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달래능선 아래, <독립>과 <민주>의 넋들! 붉게 피어났구나
2025년 4월 서울학교는 <화창한 봄날, 열사의 길 순례>
봄이 활짝, 4월 서울학교(교장 최연. 서울인문지리역사전문가) 제110강(제7기 제6강)은 북한산 진달래능선에 안기신 <독립>과 <민주>의 열사들을 찾아뵙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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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능선은 북한산의 대동문에서 우이동으로 내려뻗은 산줄기로, 해마다 4월이 오면 온통 붉은 진달래 천지가 되는 곳입니다. 그 아래, 골짜기 곳곳에는 독립열사들의 묘가 들어서 있고 능선의 끝자락에는 꽃잎처럼 스러진 젊은 넋들이 잠들어 있는 국립4.19민주묘지가 있습니다.
▲북한산에 봄이 왔다. 그 아래 진달래능선 자락에는 많은 독립투사와 민주열사들의 넋이 잠들어있다.ⓒ북한산국립공원
서울학교 제110강은 2025년 4월 13일(일요일) 열립니다. 이날 아침 8시 50분, 서울 강북구 수유동 국립4.19민주묘지 정문 앞에 모입니다.
*시내버스
-간선:104,109,120,144,151,163.
-지선:강북01,1119(4·19방향),1126(4.19방향), 1144,1165,1166
*우이신설선 도시철도 이용시 4.19민주묘지역에서 도보 5분(600m)
*주소:강북구 4.19로 8길17. 02)996-0419
*여유있게 출발하여 모이는 시각을 꼭 지켜주세요^^
이날 답사 코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국립4.19민주묘지앞-진달래마을-신숙묘-김도연묘-서상일묘-김창숙묘-양일동묘-섶다리-유림묘-이시영묘-17위광복군합동묘-김병로묘-신하균묘-신익희묘-이준묘-점심식사겸뒤풀이-국립4.19민주묘지(중앙분향소/묘역/영정보관소/기념관)
*상기 일정은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변경될 수 있습니다.
*답사 도중 함께 점심식사 겸 뒤풀이를 합니다.
▲4월의 서울학교 답사도Ⓒ서울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화창한 봄날, 열사의 길 순례> 답사지에 대해 들어봅니다.
대한민국은 임시정부의 법통과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여 건국하였습니다.
대한민국은 헌법 전문에도 나와 있듯이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여 건국하였습니다. 이는 일제와 독재에 항거한 독립열사들과 민주열사들의 ‘독립’과 ‘민주’의 정신을 이어가겠다는 의지를 나타낸 것입니다.
북한산 진달래능선은 북한산성의 대동문에서 우이동으로 내리뻗은 산줄기로 해마다 4월이 오면 온통 핏빛 진달래 천지가 되는 곳으로 골짜기 곳곳에는 독립열사들의 묘가 들어서 있고 능선의 끝자락에는 꽃잎처럼 스러진 젊은 넋들이 잠들어 있는 국립4.19민주묘지가 있습니다.
▲진달래능선 가는 길ⓒ우보천리
국립4.19민주묘지에는 560여 영령이 잠들고 있습니다.
해마다 4월이 오면 강산은 진달래로 붉게 물들지만 차마 잠들 수 없는 스러진 꽃잎들이 누워 있는 북한산 진달래능선 아래 국립4.19민주묘지에는 ‘욕처럼 남은’ 이들의 추모행렬이 줄을 잇습니다.
4.19묘지는 지금은 국립묘지가 되었지만 군사독재정권 시절에는 이곳에 참배하는 것만으로도 불온시하여 4.19 혁명정신을 계승하려고 참배를 강행하려는 많은 민주인사와 학생들이 전투경찰에 의해 ‘닭장차’에 실려 경찰서에 끌려가던 때가 있었습니다.
눈이 부시네 저기 난만히 묏등마다
그날 스러져간 눈물 같은 꽃 사태가
맺혔던 한이 풀리듯 여울여울 붉었네
그렇듯 너희는 지고 욕처럼 남은 목숨
지친 어깨 위로 하늘이 무거운데
연연이 꿈도 설워라, 물이 드는 이 산하
(이영도 시, 한태근 곡 <진달래>)
1960년 4월 헌정 사상 최초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독재 권력에 항거한 시민혁명이 일어났습니다만 독재정권의 하수인인 경찰의 발포로 많은 젊은이가 목숨을 잃었으며 이로 인해 국민적 분노가 전국적으로 분출되어 무너지지 않을 철옹성 같았던 이승만 독재정권은 그렇게 무너졌습니다.
