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설
정지용
문 열자 선뜻!
먼 산이 이마에 차라
우수절(雨水節) 들어
바로 초하루 아침
새삼스레 눈이 덮인 뫼뿌리와
서늘옵고 빛난 이마받이 하다
얼음 금가고 바람 새로 따르거니
흰 옷고름 절로 향기로워라
옹숭거리고 살아난 양이
아아 꿈 같기에 설어라
미나리 파릇한 새 순 돋고
옴짓 아니기던 고시 입이 오물거리는
꽃 피기 전 철 아닌 눈에
핫옷 벗고 도로 춥고 싶어라.
(『문장』 3호, 1939.4)
[어휘풀이]
-우수절 : 입춘과 경칩 사이인 24절기 중 두 번째. 양력 2월 19일이나 20일.
-서늘옵고 : 서르렇고
-이마받이 : 이마와 마주 대다. 여기에서는 눈 덮인 산봉우리를 마주대하는 것.
-옹숭거리고 : 궁상스럽게 몸을 옹그리고
-옴짓 : 옴죽, 몸치가 작은 것이 몸을 조금 움직이는 모양
-아니기던 : 아니하던
-핫옷 : 솜을 두어서 지은 옷.
[작품해설]
이 시는 정지용의 후기 시 세계의 특징을 잘 보여 준다. 이 시는 초기의 모더니즘 계열에서 벗어나서 카톨릭에 몸담은 종교시의 통과의례를 거친 뒤, 동양적 세계에서 노니는 관조적 서정을 절제된 이미지로 잘 표현하고 있다.
여전히 정지용다운 시어의 세련된 구사가 두드러지는데, 첫 연의 ‘먼 산이 이마에 차라’와 같은 감각적 표현은 그의 장기(長技)를 유감없이 보여 주고 있는 부분이다. ‘서늘옵고 빛난 이마받이하다’ · ‘흰옷고름 절로 향기로워라’ · ‘아아 꿈 같기에 설어라’와 같은 부분들도 그 세련된 언어 맛을 잘 살리고 있는 표현이다.
밤새 춘설이 내려 시적 화자는 문을 연다. 선뜻 느껴지는 싸늘한 기운, 절기는 이미 우수를 지났지만 추위가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봄기운이 자연 속에 피어나서 ‘얼음 금가고 바람 새로 따르거니’ 이러한 봄향기가 옷 속에까지 스며온다. 겨우내 웅크렸던 생명들이 ‘옹송그리고 살아난 양이’ 서러울 정도롤 아름답다. 이러한 봄기운을 느끼기 위해서는 비록 추위 남아 있더라도 핫옷을 벗어 던져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을 시인은 역설적으로 ‘핫옷 벗고 도로 춥고 싶고 싶어라.’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직설법이 아닌 시적 표현의 아름다움을 유감없이 맛보게 된다.
[작가소개]
정지용(鄭芝溶)
1903년 충청북도 옥천 출생
1918년 휘문고보 재학 중 박팔양 등과 함께 동인지 『요람』 발간
1929년 교토 도시샤(同志社) 대학 영문과 졸업
1930년 문학 동인지 『시문학』 동인
1933년 『카톨릭청년』 편집 고문, 문학 친목 단체 ‘구인회’ 결성
1939년 『문장』지 추천 위원으로 조지훈, 박두진, 박목월, 김종한, 이한직, 박남수 추천
1945년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1946년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
1950년 납북,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