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121
2월1일[연중 제3주간 토요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youtu.be/5ni2EetN-70
[수원교구 박찬홍 가브리엘(은행동성당 주임) 신부님 집전]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때로 아니 계시는 듯하지만, 반드시 우리 신앙 여정을 굳건히 동반하시는 주님!>
성향이 다른 여러 형제들이 함께 모여 공동체를 이루며 살다 보니 참 재미있는 일들이 많이 생깁니다. 성격이 세상 느긋한 형제가 있는가 하면, 스팀 보일러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급한 형제도 있습니다.
가끔 수도원 건물 화재경보기가 오작동할 때가 있습니다. 크게 알람이 울립니다. 그 순간이 한밤중이라 할지라도 초스피드로 튀어나와 상황을 체크하는 형제들도 있습니다. 반대로 절대 문 밖 한번 내다 보지 않는 형제들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비슷한 광경이 연출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작은 거룻배를 타고 갈릴래아 호수를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
놀랍게도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배의 앞부분을 이물 혹은 선수(船首)이라고 하고, 뒷부분은 고물 혹은 선미(船尾)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그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은 다들 죽는다고 비명을 지르는 와중에, 배의 뒷쪽에 누우셔서, 배개까지 베고 주무시고 계신 것입니다.
기상 상황이 너무 심각해지다보니, 베드로나 요한을 비롯한 성격 급한 몇몇 사도들이 주무시고 계신 예수님을 흔들어 깨웠습니다. 천하태평이신 예수님을 보며 해도 해도 너무하다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마르 4,38)
제자들이 보여준 태도는 참으로 기가막힌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삼라만상의 주인이자 생명의 주관자이신 예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있는데도 제자들은 목숨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미성숙과 불신앙, 몰이해와 두려움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느릿느릿 일어나셔서, 바람을 꾸짖으십니다. 호수를 향해 외치십니다.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마르 4,39)
예수님께서 보이신 기적을 목격한 제자들은, 조금 전 집채만한 풍랑 앞에서 느꼈던 두려움보다 더 큰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도 갈 길이 먼 제자들, 당신을 향한 믿음도 부족하고, 이해의 폭도 넓지 않은 제자들을 향해 크게 나무라십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 4,40)
폭풍을 잠잠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능력이 그분 안에 현존하고 계심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역시 그 옛날 제자들이 갈릴래아 호수에서 겪었던 체험을 고스란히 겪게 됩니다. 이 세상이라는 거친 바다를 항해하는 여정 안에 높은 풍랑과 파도를 수시로 겪게 됩니다.
폭풍우가 다가올 때 마다 우리는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흔들리는 우리 배 안 어딘가에 주님께서 현존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때로 아니 계시는 듯 하지만, 반드시 우리들의 여정에 함께 동반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고통이나 시련 여부에 상관없이 태초부터 지금까지 늘 존재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 앞에 일상적으로 펼쳐지는 다양한 형태의 십자가와 이해하지 못할 현실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우리와 함께 동행하십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86czyfuTF0E
++++++++++++++++++
<신앙을 지키기 위해 핏줄과 나라까지 배신해야 한다면, 그래도 믿을 것인가?>
오늘은 2월 성모 신심 미사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찾아온 어머니와 형제들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라고 하십니다. 아버지 뜻에 인간의 뜻이 경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이 핏줄을 넘어 나라로 확대된다면 어떨까요? 자기 핏줄을 거부한 경우는 매우 많습니다. 광암 이벽 성조는 정약용이 존경하던 친구로서 뛰어난 학식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이벽 성조는 가문의 반대로 아버지로부터 감금당했고 독살당했다고까지 추측되고 있습니다. 이로써 큰 박해가 시작되었고 이에 가담한 정약용도 유배를 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정약용이 두 번째 유배를 가게 된 사유 또한 천주교 때문입니다. 바로 조카 사위인 황사영 때문이었습니다. 황사영은 정말 믿음 때문에 가문은 물론 나라까지도 배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황사영 백서는 조선에서, 1801년(순조 1년) 신유박해 때 천주교 신자 황사영이 중국 로마 가톨릭교회 북경 교구의 주교에게 혹독한 박해를 받는 조선교회의 전말 보고와 그 대책을 흰 비단에 적은 밀서입니다. 황사영은 토굴속에 숨어지내며 정세를 파악하던 중 교회의 머리인 주문모, 정약종, 이승훈, 최창현, 강완숙, 최필공, 이존창, 유황검 형제 등 다수가 처형당했다는 비보를 접합니다.
