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시 여행] 국립 전주박물관.2편(조선왕조와 미술)..........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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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국립전주박물관(역사실).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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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전주박물관은 1990년 10월 26일에 개관한 이래, 전라북도의 문화유산을 수집·보존·연구·전시·교
육하고 국내외의 문화교류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중심적인 문화기관이다. 국립박물관으로서 아홉 번
째로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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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능과 역할을 보면 6만 5,289㎡의 대지 위에 연건평 8,030㎡의 지하 1층, 지상 2층의 조선시대 관아 모
습을 본뜬 전통적인 건축 양식으로 꾸며졌다. 그렇다 왼지 낮설지 않은 건물이라 생각했던, 박물관,
박
물관 내부에는 상설 전시실과 야외 전시장·기획 전시실, 강당, 영상실, 문화 사랑방, 기념품 코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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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문화의 중심으로서의 박물관은 상설 전시뿐만 아니라 매년 2∼4회의 특별 전시를 통하여 우리
의 전통문화를 균형 있게 보여 주고 있다. 전북 지역 문화적 특성을 부각시킬 수 있는 종합적이고 체
계적인 전시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다. 또한 다양한 사회 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하여, 지역 주민들이
문화적 즐거움을 누리는 문화 공간이 되기 위하여 애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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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국립전주박물관의 소장 유물은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내 발견유물(益山王宮里五層石塔內發見
遺物, 국보 제123호), 『법화경절본사본(法華經折本寫本)』(보물 제278호), 「이상길초상(李尙吉肖
像)」(보물 제792호), 선운사 석씨원류(禪雲寺釋氏源流,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14호)를 포함하여 3
만여 점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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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 1,200여 점의 소장품을 고대문화실, 미술실, 민속실, 석전실, 전북의 역사문화실의 5개의 전시
실과 야외전시장에 전시되어 있다. 유물들 대부분은 전북 지역에서 출토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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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실(조선의 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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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는 1335년(충숙왕 복위 4) 화령부(현 영흥)에서 아버지 이자춘과 어머니 최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중결(仲潔), 호는 송헌(松軒)이다. 왕이 된 후 이름을 단(旦), 자를 군진(君晉)
으로 고쳤다. 이성계의 본관은 전주(全州)로 전주의 향리였던 고조부 이안사가 동북면의 덕원(德源)
으로 이주하면서 그곳에서 자리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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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성계가 무장으로 활동하던 14세기 중엽 중원은 중국 내륙에서 명나라가 일어나 원나라 세력
을 몰아내던 혼돈의 시대였다. 고려는 이 시기에 원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 세력을 확대하고자 했다.
이 때문에 원나라와 사이가 나빠져 자주 무력 충돌을 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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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정세가 혼란한 틈을 타 북으로는 여진족, 남으로는 왜구의 침탈이 끊이질 않았다. 이성계는 이
즈음 여러 전투에 참여해 전공을 세우며 고려 무장으로서 확실한 지위를 차지했다. 패전을 모르는 무
장으로 이름을 떨친 이성계가 수문하시중에 오른 뒤, 우왕은 요동을 정벌하겠다고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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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가 지나치게 무리한 공물을 요구할 뿐 아니라 철령 이북 땅을 내놓으라고 고려를 위협했기 때
문에 내린 결정이었다. 철령 이북 땅은 본래 고려 땅으로 원나라가 강점하고 있던 것을 공민왕 때 겨
우 되찾은 곳이었다. 명나라는 원나라를 이었으니 원래 원나라 땅이던 이곳을 내놓으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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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우왕은 사신을 보내 명나라의 뜻을 꺾어 보려고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결국 최영을 중심으로 한 친원 세력의 뜻을 받아들여 요동 정벌을 단행하였다. 우왕은 1388년(우왕
14) 4월, 최영을 팔도도통사, 조민수(曺敏修)를 좌군도통사, 이성계를 우군도통사에 각각 임명하고 요
동 정벌을 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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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는 현실적으로 요동 정벌이 불가능하다는 '사불가론(四不可論)'을 제기했다.
