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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중학생일 때, 어느 날 아버지의 앨범을 보았다.
다부진 신체, 초롱한 눈빛, 당당한 기백의 사진 속 아버지는 당시 고교생이었다.
미더운 땀을 흘리며 뜨겁게 뒹굴었던 운동클럽 회원들과 함께 포즈를 취한 사진이었다.
시기적으로는 전쟁 직후인 1950년대 중반이었다.
사진 속 젊은이들은 모두 하얀색 민소매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이두, 삼두, 활배, 대흉근이 무지 발달되어 있었다.
한눈에 척 봐도 운동깨나 한 사람들이었다.
빛나는 청춘들의 한 쪽 가슴팍엔 '義虎'란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나중에 아버지께 여쭤보았다.
과연 '義虎'란 어떤 단체인지 궁금했고, 알고 싶었다.
아들의 갑작스런 질문에 아버지는 회상에 잠기시는 듯 몇 초간 눈을 감으셨다.
그리곤 조용한 어투로 설명해 주셨다.
운동으로 심신을 열심히 단련했고 불의에 당당하게 맞서려 노력했던, 뜻을 함께 한 교우들과의 모임이라고 하셨다.
그 당시는 전쟁 직후라 사회가 혼란스러웠고, 왕왕 폭력과 무질서가 횡행했는데 그런 상황속에서 선량한 학우들을 보호하고,
자신의 마을에 외부세력들의 폭거와 무례들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경주하셨단다.
특히, 부녀자들과 어르신들껜 늘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자 힘썼다고 하셨다.
짧고 굵직했던 아버지의 몇 마디 말씀.
그 말씀은 사진 속 청년들의 진지한 눈빛과 오버랩되면서 굳세고 강직한 기상으로 내게 와락하고 다가왔다.
어째서 그 단체의 이름이 '義虎'였는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감수성이 예민했던 나의 사춘기.
한 세대 전, 잘생긴 사내들의 당찬 호연지기와 다부진 모습들은 그렇게 내 가슴판에 선명하게 새겨졌다.
그 이후론 내 영혼에서 함께 살아 움직였다.
내 나이 이미 지천명을 넘겼지만 중학생 때 내 가슴에 꽂혔던 그 義虎의 울림은, 조금도 바래지거나 옅어지지 않았다.
1980년 3월, 나는 고등학생이 되었다.
고교시절에 읽었던 책들 중에 '매헌의 생애'는 내겐 큰 충격이자 떨림으로 다가왔다.
매헌은 23세 때 조국을 떠나면서 유서를 남기셨다.
'丈夫出家 生不還'
그리고 중국으로 건너가 우리 조국을 위해 살신구국을 실천하셨다.
우리 민족사에 영원히 빛나는 웅혼한 사상과 실천의 애국지사, 매헌 윤봉길.
상해 홍구공원에서 압제와 폭거의 장본인들을 향해 준비해 간 물병폭탄을 투척하셨다.
단 한방으로 일제의 침략수괴 7명을 처단하셨다.
1932년 4월 29일의 일이었다.
선생님은 일본으로 압송되어 그해 12월 19일, 가나자와 교외 육군 공병대 연병장에서 총살당하셨고, 불꽃같은 생을 마감하셨다.
한참 꽃다운 나이, 고귀한 넋은 그렇게 장렬하게 산화되어 민족의 자랑스런 횃불로 남았다.
그 때 매헌은 스물다섯, 청춘의 절정기였다.
고교생이던 내겐 매헌의 고결한 사상과 불꽃같은 생애가 벼락같이 내리꽂혔다.
그날 이후로 내 영혼엔 그분의 찬란한 발자취가 거친 고봉에 자생하는 生千死千의 주목들처럼,
그렇게 꼿꼿하고 확실하게 스며들었다.
"丈夫出家 生不還"
과연 진정한 대장부의 길이었다.
대학을 다니다 군에 입대할 나이가 되자 나는 주저없이 해병대에 지원했다.
1985년 8월, 푹푹찌는 무더위 속에서 포항 신병훈련소로 입소했다.
7주간의 신병훈련소를 경험하면서 나는 다시 한 번 과감하게 결단했다.
군생활의 이정표를 가차없이 틀어버렸다.
기왕지사 병역을 필하고자 한다면, 차라리 지옥문을 박차고 들어가 뜨거운 가슴으로 조국의 안위를 옹골지게 부등켜 안고 싶었다.
단지 그 생각 하나 뿐이었다.
나는 다시 한 번 지원했다.
그렇게 해병대 특수부대(그린베레)의 일원이 되었다.
거선의 기관처럼 힘차게 박동했던 이십대 초반의 내 심장과 영혼은, 용암처럼 뜨거웠고 흰눈처럼 순결했다.
