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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고대성경 사해사본들과 역본들
[맛소라 사본]
현재 남아 있는 히브리어 성서 코덱스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 카이로 예언서'이다. 이것은 895년에 팔레스타인의 티베리아에서 모세스 벤 아셰르가 쓰고 모음 기호를 붙였다. 그다음으로 오래 된 것은 레닌그라드 코덱스인 '후기 예언서'(916경)이다. 벤 아셰르가 직접 쓴 것은 아니지만, 모음 기호가 티베리아 마소라 체제를 따른 것이다. 그다음의 것은 현재 예루살렘에 있는 ' 알렙포 코덱스'이다. 솔로몬 벤 부야가 썼고, 아론 벤 모세스 벤 아셰르가 교정하고 구두점을 찍고 마소라 주기를 붙인 것으로서, 930년경에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본래 이 사본은 [구약성서] 전체를 포함한 것이었으나 모세5경과 성문서 부분이 거의 소실되고 예언서 부분만 그대로 남아 있다. 아론 벤 모세스 벤 아셰르의 체제를 따르는 또다른 두 사본이 있다. 하나는 BM(4445) 사본으로서 모세5경 전체를 포함하고 있으며 950년경에 완성된 것으로 본다. 또다른 하나는 레닌그라드 사본으로서 [구약성서] 전체를 다 포함하고 있는 MSB 19a 사본인데, 이것이 완성된 것은 1008년이다. 이밖에도 1105년에 씌어진 예언서 로이클린 코덱스(Codex Reuchliana of the Prophets)가 있다.
맛소라 자료들의 대조
일찍이(1050 이전) 미샤엘 벤 우지엘이 자신의 책 [키타브 알 훌라프 Kitab alHulaf]에서 벤 아셰르의 맛소라 본문과 벤 납달리의 마소라 본문 사이의 차이를 비교한 바가 있다. 솔로몬 예디다 노르지는 [민하트 샤이 Minhath Shai]로 알려진 본문비평주석에서 방대한 양의 마소라 본문 자료들을 비교하여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1626년에 완성하여 1742년에 나온 '만투아 성서'(Mantua Bible)에 함께 인쇄되어 나왔다. 벤저민 케니콧은 615개의 상이한 사본들과 52개의 인쇄본을 수집하여 2권으로 편집했다(1776~80). 조반니 베르나도 데 로르시는 731개의 상이한 사본들과 300개의 인쇄본들을 수집하여 4권으로 펴냈고(1784~88), C.D. 긴스부르크는 70개의 상이한 사본들과 17개의 초기 인쇄본들을 수집하여 4권으로 펴냈다(1908~26).
[고대 역본들]
성경이 유대인들만의 소유였고 그들이 히브리어만을 사용했을 때에는 번역이 필요없었다. 그러나 시대와 상황의 변화로 인해 성경을 원전의 언어로 읽기가 어렵거나 전혀 읽ㅇ르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성경의 일부 혹은 전체가 번역되어야 할 필요가 생겼다. 이런 필요는 구약뿐만 아니라 신약도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나라에 복음을 전해야 하는 교회로서는 성경번역이 필연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성경에는 수많은 번역본들이 있다. 전체적이든 부분적이든 20세기 중엽까지 1,500여 종 이상의 언어와 방언으로 번역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번역본들 가운데 특히 고대의 역본들은 현존하는 사본들보다 이른 것들이 많이 있어서 사본과 함께 성경연구에 귀중한 자료로서 취급되고 있다.
1.아람어 탈굼역
바벨론 포로기 이후 회당에서는 성경을 낭독한 다음 당시 히브리어보다 아람어를 더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유대인들을 위해 아람어로 해설해 주었다. 이같은 구두 해석이 전승을 거듭하다가 기원전 2세기에는 문서화되기에 이르렀는데, 이것이 탈굼이라고 하는 아람어 역본이다. 오늘날 전해지는 탈굼은 모세 오경, 예언서, 성문서집 등이다. 하지만 아람어 역시 나중에는 대중들이 이해하지 못하게 되면서 히브리어와 같은 운명을 겪는다.
탈굼은 히브리성경을 후일 포로 후기시대팔레스타인의 일상용어가 되었던 아람어로 자유롭게 번역한 것이다. 이것은 초기에 구전되었다가 히브리성경으로 읽혀졌으며 아람어 번역본에 이르게 되었다. 최초에 기록된 탈굼, 즉 온켈로스의 모세오경이나 요나단의 예언서 등은 그리스도 시대에 기록된 것이다.
BC 5, 6세기경부터 페르시아 제국에서는 아람어가 공식 언어로 사용되었고, 팔레스타인 유대 사회와 디아스포라(여러 나라로 흩어진 유대인들) 사이에서도 아람어를 쓰게 되자, 유대인 회당에서는 예배 때 통역자(메투르게만)가 등장하여 예배 때 낭독되는 율법서와 예언서 관련 본문 등을 히브리어에서 아람어로 통역했다. 처음에는 구두로 통역되고 전승되던 것이 후대에 이르러 통역 내용이 일정한 형식으로 굳어졌고 드디어 기록으로 정착되었다.
율법서 탈굼에는 몇 가지 종류가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온켈로스의 탈굼으로 알려진 바빌로니아 탈굼(Babylonian Targum)이다. 이것은 본래 팔레스타인에서 만들어진 것이었으나 바빌로니아로 건너가 거기에서 개정되고 크게 권위를 인정받게 되었다. 9세기 직후에 다시 팔레스타인으로 들어와 다른 여러 종류의 탈굼들을 제치고 독자적 위치를 차지한다. 전체적으로 볼 때, 온켈로스의 탈굼은 문자적인 번역이면서도 랍비들의 주석을 번역에 반영시키고 있다.
팔레스타인 탈굼들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요나단의 탈굼이다. 요나단은 14세기경부터 생긴 이름으로서 예루살렘 탈굼(Targum Jerusalem)을 뜻하는 히브리어 약자 'TJ'를 요나단의 탈굼(Targum Jonathan)으로 잘못 읽은 데서 비롯되었다. 이것은 옛 팔레스타인 탈굼(Old Palestinian Targum)과 온켈로스의 초기 번역을 뒤섞은 것이다. 랍비들의 주석·설교·교훈 등이 번역에 많이 첨가되어 있다.
사마리아 5경을 번역한 탈굼도 있다. 유대인의 탈굼이 문자적인 번역인 데 비해 이것은 좀 자유스러운 번역이다. 본문이 공식적으로 확정된 적은 없다. 예언서 탈굼도 본래는 팔레스타인에서 나왔으나 바빌로니아로 건너가 최종적으로 개정되었다. 여러 세기에 걸쳐서 완성된 것이지만 일반적으로 BC 1세기말에서부터 AD 1세기초까지 활동한 유명한 랍비였던 힐렐의 제자 요나단 벤 우지엘의 번역으로 본다. 이것이 엄격한 문자적 번역은 아니지만 온켈로스에 의존한 증거가 많이 나타난다. 성문서의 아람어 역은 모두 5세기 이후에 나온 것들이다.
2.그리스어 역본(LXX)
기원전 3세기 초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70명의 유대인 학자들이 히브리어 구약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했는데, 이를 70인역(Septuagint)이라 부른다. 예수 그리스도 시대에 팔레스타인과 지중해 지역의 유대인들과 이방인 개종자들은 이 70인역만을 사용하였다.
약자로는 LXX부르며 〈구약성서〉최초의 번역으로 그리스어로 번역되었다.
최초의 〈구약성서〉 번역본이다. 히브리어 성서 원문을 번역한 것으로 그리스어가 국제 공용어일 때 이집트에 있는 유대인 공동체들이 사용하도록 제작한 것 같다. 언어분석 결과 토라, 즉 모세 5경(처음 5권)은 BC 3세기 중반에, 나머지 부분은 BC 2세기에 번역되었다고 한다. '70'을 뜻하는 라틴어 septuaginta에서 유래한 '70인'이라는 명칭은 이스라엘 12지파에서 6명씩 뽑은 72명의 번역자들이 각각 독방에 들어가 〈구약성서〉 전체를 번역했는데, 그들의 번역이 모두 동일했다는 후대의 전설에서 유래했다. 사실 토라(율법서)와 후대의 번역본은 문체와 용례가 많이 다르다. 예루살렘의 대제사장 엘레아자르가 문학의 후원자인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푸스(BC 285~246)의 요청으로 번역자들을 알렉산드리아로 보냈다는 전승이 〈아리스테아스의 편지〉에 처음 보이는데 별로 신빙성이 없는 자료이다. 초기 그리스도교가 사용한 언어는 주로 그리스어였으며, 그리스도교도들은 그리스도가 성취했다는 예언들을 70인역 본문에서 인용했다. 유대인들은 이것을 성서를 잘못 사용하는 것이라고 간주하고 70인역 사용을 중단했다.
3세기에 오리게네스는 70인역에 끼어든 필사자의 오류들을 바로잡으려고 시도했는데, 당시 사본에 따라 여러 가지 많은 오류가 있었다. 다른 학자들도 70인역을 좀더 정확하게 만들기 위해 히브리어 본문을 참조했다. 그러나 〈구약성서〉에 대한 고대 라틴어역·콥트어역·에티오피아어역·아르메니아어역·그루지야어역·슬라브어역, 그리고 아랍어역 일부의 주요근거가 된 것은 히브리어 성서가 아니라 바로 70인역이었다. 그리스 정교회는 70인역을 〈구약성서〉 표준역본으로 인정해왔으며, 히에로니무스는 이 역본을 가지고 불가타 〈구약성서〉를 번역하기 시작했다.
그리스도교권에서 보존한 70인역은 히브리 정경의 모든 책 외에 소(小)예언서들과 몇몇 책들을 구분했으며, 개신교도들과 유대인들에게는 외경으로, 로마 가톨릭교도들에게는 제2정경으로 알려진 부수적인 책들을 덧붙였다. 히브리 정경은 토라·느비임(예언서)·케투빔(성문서)의 3부분으로 나뉘는 데 비해, 70인역은 율법서·역사서·시가서·예언서의 4부분으로 나뉘며 외경들도 적절히 배치되어 있다. 오늘날 서방세계 대부분의 성서 역본들은 계속 이런 식으로 구분되었으나 개신교 역본들의 경우에만 외경을 빼거나 따로 묶는다. 70인역의 본문은 몇몇 초기의 사본들에 실려 있지만, 그 사본들은 별로 신빙성이 없다. 이 가운데 잘 알려진 사본들은 4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바티칸 사본'(B)과 '시나이 사본'(S), 그리고 5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알렉산드리아 사본'(A)이다. 그밖에도 이전에 제작된 수많은 파피루스 단편들과 후대의 많은 사본들이 있다. 최초의 70인역 인쇄본은 '콤플루툼 학파 대역성서(對譯聖書)'(1514~22)에 실려 있다.
