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열사가 이 땅의 백성들을 억압하고 오염시킨 매국노에 대항하여, 하얼빈 역에서 이등박문을 처단한 것처럼, 2011년 우리 백성을 이끄는 자유의 전사 되어야만 한다. 이것이 대한민국의 민심이고 운명이고 역사이기 때문이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 하얼빈역서 이등박문 사살
(安重根義士滿滿) 平生營事只今畢 死地圓生非丈夫 身在三韓名萬國 生無百世死千秋 평생을 벼르던 일 이제야 끝났구려. 죽을 땅에서 살려는 것은 장부가 아니고말고. 몸은 한국에 있어도 세계에 이름 떨쳤소. 살아선 백 살이 없는데 죽어서 천 년을 가오리다
1909년 가을, 안중근은 블라디보스1909년 토크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러일전쟁(露日戰爭)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국을 합병한 뒤 중국 땅인 만주까지 빼앗을 계획을 세우고,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으로 보내 러시아의 재무 대신 코코프체프와 협상을 하려는 것 이었다 . 이토 히로부미는 우리나라와 을사조약을 강제로 맺고 한국의 초대 통감을 지낸 뒤, 일본으로 돌아가 추밀원(樞密院) 의장이 된 침략의 우두머리였다. 안중근은 침략자 이토 히로부미를 없애고 일본의 침략 정책을 세계에 알릴 하늘이 주신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안중근은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대동공보사(大東共報社) 사무실에서 독립투사 정재 관, 김성무 등 여러 동지들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를 없앨 계획을 세운 뒤, 1909년 10월 21일 동지 우덕순과 함께 하얼빈으로 떠났다. 하얼빈은 러시아의 동청(東淸) 철도의 종착지인 동시에 정치, 문화의 중심지였다.
우덕순(禹德淳)과 함께 기차를 타고 하얼빈으로 가는 도중에 러시아 말을 잘하는 유동하(劉東夏)를 통역으로 삼았다. 또 하얼빈에 도착한 뒤에는 교포 김성백(金成白)의 집에 머무르며 다시 조도선(曺道先 )을 동지로 맞았다. 안중근 은 동지들과 함께 밤새 여러 신문을 모아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에 도착하는 시간과 환영 행사 등에 관한한 정보를 모았다. 이때, 안중근은 일본의 남만주 철도와 러시아의 동청 철도가 엇갈리는 채가구(蔡家溝) 역에서 이토 히로부 미가 열차를 갈아탄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채가구에서도 기회를 엿보기로 했다.
안중 근은 의거 전날 밤, 자신의 굳은 뜻을 담은 시 '장부가(丈夫歌)'를 지었다. 장부가 세상에 남에 그 뜻이 크도다. 때가 영웅을 만들고 영웅이 때를 만드는구나.천하를 굽어보니 어느 날에 뜻을 이루고 동풍이 점점 차가우나 장사의 뜻이 뜨겁다분함은 한번 갔으니 반드시 목적을 이루리로다.주도적 이토여 어찌 목숨을 비길 고 어찌 이에 이를 줄을 헤아렸으리요. 모든 일은 본디부터 그러하도다. 동포 동포여 속히 큰 뜻을 이룰지어다. 만세 만세여 대한 독립이로다. 만세 만만세여 대한 동포로다 하얼빈 역에는 벌써부터 러시아 군인들과 환영객 들이 많이 나와서 이토 히로부미를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안중근은 역 안에 있는 찻집에 들어가 차를 마시며 열차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오전 9시쯤이 되자 이토 히로부미가 탄 열차가 하얼빈 역에 들어와 멎었다. 얼마 후, 러시아 재무 대신 코코프체프와 일본 총영사(總領事)의 안내를 받으며 이토 히로부미가 기차에서 내렸다. 안중근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이 일이 반드시 성공하게 해 달라고 기도한 뒤 찻집에서 나왔다.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 군 의장대를 사열한 뒤, 환영객들로부터 인사를 받기 시작했다. 안중근은 러시아 군대 뒤 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쏠 기회를 노렸다.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가 10보정도 떨어 진 거리에 왔을 때, 재빨리 권총을 꺼내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3발을 쏘았다. 이토 히로부미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그 순간, 안중근은 자기가 혹시 이토 히로부미가 아닌 다른 사람을 쏘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일행 중 의젓해 보이는 사람들을 향해 3발을 더 쏘았다. 이토 히로부미를 뒤따르던 하얼빈 일본청영사가 가와 가미 도시히코, 비서관 모리야스지로, 남만주 철도 (南 滿州鐵道) 이사 다나카 세이지로(田中淸次郞)등이 차례로 쓰러졌다. 그때, 러시아 헌병 들이 안중근을 덮쳤다. 안중근은 '코레아우라! (대한만세)' 라고 외친 뒤 순순히 체포 됐다. 안중근 의사의 총에 맞아 쓰러진 이토 히로부미는 곧 수행하던 의사가 응급 처치를 했지만 숨을 거두고 말았다.