이에 이런 탄압의 전말을 북경 주교에게 알리고, 주문모 신부가 중국인이라는 사실을 부각해 청나라 조정의 도움을 끌어낸다면 박해를 종식할 수도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여기엔 청나라 종녀 1인을 공주로 삼아 조선 왕과 결혼케 함으로써 국왕을 부마로 만들면 다음 왕은 청국 황제의 외손이 되므로 자연히 청국에 충성을 바치게 될 것으로 생각을 밝혔습니다. 또는 조선을 청나라의 한 성(省)으로 편입시켜 감독하게 할 것, 심지어 조선은 2백 년 이래 평화가 계속되어 백성은 전쟁을 모르니 조선에 배 수백 척과 강한 병사 5~6만 명으로 대포, 군물들을 싣고 와서 선교의 승인을 강력하게 요구할 것과 서양 전교대를 조직하여 와서 선교사의 포교를 쉽게 할 것 등입니다.
백서가 중국에 전달되지 못한 채 1801년 9월 15일에 제천 배론에서 체포되었고 9월 26일에 황사영도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습니다. 국청이 열리고 혹독한 심문을 받은 황사영은 11월 5일에 대역죄로 서소문 밖에서 온몸이 찢기는 능지처참을 당했습니다. 그의 일가족은 물론 종들까지도 피해를 당하였습니다. 또한 황사영이 극형을 당한 다음 날 그의 집을 헐어 버리고 웅덩이를 파서 물이 고이게 했습니다.
황사영이 정약용 형제의 조카사위였기 때문에 사태는 심각했습니다. 노론 벽파의 홍낙안 등은 “천 사람을 죽여도 정약용 하나를 죽이지 못하면 아무도 죽이지 못한 것과 같다.”라며 이번 기회에 정약용을 죽이려 했습니다. 그러나 관련 증거가 나오지 않았고 노론 벽파 내 의견이 갈리면서 극형은 면하게 되었습니다. 정약용은 강진, 정약전은 흑산도로 다시 유배를 떠나야 했습니다.
우리가 만약 정약용이라 생각해봅시다. 기중기를 최초로 이용해 수원성을 만들고 수백 권의 책을 쓸 정도로 국가의 인재였습니다. 그는 분명 고민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가문과 국가를 생각하기로 하고 배교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에게 믿음이 없다고 화살을 돌릴 수 있을까요?
나이팅게일은 간호학이라는 새로운 간호의 비전을 제시한 인물입니다. 그녀 덕분으로 간호 학교들이 최초로 생겼습니다. 부상한 군인의 40%가 사망했지만, 그녀가 간호 시스템을 정비하자 4%로 떨어졌습니다. 문제는 그녀는 아군만 살린 게 아니라 다친 적군도 살려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런 행위는 전쟁에서 역적이 될 수도 있는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생명’ 앞에서 핏줄이나 나라, 이념 따위는 의미를 잃습니다. 아무리 아버지의 원수라고 하더라도 그 사람이 물에 빠져 죽어가고 있다면 바라만 봐야 할까요? 아버지에게 욕을 먹는 한이 있더라도 구하는 게 도리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는 믿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 어떤 가치도 그 믿음에 방해되는 것이라면 경쟁자로 놓아두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바치라고 하시며 로마가 이스라엘을 지배하는 것을 합리화하였습니다. 독립운동가들이 보면 역적이자 매국노라 불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상황에서 굳이 어떤 나라에 지배받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필레몬에게 오네시모라는 도망친 노예를 돌려보내며 주인에게 충실해지라고 권고합니다. 링컨은 노예제도를 폐지해서 존경받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믿음에만 유익하다면 체제는 중요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지금은 너무도 종교가 현세화 되어갑니다. 종교가 가문이나 나라의 뜻에 배치되면 조선시대 때처럼 사교로 박해당합니다. 마치 이 세상이 영원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러나 우리가 영원히 살 세상은 천국이지 이 지상이 아닙니다. 우리에겐 언제라도 이 지상의 핏줄이나 애정, 혹은 나라가 믿음의 발목을 잡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가문의 원수나 매국노라도 불려도 될 용기를 내야 합니다.
