨앗을 싹틔우는데에는 ‘겨자씨 한 알 만큼의 믿음’이면 됩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에서는 양보다 질이, 크기보다 내실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씨앗이 지닌 힘과 능력을 믿지 못한다면 땅을 가꿀 이유도 힘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느님 나라를 진정으로 믿고 바라고 희망하지 않는다면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 뜻을 따를 이유와 힘이 생기지 않습니다.
땅 속에 묻힌 씨앗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기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지만, 분명히 그 안에서 변화가 일어나고 있으며 때가 되면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립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면 당장은 내 삶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지만, 분명 하느님의 섭리가 내 삶에 작용하고 있으며 때가 되면 그분 뜻이 나를 통해 드러나고 결실을 맺을 것입니다. 그것을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렇게 믿는대로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니 기회될 때마다 하느님 말씀의 씨앗을 믿음으로 내 마음에 심고 순명으로 가꿔야겠습니다. 그러면 종말의 날이 두렵고 공포스러운 날이 아니라, 내 삶이 맺게 될 다양하고 충만한 결실을 확인하는 기쁘고 보람찬 날이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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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유난히 아이들을 사랑하는 저에게 있어서 세명의 조카들은 저에게 있어 매우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더욱 저의 조카들에게 부채감이 있는데, 오랜시간 해외에서 유학기간을 거친 덕에 아이들이 자라는 순간순간을 함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는 조카들이 하루하루 다르게 자라는 모습을 볼 때마다 자연의 신비를 느끼게 됩니다. 부모는 아이가 성장하는데에 있어서 많은 역할을 하지만 자세한 면모를 생각해 보면 아이의 교육과 정신적 성장에 있어서 그러할 뿐 육체적인 성장에 있어서는 많은 것을 해주지 않는 것 같습니다.
물론 때마다 밥을 차려주고 뛰어노는 것은 아이의 육체적 성장에 있어 매우 중요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키가 크고 육체적으로 성숙하는 것은 어떠한 면에서 보면 온전히 자연의 섭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찌 되는지 모른다”라는 비유를 통해 하느님의 섭리를 표현합니다. 사실 씨앗을 심고 농사의 결실을 거두기까지 사람이 할 수 있는 역할은 매우 적습니다. 땅을 파고 돌을 골라내고 씨를 뿌리고 나서 물을 주지만 그것은 최소한의 역할일 뿐 씨앗이 자라는 것은 어찌보면 매우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씨앗이 싹트고 그 싹이 자라서 줄기가 나고 잎이 나오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은 전적으로 자연의 원초적인 힘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 씨앗이 열매 맺기까지, 한 생명을 성장시켜 결실에 이르게까지 하는 능력은 사람에게 주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오히려 그러한 일에 개입하고자 하는 순간 그것은 인간의 욕심이 될 뿐입니다. 하느님의 섭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우리의 일상생활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물론 식물에 물을 주고 햇빛을 쬐어 주는 것처럼 기본적인 노력은 인간에게 맡겨져 있지만 사실 우리 안에서 자라나는 하느님 나라의 은총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현존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것에 인간이 개입하고자 하는 순간 그것은 인간의 헛된 욕망이 될 뿐이고 오히려 원망만 갖게 됩니다.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하느님의 은총이 잘 이루어 질 수 있도록 스스로가 좋은 땅, 좋은 양분이 되도록 노력하는 일입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의 능력 안에서 우리는 숨쉬며, 움직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나 자신 안에 주어진 환경을 최대한 가꾸되 하느님의 말씀이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며 조금은 여유로운 마음으로 지켜보고 인내심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자연스러운 일상 속에서 하느님 나라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우리는 비로소 그 안에 머물며 살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말씀에 등장하는 겨자씨는 실제로 보면, 우리 손톱의 30분의 1정도 밖에 되지 않는 아주 작은 씨앗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땅에서 잘 뿌리를 내리고 자라나면 어떤 풀보다 크고 높게 자라게 됩니다. 이 모습 자체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아주 미소한 존재로 태어났지만 많은 것들은 하느님께서 이루어 주십니다.
이에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고 개입하고 알고자 하면 그것은 온전히 인간의 욕심이 되고 조바심만 생길 뿐입니다.
이 점을 명심하며 하느님의 섭리를 기대하되 모든 것을 알아서 해주시는 창조주의 역할에 모든 것을 맡길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인간의 행복을 바라시는 주님께서는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우리의 성장과 행복을 위해 함께 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비록 몸소 느껴지지는 않을지라도 하루하루 주님께 의지하며 살아간다면 결국 우리는 어느덧 제 모습을 갖춰나가는 아이들을 보듯 나에게 잘 맞춰져 있는 하느님의 섭리를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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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지만,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를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가시적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나라’는 결코 외부에서부터 이루어지는 변화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을 듣고 받아들여 안으로부터 오는 나라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하느님 나라가 우리 안에서 어떻게 건설되는 걸까?