70인역 성서 사본들과 인쇄본 사본
편의상 파피루스 사본, 대문자 사본(Capitalletters : Uncials), 필기체 소문자 사본(Cursive script : Minuscules)으로 나뉜다. 파피루스 사본의 수는 수백 개에 이르고, 크기는 다양하며, 70인역이 형성되던 초기에서 7세기 중엽의 것까지 있다. 특히 이집트에서 발견된 [신명기] 파피루스는 기원전의 것이다. 파피루스에 씌어진 것이 아니고 양피지나 가죽에 씌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쿰란에서 발견된 [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의 단편 조각 사본들, 그리고 나할 레베르에서 발견된 그리스도교 형성 초기시대의 두루마리 사본도 중요한 고대 사본들이다. 가장 중요한 파피루스 사본은 구약에 속하는 9권의 단편들을 보여주고 있는 11개의 코덱스로 되어 있는 체스터 비티 파피루스이다. 이 사본이 만들어진 것은 2~4세기경이다. 그후 300여 년 동안 파피루스 본문들이 급증했고 현재 200여 개의 사본들이 남아 있다.
대문자 사본들은 4~10세기에 나온 것들로서 모두 코덱스(책 모양)로 되어 있다. 괄목할 만한 것들로는 4세기의 바티카누스 사본(Codex Vaticanus : [구약성서] 전체), 4세기의 시나이티쿠스 사본(Codex Sinaiticus : [구약성서] 일부), 5세기의 알렉산드리아누스 사본(Codex Alexandrianus)이다. 이 셋은 본래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를 다 포함한 것들이었다. 이밖에도 성서의 일부만 보여주고 있는 사본들이 많다. 그중에서도 예언서를 보여주고 있는 6세기의 마르칼리아누스 사본(Codex Marchalianus)은 값진 것이다.
필기체 소문자 사본은 9세기 이후부터 나타난다. 11~16세기에 1,500여 개의 사본들이 발견되었으나 그들은 모두 같은 본문을 반영하는 사본들이다. 비록 후대의 것이지만 좋은 본문을 간직한 대문자 사본을 베낀 것일 때에는 가치가 있다. 가장 먼저 인쇄된 70인역은 '콤플루툼 학파 대역성서'1514~17)이다. 이것은 1522년에 비로소 유포되었으므로, 1518년에 베네치아에서 나온 알다인판(版)이 실제로는 맨 처음에 나온 인쇄본이라고 할 수 있다. 1587년 로마에서 식스투스(교황 식스투스 5세) 판이 나왔고, 19, 20세기에 들어서서 여러 가지 비평적 편집본들이 나왔다.
3.아퀼라 역본
아퀼라는 소아시아의 폰투스 출신으로 유대교인이 된 사람으로서, 랍비 아키바의 지도를 받으면서 130년경에 히브리어 성서를 그리스어로 번역했는데, 극도로 직역을 했다. 전체 역본은 남아 있지 않으며, 다만 인용된 부분들과 오리게네스의 '헥사플라'(Hexapla : 6개 언어 대조성서)에 그 단편이 남아 있고, 카이로의 고본 서고에서 나온 재활용 양피지(palimpsests : 한 번 쓴 양피지를 지우고 그 위에 다시 쓴)에 단편이 남아 있을 뿐이다.
4.테오도루스의 개정본
그리스어 번역본의 2차 교정이 70인역을 개정한 것인지, 아니면 70인역 외에 다른 그리스어 역을 개정한 것인지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2세기 후반에 테오도루스라는 사람이 개정했다. 히브리어 음역의 빈도수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5.심마쿠스의 역본
2세기말 심마쿠스가 번역했다. 번역자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번역은 우수하지만 영향력은 미미했다. 히에로니무스가 그의 불가타 역에서 심마쿠스의 번역을 활용하긴 했으나, 오늘날 그의 번역은 '헥사플라'를 통하여 단편만이 알려져 있다.
6.오리게네스의 역사플라
여러 가지 상이한 번역판을 갖게 된 3세기에 이르러서 성서 본문에 대해 서로 다르게 이해함으로써 혼란이 생겼다. 230~240년경에 카이사리아에서 활동하던 알렉산드리아의 신학자 오리게네스가 '헥사플라'를 편집했다. 히브리어 본문, 히브리어 본문의 그리스어 음역, 아퀼라 역, 심마쿠스 역, 70인역, 테오도루스의 개정본을 평행으로 편집하여 비교해볼 수 있게 했다.
오리게네스의 주요관심은 70인역이었다. 그는 70인역 본문을 히브리어 본문과 비교하여, 히브리어 본문에는 없는데 70인역에만 있는 첨가된 본문에는 의구표(疑句標)를 했고, 히브리어 본문에는 있는데 70인역에 그 본문이 번역되어 있지 않은 곳에는, 다른 그리스어 번역에서 그 부분을 가져와서 70인역에 삽입시키고 앞뒤에 의구표를 붙여 놓았다. 의구표란 고사본의 의심스러운 본문이나 재생시킨 본문을 표시하던 단검표(+), 마이너스표(-), 나누기표(÷), 별표(*) 등을 일컫는다. 헥사플라의 원본은 600년경까지는 존속되었던 것 같으나, 오늘날에는 단편만 남아 있다.
7.콥트어 역본들
그리스도교가 그리스어권 밖으로 퍼져가면서 그곳 언어로 성서가 번역되었는데, 그중 하나가 콥트어 성서이다. 3세기말 4세기초에 번역된 것으로 보이며, 번역 대본은 그리스어 성서이다. 부분적으로는 고대 라틴어 역본과 유사성도 보인다.
8.아르메니아 역본
5세기초까지 아르메니아 민족 교회는 그동안 문학과 예배 의식에서 그리스어와 시리아어를 함께 사용해왔으나, 성 메스로프(361~439)가 아르메니아어 알파벳을 만들어 아르메니아 민족 문학의 기반을 닦았는데, 이때 성서도 아르메니아어로 번역되었다. 첫 번역은(414경) 시리아 역 페시타(Peshitta)를 대본으로 번역했고, 곧 이어서 개정했다. 현재까지 전해져오는 최종적인 공인 번역은 70인역을 대본으로 하여 번역된 것이지만 여기에도 페시타의 영향이 나타나 있다.
9.그루지아어 역본
아르메니아의 전승에 따르면 그루지야어 역본도 메스로프의 번역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루지야어 [구약성서]의 가장 오래된 부분인 [시편]도 5세기 이전으로 소급해 올라가지는 않는다. 사본들은 그리스어 역본이나 아르메니아 역본에 근거해 있다.
10.에티오피아어 역본
5세기경에 에티오피아에 그리스도교가 자리잡으면서 성서 번역이 시작되었는데, 최초의 것은 70인역을 대본으로 하여 번역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사본은 13세기의 것이다. 14세기 이후의 사본들에는 아랍어 역과 콥트어 역의 영향이 나타나 있다. 많은 부분이 히브리어 본문과 일치하고, 70인역 본문과는 큰 차이를 나타낸다.
11.고트어 역본
고트족은 오늘날 슬로바키아와 불가리아로 알려진 지방에서 살았다. 4세기 중엽 그리스도교 선교사였던 울필라스가 고트어 알파벳을 발명하여 성서를 번역했다. [구약성서] 번역은 [에즈라]와 [느헤미야]의 극히 일부 단편만 남아 있고 나머지는 다 없어졌다. 그리스어 역을 대본으로 번역했다. 고트어로 기록한 문헌이라고는 성서 단편적 사본뿐이다.
12.고대 라틴어 역본
2세기 중엽 라틴어 역 [구약성서]가 북아프리카와 갈리아 지방에 유포되고, 3세기 초에는 로마에도 유포된 흔적이 있다. 아프리카의 로마 점령지에 살며 라틴어를 쓰던 유대인들이 번역한 것을 그리스도교에서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있다. 원본도 히브리어가 아니고 그리스어 역이다. 고대 라틴어 역본은 '라틴어 옷을 입은 70인역'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70인역과 관계가 깊다.
고대 라틴어 역본에는 오리게네스가 개정하기 이전의 70인역의 상태가 반영되어 있으므로 본문비평에 있어서 고대 라틴어 역의 비중이 크다. 3세기까지 여러 종류의 라틴어 역들이 유포되고 있었다. 그 번역이 하나의 번역본에서 나온 개정판들인지, 처음부터 독자적으로 번역된 것들인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382년경 교황 다마수스가 여러 가지 서로 다른 고대 라틴어 역본들을 정리했다.
13.불가타 역본
불가타(vulgata)는 라틴어의 '공동번역'이라는 뜻의 editio vulgata에서 유래했다.
성 히에로니무스(제롬)가 번역한 것으로, 로마 가톨릭 교회가 사용하는 라틴어 성서.
382년 교황 다마스쿠스가 당대 최고의 성서학자인 히에로니무스에게 당시 사용되던 여러 번역본을 토대로 만족할 만한 라틴어역 성서를 출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383년경 복음서의 라틴어역 개정판이 나왔다. 그는 〈70인역 성서〉를 사용하여 새로운 라틴어역 〈시편〉(갈리아 시편)과 〈욥기〉, 몇몇 다른 책들을 펴냈다. 나중에 히에로니무스는 〈70인역 성서〉가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고 히브리 성서 원본을 토대로 〈구약성서〉 전체를 번역하기 시작하여 405년경에 이 작업을 끝마쳤다. 히에로니무스의 번역은 즉시 인정받지는 못했으나 6세기 중엽부터 모든 낱권 성서들을 하나의 겉표지로 묶은 성서가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이 책 안에는 보통 〈시편〉을 제외한 히에로니무스의 〈구약성서〉 번역본, 히에로니무스가 번역한 〈갈리아 시편〉, 〈토비트〉·〈유딧〉·〈복음서 개역본〉 등이 들어 있었다. 나머지 〈신약성서〉는 히에로니무스가 이전의 라틴어 역본에서 취해 약간 고친 듯하다. 또한 개신교와 유대교에서는 외경으로 취급하고 로마 가톨릭에서는 제2경전으로 분류하는 〈70인역 성서〉의 일부도 이전의 번역본에서 취하여 포함시켰다.
