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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경영진이 정권에게 유리한 부분은 부풀리고 불리한 부분은 강제로 삭제하는 식으로 공정보도를 방해해 온 것으로 드러났다. ‘빨간펜’을 든 김인규 사장. 정권을 추켜세우면 무조건 ‘정답’, 정권을 비판하면 ‘오답’ 처리를 해 왔다.
불리하면 여지없이 출동하는 ‘삭제용 빨간펜’
파업 중인 KBS 새노조가 <소비자 고발>을 패러디 한 동영상 <김인규 고발>을 통해 ‘빨간펜’의 실체를 고발했다.
<김인규 고발> 제작진은 반정부적이라는 이유로 ‘김인규 빨간펜’이 삭제 지시를 내린 대표적인 케이스를 소개했다. <추적 60>에 방영됐던 ‘의문의 천안함, 논란은 끝났나?’ 편. 담당 PD는 ‘윗선’으로부터 “왜 굳이 천안함을 다루려고 하느냐”는 질책을 받았고 제작과정에도 어려움이 계속됐다고 털어 놓았다.
‘(천안함 사고 원인에 대한) 재소사가 필요하다’라는 멘트를 트집 잡아 ‘정부가 총력을 기울여 조사했지만 역부족이었다’라는 말로 대치하라는 집요한 압력 때문에 “불방 직전까지 갔었다”고 밝혔다. 또 하얀 꽃 모양의 흡착물질을 달고 어뢰 추진체 안에 붙어 있던 가리비에 대해 KBS 간부진이 해당 취재분의 편집 삭제를 지시했다고 주장했다.
‘가리비’의 발견은 큰 논란을 일으켰다. 어뢰 스크류의 좁은 구멍에 어떻게 큰 가리비가 들어갔는지, 꽃 모양의 흡착물질이 어떻게 만들어져 가리비에 붙어 있는 건지, 합조단의 조사 과정에서는 왜 가리비가 발견되지 않았는지 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며 큰 논란이 벌어진 바 있다.
KBS <천안함 어뢰 추진체 구멍 안에서 발견된 ‘가리비’> |
이 부분에 ‘빨간펜’이 작동했다. 천안함 정부 조사의 신뢰성에 결정적인 타격이 될 수 있는 단서에 대한 논란을 없애기 위해서 말이다. 어뢰추진체의 ‘가리비’는 충분히 해명되지 않은 채 지금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천안함 가리비’ 삭제 지시, 청와대는 ‘4대강편’ 불방 압력
<추적 60분>의 ‘4대강 편’도 천안함 가리비 같은 일을 겪어야 했다고 담당PD가 밝혔다. <김인규 고발>은 “당시 데스크 이상 간부들은 일단 불방시켜야겠다는 의지가 강했다”며 불방에 항의하는 제작진에게 압력을 행사했던 당시 시사제작국장은 “현재 보도본부장으로 영전했다”고 전했다.
‘4대강 편’ 불방에 청와대의 압력이 작용했다는 증거로 문건을 공개했다. 김연광 당시 청와대 정무1비서관이 KBS 측에 한 말이 담긴 문건이다. 김 비서관이 “김두우 (청와대) 기획관리실장도 KBS가 천안함 <추적 60분>에 이어 경남도 소송관련 <추적 60분>을 하는 등 반정부적인 이슈를 다룬다며 왜 그러냐고 부정적인 보고를 했다”고 적혀 있다.
공영방송을 정권 홍보의 수단으로 사용해 왔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김인규 고발> 제작진은 “KBS가 지난 몇 년간 각종 관제특집방송에 동원됐다”며 “여권 인사들도 KBS를 자신의 이미지 메이킹에 활용했다”고 강조했다. 그 예로 새누리당 정두언 의원의 <열린음악회> <콘서트 7080>에 출연한 사실을 적시했다.
<다큐 3일>에 ‘김윤옥 우물’ 끼워 넣어라? ‘황당’
<김인규 고발> 제작진이 고발한 ‘백미’는 ‘김윤옥 우물 사건’. <다큐 3일> 제작 중 프로그램의 성격에도 맞지도 않는 ‘김윤옥 우물’을 취재해 끼워 넣으라고 압력을 넣어 제작을 방해한 사건을 소개했다.