오늘 <복음>은 이에 대한 해답을 가르쳐줍니다. 그것이 바로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와 ‘겨자씨의 비유’입니다. 곧 ‘하느님나라’는 씨앗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땅에 씨를 뿌려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마르 4,27)
그렇습니다. 분명, 씨앗은 자신 안에 싹을 틔우고 잎으로 자라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먼저 우리 안에 뿌려진 ‘씨앗’(말씀)의 권능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레고리우스 교종은 말합니다.
“성경(말씀, 하늘나라)은 읽는 이(응답하는 이) 안에서 자란다(성장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놀랍고 신비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씨가 우리 안에 뿌려지면, 그것이 어떻게 우리를 변화시키고 또 어떻게 성장시키는지를 우리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매 순간 하느님의 힘이 작용하여 ‘하느님 나라’가 자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햇살을 받은 나뭇잎이 광합성을 못 알아들으면서도 그것을 채워가고 푸르러가듯이 말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하느님 나라’ 안에서 나날이 그 신비를 마시며 살아가는 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마르 4,31)
‘겨자씨’는 비록 작은 씨앗이지만, 자라나서 큰 나무가 됩니다.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이게 됩니다. 마치 십자나무처럼, 모든 인류를 끌어안은 큰 나무가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십자나무에 인간이 거처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셨듯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비록 작은 ‘겨자씨’지만,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썩기만 하면, 바로 이곳에서 모든 사람들이 와서 깃들일 수 있는 큰 나무로 자랄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자고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싹이 트고 자라나는 이 놀라운 신비에 순응하게 하소서.
저의 힘이 아니라 당신의 권능으로 싹을 틔우고 자라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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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마르 4,31)
주님!
당신은 겨자씨처럼 작은 자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사랑하는 이 위에 군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낮추어 종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것이 사랑하는 방법이고 사랑의 길인 까닭입니다.
오늘 제가 형제들 앞에서 작아지게 하소서!
십자나무에 인류의 거처를 마련하듯, 제가 형제들의 거처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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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의 나라>
-“꿈과 실현”-
“주님만 바라고 너는 선을 하라. 네 땅에 살면서 태평을 누리리라.”(시편37,3)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은 물론 그분을 따랐던 성인들의 평생 꿈이자 화두였고, 평생 하느님의 나라를 사셨습니다. 우리 또한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자주 나누는 행복기도 한 대목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꽃자리 하느님의 나라 천국입니다.”
언젠가의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살아야할 하느님 나라의 꿈입니다. 믿는 이들 모두의 공통적 목표가 하느님 나라 꿈의 실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하느님 나라의 비유를 통해 하느님 나라의 꿈을 실현할 수 있는 삶의 방법을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 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 수확의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느님 나라의 교육 원리를 배웁니다. 침묵중에 전개되는 무리없이 순리대로 너무 자연스런 흐름입니다. 도약이나 비약이 없습니다. 하느님 친히 묵묵히 하시는 일입니다. 침묵중에 주변 안팎을 잘 살피는 것이 참 중요하다 싶습니다. 눈만 열리면 주변 모두가 하느님 나라 비유의 소재가 될 수 있겠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주도자는 하느님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느님의 나라가 잘 실현될 수 있도록 옆에서 겸손히 협조하는 일이겠습니다. 이어지는 겨자씨의 비유도 이와 흡사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인다.”
두 비유 모두가 땅을 소재로 자연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또 하나의 성경이라 할 수 있는, 생명의 신비를 접할 수 있는 살아 있는 “자연”과 멀어질수록 하느님 나라의 비유를 들기도, 이해하기도 힘들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나, 겨자씨의 비유는 자연스럽게 순리대로 펼쳐지는 하느님 나라의 성장과정을 보여줍니다.
우리 하나하나가 하느님의 나라 꿈을 실현해야 할 과제를 부여받고 있음을 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때가 될 때까지 기다리는 한없는 인내입니다. 사랑이 지혜입니다. 참으로 사랑이 아니면 개입하지 않고 묵묵히 바라보는 것이 관상의 사랑이자 지혜입니다. 이런 인내와 사랑은 하느님 나라의 희망이, 꿈이, 확신이 있기에 가능합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좋은 답을 줍니다.