세상을 이겨야 합니다. 핏줄이나 나라를 사랑하지 말자는 말이 아니라 참믿음을 잃은 나라는 현세에서부터 지옥이 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런 때마다 생각해야 합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대한독립’이라고 외치면 다음에 나오는 말로 떠오는 단어가 있습니다. 무슨 말일까요? 그렇습니다. ‘만세’입니다. ‘만세(萬歲)’라는 말은 원래 황제에게만 쓰는 단어였습니다. 황제가 영원히 살라는 축복입니다. 황제가 건강해지라는 의미입니다. 황제가 영원히 다스린다는 의미입니다. 만세라는 말을 황제 이외의 사람에게 하면 역모와 역적의 혐의로 죽임을 당할 수 있었습니다. 이 단어가 황제 이외의 곳에서 처음으로 사용된 적이 있습니다. 언제일까요? 1919년 3월 1일 ‘삼일운동’ 때입니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사람들은 거리로 나왔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대한독립 만세!’ 사람들이 말한 대한독립은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아니라, 대한민국(大韓民國)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은 어떤 나라였을까요? 황제가 다스리는 제국이 아니었습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모든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민주주의의 나라입니다. 그 대한민국은 성별로, 빈부로, 세대로, 이념으로, 귀천으로 차별되는 나라가 아니라, 모든 이가 동등한 권리와 책임을 다하는 평등한 나라였습니다. 그런 나라를 꿈꾸었기에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거리로 나와서 ‘만세’를 외쳤습니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의 세상을 꿈꾸었습니다. 만세는 ‘믿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
1784년 이승훈 베드로가 북경에서 세례받으면서 조선의 천주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양반을 중심으로 서학이라는 학문을 연구하면서 천주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유교의 나라, 성리학의 나라였던 조선은 낯선 종교인 천주교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박해하였습니다. 곧 끝날 것 같았던 천주교회가 박해의 엄중한 칼날을 견뎌내고 뿌리내릴 수 있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그것은 엄격한 신분사회였던 조선에서, 평생 노비와 백정으로 지내야 했던 백성들이 천주교회에서 ‘만세’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천주교를 믿으면 노비도, 백정도, 여인도, 장애인도, 서자도 아무런 차별 없이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천주교 안에서는 고귀한 왕족도, 지체 높은 양반도, 가난한 천민도, 백정도, 여인도, 서자도 모두 한 형제요, 자매라고 부를 수 있었습니다. 만세를 꿈꾸었던 많은 신앙인이 재물을 빼앗겨도, 목숨을 빼앗겨도 신앙을 증거할 수 있었고,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되었습니다.
2000년 교회의 역사를 보면 사람들은 교회를 신뢰하였습니다. 교회에서 사람들을 치료하였고, 병원이 시작되었습니다. 교회에서 사람들을 가르쳤고, 학교가 시작되었습니다. 마을의 중심에는 높은 첨탑의 교회가 있었습니다. 밀레의 그림 ‘만종’에서 보듯이 교회의 종소리를 듣고 하루의 일을 마쳤습니다. 신앙이 생활이고, 생활이 신앙이었습니다. 박해의 시련을 겪으면서 ‘교우촌’은 신앙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박해를 피해서 지친 몸을 의탁하는 장소였습니다. 함께 모여서 기도하고, 나누는 장소였습니다. 기도와 생활이 둘이 아니었습니다. 교우촌을 중심으로 많은 성소가 있었습니다. 자녀들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이 영광이었기 때문입니다. 혼인의 조건은 재물, 능력, 학식이 아니었습니다. 세례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세례를 받아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재물, 능력, 학식이 부족해도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2025년입니다. 천주교 신자이기 때문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일을 맡길 수 있을까요? 천주교 신자이기에 믿고 혼인을 시킬 수 있을까요? 천주교 신자이기에 주어진 일을 충실하게 할 거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입니다. 신앙과 생활이 하나가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부족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천주교 신자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충실하게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천주교 신자의 모습에서 어쩌면 ‘양치기 소년’을 보는지 모릅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믿음’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은 장차 상속 재산으로 받을 곳을 향하여 떠나라는 부르심을 받고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떠난 것입니다.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이 외아들을 바치려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죽은 사람까지 일으키실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가장 소중한 것까지도 봉헌하는 믿음입니다. 죽음의 골짜기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입니다. 믿음 때문에 가진 것을 빼앗길 수 있고, 믿음 때문에 건강을 잃어버릴 수 있고, 믿음 때문에 목숨을 바칠 수 있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믿음입니다.