[“지금에 출사(出師)하는 일은 네 가지의 옳지 못한 점이 있습니다.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에 거역하
는 것이 한 가지 옳지 못함이요,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이 두 가지 옳지 못함이요, 온 나라 군
사를 동원해 멀리 정벌하면, 왜적이 그 허술한 틈을 탈 것이니 세 가지 옳지 못함이요, 지금 한창 장
마철이므로 활(弓弩)은 아교가 풀어지고, 많은 군사들은 역병(疫病)을 앓을 것이니 네 가지 옳지 못
함입니다. - 《태조실록》 권 1, 총서 83번째 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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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왕은 이미 군사를 일으켰으니 중지할 수 없다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내키지는 않았지
만 이성계는 일단 왕의 명에 따라 조민수와 함께 5만의 대군을 이끌고 출정 길에 올랐다. 이성계와 조
민수의 부대는 압록강 하류에 위치한 위화도(威化島)에 당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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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서 전열을 가다듬어 요동성을 칠 계획이었다. 하지만 때는 5월이었고 장마로 압록강이 불어나
자 도망병이 속출했다. 이성계는 이대로 정벌에 나선다는 것은 자멸의 길이라 여겼다. 더구나 친명파
로서 명을 친다는 것은 명분에도 맞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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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결단을 내린 이성계는 조민수를 설득해 회군을 감행했다. 역사를 뒤흔들 사건의 시작이었다.
개경으로 돌아온 이성계는 조민수와 함께 우왕을 친위하는 최영의 부대와 싸워 승리를 거뒀다. 이렇
게 이성계는 정권을 장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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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에서 진 최영은 고봉현(지금 경기도 고양)으로 귀양갔다가 처형되고 우왕도 폐위되어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바라보는 견해는 둘로 나뉜다. 이성계가 쿠데타를 목적으로 계
획적으로 단행했다는 시각과 요동 정벌의 무모함을 현실적으로 판단해 단행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
다는 시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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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정황상 이성계가 처음부터 역성혁명을 목적으로 회군을 계획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이성계는 성
공해도 친명파로서 명분을 구기는 일이고, 실패하면 어차피 망하는 것이었다. 어떻든 결과적으로 이
성계는 위화도 회군으로 확실한 권력을 거머쥐게 되었으며, 고려 왕조는 그 존립이 위태롭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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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경을 점령한 이성계와 조민수는 각각 우시중과 좌시중에 오르고, 조준(趙浚), 정도전(鄭道傳) 등 신
진 사류들과 협력해 개혁을 추진해 나갔다. 그런데 최영을 제거하고 우왕을 폐한 후 뒤를 이을 왕을 누
구로 할 것인가의 문제로 조민수와 이성계의 의견이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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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상 초상(1914년, 채용신) :당시 최고의 화가 채용신은 전북 지역에 있던 언양 김씨 집안의 주문에 따라 이 가문의 인물
3인의 초상화를 제작하였다. 채용신 초상화법의 가장 큰 특징은 근대 사진술과 서양화법이 절묘한 반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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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민수는 우왕의 아들 창을 왕으로 옹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이성계는 우왕이 공민왕이 아닌
신돈의 아들이라며 왕씨 일족 중에서 왕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조민수가 국새(國璽)를 맡
긴 공민왕의 정비 안 씨가 우왕의 아들 창(昌)을 왕으로 지목함으로써 창왕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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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성계는 정몽주 등과 함께 이듬해인 1389년(창왕 1)에 창왕을 폐위시키고 고려 20대 왕 신종
의 7세손을 왕으로 등극시켰다. 그가 바로 고려 최후의 왕 공양왕이다. 공양왕 즉위 후 이성계는 우왕
과 창왕을 죽이고 조민수까지 변방으로 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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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고려 조정은 이성계가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공양왕을 세울 당시 이성계를 아예 왕으로 옹
립하자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를 반대하는 조정 신료들을 의식한 이성계가 사양했다.