여러 편집인과 교정자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불가타 성서'의 여러 개정본을 발행했다. 파리대학교는 13세기에 중요한 판본을 발행했는데, 그것의 1차적 목적은 신학 강의와 토론 때 통일된 기준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가장 오래된 인쇄본인 불가타 성서는 모두 파리 판본에 근거를 둔 것들이다. 1546년 트리엔트 공의회는 불가타 성서가 라틴어 성서로서 유일한 권위를 가진다고 선언했으며, 결점을 최소한으로 줄여 이를 출판하라고 요구했다. 1592년 교황 클레멘스 8세가 발행한 이른바 〈클레멘스 불가타 성서〉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권위 있는 성서본문이 되었다. 이것을 토대로 1941년에 '성심회' 역본이 번역되었고 현대에 들어와 여러 교정판이 출판되었다. 1965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불가타 성서를 개정하기 위한 위원회를 만들었다.
Vellum leaf from an illuminated Medieval Manuscript
Italy; Early 14th Century
Latin Text; Transitional Rotunda Script
23.5 by 17 cm
At this period, the St. Jerome Bible was not transcribed as often as one would expect in the country of its origin and the very land which held the seat of the Roman Church. During the greater part of the 13th century, while the popes were greatly concerned with gaining political power, art was at a low ebb in Italy, and religious manuscripts were comparatively few and far inferior to the work of monastic scribes in Germany, France, and England. But with the great wealth accumulating in Italy during the 14th century through commerce and the Crusades, this country soon surpassed in richness as well as in numbers the manuscript output of all other nationalities.
The rich black lettering of this manuscript is in the transitional rotunda script and is excecuted with skill and beauty. It is supplemented by initial letters in rich ultramarine blue and deep cinnabar (vermilion), which colors are reflected in the ornament of the romanesque capitals. All of these factors combine to indicate that the manuscript was executed in central Italy, possibly at Florence.
13.시리아어 역본
시리아 교회가 가지고 있던 시리아 역 성서는 '페시타'(단순한 번역)라고도 알려져 있다. 왜 이런 이름이 붙었는지, 누가 언제 번역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 번역은 본래 1세기경에 번역되었던 것 같고, 그것은 메소포타미아의 아리아베네 지역에 있던 유대인 사회에서 번역하여 사용했던 것 같다. 페시타는 문체도 다양하고 채택한 번역 방법도 다양하다. 모세5경 부분은 마소라 본문과 아주 가깝지만, 다른 부분은 70인역과 가깝다. 맛소라 본문과 가까운 본문은 유대교인들이 번역한 것이고, 70인역과 가까운 본문은 그리스도교 쪽의 개정일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5세기 시리아 교회가 네스토리우스파(동시리아)와 야코부스파(서시리아)로 나뉘면서 페시타의본문사도 2갈래로 갈라진다. 네스토리우스 교회는 고립되어 있었으므로 그 교회가 간직하고 있던 사본이 덜 손상되었을 것으로 본다. 6세기초에 마북의 감독 필록세노스가 70인역의 루시아 개정본을 근거로 페시타를 개정했다. 617년에는 헥사플라에 들어 있는 시 리아어 역을 텔라의 주교인 파울루스가 헥사플라 70인역에 근거하여 개정했다. 지금 단편만 남아 있는 팔 레스타인 시리아 역은 에데사 야코부스(708 죽음)가 새롭게 개정한 것이다. 현존하는 페시타 사본 중 가장 오래된 것은 442년에 나온 것이다. 완전한 형태로보존된 4권의 코덱스는 5~12세기 때의 것이다. 아직 비평적편집본은 없으나, 국제구약학회가 준비하고 있다
14.아랍어 역본들
최초의 것으로서 가장 중요한 역본은 사디아 벤 요세프(892~942)가 히브리어에서 번역한 것으로서 히브리어로 씌어진 아랍어 역본이다. 이 번역은 이집트의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아부 알 하산이 이것을 대본으로 모세5경을 번역했으며, 11~12세기에 아랍어 역 사마리아 5경으로 받아들여졌다. 또다른 아랍어 역 사마리아 5경은 아부 사이드가 13세기에 번역한 것이다.
히브리어에서 번역된 다른 여러 번역들 중에 10세기에 야피트 이븐 알리가 번역한 것이 가장 주목할 만하다. 946년 스페인 코르도바의 그리스도교인이었던 벨라스케스의 아들 이삭이 복음서를 라틴어에서 번역했다. 아랍어 역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사본으로는 16세기에 번역된 것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보관되어 있다. 19세기의 것으로 파리와 런던에 있는 '대역성서'(Polyglots)에 아랍어 역이 보존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아랍어 역 사본들은 히브리어·그리스어·사마리아어·시리아어·콥트어·라틴어 중에서 번역된 것 등이 함께 전해져오기 때문에 번역판들마다 큰 차이를 보인다. 그런 만큼 아랍어 역은 본문비평 자료로서는 큰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 19, 20세기에 개신교와 가톨릭이 번역한 현대 아랍어 역들이 있다.
[라틴 역본]
기원후 2세기 말엽부터 유럽 각지에서 라틴어로 성경이 번역되었는데 이들을 고대 라틴어역이라고 한다. 그러나 고대 라틴어역들은 무절제한 수정과 내용의 와전으로 많은 혼란을 가져왔다. 그리하여 382년 교황 다마수스 1세는 당시의 가장 유능한 성경학자인 유세비우스 히에로니무스(오늘날 제롬으로 알려져 있음)에게 라틴어 성경의 번역을 요청하였다. 제롬은 383년 복음서를 시작으로 하여 405년에 신구약 번역을 끝마쳤다. '불가타'(The Vulgata: 공통적인)라고 불리는 제롬의 라틴어 역본은 이후 중세 1,000년 동안 서구세계에서 공인성서로 그 권위를 인정받았다.
불가타본 이전에 있었던 라틴어 역본들의 총칭을 편의상 고대 라틴어 역본이라고 한다. 성서가 최초로 라틴어로 번역된 것은 2세기 말엽 북아프리카로 추정된다. 신약성서는 그리스어 원본을 번역하였으나, 구약성서는 헤브라이어 원본이 아니라 그리스어 역본을 토대로 번역하였다. 3세기에는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등 유럽 여러 곳에 라틴어 성서가 유포되었다. 고대 라틴어 역본들의 표현 및 문체의 특징은 통속적이고 구어적이다. 이는 비지식층의 독자들을 대상으로 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라틴어 역본들은 그 종류가 아주 다양해서 후에 성서편찬작업을 한 성 히에로니무스가 라틴어 번역의 종류는 필사본의 수효만큼이나 다양하다고 불평할 정도였다. 불가타본 성서의 형성을 보면 다음과 같다. 2세기 중엽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고대 라틴어 역본은 오늘날 50여 개의 수사본(手寫本)과 단편들이 전해질 정도로 대단히 많았다. 4세기 말경에 이르러 라틴어역 수사본들이 양산되자, 라틴어 역본은 심각할 정도로 그 순수성을 잃게 되었다. 그러자, 라틴 교회 안에서 사용하던 성서를 개정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때 이 문제의 심각성을 직시하고 모든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는 성서를 편찬한 사람이 바로 고대 교회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성서학자 성 히에로니무스였다. 그는 달마티아의 스트리돈에서 태어났으며, 로마에서 문법과 수사학을 공부하였고, 그리스어와 헤브라이어도 익혔다. 382년 교황 다마수스 1세의 비서로 임명되었으며, 그때 그가 맡은 일이 라틴어판 성서를 개정하는 일이었다. 384년 4복음서의 개정판을 완성하였고, 신약성서는 386년경에 개정한 것으로 전해지나 학자들마다 견해가 다양하다. 구약성서까지 포함해서 개정판을 완성한 것은 391~405년에 걸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가 이 방대한 작업을 하면서 가장 중점을 둔 것은 라틴어 성서문헌을 정화시키는 것으로, 그 방법은 원천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즉, 구약성서의 경우에는 구약성서 본래의 언어로 된 헤브라이어본을, 신약성서는 그리스어 필사본 중에서 나은 것들을 새로운 번역의 문헌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는 고대 라틴어본을 개정한 《시편》을 제외한 모든 구약을 종래의 70인역에 의존하던 것을 지양하고, 히브리어 원전에서 직접 번역하였다. 그리하여 15년간의 노력으로 서방교회는 70인역을 계승해갈 수 있는 라틴어 성서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당시에는 이 성서개역작업이 과소평가되었으나, 중세에 이르러 서방교회 전체가 이것을 표준적인 성서로 사용하게 되었다. 이 불가타 성서는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인수페르 Insuper〉라는 칙령을 통해 라틴 교회의 공식 성서로 선언되었다. 그후 1590년 교황 식스투스 5세의 주관하에 식스투스판 개정본이 나왔으며, 1592년 클레멘스 8세에 의해 다시 개정본이 나오면서 로마 가톨릭 교회의 표준성서로 공인되었다.
[중세와 근대 역본]영어역 제외
중세와 근대에 번역된 성경의 수효는 수없이 많다. 더구나 일부 언어(예. 프랑스와 독일어)에서는 상이한 번역본이 수백종에 이른다. 여기에서는 일부 대표적인 유럽어 번역본 성경만을 살펴보겠다. 독일어역 성경은 서고트의 주교 울필라스(Ulfilas)가 고트어로 성경을 번역한 것이 시초이지만 게르만어로 된 가장 최초의 성경은 몬제(Monsee)의 프랑크역 마태복음이다(738). 그러나 독일 성경사뿐 아니라 독일 언어사에서도 신기원을 이룩한 것은 루터역 성경이다. 1522년 9월에 신약이, 1534년에 성경 전체가 간행되었는데, 장엄한 어법과 풍부한 어휘로 유명해 독일문학사에 심원한 영향을 끼쳤다. 이 외에 쮜리히위원회에서 원전에서 직접 번역한 《쮜리히성경》(1931)과 현대 독일어역 성경 중 가장 훌륭한 것으로 인정받는 《Menge Bibel》(1926)이 있다. 프랑스역 성경으로 최초의 것은 1170년경 발도(P.Waldo)가 추종자들과 함께 번역한 복음서 및 바울서신이다.