“하느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네.”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가셨던 예수님을 봅니다. 묵묵히 그분의 십자가를 지고 갔던 시몬을 봅니다. 예수님 얼굴에 흐르던 피와 땀을 닦아 드리던 베로니카를 봅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주님 저를 기억해 주세요.’라고 했던 죄인을 봅니다. 믿음은 함께 할 때 현실이 되고, 함께 할 때 비로소 이루어집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삼의딸들수녀회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님]
오늘 독서와 복음은 믿음에 대하여 말합니다. 때때로 믿음은 우리에게 오감과 경험으로 인지하는 것을 넘어서게 합니다. 부르심을 받고 믿음으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떠난”(히브 11,8) 아브라함과, 아이를 가질 수 없고 나이까지 많음에도 믿음으로 아들을 낳은 사라가 전형적인 예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호수 저쪽”(마르 4,35)으로 건너가자고 초대하십니다. 군중을 가르치시면서 하루를 보내신 뒤 피곤하시어 돌풍으로 요동치는 배 안에서까지 곤히 주무시면서도 왜 예수님께서는 그냥 머무르시던 자리에서 쉬시지 않고 늦은 시간에 굳이 ‘호수 저쪽’으로 가자고 하셨을까요? 그 이유가 무엇이든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것을 요구하셨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호수 저쪽’으로 부르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새로운 삶, 공동체의 쇄신, 새로운 임무를 향하여 익숙하고 안정된 현실을 떠나 돌풍이 몰아치는 밤에 위험을 감수하고 떠나라며 부르시는 경우입니다. 그때 요구되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주님 말씀에 대한 신뢰, 특히 그분께서 그 위험 속에서도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믿음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 하나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호수 저쪽으로 떠난 이유는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도성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히브 11,10)입니다. 믿음의 본질은 현실을 부정하거나 인간적인 것을 무시하는 데 있지 않고, 영원한 궁극적 가치를 향하는 데 있습니다. 구약의 성조들은 “더 나은 곳, 바로 하늘 본향을 갈망”(11,16)하였다고 히브리서의 저자가 밝혀 주는 대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과연 그 믿음대로 “그들에게 도성을 마련해 주셨습니다”(11,16).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4,35-41: 풍랑을 가라앉히시다.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35절) 여기서 저쪽이라고 하면 지상의 것에서 천상의 것으로, 현재의 것에서 미래의 것으로 건너가자는 말씀이다. 하느님의 것은 당신을 따르는 이들을 덕을 향하게 하므로, 호수 저쪽으로 건너갈 필요가 있다.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37절)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38절). 주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는 동안에도 제자들을 시험하신다. 주님께서 깨어나시어 호수를 꾸짖으시자 돌풍이 잔잔해졌는데, 호수를 꾸짖으신 분은 피조물이 아니라, 창조주시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이렇게 그들이 구원되어 주님의 기적을 증언하고 있다. 주님께서는 주무시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분은 우리와 함께 계시며 구원해 주시는 분이다.
예수님은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신다. 그 모습은 아무 힘없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무덤에 묻히신 분을 연상케 한다. 예수님의 모습과 아우성을 치는 제자들의 모습은 대조적이다. 그분은 그들을 두려움 속에 내버려 두신 채 주무신다. 닥쳐올 일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도록 그들의 감각을 날카롭게 하려는 뜻이었다.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39절) 그러자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39절) 이렇게 하느님의 능력을 갖추신 분이 누구신지를 제자들은 이 풍랑의 기적에서 읽을 줄 알아야 한다. 인간을 죽음의 위협에서 구출해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이처럼 교회와 신앙인은 끊임없이 위협을 받는다. 우리는 모든 삶의 모든 사건 안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어야 하고, 그분의 현존과 그분의 능력을 읽을 수 있는 눈이 필요하다. 많은 경우 우리는 우리에게 닥치는 조그만 풍랑에도 절망하며, 원망하고 그분을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 이러한 자세가 아니라, 주님께 우리 자신을 맡기고 그분을 의지하는 마음이 필요할 것이다.
=====================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그날 저녁이 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 하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들이 군중을 남겨 둔 채, 배에 타고 계신 예수님을 그대로 모시고 갔는데, 다른 배들도 그분을 뒤따랐다. 그때에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로 말하였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마르 4,35-41)
1)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바람과 호수까지도(자연계까지도) 지배하시고 복종시키시는 주님”이라는 증언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죽게 되었다고 무서워하는 제자들의 모습과 편안하게 주무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너무나도 대조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주무신 것은 제자들의 상황을 모르셨기 때문도 아니고, 관심이 없었기 때문도 아닙니다. 바람과 파도 때문에 고생은 조금 하겠지만, 그것 때문에 제자들이 죽거나 다치는 일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눈앞의 위험만 보고 있지만, 주님이신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보고 계시고 다 알고 계십니다.
<나중에 최후의 만찬 때, 제자들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저희는 스승님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누가 스승님께 물을 필요도 없다는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이로써 저희는 스승님께서 하느님에게서 나오셨다는 것을 믿습니다."(요한 16,30)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그러나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온다."(요한 16,31-32)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기 전까지는, 제자들의 믿음은 아직도 부족한 상태였고, 부활, 승천, 성령 강림 후에 믿음이 완성됩니다.>
2) 제자들은 죽게 되었다고 무서워하면서 예수님을 깨웠다가 믿음이 부족하다고 혼났지만, 나중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로 강한 믿음을 갖게 됩니다.