이때 꽃잎처럼 스러진 199위의 영혼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 국립4.19민주묘지입니다. 한땐 ‘혁명’ 또는 ‘의거’로 불리다가 5·16 이후에는 ‘의거’로 공식화되었으나 1960년대 말부터 그냥 ‘4·19’로 불리다가 1993년에 이르러 그 의의와 정신이 재조명되어 비로소 ‘4·19혁명’으로 정당한 역사적 평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공원묘지로 서울시에서 관리해 오던 4·19묘지도 성역화 사업을 거쳐 1995년 4월 19일(4.19 35주년) 국립묘지로 승격되었을 뿐만 아니라 1997년 4월 19일에는 전시실 기능을 갖춘 4.19혁명기념관을 개관함에 따라 4.19혁명을 계승할 정신적 산 교육장임과 동시에 민주주의 최고 성지로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봄을 맞은 국립4.19민주묘지ⓒ국립4.19민주묘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기붕을 당선시켜야 한다”
자유당의 장기 집권에 염증이 깊어가던 1960년 4.19혁명 전야를 돌아보면, 바로 한해 전인 1959년 7월 31일, 이승만의 최대 라이벌 조봉암은 진보당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고 민주당 대통령후보 조병옥은 선거 바로 한 달 전인 2월 15일 미 육군병원에서 급서했습니다.
당시 경쟁자들이 사라진 이승만은 대통령 단일후보가 되었지만 그가 86세의 고령이었기에 정권 연장을 위해서는 대통령 유고시 권력을 이어받게 되는 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 이기붕 후보가 민주당 장면 후보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기필코 이겨야 하는, 절체절명의 목표에 혈안이 되었습니다.
1960년 3월 15일, 전국적으로 자행된 선거 폭력과 부정은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지요. 경찰과 정부당국은 선거 전에 이미 투표함에 30~40%의 투표지를 미리 넣어놓았습니다. 물론 이 투표지는 모두 이승만과 이기붕으로 기표된 표였습니다. 대리투표는 기본이었고 물품을 뿌려 자유당 투표를 독려하는가 하면 투표를 도와준다는 명목으로 3인조나 5인조로 묶어서 투표를 시키기도 했습니다. 심지어는 완장부대와 정치깡패를 동원하여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여 투표하는 시민들에게 위압감을 주었고, 야당 참관인에게는 위협, 폭행 등 무력을 가하거나 투표소 시계를 조작해서 선거가 종료되지도 않았는데 투표 끝났다며 선거장 밖으로 쫓아내기도 했습니다. 이런 부정선거를 견디지 못하고 선거가 끝나기 전인 오후 4시 30분, 민주당 중앙당은 "3.15 선거는 불법 무효다"라고 발표했습니다.
개표 결과 이승만과 이기붕의 압승이었습니다. 조작이 너무 완벽해서 양 후보의 득표율이 90%를 넘기자 당황한 정부가 임의로 득표율을 낮춰 이승만이 전체의 88.7%, 이기붕은 79%의 득표율을 기록했다고 발표하였습니다.
4.19혁명은 김주열의 비참한 죽음에서 촉발되었습니다.
3.15선거 당일 전국적으로 자행된 부정선거가 현장 적발되자 마산, 광주 등 여러 도시에서 분노한 시민, 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시위를 벌였는데, 경찰이 총기를 발포하여 사상자들이 발생하였습니다. 그날 경남 마산시에서 벌어진 1차 의거로 9명이 사망하고 80여 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이에 마산 시민들은 물론 전 국민이 충격에 빠졌습니다.
3.15 이후 한 달 가까이 행방불명됐던 김주열 군이 4월 11일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낚시꾼에 의해 시신으로 떠올랐습니다. 멀리 전북 남원에서 마산상고 입학시험 결과를 확인하러 왔던 김 군은 형과 함께 3.15 저녁 시위에 참가했다가 오후 10시경 눈에 최루탄을 맞고 죽은 상태로 발견됐는데 경찰이 마산항으로 옮겨 바다에 버린 사실까지 드러났습니다.
김주열의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온 시내로 퍼졌고 이에 흥분한 수천여 명의 시민들이 경찰의 저지를 뚫고 병원 안으로 밀려들어가 김주열의 사망을 확인했으며 어머니는 그 끔직한 모습에 충격을 받아 시신의 인수를 거부하였습니다. 2차 마산의거는 11일부터 13일까지 이어졌고 마산의 도시 기능은 온통 마비되었습니다. 4.11마산의거는 전국적으로 번져나가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이에 이승만 정부는 예나 이제나처럼, 마산의거를 공산당과 간첩들이 사주한 것이라고 몰아붙였고 이승만 대통령은 같은 날 난동 배후에 공산당이 있다는 특별담화를 발표했으며 15일에도 공산당 선전 때문에 마산 "폭동"이 일어났다는 담화를 발표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