성경 전체의 번역판은 파리대학에서 출판한 것이 최초의 것이다(1226-50).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번역본은 칼빈의 사촌형 올리베땅(Olivétan)의 작품(1535)인데, 칼빈은 여기에 라틴어 서문과 신약의 서언을 썼다. 현재 널리 사용되고 있는 성경은 이것을 개정한 것이다. 이 외에 현존하는 네덜란드어 최고의 번역본은 10세기 초에 의역된 시편이고, 완역성경은 무명의 학자들에 의해 1526년에 출판되었다. 이탈리아어 최고의 번역본은 13-14세기의 공관복음서이고 완역성경은 1532년에 출판된 브루치올리(A.Brucioli)의 번역이며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번역성경은 디오다티(G.Diodati)의 작품이다(1607). 약간의 단편이 남아 있는 최초의 헝가리역 성경은 15세기 초 프란치스꼬회 수사인 토마스와 발렌티누스의 작품이고 최초의 완역성경은 멜란히톤의 제자이며 개신교 목사였던 카롤리(G.Károli)의 번역본인데(1590), 비졸리에서 인쇄되었다고 해서 비졸리성경으로 알려져 있다.
[영어 역본]
영국 기독교의 초기에 알려진 유일한 성경은 불가타성경이었다. 앵글로 색슨어로 해설된 성경이야기가 캐드먼(Caedmon, 680사망)에 의해 시 형식으로 출판된 것 외에는 1382년이 되기까지 자국어 성경은 나타나지 않았다.
1. 위클리프 성경
최초의 영역성경은 위클리프가 불가타성경에서 번역한 《John Wycliffe’s Version》(1382; →위클리프역 성경)으로서, 그는 가톨릭에 반대해 평신도의 손에 성경을 주겠다는 목적으로 번역을 했고 이로 인해 이단자로 몰려 처형되었다.
2. 틴데일 성경
그 후 틴들이 처음으로 히브리어와 헬라어에서 직접 번역한 《Tyndale’s Version》(1525-35; →윌리엄 틴들의 역본)이 출판되었는데, 그도 이로 인해 화형을 당했다.
3. 커버데일역과 매튜성경
인쇄된 최초의 영역본은 틴들의 조수였던 커버데일의 《Coverdage Version》(윌리엄 틴들의 역본, 1535)이고, 커버데일의 친구 매튜가 틴들역과 커버데일역을 개정해 《Matthew’s Bible》(1537; →매튜성경)을 출간했다.
4. 1539~1610년 성경
그 후 크롬웰과 크랜머 대주교가 커버데일에게 부탁해 만든 매튜역 개정판인 《The Great Bible》(1539-1541;→큰 성서)이 나왔는데, 그 규격이 크고 화려해서 붙인 명칭으로 대중에게 인기가 좋았다. 큰 성서와 비슷한 시기에 평신도였던 태버너(R.Taverner)가 번역한 《Taverner Bible》(1539; →태버너성경)이 나왔는데, 그것은 영국에서 인쇄된 최초의 영역성경이었다. 메리여왕의 가톨릭 정책으로 제네바에 피신한 신교도들이 1560년에 《Geneva Bible》을 출간했는데, 이것은 160판을 거듭하면서 인기를 누렸다(→제네바 성서). 큰 성서가 강단에서, 제네바 성경이 일반 대중에게 인기가 있자 이를 절충할 필요가 생겨나 1568년 파커대주교의 지시로 《The Bishop’s Bible》이 만들어졌는데, 이것은 참여자의 대부분이 주교들이라 붙여진 명칭이다(→비숍스 바이블). 한편 이 당시 로마 가톨릭에서 마틴(G.Martin)의 역본으로 《Douai And Rheims Version》(1610)이 출간되었다(→두에이-랭스성경).
5. 흠정역 성경
1611년 영역성경의 금자탑이라고 불리는 《The King James Version》이 출간되었다. 이것은 제임스1세의 지시로 큰 성서와 제네바 성서의 결점을 검토해 전면적으로 개정된 성경으로, 영문학사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성경은 발행 후 300년간 최고의 성경으로 군림했다. 그러나 언어의 낙후성과 성경사본의 발견으로 인해 개정이 필요하게 되었고, 그래서 《English Revised Version》(1885)이 출판되었다(→영어 개역 성서). 한편 이에 협력한 자들이 미국에 알맞게 출판한 것이《American Standard Version》(미국 표준 성서, 1901)인데, 10년이 못되어 개정의 필요가 생겨났고 여러 우여곡절 끝에 《Revised Standard Version》(1952)이 출간되었다.
흠정역(King James Version: KJV)은 1604년 영국왕 제임스 1세가 "전 영국 교회가 하나님 예배시에 사용할 수 있도록" 성경번역을 명령하여 성공회와 청교도 성직자 및 평신 도로 구성된 54명에 의해 1611년 완성되었다. 종교개혁의 일환으로서 10세기 이후 발간 된 각종 영역성경에 입각, 왕과 교회의 권위로써 통일시킨 표준역으로, 내용 면에서도 독 일어의 루터역 성경과 쌍벽을 이루는 명역(名譯)으로 알려져 있다. 장중한 문체, 간결하 고도 힘 있는 표현, 유려하고 격조 높은 리듬, 명확하고 구체적인 이미지 등의 특징으로 인하여‘영어 산문의 가장 숭고한 금자탑’으로 평가되고 있다. 처음 출판된 이래 수세 기를 경과한 오늘날까지 영국 국민뿐만 아니라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두터운 사랑을 받아왔다.
>> 참고고리 : 킹 제임스 성경의 유래
6. 그 밖의 영어 성경
흠정역 이후 17-19세기 동안 새로운 사본의 발견에 자극받아 수많은 번역이 이어졌다. 어져 나왔다. 1870년 영국에서 신교가 초교파적 개역 작업에 착수하여 1881년 신약이 출 판되었는데 영,미 양국에서 첫 해에 300만부나 팔렸고 4년 후 구약이 마저 발간되었다(English Revised Version). 1901년에는 미국에서 이를 일부 수정한 American Standard Version이 출판되었다. 그 후로도 Revised Standard Version, The New English Bible, The New American Bible, The Today`s English Version, Good News Bible, The New International Version(NIV), The Living Bible 등이 발간되었고, 가장 최근에는 New Living Translation(NLT)이 번역, 출판되었다.
이 외에 주요한 것으로는 스코틀랜드 교회가 오늘날의 언어로 번역한 《The New English Bible》(1970;→새영어성경), 프랑스판을 영어로 번역한 《The Jerusalem Bible》(1974; →예루살렘성경), 가톨릭에서 주관해 불가타를 대본으로 번역한 《The New American Bible》(1974;→새미국성경), 교육수준에 관계없이 누구나 쉽게 읽도록 번역된 《Today’s English Version》(1976, 일명 Good New American Bible;→오늘의 영어성경), 보수적 입장에서 KJV적 권위를 회복시키려 했던 《The New International Version》(1978; →새국제성경), 테일러(K.Taylor)의 작품으로 70년대에 가장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으면서 또한 물의를 일으킨 《The Living Bible》(1971;→리빙 바이블), 유대교 영어 역본들 등이 있다.
[프랑스어 역본]
처음으로 프랑스어 완역 성서가 나온 것은 13세기였다. 파리대학교가 중심이 되어 학자들을 동원하여 번역했는데, 그 대본은 라틴어 성서였다. 1487년에는 가톨릭 학자들이 성서를 번역하여 '큰 성서'로 출판했다. 개신교 쪽에서는 1535년에 올리베탕으로 알려진 피에르 로베르가 성서를 번역했다. 몇 차례 개정을 거듭했고, 1546년판을 낼 때에는 칼빈이 서문을 썼다.
1553년 인쇄업자 로베르 에티엔이 이 번역을 제네바에서 출판할 때 원문의 장절을 구분하여 출판했다. 19세기 후반에 루이 스공이 프랑스어 역 [구약성서](1874)와 [신약성서](1879)를 출판했고, 이것이 오늘날까지 널리 읽히고 있다. 20세기에는 1956년에 완역된 도미니쿠스 수도회 학자들이 번역한 예루살렘 성서 (La Bible de Jerusalem)와 1971~75년에 나온 공동번역 성서(Traduction Oecumenique de La Bible)가 있다.
[독일어 역본]
6세기에 고트어로 된 [구약성서]와 [신약성서]가 있었으며, 8세기에 와서 라틴어 역에서 번역된 [마태오의 복음서]가 바이에른(독일 남부) 방언으로 번역되었다. 9세기에 복음서들의 발췌 번역과 [시편] 번역이 나왔다. 아우크스부르크 성서(Augsburg Bible)로 알려진 [구약성서]는 1389~1400년에 나왔다. 최초의 인쇄본 성서인 멘텔 성서(Mentel Bible)가 1466년에 나와 1533년까지 18판이 나왔다.
독일에서 성서 번역의 신기원을 이룬 것은 마르틴 루터의 독일어 역 성서이다. 1522년에 비텐베르크에서 [신약성서]가 나왔다. 에라스무스의 그리스어 [신약성서] 제2판을 대본으로 하여 번역된 것이다. 뒤이어 나온 [구약성서]는 브레시아 히브리어 성서(Brescia Hebrew Bible : 1494)를 대본으로 번역한 것이다. 루터의 히브리어와 아람어 독해력은 제한된 것이었으나, 그의 번역에는 11~12세기 프랑스의 랍비였던 라시의 영향이 많이 나타나 있다. 1534년 루터 역 성서가 완역되었다. 루터는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그의 번역을 계속 개정했으며, 1534~46년에 11번이나 개정을 거듭했다. 마지막 판은 그의 사후에 나온 것이다.
루터의 번역은 가톨릭 번역에도 영향을 미쳤다. 히에로니무스 엠세르의 번역은 불가타를 대본으로 하여 번역한 것이지만, 루터 역의 영향을 많이 반영하고 있다. 1534년 요한 디텐베르거가 마인츠에서 엠세르의 번역·개정판을 낼 때 재세례파(개신교의 한 분파) 역과 1529년의 취리히 번역을 사용했는데, 이것이 가톨릭의 표준 번역이 되었다. 20세기에 와서 그뤼네발트 성서(Gruenewald Bible : 1956년에 7판이 나옴)는 가장 주목할 만한 역본이다.
