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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나는 개가 아니었지, 사람이었지. 나의 자존감을 다시 찾아야겠다. 내가 내 모든 것을 잃더라도 이것은 아니다.”
박 사무장은 언론에 진실을 말했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재벌그룹 오너 딸과 회사 간부들, 정부 기관의 비위와 부도덕성을 사실대로 알리는 행동은 소시민이 웬만한 용기로는 엄두조차 내기 힘들다. 그럼에도 그가 모든 것을 잃을 각오로 당당히 진실을 밝힐 수 있게 한 것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자각이었다.
그러나 문제의 비행기에 탑승했던 여승무원들의 행동은 모든 걸 잃을 각오로 인간의 존엄을 선언한 사무장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모욕을 줬던 오너의 딸에게 유리하도록 거짓증언으로 일관해 왔다. 더욱이 얼마 전 방송된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공개한 화면을 보면, 샤넬 가방을 멘 한 여승무원은 검찰에 조사를 받기 위해 출두하는 과정에서 즐겁다는 듯 활짝 웃어 보여 시청자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회사 측에서 요구하는 대로 증언하는 대가로 모기업 회장이 주주로 있는 대학 교수자리를 제안했다는 얘기도 나왔다. 이들은 왜 인간의 존엄에 대한 자각을 하지 못하고, 가진 자의 노예가 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인간의 도리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버리는 속물주의의 극치를 택했을까?
그들을 지켜보면서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가 떠오른 건 우연이 아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쓴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세계적인 패션잡지사를 배경으로, 화려한 패션업계의 씁쓸한 이면을 들춰내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명문대학을 졸업한 앤드리아(앤 해서웨이)는 패션잡지 ‘런웨이’에서 편집장 미란다(메릴 스크립 분∙‘보그’지의 편집장 안나 윈투어가 실존인물이다)의 비서로 취직한다. 쥐꼬리만한 월급을 받는 인턴사원 앤드리아에게 패션계를 좌지우지 하는 거물급 인사인 미란다는 가혹한 상사다. 출근 첫날부터 매일 같이 새벽을 넘기는 야근의 연속이다. 여기에 미란다가 지시하는 불가능에 가까운 각종 개인심부름 때문에 24시간 주말도 없이 울려대는 핸드폰. 그 뿐만이 아니다. 호된 질책에 옷차림이 촌스럽다며 노골적으로 무시까지 당한다. 재미있는 것은 앤드리아를 비롯해 수많은 인턴들이 언제 잘릴지 모르는 불안정한 신분과 용돈 수준의 월급, 인간적인 모욕에도 불구하고 악명 높은 미란다 밑에서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쳤다는 것이다.
젊고, 똑똑하고, 예쁘기까지 한 엄친 딸들이 그런 선택을 하게 만든 동력은 다름 아닌 물신숭배다. 미란다가 화보촬영 후 갖다 버리라며 건네 주는 프라다나 마크 제이콥스 같은 럭셔리 브랜드 제품들, 회사에서 빌려 입을 수 있는 옷과 신발, 가방들, 패션쇼 초대권 등은 20대 여성들이 뿌리치기 어려운 유혹이다. 눈 앞의 달콤한 유혹 앞에서 더럽고 치사한 일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물신숭배가 지배적인 사회에서 사람들은 재물의 축적과 소비에 매진하며 속물이 된다. 속물은 자기 주체에 대한 반성이 없는 존재로, 위선적이고 거짓말을 잘 하며, 물질의 노예로 존재한다.
그러니 문제의 여객기에 탑승했던 여승무원들에게 인간의 존엄성을 운운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에 가깝다. 매스컴에 비춰진 물신숭배주의에 물든 속물근성이 이들의 진정한 모습이라면 말이다.
‘땅콩 회항’ 사건을 계기로 시민들은 아마 속물주의에 찌든 을의 변화 없이는 끊이지 않는 갑의 패악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고 느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