“헤로데가 베드로를 끌어내려고 하던 그 전날 밤, 베드로는 두 개의 쇠사슬에 묶인 채 두 군사 사이에서 잠을 자고 있었고, 문 앞에서는 파수병들이 감옥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더니 감방에 빛이 비치는 것이었다. 천사는 베드로의 옆구리를 두드려 깨우면서, ‘빨리 일어나라.’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의 손에서 쇠사슬이 떨어져 나갔다."(사도 12,6-7)
사형 집행 전날 밤인데도 베드로 사도는 아주 태평한 모습으로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 모습은 주무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닮았습니다. 천사가 옆구리를 두드려서 깨울 정도로 베드로 사도가 깊이 잠들어 있었다는 것은,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음을 나타내고, 또 ‘믿음의 완성 단계’에 도달했음을 나타냅니다.
3) 복음 말씀의 이야기를 해석할 때, “예수님께서 지켜 주시니 우리는 죽지 않는다.”라고 해석하거나, “예수님께서 항상 우리를 지켜 주시고, 죽지 않게 해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라고 해석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너무 단순하고 초보적인 해석입니다.
<혹시라도 “믿음이 있으면 죽을 위험에서도 살아난다.”라고 해석한다면, 그것은 잘못 해석하는 것입니다.>
여객선 침몰이나 비행기 추락으로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은 사고들의 경우를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켜 주시지 않아서 그런 사고가 생겼을까? 그 사고로 목숨을 잃은 이들은 전부 다 믿음 없는 사람들이었을까? 예수님께서 사랑하시지 않은 사람들이었을까? 그런 사고를 당해도 죽지 않고 사는 것만이 주님의 뜻일까?
물론 그런 사고로 죽는 것 자체가 주님의 뜻일 수는 없습니다. 어떻든 무슨 병에 걸렸을 때나 어떤 사고를 당했을 때 ‘주님의 뜻’이라는 말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이라는 말도 너무 남용하면 안 됩니다.
4)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가운데에는 자신을 위하여 사는 사람도 없고 자신을 위하여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로마 14,7-8)
베드로 사도가 사형 집행을 앞두고서도 태평하게 잠을 잔 것은 ‘자포자기’도 아니고, 반드시 살아난다고 믿었기 때문도 아니고, 살고 죽는 것을 모두 주님께 맡겼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생사를 초월한 모습입니다.
죽는 것보다 사는 것이 좋은 일이지만, 항상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생사의 갈림길에 섰을 때, 주님께서 원하시면 살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냥 그대로 데려가시는 것이 주님의 뜻일 수도 있습니다. 신앙인은 육신의 목숨이 아니라(‘무병장수’가 아니라) 영혼의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고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배를 타고 가는 제자들과 예수님의 이야기는 내용에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모든 복음서에서 공통으로 전하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기도 하고, 나중에 그분께서 제자들에게 다가오시기도 하지만 배를 탄 제자들은 그들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곤경에 빠집니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 심한 풍랑을 겪는 가운데, 예수님께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시어 문제가 해결됩니다. 오늘 복음도 이러한 예수님의 능력을 보여 주는데, 그것만이 복음이 전하고자 하는 핵심 내용은 아닙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말씀은 의미심장합니다. 이 말씀은 바람과 파도에 겁을 먹은 제자들을 꾸짖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이 오늘 이야기에만 적용되지는 않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것이기도 합니다.
마르코 복음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기쁜 소식을 제자들이 믿지 못하였다는, 믿으려 하지 않았다는 슬픈 결말을 보여 줍니다.
제자들은 마리아 막달레나와 길을 가던 두 제자가 전하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16, 11.13 참조) 또한 복음은 가장 처음 부활을 목격한 여인들도 “두려워서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다.”(16,8)라고 전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받아들이고 믿기보다 두려움이 훨씬 더 컸습니다.
부활은 합리만으로 결코 이해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 용기는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다는 것을 깨닫고 체험할 때 생겨날 수 있습니다.
=====================
[원주교구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
오늘 독서에 나오는 “도성”은 공동체적 구원과 관련 있습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는 회칙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에서 우리의 시선이 기쁨의 원천인 사랑 그 자체이신 하느님을 향하게 하려면 ‘나’의 감옥에서 벗어나 ‘우리’ 안에 일치되어야 함을 강조하십니다.(14항 참조)
주님께서 마련하신 도성은 그리스도교의 구원이 개인주의적이지 않듯, 한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알려 줍니다. 인류 일치의 파괴, 붕괴와 분열을 죄로 보던 교부들은 신자들이 공동체 안에 다시 모이는 일치의 재건을 구원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과 함께 있는 배 안에서, 제자들은 거센 돌풍이 일어 배에 물이 거의 가득 차게 되자 겁을 내고 우왕좌왕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자 그분께서는 모든 것을 평화롭게 만드시고, 믿음이 없는 제자들을 나무라십니다.
마르코 복음서에서 말하는 이 “믿음”은 예수님과 그분께서 행하시는 하느님의 권능에 대한 믿음을 가리킵니다. ‘나’의 감옥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한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있는 ‘우리’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여 구원을 깨닫지 못합니다.