12~13세기에 독일어로 번역되고 히브리어로 씌어진 이디시어 역본들이 유대인들 사이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인쇄본으로서는 야콥 벤 이삭 아슈케나지의 [체나 우레나(Tzenah u-Rena : 1616)가 있다. 유대교에서 번역한 최초의 독일어 역 [구약성서]는 모세 멘델손의 번역으로 1780~83년에 나왔다. 독일어로 번역된 것이지만 히브리어로 쓴 것이다. [구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고 독일어 활자로 인쇄한 최초의 역본은 고트홀트 살로몬의 역본이다(1837). 마르틴 부버와 프란츠 로젠바이크가 히브리어 문체의 특성을 살린 번역을 했다(1925). 최근의 역본으로는 가톨릭과 개신교가 공동으로 번역한 공동번역 성서(Die Bibel Einheitsübersetzung : 1980), 현대 독일어 성서(Die Bibel im heutigen Deutsch : 1982), 공동번역 성서에 프랑스어 예루살렘 성서의 해설을 함께 단 새 예루살렘 성서(Neue Jerusalemer Bibel : 1985)가 있다.
[중국어 역본]
중국에 그리스도교가 들어간 것은 7세기에 경교(景敎 Nestorianism)가 전파된 것을 시작으로, 13세기에 가톨릭이, 19세기에 개신교가 들어갔다. 본격적인 성서 번역은 개신교가 들어가면서부터 시작되었다. 1810년에 선교사 마르시만이 [마태복음서]를 번역했다. 1822년에는 [구약성서]·[신약성서]가 간행되었다.
중국어 성서의 대표적인 두 역본은 대표역본(Delegates Version : 1854)과 화합역본(和合譯本 Union Version)이다. 대표역본은 '하나님'을 '신'(神)으로 표기한 '신판'(神版)과 '상제'(上帝)로 표기한 '상제판'(上帝版)으로 출판되었다. 화합역본은 중국의 표준 역본으로서 1891년에 시작하여 1919년에 완료된 것으로서 현재까지 널리 쓰이고 있다. 최근의 역본으로는 홍콩 성서공회에서 간행된 현대중문역본(現代中文譯本 Todays Chinese Version : 1979)이 있다.
[일본어 역본]
최초의 번역은 귀츨라프의 [요한의 복음서]를 번역한 것이다(1837). 1880년에 [신약성서]가 번역되고 1888년에 [구약성서]가 번역되었는데 이것이 메이지 역[明治譯]이다. 1917년에 [신약성서] 개정판이 나왔으며, 1954년에는 메이지 역에 이어 2번째로 완역 성서가 나왔다. 이것은 구어(口語)로 개정되어 나온 성서로서 현재까지 가장 널리 쓰인다. 1970년에 기존 역본을 개정한 신개역이 나오고, 1978년에는 개신교와 가톨릭이 공동으로 번역한 공동번역 신약이 나왔고, 1987년에는 신공동번역 성서가 나왔다.
[한국어 역본] 한글성경
성경이 우리나라에 소개된 것은 1832년 네덜란드 선교사 귀츨라프 선교사를 통해서이다. 그는 얼마동안 머물면서 주기도문을 한글로 번역했다. 그 후에 1865년 토마스 목사는 황해도 해안지방에서 대동강을 따라 평양 근처에서 순교하기까지 한문성경을 전해 주었다.
우리말 성경을 최초로 번역한 것은 중국에서 영국인 선교사 존 로스(John Ross, 1842-1915)이다. 당시 쇄국정책으로 인해 조선에 들어오지 못한 로스 목사는 만주에 머물면서 그곳에서 만난 서상륜에게 한글을 배우며 함께 한문성경을 한글로 번역하기 시작, 그 때 서상륜 이외에도 이응찬, 백홍준 두 사람이 협조, 1882년 말에 최초로 번역된 우리말 성경이 누가복음이었다. 로스 목사는 같은 선교회에서 파송한 매킨타 이어와 합작, 1887년에 예수성교전서라는 이름으로 신약을 완역하였다.
한편 1883년 4월 일본에서는 미국성서공회가 한문으로 된 4복음서(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와 사도행전에 이두로 토를 달아 3천부를 인쇄했는데, 토를 다는 작업을 맡았던 관비 유학생 이수정이 1884년 마가복음을 한글로 번역, 1885년 언더우드 목사와 아펜젤러 목사가 그 성경을 가지고 한국에 들어왔다.
이후 국내 번역위원회가 구성되어 1900년 신약전서를, 1911년에 구약전서를 완역하였다. 이를 다시 1936년에 구약을, 1938년에 신약을 개정하였는데, 1938년에 개정한 성경은 1956년에 한글맞춤법통일안에 의거하여 개역성경(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성경)을 발간하였으며, 1998년 개역 개정판이 나왔다. 이외에도 1977년 가톨릭과 함께 번역한 공동번역이, 1985년 현대인의 성경, 1993년 표준새번역 등이 있다.
1. 개역 성경이 나오기까지
우리 나라에서 가장 먼저 번역된 성경은 피터스(A. A. Pieters)가 번역한 '시편촬요'이다. 그 후 1882년에는 존 로스가 누가복음을 번역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해서 선교사를 중심으로 한 '성경번역위원회'가 구성되었다. 그들은 번역작업을 시작하여 1900년에 신약을 모두 번역했고, 1911년에는 구약을 모두 번역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최초로 '신구약 성경'이 출판되었는데, 이 성경은 1938년에 다시 한 번 개역이 되었다. 이 성경은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개역 성경'의 모체가 되었다. 그리고 1956년에 이 성경은 '한글 맞춤법 표기'에 맞추어서 다시 한 번 부분적으로 개정이 되었다.
개역성경은 1911년에 번역 출간된 「셩경젼셔」를 두 차례에 걸쳐서 크게 개정한 것이다. 1차로 개역된 성경은 1938년에 출간된 「셩경 개역」이다. 1938년의 「개역」과 구별하여 1911년의 「셩경젼셔」를 「옛 번역」 또는 「구역」이라고 부른다.
1) 성경전서 개역한글판
이것을 '한글맞춤법통일안'에 따라 표기를 고치고 더 손질하여 출판한 첫 판이 1952년에 나온 「성경전서 개역한글판」이다. '한글판'이라는 이름은 '국한문판'과 구별하려고 쓴 것이 아니라, 성경의 표기를 「셩경 개역」에서 쓰던 옛 철자법을 버리고, 한글맞춤법통일안의 철자법에 따랐다는 뜻으로 쓴 것이다. 그 후 번역 내용과 표기법을 더 손질하여 출간한 개정의 결정판이 1961년에 나온 「성경전서 개역 한글판」(표제지 연도 1956)이다.
구약은 1911년부터 1937년까지 26년 동안 개역 작업을 하였고, 신약은 1926년에 시작하여 1937년에 끝마쳐 12년 만에 마무리되었다.
2) 개역 성경 개정판
각 교단이 표준 새번역이 여러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사용하기를 꺼리게 되자, 대한성서공회는 내용을 더욱 보완해서 2000년에 "개역성경 개정판"을 내놓았다. 그 후에도 여러 교단들의 지적에 의해 개역 성경 개정판은 수정작업을 거쳤으며, 일부 교단이나 단체에서는 이 성경을 공인 성경으로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여전히 일부 교단들은 이 성경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개정을 요구하고 있다.
2. 공동번역
그러나 개역 성경은 원어 성경이 아닌 영어성경(흠정역)과 한문 성경을 기초로 해서 번역되었고, 자국인이 아닌 외국 선교사들을 주축으로 번역되었다는 점에서 한계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1968년에 대한성서공회는 레닌그라드 비평 자료인 BHK를 기초로 해서 천주교와 공동으로 번역 작업에 착수했다. 그 결과 대한성서공회는 1971년에 신약을 완역하였으며, 1977년에는 구약과 외경을 완역하여 "공동 번역 성경"을 출판하였다. 그러나 현재는 개신교와 가톨릭(가톨릭은 자체 번역한 새 성경을 사용한다.) 어디에서도 사용하지 않는 성경이 되었으며 북한성경은 공동번역을 북한단어로 수정하여 출판하였다.
3. 현대인의 성경
대한성서공회에서 카톨릭과 개신교 공동으로 공동번역을 내 놓았지만, 외경 문제로 인해 개신교 내에 전혀 수용이 되지 못했다. 그러던 중에 생명의 말씀사에서 개신교인을 위해서 현대어로 된 번역 성경을 만든 것이 바로 '현대인의 성경"이다. 현대인의 성경은 1977년에 신약이, 그리고 1985년에 신구약 완역본이 나왔다.
현대인의 성경은 히브리어와 헬라어 성경에서 번역한 것이 아니라, 주로 영어판 성경인 Living Bible에서 번역을 했다. 이 성경은 히브리어와 헬라어 원전을 번역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개역성경을 대체하기에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번역진들이 이 성경을 번역한 것은 기존의 개역 성경을 대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고어로 된 개역 성경을 현대어로 알기 쉽게 번역하여 개역 성경의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한 것이었다. 번역자들은 개역성경과 현대인의 성경을 함께 사용하여 어려운 개역성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려고 했다. 이 성경은 개신교인들에게 새롭고 쉬운 한글성경이 만들어 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Living Bible은 많은 영어 번역 성경 중에서 가장 풀어쓰기(의역)를 한 성경이며 가장 읽기 쉬운 성경으로 꼽히고 있다. 현대인의 성경이 이러한 Living Bible을 번역했기 때문에 주요 번역 원칙이나 특징은 Living Bible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4. 현대어 성경
현대인의 성경이 히브리어와 헬라어 성경에서 번역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후에 성서교재 간행사에서 히브리어와 헬라어 성경을 근거로 해서 현대어 성경을 출간했다. 신약은 1978년에 출간되었고, 신구약 완역은 1991년에 출간되었다.
현대어 성경은 번역을 위한 원전으로 히브리어와 헬라어 원문 성경을 사용했다. 그리고 번역원칙은 현대인의 성경과 같이 Living Bible과 같은 쉬운 풀어쓰기(의역)를 따랐다. 현대어 성경은 현대인의 성경과 같이 고어로 된 성경을 현대어로 쉽게 번역을 하는 동시에, 히브리어와 헬라어 성경을 참고해서 번역함으로 그 의미를 보다 더 정확하게 했다. 현대어 성경은 성도들이 쉽게 이해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원문의 내용이 모호한 부분은 권위있는 주석을 참고해서 성도들이 그 뜻을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 성경의 번역자들은 현대어 성경을 만들면서 '주석을 바탕으로 풀어 옮긴 성경', 그리고 '주석의 도움 없이도 쉽게 읽을 수 있는 성경'을 만들려고 했다.