“여러분은 그 확신을 버리지 마십시오. 그것은 큰 상을 가져다 줍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 약속된 것을 얻으려면 인내가 필요합니다. ‘조금만 더 있으면 올 이가 오리라. 지체하지 않으리라.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그러나 뒤로 물러서는 자는 내 마음이 기꺼워하지 않는다.’ 우리는 뒤로 물러나 멸망할 사람이 아니라, 믿어서 생명을 얻을 사람입니다.”
하느님 나라 꿈의 실현에 “인내의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뒤로 물러서지 말고 믿어서 생명을 얻기위해 끝없는 전진을 격려하는 히브리서 저자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생생한 꿈과 희망이 있기에 이런 인내의 믿음이요, 적극적 전진의 삶입니다. 바로 이런 하느님 나라의 꿈을 실현하며 살았던 성인들입니다.
오늘 기념하는 성 요한 보스코도 사제도 하느님 나라 꿈의 실현에 빛나는 모범이 됩니다. 한 사람의 영향력이 얼마나 지대한지 깨닫습니다. 이 또한 하느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 또한 그 한 사람의 성인이, 하느님 나라의 실현이 되도록 고무하고 격려하는 교회의 성인들입니다.
“젊은이들의 스승이자 신부”로, 돈 보스코 또는 보스코 신부로 불려지는 성 요한 보스코 사제는 어린이, 청소년, 청년들을 위한 활동을 하는 수도회인 살레시오 수도회와 살레시오 수녀회를 창설하고 평생을 어린이와 청소년 교육에 헌신했습니다. 지금도 그의 이름을 딴 돈 보스코 청소년 센터에서는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직업교육을 실시합니다.
성 요한 보스코는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를 존경했고, 항상 아이들에게 그를 본받아야 한다고 말했고, 그래서 수도회 이름도 살레시오회입니다. 수도회를 창설한 후 청소년 교육에 매진한 보스코 신부의 유명한 어록 몇을 소개합니다.
“체벌과 강요가 아니라 종교적 유대감을 통해 스승과 제자의 신뢰를 긴밀하게 해야 합니다”
“청소년은 젊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랑받기에 충분합니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들이 사랑받고 있음을 알도록 사랑하십시오.”
성 요한 보스코는 산업화라는 격변기 속에서 사회가 관심을 갖지 않았던 빈곤하고 버림받은 청소년들에 대한 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몸소 실천한 교육자이자 영성가이며 뛰어난 저술가였습니다.
성인은 “모든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고, 아무에게도 악을 행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아이들에게 천국에서 기다리겠다고 전해 주십시오.” 라는 유언을 남기고 1888년 1월31일, 바로 오늘 73세를 일기로 선종합니다.
교황 비오 11세에 1929년 시복되고 1934년 시성되어 성인의 반열에 오른 성인은 편집자, 출판업자, 학생, 젊은이, 마술사의 수호성인이기도 합니다. 겨자씨 같은 존재가 성장하여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 수 있게 된 큰 나무가 된, 명실공히 하느님 나라의 꿈을 실현한 돈 보스코 성인입니다.
겨자씨 같이 작게 시작한 요셉수도원이 이제 많은 이들의 쉼터가, 배움터가, 샘터가 되었으니 하느님 나라의 꿈이 그대로 실현되고 있음을 봅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느님 나라의 꿈을 실현하며 살게 하십니다.
“네 앞길 주께 맡기고 그를 믿어라. 몸소 당신이 해 주시리라.“(시편 37,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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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큰맘만 먹으면>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놓으면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한다.”
비유의 이 말씀을 들으며 저는 이런 생각이 대번에 들었습니다. 나는 씨만 뿌리면 되는구나!
왜냐면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놓으면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르는 채 저절로 열매를 맺게 된다고 하니 말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쉽습니까? 씨만 뿌리면 되니 이 얼마나 쉽습니까? 그런데 이 쉬운 것조차 왜 하지 않을까요?
이런 생각은 어제 묵상의 연속입니다. 어제 저는 이런 요지로 묵상하였지요.
“하려는 사람에게 은총도 주어집니다. 아무것도 할 생각이 없는 사람에겐 은총도 필요 없고, 그래서 은총을 바라지도 청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은 아무리 은총이 주어져도 그리고 아무리 쉬운 것이어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비유의 경우엔 좀 더 들여다봐야 할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 씨가 우리 입에 들어갈 열매의 씨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씨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을 사는 우리가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라는 씨를 뿌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의 씨를 제가 뿌리고 싶고 여러분이 뿌리고 싶은가 그것이 관건인 셈입니다.