2010년 1월 <다큐 3일> ‘캄보디아 시골마을에서의 3일’ 편을 촬영하고 있던 제작진이 서울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는다. 내용은 ‘어느 장소에 김윤옥 여사가 기증한 우물이 있으니 그걸 찍어오라’는 것.
편집 작업 중에도 외압이 계속됐다고 전했다. “우물 풀샷 하나, 중간샷 하나, 아무것도 없이 ‘김윤옥’ 이름 석 자만 적힌 현판이 있었는데 EP(총괄PD)가 ‘이 컷을 집어넣어라’고 했다”며 “프로그램과 아무런 논리 연결이 안 되는데도 (이 컷들을) 넣으니 빼니 하며 일주일간 엄청나게 압력을 받았다”고 밝혔다.
<다큐 3일>과 ‘김윤옥 현판’의 연결고리는 단지 캄보디아라는 공간적 배경뿐이다. 그런데도 청와대 안주인을 띄우기 위해 프로그램의 맥을 끊으면서까지 ‘김윤옥 컷’을 넣으려 했다니 실소를 금할 수 없다.
‘김윤옥 우물 띄우기’, 보수언론이 벌인 일
‘김윤옥 우물’이 궁금했다. 자료를 검색해보니 ‘김윤옥 우물 띄우기’는 비단 KBS에만 국한된 게 아니었다. 2010년 4월 30일자 연합뉴스에 ‘김윤옥 여사, 오은선 씨 캄보디아 우물파기 동참’이라는 기사가 올라 있었다. 물론 중앙일보 등 보수신문들은 이 내용을 연합뉴스 발 기사로 내보냈다.
<후원사업으로 제공된 우물 / 이미지출처: 지구촌공생회 홈페이지> |
내용인즉슨 ‘지구촌공생회’(국제구호 NGO)가 캄보디아에서 벌이는 우물파기 사업에 김윤옥 여사가 후원을 했다는 것인데 기사 곳곳에 황당한 표현이 들어 있었다.
이명박 대통령의 부인 김윤옥 여사와 청와대 홍보수석실 이름의 우물이 캄보디아에 있다는 사실도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공생회 측은 후원자들을 밝히지만 이들의 신분을 모두 공개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연합뉴스기사 2010·4·30)
무슨 얘긴가 해석해 보자. ‘지구촌공생회’ 측은 후원자의 신분을 밝히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데 연합뉴스가 굳이 후원자 신분을 밝히고자 해서 김 여사가 우물 하나를 후원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는 얘기다.
그 아래 줄에 또 재미있는 내용이 있다.
이미 완공한 우물 1천 곳 가운데 991번째는 김 여사가, 999번째는 청와대 홍보수석실이 후원했다. (연합뉴스기사 2010·4·30)
1000명이나 되는 우물 후원자 가운데 하필 김윤옥 여사와 이동관 수석을 부각시켜야만 했을까? 다른 후원자 이름 몇몇도 함께 거론했지만 누가 봐도 들러리로 보인다. 두 사람의 이름만 콕 집어 언급할 수 없으니 두세 명을 끼워 넣은 것으로 보인다. 졸렬하기 짝이 없다. 얼마나 자랑할 일이 없으면 ‘우물’ 가지고 난리일까.
‘빨간펜’ 아웃! KBS, 정권의 전유물 아니다.
자신에게 좋은 건 취하고 나쁜 건 버리는 일은 누구나 잘할 수 있다. 하지만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정권은 달라야 한다. 자신에게 좋은 것이라 해도 국민을 위해 버릴 줄 알아야 하고, 자신에게 나쁜 것이라 해도 국민을 위하는 길이라면 기꺼이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국민으로부터 부여받은 권력을 이용해 국민의 방송인 공영방송의 공정성을 훼손하는 일이 아직도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니 개탄스럽기 짝이 없다.
김인규 사장은 인제 그만 ‘빨간펜’을 놓고 KBS를 떠나야 하고, 공영방송을 정권의 전유물로 삼으려는 정권의 전횡도 중단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