한국에 이어 만주(滿州)를 집어삼키려던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우두머리 이토 히로부미는 안중근의 손에 최후를 맞은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가 총에 맞아 죽었다는 소식은 곧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동경일일신문(東京日日新聞) 과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등의 호외가 쏟아져 나왔고,전세계가 떠들썩했다. 해외에서 독립 운동을 하던 사람들은 안중근 의사의 의거에 환호를 보냈으나 한국, 중국의 친일파들은 매우 당황했다. 중국 사람들은 안중근 의사가 마치 자기들의 원수를 갚은 것처럼 기뻐했다.
당시중국의 국가 주석 이었던 원세개는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듣고 다음과 같은 글을 지어 찬양하였다. 안중근 의사 만 (安重根義士滿滿) 平生營事只今畢 死地圓生非丈夫 身在三韓名萬國 生無百世死千秋평생을 벼르던 일 이제야 끝났구려. 죽을 땅에서 살려는 것은 장부가 아니고말고. 몸은 한국에 있어도 세계에 이름 떨쳤소. 살아선 백 살이 없는데 죽어서 천 년을 가오리다.
의거 직후 안중근 의사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러시아 기병 대위 니키프로프에게 체포되어, 하얼빈 역에 있는 러시아 헌병파출소로 끄려가 간단한 조사를 받았다. 그 날 오후, 안중근의사는 일본 영사관으로 넘겨졌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장소가 러시아 땅인 하얼빈이었기 때문에 러시아 재판소에서 안중근 의사를 재판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이 사건이 정치적으로 복잡한 문제라고 생각하여, 안중근 의사를 일본 총영사관에 넘기고 재빨리 발을 뺀 것이다. 안중근 의사가 조사를 받고 있는 동안 우덕순, 조도선 등 사건과 관련된 동지들이 하나둘 씩 잡혀 들어와 일본 총영사관 지하실에 갇혔다. 1979년 10월 26일. 19년 동안 이 땅의 민중을 핍박하고 억압을 하면서 철권통치를 하다가 자신의 충복 김재규의 손에 의하여 총살을 당했다. ▲ 만주군관학교 2기생 예과 졸업식에서 박정희는 우등상을 받고 부상으로 부의 황제 명의의 금시계를 하사받았다. 대열 앞에서 생도 대표로 인사하는 사람이 박정희다. 졸업식장에서 재학생의 송사에 답하는 졸업생 답사를 낭독했는데, 그 답사 내용 중에는 "대동아 공영권을 이룩하기 위한 성전(聖戰)에서 나는 목숨을 바쳐 사쿠라와 같이 휼륭하게 죽겠습니다."라는 구절이 명백히 포함되어 있다. (滿洲日報 1942.3.24)
박정희(朴正熙) 만주군관학교를 최우등생으로 수료한 뒤 일본육군사관학교로 전학, 1944년 졸업과 함께 만주군 소위로 임관되어 관동군(關東軍)에 배치되었다.
광복 후 군인생활광복 때까지 만주와 화북지방에서 일본군 장교로 전쟁에 가담했다가, 1946년 귀국하여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 제2기로 졸업하고 육군대위로 임관하였다. 한국전쟁 동안 주로 육군본부 정보국에서 근무하다 1953년 장군이 되었다.
육군본부 정보국에 근무하고 있던 1949년, 사상관련사건에 연루되어 군법회의에 회부된 적이 있었다. 당시의 신문보도에 의하면 여순반란사건 관련 공산주의 혐의자로 되어 있는데, 군법회의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육군본부의 동료·상사들의 구명운동에 의하여 복역은 면제되었다
1954년 제2군단 포병사령관, 1955년 제1군참모장, 1960년 육군군수기지사령관, 제1관구사령관,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을 거쳐, 1961년 제2군부사령관으로 재직중, 군부쿠데타를 주도하여 정권을 장악하였다.
누리꾼, 나경원 <자위대창립 50주년 기념행사> 참석 再비난 나경원, "문은 했지만 참석은 안 했다!" 2011년 09월 19일 (월) 16:23:39 홍성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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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노무현대통령님의 가치와 정치철학 계승 원문보기 글쓴이: 순수나라
첫댓글 10월 26일은 김좌진,이범석,홍범도 장군이 지휘한 청산리대첩의 막판 승리를 장식했던 날이기도하져...
참고로 열우당 신중식 의원이라는 양반은 그 다음 임기에 낙선했습니다.
어디 지금 기숙학원 원장으로 취임했다고 자료가 나옵니다. 당연히 낙선해야죠.
그런데 그나라당은.....?
-_- 참........ 용빼는 재주라도 있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