주님께서는 요동치는 바다와 같은 사탄의 유혹을 당신 말씀으로 무력하게 만드시기도 하셨고(마르코 복음 1장 13절 참조), 더러운 영을 꾸짖으시며 조용히 하라고 말씀하시기도 하셨습니다.(마르코 복음 1장 25절 참조)
우리는 일상에서 요동치는 바다와 같은 어려움을 만나면 주님께 살려 달라고 청합니다. 그러나 그러기 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며, 이 믿음은 ‘나’만을 살리는 믿음이 아닌 ‘우리’를 살리는 믿음을 전제로 해야 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
[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코 4,40)
우리가 가지는 감정 중 하나인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정상입니다. 그러나 쓸데없이 많은 두려움 때문에 해야 할 일도 못하게 하는 공포심은 우리 삶에 걸림돌이 됩니다.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것을 우리가 두려워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신뢰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신뢰하지 못하면 경계심이 생기고, 경계심은 우리 안에 있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경직된 인간관계는 사람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옵니다. 경직된 인간관계를 되풀이되면, 두려움과 불신은 악순환이 됩니다.
두려움은 우리 내면에 불신의 상처가 있기 때문입니다. 태어나서 18개월까지는 보통 아기가 세상과 사람에 대한 기초 신뢰를 배우는 시기인데, 이때 아기가 심한 충격을 받으면 불신을 배운다고 에릭 에릭슨은 말합니다.
사람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겪은 불신의 아픔을 다시 겪지 않으려고 자신을 보호하려는 무의식적인 방어기제 입니다. 이때 그 두려움은 우리가 회피할수록 점점 더 우리 안에서 커지게 됩니다.
두려움을 회피하여 생기는 용기는 없습니다. 용기는 우리가 두려움을 직면하고 바라보고 수용할 때 조금씩 생기게 됩니다.
두려움은 우리가 느끼도록 자신에게 허용하고,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그 정체를 알고 수용해야 사라지게 됩니다.
두려움을 모르는 용기는 때로 무모한 용기가 되기도 하지만, 두려움을 알고 직면 할때, 우리는 슬기롭고 진정한 용기를 가지게 됩니다.
두려움을 회피하거나 거부하면 걱정만 하지만, 두려움을 수용하면 지혜로운 용기를 우리가 가지게 됩니다.
사람을 믿지 못해서 가지는 두려움은 사랑스런 관계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은 괴물이 아니라, 주님의 모습을 닮은 사람입니다.
사람을 두려워한다면, 그것은 아직도 떨고 있는 내면의 아기를 자신이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진정으로 믿을 때, 우리는 두려움을 모릅니다. 어린 시절 우리가 하느님처럼 여기던 부모님에게 받은 신뢰와 평화의 경험은 성장 후 주님을 믿는 디딤돌이 되지만, 불신의 상처는 자주 걸림돌이 됩니다.
믿음의 성조인 아브라함의 굳은 믿음으로 100세가 되어도 아들을 가져 수없이 많은 자손들이 번창하였습니다. 불신을 벗어 버리고 오늘은 더 깊은 믿음을 청하는 날입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9년, 호주 전역에 대형 산불이 났습니다. 산불이 나자마자 어떤 사람이 100만 호주달러(약 8억 5천만 원)를 구호 기금으로 내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이 발표로 사람들은 이 기부자에게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칭찬을 받았을까요?
아니었습니다. 그는 가차 없이 엄청난 뭇매를 맞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기부자의 이름 때문입니다. 그가 바로 아마존 CEO로 최고 부자인 제프 베조스이었거든요. 그가 기부한 돈은 그가 5분마다 버는 금액이라고 합니다. 일반 사람에게는 분명 적지 않은 돈이지만, 그가 버는 돈에 비할 때 너무나 성의 없는 기부였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 제프 베조스와 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이 정도면 충분하다면서 봉헌하는 모습, 자기 어려움이 더 크다면서 누릴 것 다 누리고 나서 봉헌하겠다는 모습, 세상을 도울 힘이 있음에도 상관없다는 듯 외면하는 모습 등등….
할 수 있음에도 하지 않는 것은 주님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모습이 아닙니다. 실제로 우리는 주님께 많은 것을 받고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과 은총이 우리 삶 안에서 계속 주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감사하기보다는 당연히 누려야 할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감사하지도 못하고, 주님의 계명인 사랑 실천에 늘 소극적인 것입니다. 혹시 사랑을 입으로만 외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과 제자들이 호수 건너편으로 배를 타고 건너고 계셨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지요.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된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자들의 행동은 무엇이었을까요? 예수님을 깨우면서 말합니다.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마르 4,38)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보여주셨던 기적을 떠올렸다면 그래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렇게 불안에 떨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겁을 내고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 4,40)
이 상황에서 제자들의 노력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냥 예수님께 무엇이든 다 해 달라는 식입니다. 제자 중에는 어부 출신이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탓만 하는 제자들이었던 것입니다.