5. 표준새번역
1983년 번역에 착수하여 1993년에 출판한 새 번역이다. 개역 성서의 개정이 아닌 새로운 번역이다. 현대 한국어, 쉬운 한국어로 번역하고, 원어의 뜻을 분명하게 파악한 다음에 한국어의 어법에 맞게 표현하고, 교회에서 실시하는 예배와 교육에 적합한 번역이 되도록 했으며, 고유명사의 음역은 개역 성서를 따르고, 한국교회가 중요하게 여기고 써온 용어는 바꾸지 않는다는 원칙에 따라서 번역되었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하느님의 이름 네 글자 YHWH를 '여호와'라고 번역하지 않고, 맛소라 본문의 전통과 그리스도교 2,000년의 번역 전통을 따라 '주'(主)로 번역했다.
6. 북한 성경(1990)
7. 쉬운성경(2001)
아가페 출판사에서 어린이들을 위해 쉬운 구어체로 원문에서 번역하여 그림과 함께 발행한 성경이다.
8. 우리말 성경(2004, 두란노)
[사해사본]
1.<사해사본>이란 무엇인가
2.<쿰란 사본들>은 무엇을 말하는가
3.<쿰란사본들>는 어떻게 발굴되었는가
4.<사해 사본>의 발견은 무엇을 가져다 주었는가
5.예수의 탄생은 기원 1년인가
6.예수와 그리스도는 동일인인가
7.알파벳은 언제 생겼는가
8.유럽 사조의 근본은 무엇인가
금세기 중엽에 그노시스 세계, 헤브라이즘 세계 및 헬레니즘 세계에 있어서 각각 극히 중요한 대 발견이 있었다. 그것은 즉, 첫째 1946년(1945년이라고도 한다)에 나일강변의 한 촌락 나그.하마디(카이로의 남쪽 약 570킬로,옛 케노보스키온)에서 그노시스파의 서고를 발견했고, 둘째로 뒤에 말할 1947년의 사해 사본의 발견이며,셋째로, 크레테섬 크노소스 및 그리스 본토에서 출토된 선문자 B가 1952년에 영국 건축가 마이켈,벤트리스(1922-1956)에 의하여 해독되고, 이것이 기원전 1400년대의 가장 오래된 그리스어라는 것이 판명된 일이다.
사해 사본이 발견된 경위는 이렇다. 1947년 봄(1945년 이었다고 한다) 사해의 북서부 사막의 구릉지대 쿰란에서 베두인(아랍계 유목민)이 양과 염소를 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무리에서 이탈한 한 마리의 염소를 찾기 위하여 한양치기 청년이 반 쯤 허물어진 벼랑의 동굴에 돌을 던졌더니 무엇인가가 깨어지는 소리가 났다. 이튿날 그 청년은 사촌 형제와 함께 그 동굴로 기어 올라가 보니 좁은 동굴 속에는 항아리의 파편이 흩어져 있으며 안쪽에는 뚜껑이 덮인 항아리 여덟개가 있었다. 그러나 그 중 일곱 개는 빈것이었고 나머지 한 개의 항아리 속에는 큰 두루마리 한 권과 작은 두루마리 두 권이 들어 있었다.
이 두루마리를 결국 베들레헴의 고물상에게 넘어가고, 그 해 12월에 예루살렘의 헤브라이 대학이 이 세 두루마리를 사들이게 되었다.
그후 사해의 서북 연안의 동굴은 베투인들이나 고고학자들에 의하여 답사되고 매년 계속해서 발견이 있었다. 와디,쿰란 지역의 동굴 발견은 1956년 봄까지 11개 곳(1956년에 발견)이었으며, 발견의 순서에 따라서 1(1Q,Qumran Cave1)에서 11까지 번호가 매겨졌다. 그 밖에 와디,므라바트 지역의 동굴, 킬베트.밀드 지역에서 발견된 사본들,그리고 킬베드,쿰란과 아인.페스카 폐허에서 발견된 사본들은 모두 대단한 가치가 있는 것들이었다.
일반적으로 사해 사본 또는 사해 문서라고 부르는 것은,1947년에서 수년 간에 걸쳐서 사해의 서북연안과 서안에 펼쳐져 있는 <유다의 황야>의 동굴이나 폐허에서 발견된 고사본들을 말한다. 발견한 장소나 사본의 내용과 성격 등은 여러가지이며, 그 정리와 분류는 끝나지 않았다. 현재까지 간행된 사본과 단편들을 대별하면 다음과 같다.
(1) 와디.쿰란 지역의 11개 동굴에서 발견된 사본들
(2) 와디.므라바아트(쿰란의 남쪽 약 16킬로미터,예루살렘의 동남남 약 24킬로미터)지역의 동굴들에서 발견된 사본 단편들(대부분은 2세기 전반, 특히 유대인의 대로마 제 2차 반란(AD 132-135년)시대에 속하는 것이며, 이 반란의 지도자 발,코호바에 관한 사료도 포함되어 있다.
(3) 킬베트.엘밀드(예루살렘의 동남쪽 약 14킬로미터)지역의 유적(비잔틴 시대의 수도원 자리)에서 발견된 신약성서의 사본 단편들(AD 5-8세기에 속하며, 쿰란 사본들과는 직접 관계가 없다.)
(4) 아랍인 베투인들이 가지고 온 출저 불명의 사본 단편들.
이것들 종에서 사해 사본이 중심이 되는 것은 (1)의 쿰란 사본들이다. 사본의 종류는 600종이나 된다고 하며, 두루마리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것도 10권 이상이 되며, 특히 동굴 1에서 발견된 이사야서 전권(54난의 양피지로 돼있으며,전장 7.34미터,폭 평균 26센티미터,각 난은 평균 30행.이사야 66장이 전부 들어있다)과 동굴 4에서 발견된 키므엘기는 귀중한 것이다. 사본들의 연대는 대개 기원전 3세기 중엽에서 쿰란 종단의 본거지가 로마군에게 점령된 기원 67년에 걸쳐있다.
기원전 3세기에서 기원전 2세기 초에 기록된 사본은 대부분이 구약성서의 사본이다. 대부분의 두루마리 연대는 성서의 사본도 쿰란 종단 문서도 기원전 2세기말 이후, 특히 기원 전후의 그시게에 속한다 <사해사본>중에서 오래된 것은 와디.므라바아트에서 발견된 파피루스 단편들이며 기원전 8세기의 것이라고 한다.
발견된 많은 사본이나 파편을 양피지, 파피루스 ,동판,오스트라카 등에 기록되어 있다.
쿰란 사본들은 구약성서 정전.외경,주해서 및 쿰란 종단이라고 하는 유대교의 한 종파의 종교 문서로 나뉘고,이것을 다시 분류하면 다음 네가지 문서로 대별된다.
(1) 구약성서 정전의 사본들(단편을 포함)
전체의 약 4분의 1이 되고 에스델기를 제외한 구약 각서가 있다. 신명기 이사야서,소예언서,시편등의 사본은 10종 이상이 된다. 주요한 것은 성마르크 수도원 소유의 <이사야서>의 두루마리(완본)와 헤브라이 대학 소유의 <이사야서>단편,<시편>단편 등이다.
(2) 구약성서의 외경(또는 위경)
여러가지 단편이 출토되고 있으나 가장 많은 것이 요엘서,에녹서 등이다.
(3) 구약성서의 주해서
창세기,시편,이사야서,호세아서,미가서, 나훔서,스바니야서,하박국서 등의 주해서의 단편들이 출토되고 있다. 가장 완전한 형태로 출토된 하박국서 주해서는 가장 흥미 깊고 중요한 것이다.
(4) 쿰란 종단의 종교 문서
사해 사본을 남긴 사람들의 종교 집단의 조직, 목적 계율,의식 등을 기록한 <종규 요람><종단 계율제요>라고도 한다. <회중규정>,<축복기도문>,<감사의 시편>등의 예배식문에 속하는 문서, 그 밖에 <빛의 아들들의 싸움의 규칙>,아람어로 된 <외경 창세기>등이 있다. 그리고 1952년 3월에 발견된 동굴 3 속에서는 성전의 보물표와 그 숨긴 장소등을 기록한 이른바 <동의 두루마리>가 발견되었으나 이 리스트가 성전의 보물이었는지,또는 쿰란 종단의 재산이었는지,아니면 허구적인 것이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동굴 1에서 남쪽으로 약 1500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폐허는 오늘날 킬베트,쿰란<쿰란의 폐허>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 지역은 이미 1851년에 F.두.서씨에 의하여 답사되었고 <사해사본>의 발견과 함께 이 폐허는 다시 주목을 받게 되었다.
1951년에서 56년까지에 6회에 걸쳐서 예루살렘의 도미니코파 성서학원 원장 롤런,두.워 신부와 요르단 왕국의 고적 보존국장 G.L.하딩의 지도 아래 킬베트.쿰란의 발굴 조사가 실시되고 그 전모가 밝혀졌다.
두.워 원장이 얻은 결론에 의하면 ,킬베트,쿰란의 역사는 다음에 네 시기로 나누어진다.
(1) BC 8-7세기(철기시대 제II기)
(2) BC 2세기말-AD 68년까지
(3) AD 68-90년경 (로마군의 점령)
(4) AD 132-135년(유대인의 대로마 제2차 반란시에 유대인 저항군이 점거)
(1)의 시기에 속하는 것으로는 벽의 일부와 토기,오스트라카(ostraca)의 단편이 출토되고 있을 뿐이다.
(2)의 시기에 속하는 유적은 쿰란 종단의 본거지로서 공동 목적을 위해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주요 건물은 북서쪽 구석에 견고한 성루가 있는 30미터 * 37미터의 장방형 건물이며, 안뜰을 둘러싸고 동서남북으로 작은 방이있고, 집회실, 사경실,식당,부엌 등이 있다. 그리고 부근의 와디.쿰란에서 물을 끌어오기 위한 수로,7개의 저수조, 6개의 욕실 등이 있고, 이것들은 쿰란의 종단의 교리나 생활을 아는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여기에 쿰란 종단이 형성된 것은 요하네.하르카누스(BC 135-104)시대였던 것 같다. 그후 기원전 31년에 이 근처 일대는 대지진을 만나 포기되었다. 이것은 건물의 균열로 알 수 있으며, 프라비우스.오세퍼스도 이 사실을 전하고 있다. 쿰란 사본들을 만들어 낸 쿰란 종단은 그후 재건된 것 같다.