그 당시 내 삶을 견인했던 단 두 마디는 '義虎'와 '生不還'이었다.
이 두 단어는, 내가 눈물겹도록 힘들고 곤고할 때마다 홀로 곱씹어가며 수도없이 기도했던 내 심장의 영원한 표상이었다.
혹독하기로 소문난 해병대 특수부대의 고강도 훈련들.
숱한 날들, 입에서 게거품이 버걱거렸고 골수에서도 단내가 풀풀 풍겼다.
하나 하나 어려운 고갯길을 넘고 또 넘어가면서 난 뼈에 사무치도록 뉘우쳤고 또한 깨달았다.
부모님의 사랑과 헌신이 얼마나 크고 깊은 것이었는지,
입대하기 전엔 그 사랑과 희생을 왜 잘 헤아리지 못했는지,
설사 알았더라도 어찌하여 표현하지 못한 채 살았는지,
막급한 후회가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특히 쫄병 때,
순검(육군의 점호)이 끝나고 막사에 불이 꺼지면 나는 모포를 머리 끝까지 뒤집어 쓴 채 부동자세인 상태로
먹먹한 가슴을 부여잡고 뜨거운 울음을 쏟아내곤 했었다.
아무도 모르게 소리없이.
봇물같은 눈물이 쏟아질지라도 어깨를 들썩거리거나 훌쩍거리는 소리를 내는 건 상상할 수 없었다.
하리마오에게 걸리는 날엔 내무반을 떠나 부대 전체가 죽음이었다.
어두컴컴한 지하 보일러실이나 주계(육군의 식당) 뒷편에서 해병대 '기수빠따'로 악명높은 혹독한 매타작이 심야까지 이어졌다.
누군가가 하달한 집합명령, 그 명령을 내린 대원의 아랫기수들은 그날밤 바로 죽음이었다.
쫄병에게 '집합'이란, 그 자체로 처절한 공포였다.
그랬으므로 눈물이 와락 쏟아질 때라도 부동자세인 채로 소리없이 먹먹한 울음을 울 수밖에 없었다.
소등 후 그런 절대고요 속에서 삐질삐질 미간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스스로 달래며, 나는 여러 차례 진정으로 참회했었다.
사랑하는 부모님을 위해 작지만 마음의 선물을 준비하기로 결심했다.
우리 부대 대원들은 생명수당을 받았다.
보병부대의 전우들보다 예닐곱 배 이상이나 되는 꽤 큰 수당을 받았다.
그래봐야 사회인들이 볼 땐 조족지혈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3년간 꼬박꼬박 모으면 제법 상당한 돈을 만질 수 있었다.
전역을 앞두고 큼지막한 금반지 2개를 만들었다.
반지 한가운데엔 빨간 루비를 박았고, 빙 돌아가면서 해병대 전통 문양과 고유 글귀를 섬세하게 가공해 새겨넣었다.
묵직했다.
품격이 느껴졌다.
별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부모님을 향한 감사와 사랑을 내 나름대로 表現하고 싶었다.
'군대가 사람 만든다'는 말이 허언은 아니었다.
전역 후 집으로 달려가 부모님께 큰절을 올리고 준비해 간 반지를 직접 끼워드렸다.
아버지는 먼 산을 바라보셨고, 어머니는 이내 눈가가 촉촉해 지셨다.
"아니고, 이 놈아, 너의 땀과 피로 받은 생명수당인데...이걸 어찌...."
부모님은 둘째 아들을 뜨겁게 포옹해 주셨고 한동안 말없이 어깨를 두드려 주셨다.
내 군복엔 진한 '땀냄새'가 흥건했지만, 아버지와 어머니 품속에선 향긋한 '사랑냄새'가 가득했다.
안락한 나의 둥지에서 오랜만에 맛보는 여유와 행복에 감사가 차올랐다.
'부모님'과 '가정'이란 단어는 그런 것이었다.
이십대 중반의 사내는 못내 가슴이 저릿했고 형언할 수 없이 뭉클한 정감을 경험했다.
다시 인생의 시간들은 쏜살같이 흘렀다.
내 아들이 2014년 10월 20일, 건강한 심신으로 해병대를 전역했다.
에이스의 귀환이었다.
가족들의 재회, 진정으로 행복했다.
전역인사로 큰절은 올린 아들은, 나에게 군번줄을 걸어 주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하나는 나의 군번이 새겨진 인식표였고, 다른 하나는 아들의 군번이 새겨진 인식표였다.
그런데 내 인식표는 보통의 것들과 다른 노란색이었고 약간 무거웠다.
아들이, 쥐꼬리만한 자신의 월급을 모아서 순금 3돈짜리로 만들어준, 세상에 단 하나 뿐인 선배 해병(아빠)을 위한 군번줄이었다.
