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의 말 ]
사랑하게 되는 일,
정성을 다하는 일,
의자를 내어놓는 일,
기다리는 일,
시가 내게 준 것들
부르지 않아도 오는 것들
햇빛, 인연들
봄을 주신 분들께 바칩니다.
2024년 가을, 정종숙
[출판사 서평]
학창 시절 시인은 세상을 향해 소리치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많은 꿈을 꾸었고 무엇이든 바꾸고 싶었다. 그러는 동안 우리를 가두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깨달아갔고, 흔들리고, 무너지면서 무엇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지를 주문처럼 외웠던 것 같다. 시인에게선 유독 흔들리지 않는 어떤 믿음 같은 게 있어 보인다.
이 시집에 등장하는 장소와 인물들이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가까운 사람인가 하면 멀고, 멀다고 생각하면 어느새 성큼 우리 옆에 서 있는 사람, 한 번쯤 가 보았을 것 같지만, 어쩌면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곳, 낯익지만 낯설고, 낯설지만 결코 낯설 수 없는, 어떤 경계 바깥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들……. 그런 장면들이 마치 편지를 보낸 것처럼 말을 건네 온다. 시인의 시적 근원은 이렇게 시작된다. 시인은 부천에서 오랫동안 살았고, 지금까지도 그곳에 살고 있다.
내가 사는 집은 부천이고
집 옆 4차선 도로를 건너면 서울인 것도 갸우뚱한데
어제와 오늘의 경계
여기와 저기의 경계
너와 나의 경계
사랑과 사랑 아님의 경계
진실의 경계를 어떻게 그을 수 있나
차라리 경계의 안과 밖
그 언저리를 사랑하리라
서성거림과 의문
풋풋함과 단단함
때론 당돌한 도전을 머금은 언저리를
-「경계」 부분
시인은 어쩌면 언저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쭉 살아왔을 것이다. 삶이 곧 시이고, 시가 곧 삶이라는 말은 이럴 때 해당이 되는 말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시인의 기억은 살면서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었던 사람과 그들과 함께했던 수많은 장소를 자연스럽게 소환한다.
시집에 등장하는 인물은 대부분 삶의 언저리에서 맴돌고 있는 우리의 이웃들이다. 어머니와 아버지, 연변동포들, 러시아 유학생과 모로코 소년, 육교에서 고무줄과 단추를 파는 노인, 버스킹을 하는 젊은이, 경비원, 열사와 장애 청년 등등 다양하다.
동쪽으로 십 킬로쯤 달려와/ 살게 된 동네를 사랑하게 되었다// 당신을 사랑하게 되듯이 그렇게// 목화솜 같은 눈송이가/ 나뭇가지에 쌓이는 걸 보면서 이삿짐을 풀었다/ 막막한 걸음도/ 받아주는 사람이 있고 녹여주는 곳이 있어/ 세상은 얼어 죽지 않았다//
넓은 인도에는 띄엄띄엄 벚나무가 있고/ 가게 앞에는 옷을 입은 강아지가 있다/ 턱을 괴고 있는 여인의 조각상이 있는/ 빨간 벽돌 집 마당을/ 담장 너머로 훔쳐보는 기쁨이 있고/ 고흐의 그림 밤의 카페테라스처럼/ 여름 밤 치킨 집 앞에는/ 삼삼오오 맥주 마시며 떠드는 사람들/ 정겨운 소란을 보는 즐거움이 있다//
은행나무 아래 둥지 튼/ 공중전화 박스에 풀풀 눈이 들이치면/ 괜히 전화 걸고 싶은 그리움이 있다/ 오래된 집에 푸른 물을 들여 꽃집 차린 아가씨가/ 화분에 물 주는 뒷모습과/ 팝송 틀고 자전거 고치는 아저씨 뒷모습은/ 뒷모습의 반경을 생각하게 한다/ 별것도 아닌 사람들이 별빛을 내고 / 창가 불빛이 지붕을 기댄 집들을 위로한다//
동쪽으로 걸어가면 나무숲과 기찻길이 볕을 모으는/ 이 동네를 어슬렁거리면/ 살짝 기운 지구와 오래 살고 싶어진다//
당신을 사랑하게 되듯이 그렇게
-「사랑하게 되는 일」 전문
“이 동네를 어슬렁거리면/ 살짝 기운 지구와 오래 살고 싶어진”다고 말하는 시인은 “받아주는 사람이 있고 녹여주는 곳”에서, “삼삼오오 맥주 마시며 떠드는” 평범한 사람들과 함께 “별것도 아닌 사람들이 별빛을 내고/ 창가 불빛이 지붕을 기댄 집들을 위로”하는 살짝 기울어진 곳에서, 살짝 기울어진 사람들과 함께한다. 사랑이 결코 관념이나 이념에 치우칠 수 없다는 것, 사랑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옆에, 우리들의 주변에서 늘 손을 뻗고 있음을 알게 한다. 살아있는 생명에 대한 관심과 염려, 그리고 끊임없이 건네는 대화 속에서 사랑은 이루어진다.
