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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권력자의 거짓을 알리고 행동하라”…지식인에 ‘현실 참여’ 촉구
김호기 |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놈 촘스키 ‘지식인의 책무’
미국의 언어학자이자 정치적 행동주의자인 놈 촘스키가 1979년 포르투갈에서 열린 학술회의에서 동티모르의 반인권 잔학행위에 대해 발언하는 모습. 그는 미국의 야만적 대외정책을 폭로·비판해온 실천적 지성으로 1970년대 이후 참여적 지식인을 대표했다.
지식인에게 일차적으로 요구되는 필요조건은 진리 탐구다. 지식인의 현실 참여는 어떻게 봐야 할까. 어떤 이들은 지식인의 정치적 중립을 지지하고, 다른 이들은 정치적 개입을 역설한다.
정치적 개입에도 물론 다양한 방식이 존재한다. 어떤 이들은 권력 밖에서의 권력 비판을 주장했던 반면, 다른 이들은 권력에의 직접적 참여를 실천했다. 대통령이 된 브라질 사회학자 페르난두 카르도주나 체코 작가 바츨라프 하벨은 후자의 대표적 지식인들이었다.
권력 밖에서 권력 비판을 추구한 전후의 주목할 지식인들로는 프랑스 작가이자 철학자인 장 폴 사르트르와 미국 언어학자인 놈 촘스키(Noam Chomsky·1928~)를 들 수 있다. 두 사람은 자기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평생 중단 없는 권력 비판을 추구했다. 사르트르가 1950~60년대에 참여적 지식인을 상징했다면, 1970년대 이후엔 촘스키가 참여적 지식인을 대표했다. 두 사람은 전후 서구 사상사에서 대중에게 큰 영향을 미친 ‘공적 지식인’의 표본이었다.
언어학자와 정치적 행동주의자는 촘스키의 정체성을 이루는 두 얼굴이다. 그는 전후 가장 뛰어난 언어학자 중 한 사람이다. 인간의 선천적인 언어습득 능력을 이론화한 변형생성문법론은 언어학에서 그의 대표적 기여였다. 정치적 행동주의자로서 촘스키는 1967년 ‘뉴욕 리뷰 오브 북스’에 발표된 글인 ‘지식인의 책무’를 통해 등장했다. 이후 그는 팔레스타인 문제, 동티모르 사태, 9·11테러 등에서 미국의 야만적인 대외정책을 폭로하고 비판함으로써 실천적 지성으로 세계적인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여기서 주목하려는 것은 정치적 행동주의자로서 촘스키다.
놈 촘스키의 대표저작 <Powers and Prospects>(1996년판).
■지식인은 어떤 책무를 갖는가
촘스키는 1969년 <미국의 권력과 새로운 관료들>에서부터 시작해 정치 및 사회 관련 책들을 숱하게 출간했다. 재정학자 에드워드 허먼과의 공저인 <여론 조작>을 포함해 동료들과도 적지 않은 책들을 펴냈다. 이러한 저작들 가운데 지식인의 태도를 다룬 대표 저작 중 하나가 <Powers and Prospects>(1996)이다. 이 책에 실린 ‘작가와 지식인의 책무’, ‘목표와 비전’, ‘새로운 세계 질서에서의 민주주의와 시장’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 <지식인의 책무>다.
촘스키는 1967년에 발표한 ‘지식인의 책무’에서 정부의 거짓말을 폭로하고 정부의 문제점·동기·감춰진 의도 등을 분석하는 게 지식인의 책무라고 주장했다.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 ‘작가 센터’에서 이뤄진 강연을 바탕으로 1996년 발표한 ‘작가와 지식인의 책무’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이 글에서 촘스키는 지식인의 책무를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적합한 대중에게 가능한 범위 내에서 진실을 찾아내 알리는 것이 지식인에게 주어진 도덕적 과제다.” 이러한 책무를 설명하기 위해 그는 몇몇 사례들을 제시한다. 서구 지식인들에게 캄보디아 크메르루주의 학살이 악의 상징이었다면, 동티모르의 학살은 침묵의 사건이었다. 냉전 시기 소련 반체제 인사들은 또 다른 사례였다. 이들이 소련의 범죄를 비판한 것은 크게 주목된 반면 미국의 잔혹 행위를 비판한 것은 서구 언론에서 사실상 거부됐다는 게 그의 날카로운 관찰이다.
촘스키의 말을 다시 인용하면, “서구 지식인들의 책무는 서방 세계의 수치스러운 짓에 대한 진실을 서방 세계 대중에게 알려서, 대중이 범죄 행위를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종식시킬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논리로 무장한 촘스키는 진실을 알리는 데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고, 그 범죄 행위를 중단시킬 수 있는 서명·연설·집회 등 정치적 행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사상 70년과 정치적 행동주의
촘스키에 앞서 지식인론에 큰 영향을 미친 이는 사르트르였다. <지식인을 위한 변명>은 마르크스주의로부터 영향받은 그의 지식인론이 집약된 책이다. 그에 따르면, 지식인은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 사이에 존재하는 중간층이며, 이러한 지식인에게 부여된 의무는 자본가계급의 착취를 폭로하고 노동자계급을 위해 투쟁하는 데 있었다.