이곳은 기원전 4년의 헤로데 대왕의 죽음에서 기원 7년경까지 사이에 재건되고 건물의 개축이 있었다.
(3) 의 시기는 유대 반란 제 3년에 시작된다. 출토품 중에는 반란 제2년과 제 3년의 날짜가 새겨져있는 화폐 70여매와 로마군의 화살촉 등이 들어있다. 로마군은 1세기 말까지 주둔하고 있었던 것 같다.
(4) 의 시기에 속하는 층에서 출토된 로마의 화폐에 의하면 로마 점령군이 약 10년간 이곳에 주둔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후 단기간이기는 하지만 이유대인의 제2차 대로마 반란(AD 132-135)때에 발.코호바를 수령으로 하는 저항군이 일시 이곳에 진를 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두.워는 건물의 동쪽에 있는 묘지들을 시굴했다. 또 제분소,빵 굽는 곳, 도기 공장 등의 작업장도 발견했다.
이상의 모든 점으로 봐서, 이 폐허는 유대교의 어느 종교 집단의 본거지이며, 종단의 구성원은 부근 동굴이나 천막에 있는 일시적인 건물에 살면서 이곳을 도장으로 삼고 있었던 것 같다.
<종규 요람> 에 의하면,쿰란 종단의 단원은 자원해서 인적이 떨어진 이 유대 황야에 모여서 임박한 종말을 바라보며 메시아의 내림을 기다리는 종단의 엄격한 계율에 따라 생활하고 있던 사람들이다.
사경은 그들의 중요한 임무의 하나였기 때문에 그들에 의하여 구약성서 각서 및 구약성 외경의 대부분이 양피지, 파피루스,동판 등에 필사되어 남겨졌다.
<사해사본>의 발견은 좁은 의미의 성서학이나 성서 고고학 분야 뿐아니라, 특히 유대교의 공인된 교정본으로 정착되기 이전의 구약성서의 본문 비판학은 물론, 기원전후의 유대교 역사나 유대교와 헬레니즘의 교섭, 원시 그리스도교단과 유대교와의 관계 등의 제 분야에 새로운 빛을 던져주고 있다. <사해사본>의 연구는 전문가들의 국제적인 협력체제 아래 계속되고 있다.
쿰란 종단의 단원들에 의하여 필사된 구약성서의 사본들은 세계 최고의 것으로 높은 학문적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현재 예루살렘의 이스라엘 박물관(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스라엘 박물관은 예루살렘의 중심부에서 멀지 않은 나베.샤난<고요한 집>이라는 뜻이라고 하는 언덕 위에 있으며 22에이커의 부지에 60년의 역사를 가진 옛 베자렐 미술관 (주로 유대인의 민속 자료,슈나고게의 비품등의 종교 사료,16-20세기의 근대 서구 미술작품)과 성서,고고학 박물관(주로 시리아,팔레스타인을 중심으로 한 오리엔트 고고 출토품)을 포함한 본관과 사해 문서들을 소장한 고문서관이 있으며, 그 중간에 현대 조각을 배치한 조각 정원으로 돼있다.
그 밖에 창고, 연구실, 수복용 시설 등이 있다. 이 조각 정원의 설계가 그 규모 면에서 전후 최대인이 이스라엘 박물관은 1964년에 창립되고 이듬해 1965년에 개관했다. 그 내용은 광범위해서 고고학적, 미술학적, 민속학적 제 요소와 근대 미술관적 제 요소를 겸비하여 인류 문화유산을 통해서 미래의 전망을 하게 하는 총합적인 민족의 미술관이다.
박물관 안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고문서관>에는 사해 문서 및 기원 2세기의 발.코호바의 반로마 봉기 관계의 고문서들이 소장되어 있다. 이 고문서관은 지상으로는 흰 돔과 장방형의 검은 외벽을 보일 뿐이고 중요한 부분은 지하로 들어가 있다. 그 내부는 이중의 포물선 돔으로 돼있으며, 그것은 굴곡이 있는 거대한 항아리 같이 생겼다. 소용돌이 치는 굴곡은 천장 꼭대기에 있는 약 1.8미터의 구멍까지 위로 뻗혀 있으며, 그 구멍에서 하늘 빛이 실내로 비쳐 들어온다. 고문서의 역사의 중요성을 재현해 주는 것 같은 설계와 구조의 건물이다.
현재 우리가 보는 역사서는 연대를 표시하는데 서혁 기원을 사용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예수가 탄생한 해를 기원1년으로 하고 그 이전을 기원전 (BC.Before Crist)로표시하고, 그 이후를 기원후(AD.Anno Domini)로 표기하고 있다. 이것은 남러시아의 스키티아 지방에서 출생한 6세기 로마의 수도이사이며 연대사가인 죠니 시우스,엑시구스(497년경-550년경)가 525년에 로마 교황의 명령을 받고 <부활절>이라는 책을 썼는데 그 글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 탄생 기원을 채용하여 확립하고 그리스도의 탄생을 로마 건국 754년으로 계산했다고 한다. 이 기원법은 9세기가 되어 프랑스 왕국 카로링왕조 제2대 왕 칼 대제(742-814)시대에 다른 기원법보다 결정적인 우위에 두게 된 이후 오늘날까지 널리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사용하는 년표에는 예수의 탄생을 기원전 4년경으로 기록되어 있다. 만약 이것이 정확하다면 서력 기원법의 전체 체계는 기원전에 관해서는 4년을 빼고 기원후에 관해서는 4년을 가해야 한다. 그 근거는 차치하고 실제로 예수가 탄생한 것은 후일의 연구에 의하여 기원전 6년경에서 기원전 4년경 사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우리는 오랜 습관대로 이것을 편의상 그대로 상요하고 있다.
예수의 생애에 관한 기록은 동시대의 다른 인물에 비해서 비교적 정확한 편이지만,예수의 탄생에 관한 사료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의미의 과학적 검토에 족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소극적이긴 하지만 예수의 탄생은 적어도 기원전 4년이나 그 이전이라고 주장하는 연대의 연대학의 성과를 인정하고 있다.
신약성서 마태복음 2장 1절이하에 의하면, <예수는 헤롯 왕 때(BC 3-74)에 유다 베들레헴에서 나셨다>고 했으며 헤롯왕의 유아 학살의 명령을 피해서 이집트로 갔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누가복음에도 로마황제 어거스투스 시대(BC 27-AD14)에 전 로마 제국의 인구조사 칙령이 있어서 부친 요셉과 모친 마리아가 예루살렘으로 갈 때 유다 베들레헴에서 예수가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의 남쪽 약 9킬로미터에 있는 도시이며 다윗왕과 관계가 깊다.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고 해서가 아니라,예수가 다윗의 호순으로 존경받았기 때문에 다윗과 인연이 있는 베들레헴이 예수의 탄생지로 전해졌다고 한다. 마가복음 12장 35절 이하를 보면, 예수 자신은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에 가치를 두지 않았다. 또 예수의 생애에서 베들레헴은 그리 중요하지는 않았다. 또 예수의 탄생지는 지중해와 갈릴리 호수의 거의 중간에 있는 갈리리아의 도시나사렛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나사렛은 예수가 청소년 시절을 보낸 도시였다.
아무튼 마태,누가 양 복음서의 탄생 기록은 예수가 헤롯왕 시대에 태어났다는 것을 전해주고 있다. 그리고 헤롯이 유아 살해령을 내렸다는 기록은 헤롯왕 시대에 태어났다는 것을 전해주고 있다. 그리고 헤롯이 유아 살해령을 내렸다는 기록은 헤롯이 그 만년에 로마 황제의 신뢰를 잃고 그 결과로 헤롯은 광기가 들어서 많은 육친까지도 살해했다는 기록과도 일치하고,그것은 구약성서 위경의 모세의 승천 6장 이하에도 나타나있다. 누가복음의 탄생 설화는 세례 요한과 예수의 탄생을 모두 헤롯왕 시대라고 했다. 그리고 <클레니오(로마의 귀족 스루피큐스.퀴리노)가 시리아의 총독이었을 때에 한것보다 이전의 국세조사>때였다고 한다.
1세기의 유대 역사가 프라비우스.요세퍼스(37년경-100년 이후)의 <유대 고대사>나 신약성서의 사도행전 5장 37절 등에 의하면 클레니오가 유대에서 인구조사를 한것은 기원 6년이다. 아마 이 인구조사는 몇년에 한번씩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칼타고 태생의 그리스도교 호교론자로 유명한 텔트아누스(160년경-220년이 이후)의 <마르키온에 대한 반론>4-16에 의하면 사르투르니누스가 시리아의 총독이었을 때(BC 9-6)에 인구조사가 있었다. 그리고 4세기의 로마 역사가 문법학자 마크로비우스(340/360년경-?)에 의하면 어거스투스가 동시대인 헤롯이 자기의 왕위를 지키기 위해서 2세 이하의 남아를 모두 학살한 것을 엄하게 비난했다고 한다.
마크로비우스에 의하면 예수는 평화 정책을 써서 각지의 신망을 얻고 로마 황제 어거스투스(그는 헤롯왕가의 유대인에게도 우호적이었다고 한다)시대와 헤롯왕 시대에 탄생한 것은 분명하다. 누가복음 3장 23절에 의하면, 예수의 활동의 시작은 30세경이며,그는 그 만년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30년경에 유대의 수도 예루살렘에서 로마의 지방 총독 본디오 빌라도(26-36)에 의하여 극형,즉 십자가형을 받아 죽었다는 것이 확증되고 있다. 이 해부터 역산하면 예수의 탄생은 기원 전후가 된다.
한편 헤롯은 기원전 4년의 과월절 전에 요르단강 하류의 서쪽 여리고에서 죽은 것이 역사적으로 확정되고 있다. 따라서 예수의 탄생은 적어도 기원전 4년이후는 될 수 없다고 한다. 여러가지 점을 고려해서 예수의 탄생은 기원전 6년에서 기원전 4년 사이라고 추정된다.
인간 예수의 짧은 생애는 그 죽음으로 끝났다고 할 수 있으나, 예수를 그리스도<기름 부음을 받은 자> = <구세주>라고 고백하는 원시 그리스도교단 안에서 형성된 전승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고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삼일만에 부활했음을 전하고 있다.