이러한 시인의 사랑은 “정겨운 소란”으로 가득한 곳에서 펼쳐진다. 정전이 되어 집 밖으로 뛰쳐나온 노부부가 갈 곳이 없자 1층에 살던 시인은 노부부를 집으로 들여 쉬게 한다. 한쪽 뇌가 정전인 할아버지는 소파에서 어두워지고, 시인의 마음은 촛농처럼 흘러내린다.
삶은 때로 스위치 같다. 불을 켜고 불을 끄는 누군가가 있어서, 시시때때로 정전의 순간을 맞이한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 어두움을 함께 나누는 사람이 있어서 그나마 살아간다.
스테인드글라스에 비치는 햇살이/ 길게 드리워진 성당 의자에 오래 앉아 있었다//
의지할 수 있는 건 갈탄 난로 위 도시락인 것처럼/ 필사적으로 밥을 먹었고/ 벚나무 아래를 같이 걷던 친구들은 가끔/ 교실 창밖으로 종이비행기를 날렸다//
막막함을 견디면서/ 세상과 사람에게 무엇을 바라지 않기로 했다/ 오래전 일이다//
언덕에 올라/ 첨탑을 바라보며 은빛 종소리를 들었다//
백년 전 쫓겨 온 신도들이 구운 벽돌에는/ 믿음이 굳어 있다//
스테인드글라스에 스미는 빛을 떼어먹으며//
신은 믿지 못했지만/ 사람은 믿기로 했다//
믿지 못하면 속기라도 해야겠다//
너를 위한 벽돌을 구워야겠다
-「풍수원 성당」 전문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조금 느슨해지는 마음으로 시인은 뚝심 있게 살고자 희망한다. “신은 믿지 못했지만/ 사람은 믿기로 했다/ 믿지 못하면 속기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가도 가도 청보리밭은 없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낡은 아파트, 고무나무가 있던 골목, 묘지와 성당, 허물어진 극장, 춘천, 진주, 변산 등지에서 바라본 풍경은 우리 곁에 계속 남아 있다. 그 풍경 속에는 늘 사람들이 걷고 뛰고 있다. 저 멀리에 있는 낙원을 계속해서 희망한다. 낙원은 언제나 숙제다. 엄마가 계신 저곳이 낙원인지, 그리움을 안고 있는 이곳이 낙원인지 우리는 잘 모른다. 그렇지만 낙원이라는 말에, 혹은 천국이라는 말에 우리가 위로받는 것은 분명하다. 그것을 믿든 안 믿든 상관없이 말이다. 고통과 분노와 슬픔과 기쁨이 교차하는 이곳에서 시인은 스스로를 위로할 줄 아는 것 같다. 그 위로가 때로는 가족에게 때로는 이웃에게 때로는 모르는 사람들마저 위로해 줄 수 있다면, 그곳을 감히 낙원이라고 말해도 되지 않을까. 이 시집 속에 오랫동안 머물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시집은 삶을 정면으로 마주 보게 한다. 그래서 어떻게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지, 그 너머로 가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고독한 일인지 알게 해 준다. 그 너머에 무엇이 있든, 그 너머로 가든 가지 않든, 시인과 더불어 그 길을 갈 수 있다면, 조금 덜 외로울 것 같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쓰일 시인의 시에 기대를 갖게 되는 이유이다. 어쩌면 이미 새로운 가치를 획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고통과 막막함을 사랑과 연민으로 변환하는 시인의 시적 세계를 엿보는 것은 사람과 마주 보는 일이고 삶과 마주하는 일이다.
옛 기억에 머무르는 게 아니라 현재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전환한 기억의 방식이 여러 시 편에 녹아 있다. 과거로부터 받은 오랜 편지를 열어보면서 현재를 더 사랑하게 되는 따뜻함이 느껴지는 폴라로이드 편지 같은 시집이다. 동시대를 살아왔던 사람들이 느꼈음직한 보편적인 정서가 공감을 얻으며, 잔잔하게 펼쳐진다.
* 시집 출간을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