촘스키에게 중요한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지구적으로 자행되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폭력에 대한 폭로였고, 다른 하나는 권력 기구의 대중통제와 권력에의 지식인들의 봉사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의 현실 참여는 무정부주의적 생디칼리즘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그는 우리 인간에게 자유와 다양성과 자유로운 연합을 향한 욕구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가치들을 억압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저항이 그가 생각하는 지식인의 본분이다. 그의 사상적 원천은 빌헬름 폰 훔볼트, 존 듀이, 조지 오웰, 그리고 버트런드 러셀 등 다양했다. 특히 수학자이자 논리학자였던 러셀의 현실 참여는 촘스키의 정치적 개입에 하나의 모범이 됐다.
촘스키의 정치적 행동주의에 대한 비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촘스키가 미국 정부의 테러리즘에 대해선 엄격한 반면 이슬람 단체의 테러리즘에 대해선 관대한 이중잣대를 갖고 있다는 것은 대표적인 비판이었다. 미국 정부 정책과 언론 보도에 대한 촘스키의 가차 없는 폭로는 보수 언론은 물론 뉴욕타임스 등 진보 언론과도 불편한 관계를 갖게 했다. 그에게 거짓의 폭로와 진실의 발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었다.
전후 사상 70년을 돌아볼 때 촘스키의 정치적 행동주의는 이례적인 것이다. 그의 정치적 개입은 학문에 대한 지식인의 태도에 중요한 문제제기를 함의한다. 인간과 사회를 주목하는 인문·사회과학에서 지식인에게 이론 및 분석의 내용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그 이론 및 분석을 다루는 태도다. 뉴욕타임스는 촘스키를 ‘생존하는 가장 위대한 지식인’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이러한 평가는 그의 언어학적 성취뿐만 아니라 열정적인 현실 참여를 적극 고려한 것이다. 더 나은 사회를 꿈꾸는 지식인들에게 촘스키는 지식인의 모범적인 미래임이 분명하다.
■한국어판 저작은
저작 <지식인의 책무>는 <Powers and Prospects> 세 개 장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촘스키의 저작 선집: 지(知)의 향연>에 번역된 1967년판 글인 ‘지식인의 책무’를 함께 읽는 게 좋다.
■‘한국의 실천 지성’ 리영희, 냉전체제 갇혀있던 시민의식 일깨워
[김호기의 세상을 뒤흔든 사상 70년] (35)“권력자의 거짓을 알리고 행동하라”…지식인에 ‘현실 참여’ 촉구
한국사회에서 촘스키와 같은 역할을 담당한 지식인들은 적지 않다. 1970~80년대 군부독재 아래서 진보적 지식인들은 국가 권력을 비판하고 민주주의를 수호하려는 정치적 실천을 추구했다. 리영희(1929~2010년·사진)는 이러한 지식인들을 대표했다. 그는 국제정치를 연구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 시민적 계몽을 이끌었다.
광복 이후 리영희만큼 극단적으로 상반된 평가를 받은 지식인도 드물다. 보수 세력에겐 ‘의식화 원흉’으로 비판받았지만, 진보 세력에겐 ‘사상의 은사’라고 평가받았다.
1970년대 지식사회와 시민사회가 리영희를 주목하게 한 책은 그의 문제작 <전환시대의 논리>(1974)였다. 이 저작은 한국전쟁 이후 한국사회를 지배해온 냉전분단체제에 대해 코페르니쿠스적 사고의 전환을 요구했다. 책 내용은 1960년대 후반과 70년대 초반 변화하는 동아시아를 다뤘다. 미국 대외정책과 중국에 대한 재인식, 일본의 군사적 재무장화, 베트남 전쟁의 역사와 현실 등에 대한 분석을 통해 그는 냉전체제에 갇혀 있던 시민들의 의식을 일깨웠다.
리영희가 겨냥한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가 냉전적 보수주의에서 벗어난 균형적 현실주의 관점이었다면, 다른 하나는 외세적 시각을 넘어선 민족주의와 민주주의 시각에서의 새로운 국제질서 구축 필요성이었다.
그는 ‘전환의 시대’에서 ‘의식의 전환’, 다시 말해 대외의존적 사유에서 주체적 현실인식에로의 전환을 요청했다. 이후 그는 <8억인과의 대화>, <우상과 이성>, <대화> 등의 저작들을 통해 지식사회 최전선에 서서 냉전분단체제라는 우상의 파괴자 역할을 떠맡았다.
돌아보면, 그가 제시한 몇몇 가설들은 더러 낡았고 맞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주체적 관점에서 탈냉전적 국제질서를 모색한 것은 선구적인 통찰이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아홉 번의 연행, 다섯 번의 기소 또는 기소유예, 세 번의 징역’이라는 리영희의 삶은 1970~80년대 진보적 지식인들이 겪어야 했던 고난을 생생히 증거했다.
그는 지적 활동을 통해 권력 비판에만 주력했던 지식인이 아니었다. 2003년 정부의 이라크전 파병 결정에 맞선 반대 시위에 노구를 이끌고 참여했던 것에서 볼 수 있듯, 그는 이론과 실천의 통일을 추구했다. 역사의 관찰자인 동시에 주인공을 맡은 아주 드문, 용기 있는 지식인의 상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