할 수 있음에도 하지 못하는 이유를 찾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믿음에 우리의 노력을 더 해서 주님의 일을 이 세상에 할 수 있어야 합니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함께>
마르코 4,35-41 (풍랑을 가라앉히시다)
그날 저녁이 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 하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들이 군중을 남겨 둔 채, 배에 타고 계신 예수님을 그대로 모시고 갔는데, 다른 배들도 그분을 뒤따랐다. 그때에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로 말하였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함께>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하고 말하였다.”(마르 4,38)
나는
이렇게 외롭고
이렇게 아프고
이렇게 힘들고
이렇게 절망적인데
당신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나는
늘 그렇게
바로 네 곁에서
너와 함께 아파하고
너와 함께 힘들어해도
너와 함께하니 든든하고
너와 함께하니 희망적인데
너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믿음의 사람이 되어라>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배 안에 있었는데 마침 거센 바람이 일었습니다. 배 안으로 물이 들이쳐서 위험에 처해 있는데도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마르 4,38) 하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의 믿음의 수준을 드러내 줍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웠지만, 사실은 깨어나야 할 사람은 제자들입니다. 거센 돌풍을 잠재우실 능력의 예수님과 함께하면서도 주님이 계시지 않은 것처럼 사는 이 연약한 믿음의 삶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배를 함께 탄 것은 운명을 같이하겠다는 동의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돌풍이라는 환난이 옴으로써 그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결국 처음에 가졌던 순수한 마음을 잃어버린 탓입니다. 제자들은 그 믿음을 회복해야 했습니다. 우리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돌풍이 이는 바람과 호수를 향해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 4,40)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나와 함께 있는데 왜 무서워하느냐? 아직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신뢰하지 못하느냐?”는 질문입니다. “세상의 풍파에 조급하게 허둥대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이신 당신께 온전히 의탁하시길 원하십니다.” 그러니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믿음을 간직하고 희망을 접지 마십시오. 폭풍 속에서도 주님은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는 능력으로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걱정을 그분께 내맡기십시오.그분께서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1베드 5,7) “당신은 그분의 것이고 그분은 당신을 잊지 않으십니다.”(십자가의 성 요한)
우리는 일상생활 안에서 겪는 여러 어려움 속에서 주님이 함께하신다면 왜 이런 시련과 고통을 주느냐고 원망할 때도 있고, 예수님을 믿어서 나아진 게 무엇이 있느냐고 하소연할 때도 있습니다. 요즘 반복되는 비행기 사고를 보면서 하느님의 손길은 어디 있는가? 의문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정말 침몰의 위기에 처한 배에서 주무시던 모습 그대로인 것 같아 야속하기 한이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도대체 무엇을 하시고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열심히 살려고 애쓴 이들은 버려두고 제멋대로 사는 사람은 더 누리고 사니 속이 불편합니다. 그래도 당신의 안배와 섭리를 믿어야 하나요? 사람의 부주의가 가져오는 피해가 너무도 큽니다.
인간의 힘만으로는 두려움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어둠의 세력을 이길 수 있습니다. 집회서를 보면, “주님께서 이루신 모든 위업은 너무나 훌륭하고 그분의 모든 분부는 제때에 이루어지리라. 아무도 ‘이게 무어냐? 어찌 된 일이냐?’고 말해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은 제때에 풀리기 때문이다. 그분의 말씀으로 물이 모여들고 그분의 말씀 한마디로 그 물이 저수지가 된다. 그분께서 명령하시면 뜻하시는 바가 모두 이루어지고 아무도 그분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막지 못한다.”(집회 39,16-18)고 적혀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확고히 믿고 겁내지 말며 우리에게 다가오는 어려움을 이겨냅시다. 주님과 함께!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서울대교구 함승수 세례자요한 신부님]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배를 타고 갈릴래아 호수를 건너가던 중 갑작스레 불어닥친 돌풍을 맞닥뜨리게 됩니다. 원래 갈릴래아 호수는 저녁 때가 되면 기온이 떨어져서 육지에서 호수 방향으로 바람이 부는데, 이 때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만나 강한 돌풍이 형성될 때가 있지요. 이 돌풍에 한 번 휩싸이면 배가 부서지거나 뒤집혀서 호수 밑으로 가라앉을 위험이 있었기에 어부들은 왠만하면 저녁 때에는 호수 깊은 곳까지는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무서운 돌풍을 만났으니 제자들이 느꼈을 당혹감과 두려움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갑니다. 