조준과 정도전, 남은, 이방원 등은 적극적으로 이성계를 왕으로 세우고자 했다.
그리고 마침내 정몽주 등 반대파를 제거한 뒤, 1392년(공양왕 4) 7월에 공양왕을 폐하고 이성계를 왕
으로 세웠다. 30여 년간 전장을 누비며 패할 줄 모르는 무장 이성계가 474년의 고려 역사를 끝내고
마침내 조선(朝鮮)을 건국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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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시대의 흐름을 읽고 정확하고 과감하게 정치적 판단을 할 줄 알았기 때
문이다. 또한 그는 유연한 성품으로 사람을 끌어모으는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그 역시 쿠테타의 주
인공 이었다는 점은 부인할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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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는 즉위 초기에 고려라는 국호를 그대로 사용하고 법제나 여러 사회 제도 역시 고려를 이어받
겠다고 선포했다. 급격한 사회변화가 백성들과 기존 세력들의 반발을 살 것을 우려해서였다. 하지만
고려 왕조와 차별화하면서 새 왕조의 정당성을 꾀하기 위해 유교적 정치이념과 제도들을 정비할 필
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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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1393년(태조 2)에는 국호를 조선(朝鮮)으로 바꾸고, 한양으로 도읍지를 옮길 것을 결정했다.
한양에 궁궐과 도성을 건립하고, 정도전을 중심으로 법 제도와 군사, 재정, 과거 제도와 같은 국가 제
도 전반의 개혁을 단행하도록 했다. 이로써 이성계가 건국한 조선의 기틀이 잡히고 새로운 왕조의 역
사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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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중앙으로는 전 낙수정에서 출토된 범종이 자리를 하고 있네요. 보물 1325호다. 통일신라 양식을 계승한 고려시대
초기의 범종으로 추정된다고 하네요. 이 범종은 전주 낙수정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하며,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반출되
었다가, 1999년 다카하라 히미코씨의 기증으로 고향 땅으로 돌아오게 되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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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실
고대문화실에는 선사시대 문화를 조명하는 선사 분야, 익산 미륵사지 발굴 조사 성과를 집약한 미륵
사 분야, 삼국시대 고분 문화의 성격을 조명한 고분 분야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조사된 해양
제사 유적인 부안 죽막동 제사 유적 분야 등 네 분야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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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실에는 부안을 중심으로 꽃피웠던 고려청자를 비롯한 각종 도자기·불교 미술품, 금속 공예품·조
선시대 임금들의 각종 글씨와 문서 등의 역사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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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역의 특징적인 민속 문화를 조명하기 위한 민속실에는 호남평야를 배경으로 발달해 온 농경문
화·음식 문화·판소리·농악·한지 공예·목기 공예 등이 실물과 모형 자료를 통하여 입체감 있게 전시되
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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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석전실은 서예가로 유명한 고(故) 석전황욱(石田 黃旭, 1898∼1993)을 기리는 전시실로 1999년
아들 황병근이 5,000여점에 달하는 문화재를 기증하여 이루어졌다. 전시실은 240여 점의 전시물로
구성되어 있는데, 석전 선생의 친필서예와 가전되던 고서, 서예, 회화, 간찰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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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의 역사문화실은 문화재들의 의미를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유물의 쓰임새와 모양을 다양
한 모형과 영상자료 등을 이용하여 선사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전북의 역사와 문화를 시대의
흐름에 따라 설명하고 있는 전시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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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밖에 야외전시장에는 전라북도에서 출토된 각종 석조물이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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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자 여행기 이어보기
https://cafe.daum.net/b2345/LKz0/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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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전주시 완산구 쑥고개로 249
(지번)효자동2가 900
운영시간 안내 :3월 ~ 10월
월~금 09:00 ~ 18:00 (매월 마지막주 수요일 21시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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