이런 묵상을 하면서 적절하지 않을지 모르는데 한 예가 생각났습니다. 동물의 왕국을 보면 수컷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자기 씨를 뿌리려고 그렇게 애쓰는 것입니다. 자기 씨를 뿌리기 위해 경쟁자와 싸우다 목숨을 잃기까지 합니다.
우리도 그런 면이 있지 않을까요? 하느님 나라보다 내 나라를 건설하려고 하고, 하느님 나라의 씨보다 내 씨를 뿌리려 하지 않을까요?
그러면 하느님 나라 씨 뿌리기는 당연히 관심 없거나 아무리 쉬울지라도 도무지 하고 싶지 않고, 그러니 발심 자체가 쉽지 않습니다.
발심(發心)이란 불교적인 표현인데, 마음을 일으킴 곧 불도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을 일으킴을 뜻하지요.
우리 경우 이 세상이라는 밭에 하느님 나라의 씨를 뿌리기만 하면 하느님께서 다 싹이 나게 하고 키우고 자라고 열매 맺게 하셔도 그 마음을 일으키는 발심 자체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불교에서 대발심(大發心)이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도 큰맘 먹으면 됩니다.
이 세상에서 소시민으로 편히 살려는 작은 마음을 먹으면 안 되고, 이 세상에서부터 저세상 곧 하느님 나라를 마음에 품고, 작게는 나의 행복과 구원을 위해 크게는 세상 구원을 위해 살기로 마음을 먹기만 하면 작은 마음을 먹고 사는 것보다 차라리 쉽습니다.
한겨울 따듯한 아랫목을 파고드는 마음을 떨쳐내는 것이 힘들지 분연히 문을 열고 한번 뛰쳐나가면 그다음부터는 세상이 열리며 작은 마음이 큰마음이 되기에 오히려 쉬우며 은총도 내립니다.
항상 그렇습니다. 큰맘 먹는 사람에게 세상이 열리고, 용기 내는 사람에게 은총이 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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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마르4,26ㄱ)
<하늘의 손길!>
오늘 복음(마르4,26-32)은 '저절로 자라나는 씨앗의 비유'와 '겨자씨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두 비유를 들어 하느님의 나라를 설명하십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손길이 결코 작은 손길이 아니며, 처음에는 비록 미미하고 작아보이지만, 알지 못하는 사이에 엄청난 결과를 낸다.'는 메시지, 그렇게 '하느님의 나라가 건설된다.'는 메시지를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전합니다.
농부의 땀과 노력이 없으면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일 수는 없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늘의 손길'입니다. 하늘이 먹이시고 살리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하늘이 햇빛을 내려주지 않고 비를 내려주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죽음'입니다.
이러한 진리와 이치를 복음에서는 '저절러 자라난다.'고 비유적으로 표현합니다. 우리가 볼 때는 저절로 이지만, 그것은 '하늘의 손길'입니다.
우리는 종종 이 소중한 진리와 이치를 잊고 삽니다. 마치 나의 땀과 노력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진 것으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씨가 땅에 뿌려져 결실을 맺는 과정은 '신비'입니다. '하늘의 신비'입니다. 겨자씨는 어느 씨앗보다도 작지만, 그것이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의 나라 건설에 필요한 작은 것들이 결코 작지 않고, '무한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그 작음으로부터 하느님의 나라가 시작된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작은 것에 충실합시다! 쉽게 잊기 쉬운 '하늘의 손길'을 늘 인식하면서,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작은 행위에 충실합시다! 그리고 하늘에서 내려주시는 선물에 대해 깊은 감사를 드립시다!
"청소년의 아버지요 스승이신 성 요한 보스코여, 불쌍한 저희와 우리나라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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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마르 4, 31)
보도불럭
틈새로도
식물이
자랍니다.
자라나는
민들레와 같이
조건과 환경을
탓하지 않습니다.
이 사실도
모르는 채
우리는
살아갑니다.
우리의
신앙도
이와 같이
성장하는
것입니다.
작디 작은
겨자씨가
자라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가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를
일깨워줍니다.
성장하는 것이
진실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겨자씨는
예수님을
닮아 있습니다.
아기로 오신
예수님께서도
우리들
가운데에서
자라나십니다.
사랑은
성장을 품고
성장은
일생을
품습니다.
예수님의 일생이
우리를 부릅니다.
포기하는 것은
사라집니다.
약하여도
끝까지
걸어가는 것이
신앙이며
올바른
성장입니다.
자라나는
성장은
하느님의 나라와
함께합니다.
우리의 사랑도
예수님과 함께
성장하는
기쁨이길
기도드립니다.
사랑의 성장이
하느님의
나라이며
세상의
참된
희망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어떠한지를
묻는
새아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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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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