각 복음서에 의해서 묘사돼 있는 예수상은 차이가 있으나 복음서는 전체적으로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예수>란 헤브라이어 인명 예수아 또는 예호수아(여호수아)에 해당하는 그리스어의 예수스이다. 사도행전 7장 45절,히브리서 4장 8절에는 모세의 후계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예수>로 기재되어 있다. 여호수아는 <야훼의 구원이시다>라는 뜻이며, 인명으로 자주 사용되고 있다.
기원 1세기의 프라비우스.요세퍼스나 파피루스 문헌등에 의하면 헬레니즘 시대에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10명이 넘었다고 하니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꽤많았던 것이다. 골로새서 4장 11절에도 <유스도라고 하는 예수>라는 예가 보인다. 마태복음 27장 16절에는 <예수.바라바>라는 이름이 보인다. <그리스도>Christos (<크리스도>또는 하리스토스>라고도 표기된다>란 그리스어의 동사 크리오 chrio(<기름 붓다>란 뜻)에 유래하는 <기름부음을 받은자>라는 뜻이며, 헤브라이어의 마시아하,아람어의 메시하,즉 그리스,라틴어형의 메시아스 Messias에 해당한다(요한복음1장 41절 4장 25절).
기름 특히 향유는 고대에는 귀한 것이었다. 올리브유의 용도는 여러가지였으며, 기름에 유향을 섞어서 태워 향기 예물로 바치거나(레위기 6장 15절),기름은 번영의 표시이며(신명기 8장 8절,예레미야서 31장12절),귀중한 상품으로 수출됐다(느헤미야기 5장 11절,에즈라기 3장8절),또는 기름은 융성(신명기 33장 24절),기쁨(시편45편 7절,히브리서 1장 9절)의 상징이 되며,기름이 떨어지는 것은 비애를 나타내는 것이었다(요한계시록 6장 6절).
돌 벼개를 벤 야곱은 천사의 꿈을 꾸고 깨어서 그 돌을 세워서 그 위에 기름을 부었다(창세기 28장 18절,이것은 가나안 종교의 특징의 하나인 신성한 돌을 숭배하는 흔적이다), 사울,다윗 그 아들 솔로몬드 제사장 아론,예언자 엘리사도 기름 부음을 받았다. 이사야서 45장 1절에는 <야훼께서 당신이 기름부어 세우신 고레스에게 말씀하신다>고 했으며, 이방 페르샤의 왕 큐로스가 구약성서에서는 왕의 칭호인 <메시아>로 불리고 있다. 이것은 큐로스가 유대인을 바빌로니아 포로 생활에서 해방했기 때문이며 이 호칭이 당시 일반 민중의 지도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널리 사용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원래 보통 명사였으며 복수형도 있었을 것이다.<그리스도.예수>또는 <예수.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칭호>인 예수 (인명)>라는뜻이다. 그리스도는 나사렛의 예수로 다른 사람과 구별되고 목수였던 요셉을 가장으로 하는 경건한 가정에서 자라 어려서부터 구약성서를 읽고 주의 사람들에게도 요셉의 아들로 인정받고, 나사렛에서 교육을 받아 성인이 되었다. 모친 마리아는 카톨릭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모친>으로 숭배되고 있다. 예수에게 여러 동생들이 있었다. 사해 문서는 예수가 태어난 배경을 전해주고 있다.
유럽인의 오리엔트에서 받아들인 최대의 유산은 알파벳과 헤브라이즘일 것이다. 전자는 실용적인 유산이며 후자는 정신적인 유산이다. 먼저 알파벳의 정의부터 해보자.
알파벳이란 말의 소리를 표시하는 기호 즉 표음 문자를 가리키며, 이런 글자가 일정한 순서로 배열된 자모표 이다. 원칙적으로 1장 1음을 표기하는 것이다. 4항에서 말한 것처럼 선사시대와 역사시대의 구분은 우선 글자의 사용 여부로 할 수 있다. 오리엔트에서는 기원전 3천년대에 이미 글자가 사용되었다. 즉,메소포타미아의 (슈메르인의) 쐐기글자와 이집트의 신성 문자가 그것이다. 양자가 모두 독자적인 표의 문자이며, 각기 극히 복잡한 구조와 체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서기나 신관 계급등의 독점물로서 신성시되었다.
한편 이러한 서기제도는 대 신전이나 대 궁전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의 산물이었다. 이 글자들은 처음은 그림 글자에서 발달한 것이었으나 거의 원형 그대로 일부 표음 문자로 바뀌어 갔다. 이렇게 해서 글자는 고대 오리엔트 문화와 함께 발달했으나 지금부터 약 2천년전에는 읽혀지지 않게 되었다.
한편 이미 기원전 2천년경부터는 가나안인은 쐐기 글자와 신성 문자의 영향을 받아 독자적인 가나안 글자의 창작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중에서 기원전 1500년 경에 <시나이 그림 글자>가 나오고 이것이 알파벳의 직접 조상이 되었다고 본다. 이렇게 해서 가나안인의 발명한 글자를 페니키아인,아람인,이스라엘인 들이 계승 발전시켜 나갔다. 페니키아인은 지중해 각지에서의 무역 활동 상의 필요 때문에 표음화된 이집트 글자를 근거로 해서 독자적인 간략한 표음 문자를 만들었다. 그리고 페니키아인에 의하여 지중해를 통해서 그리스.로마로 전달된 알파벳은 유럽인의 글자로서, 즉 라틴 글자의 알파벳으로서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다. 라틴 글자의 알파벳 없이는 유럽 문화는 있을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나안에서는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에서처럼 거대한 중앙집권 국가는 성립되지 않았다. 가나안 사회의 중심은 상인층이었다. 그들에게는 왕후나 신관과 같이 서기를 양성할 경제적인 힘은 물론 없었으나 문자를 신성시할 필요도 없고 문자를 오직 실용적인 기호로 바꾸어 사용해갔다.
별표에서 보는 것처럼,첫 글자는 <숫서 머리>를 뜻한다. 숫소는 가나안어로 <알프>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 글자도 <알프>로 읽었을 것이다. 그러나 글자 <알프>는 <숫소>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당순히 <아> (엄밀하게 말하면,<아>를 발음하기 직전에 입에서 나오는 소리> 라고 하는 첫 소리를 나타내는 기호로 사용되었다. 기원전 10세기의 비문에는 이 <숫소의 머리>가 이미 양식화 되어 두 획으로 쓰는 글자가 되어 있었다. 이 글자가 180도 회전하면 고대 그리스 글자(BC 8세기)의 알파가 되며, 이것을 90도 회전하면 라틴 글자 A가 된다. 둘째 글자는 <집>을 뜻한다. 이것은 가나안어의 <집>을 나타내는 <벳>의 첫 소리 B음을 나타낸다. 이 그림 글자는 기원전 10세기에는 한 획으로 쓰는 글자가 되고 그것을 180도 회전한 것이 고대 그리스 글자 베타가 되고 그 베타의 윗부분 획이 이어져서 라틴 글자 B가 됐다고 한다.
알파벳이라는 명칭 자체는 그리스.알파멧의 처음 두 글자 알파와 베타에서 나온 것이며, 그 어원은 가나안어의 <숫소의 머리>와 <집>에 유래한다. 고대 이스라엘인은 가나안이게서 알파벳을 배우고, 이것을 독자적으로 헤브리어 글자로 발전시킨 것이다.
전항에서 우리는 유럽인의 오리엔트에서 받아들인 유산의 하나, 즉 실용적인 유산인 알파벳의 기원을 살펴봤으며 다음은 정신적인 유산인 헤브라이즘에 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헤브라이즘이라는 것은 원래 고대 이스라엘인의 사상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것은 고대 이스라엘인의 사고나 행동속에서 자라난 것이며,고대 이스라엘인의 유일 인격신 야훼 신앙에 유래하며 그리스도교에 의하여 계승되고 신의 의로움과 사랑을 근본 원리로 한다. 헬레니즘(그리스 사상 문화)과 함께 유럽 정신의 전통을 형성하여 온 2대 사조의 하나이다.
영국의 문예 사회 평론가 머슈.아놀드(1822-1888)가 평론집<교양과 무질서> (1869)에서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을 논한 이래, 이 양자가 유럽사상의 2대 원류로서 파악되게 되었다. 보통,헤브라이즘은 인간중심주의의 헬레니즘과 대비해서 논의되는데 그것은 구약성서에 근거한 헤브라이적 사유의 특질을 나타내는 경우와 그것을 기반으로 해서 성립된 그리스도교적 세계관으로 대별된다.
노르웨이의 신학자 트리프.보만(1894-)은 그 저서<그리스도인의 사유와의 비교에 의한 헤버라인의 사유>에서 헤브라이인과 그리스인의 사유방법의 구조적 차이를 설명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헤브라이인의 사유벙밥의 특색은 동적이고 힘차고 열정적이고 자주 거의 폭발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는데비해서 ,그리스인의 사유방법은 정적이고 온화하고 절도를 중히 여기고 조화를 사랑하는데 있다. 헬레니즘이 이성적 과학적 미적인데 비해서 헤브라이즘은 의지적 윤리적 신중심적 인생관 세계관이고 그 특색이다.
예수가 언제 어디스 어떤 활동을 했는지를 자세히 알아 내기는 사료의 제약으로 극히 어려운 일이지는 유대교의 율법주의를 배격하고 유대인의 편협한 선민 사상도 부정하고 하나니의 사랑과 공정을 믿었고, 그것을 유대교의 전통적 문화의 중심지 예루살렘에서 보면 변경지인 북쪽 갈릴레아를 거점으로 해서 도시와 마을을 순회하면서 동포에게 전했다.
그리스도교는 일면으로는 유대교를 모태로 해서 그것을 계승하고 다른 면으로는 그것을 변형 발전시킨 것이다. 유럽인이 받아들인 헤브라이즘은 신약성서를 통해서 그리스도교에 의하여 계승된 고대 이스라엘인의 사상인 것이다.
4세기 후반부터 게르만인이 고전 고대의 세계로 침입하여 이른바 헬레니즘,헤브라이즘,게르마니즘의 융합이 시작되고 역사의 담당자가 로마인에게서 게르만인으로 바뀌고,그와 함께 무대도 지중해 주변 지역에서 유럽으로 이동하고 역사 개체로서의 유럽이 형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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