콧날이 시큰했다.
진심으로 고마웠다.
30여년 전에, 소천하신 내 아버지가 건강하게 제대한 아들을 꼬옥 안아 주셨듯이, 나도 사랑스런 아들을 꼬옥 안아 주었다.
"고맙다, 사랑한다"
이 두 마디 외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사내들은 왕왕 가슴으로 얘기하지 않던가?
아버지와 내가 그랬던 것처럼, 나와 아들도 다르지 않았다.
돌이켜 보니, 아들은 군복무 중에 휴가를 3번 나왔었다.
그때마다 내가 용돈을 건넬라치면, 아들은 적극적으로 손사래를 쳤다.
그러면서 부모가 주는 용돈을 단 한 번도 받지 않았다.
"저 군대에서 월급받아요. 모아 둔 돈이 있으니 그것을 사용할게요"
친구들을 만나 소주 한잔 나눌 때에도, 영화 보고 옷 사입고, 지방에 내려가는 여비교통비및 식대까지도 전부 스스로 해결했다.
어느 땐, 휴가 중 자신이 입을 옷을 구입하는데 예쁜 것들이 많아 부모님과 누나 것까지 사왔다면서 우리 부부에게 쇼핑백을 건네주기도 했었다.
"아이고, 이 녀석아, 요즘 병사들 월급이래야 기껏 12-3만원 정도로 알고있는데, 그것으로 실컷 초코파이라도 사먹지 않고...."
우리 부부는 할말이 없었다.
有口無言이었다.
지금까지 인생을 살면서 사람 사이에 오가는 '物質'이나 '膳物'이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라고 여기며 살았다.
그러나 순수한 감사의 발로로 누군가에게 건네는 <사랑의 징표>는 그 의미와 가치가 아주 특별하고 감동스러운 것임을 알았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어느 누구도 눈치 챌 수 없었던, 부모를 향한 전역하는 자식의 사랑과 감사의 메시지.
그 징표 안에는, 숱한 고행과 피땀으로 점철된 눈물이 고여 있음을, 나는 그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내 가슴은 먹먹해 질 수밖에 없었다.
30여 년 전에 내가 부모님께 선물해 드렸던 해병대 금반지 2개는, 내가 부모님께 전해드리고 싶었던 진심어린 感謝의 징표였다.
그런데 이번에 아들에게서 받은 순금 3돈짜리 해병대 고유의 군번줄은 위의 <감사>와는 약간 감흥과 느낌이 달랐다.
그것은 진정으로 가슴 떨리는 父子間의 <感動>이었다.
대한민국에서 남자로 태어났으면 누구나 군대에 간다.
우리 家門도 다르지 않았다.
어느 누군가가 연출했거나 의도한 것도 아니었지만, 야무진 도전과 건강한 전역,
그리고 아버지와 나와 아들로 이어지는 우리만의 사랑의 징표는, 三代를 이어주는 감사와 보은의 멋진 가교였다.
어찌 몇 푼의 돈으로 환산하거나 금액으로 측량할 수 있겠는가?
사랑하는 아들아.
수고했다.
대한의 남자로서 인생의 한 고갯길을 당당하게 넘어 온 것에 대해, 선배 해병으로서 힘찬 박수를 보낸다.
지금까지 너에게 '義虎'와 '生不還'이란 개념을 한번도 얘기한 적은 없었지.
이것은 아빠가 청춘기에 지향했던 나만의 인생 중심테마였으니까.
너는 너만의 철학과 기상으로 네 인생을 열정적으로 헤쳐가리라 믿는다.
뜨겁게 도전하되, 배려와 헌신을 늘 기억하며 살거라.
누군가가 희생을 해야 한다면 네가 먼저 하고, 누군가가 땀을 흘려야 한다면 네가 먼저 팔을 걷어붙이고 흔쾌하게 나서주기 바란다.
인생을 그리 살거라.
또한 네가 먼저 약간 손해보는 듯하게 살면 네 주변의 모두가 웃음꽃을 피울 수 있으리라 믿어의심치 않는다.
아들아.
진정한 사내가 되어 돌아온 너에게 다시 한번 감사와 사랑을 전한다.
네가 선물해 준 사랑의 징표는 아빠가 이 땅에서의 여정을 마치고 歸天하는 그날까지 소중하게 잘 간직하마.
언제나 그랬지만,
보이지 않는 네 뒷편에 서서 너의 미래와 네 앞길을 위해 매일 새벽마다 하나님께 기도하련다.
이미 長成해 버린 너에게 아빠가 건넬 수 있는 가장 값진 사랑의 징표도 또한 기도 뿐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신의 은총과 가호가 늘 함께 하기를 빈다.
사랑한다.
아들아.
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