배가 당장이라도 뒤집힐 듯이 휘청거리고 배 안으로 많은 양의 물이 들이치는 상황에, 직감적으로 ‘이러다 다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고 그래서 황급히 주님을 깨워 살려달라고 매달렸을 겁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 죽음을 두려워하는 건 믿음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죽음이 두려우면 마음 속에 자연스레 생기는 것이 ‘생존 욕구’이지요. 하느님께서 나에게 생명을 주시면서 맡기신 소명, 즉 삶을 사는 동안 실현하고 이뤄내야 할 의미와 목표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그저 생물학적으로 ‘살아남는’ 것에만 집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믿음도 신념도 다 내팽개치고 욕망에 휘둘리며 살게 됩니다. 하느님 뜻을 거스르는 죄를 지어 그분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정신 바짝 차리라고 그들 앞에서 큰 소리로 호통을 치십니다.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를 나무라셨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사실 바람이나 호수는 잘못한 것이 없지요. 하느님의 섭리에 따라 제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예수님이 실제로 꾸짖으신 것은 당신과 함께 있으면서도 제 안위를 먼저 걱정했던 제자들의 이기심과 세속주의였습니다. 그분께서 나무라신 것은 고통과 시련을 이겨낼 힘과 용기를 청할 생각은 하지 않고 그것을 해결해달라고 주님을 닥달하기만 했던 제자들의 나약함과 수동적 태도였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그들의 마음 속에 아직 주님께 대한 참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과 오랜 시간 동안 동고동락하며 그 많은 가르침을 듣고 그 많은 기적들을 보았음에도 그들의 믿음은 한 뼘도 자라지 않았던 것이지요.
마음 속에 참된 믿음을 지닌 사람은 “주님과 함께라면” 아무 것도 두려워하거나 걱정하지 않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간직한 채로 조용하고 차분하게 주님께 기도하면서, 모든 상황이 그분 뜻에 따라 좋은 방향으로 흘러갈 것을 굳게 믿지요. 외적인 상황이나 조건이 당장 변하지 않아도, 내 마음가짐이 변하면 그 때부터 내 삶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니 시련과 고통의 거센 풍랑을 만나면 시편 작가처럼 주님께 믿음의 기도를 드려야겠습니다. “제가 비록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니 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막대와 지팡이가 저에게 위안을 줍니다.”(시편 23,4) 모든 걱정과 근심, 두려움을 주님께 내어 맡기십시오. 내가 느끼지 못하는 순간에도 주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를 돌보고 계십니다.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비유들을 통해서 하늘나라에 대해 가르치시고, 저녁이 되자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마르 4,35)
저녁이 되어 어둠이 닥쳐오는데도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도 저녁이었습니다. 그리고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는 ‘새로운 출애굽’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어둠을 가르고 나아가는 이 여행에 거센 돌풍이 일고,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쳤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가지만, 동시에 온갖 환란과 위험과 함께 갑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십니다. 제자들의 위험에 수수방관으로 그냥 침묵하고 계십니다. 제자들이 죽게 되었는데도 말입니다.
대체, 예수님의 이 침묵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 예수님의 이 침묵은 믿음이 흔들리는 순간이지만, 동시에 믿음이 요청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사실 풍랑 속에서 주무신다는 것은 아버지께 대한 ‘전적인 신뢰’를 나타냅니다. <시편> 작가는 노래합니다. “자리에 들자마자 단잠이 깊사오니 든든히 살게 하심 홀로 주님 덕이오이다.”(시편 4,9). 그러니 이는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전적으로 아버지께 신뢰를 두고 계시는 당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실, 잠들어 있는 이는 예수님이 아니라, 바로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현존에 깨어있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이 바로 잠들어 있는 이들인 것입니다. 그러니, 막상 깨어나야 할 이들은 제자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하느님께서 우리의 청에 응답해주지 않으신다고 투덜대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가 우리가 잠들어 있을 때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바로 그 때가 현존하신 그분께 의탁하고 믿음으로 응답해야 할 때임을 말입니다. 시편작가처럼, 주님께서 “뒤끓는 바다를 호령하시고 솟구치는 물결을 붙잡으시는 분”(시 88,9-10)이심을 믿고 의탁해야 할 때입니다. 그것은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나, 주님께서 ‘함께 계시며 동행하심’에 대한 믿음과 의탁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불신을 깨우쳐주시고, 당신께서 하느님이심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곧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마르 4,39)하시며 광풍을 잠재웁니다. 우리의 온갖 두려움과 걱정과 불신을 잠재우시고, 믿음으로 깨우십니다. ‘새로운 출애굽’을 통해 어둠을 건너, 새로운 생명으로 이끄십니다.
사실, “예수님의 침묵”은 나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의미합니다. 마치 십자가에서의 “아버지의 침묵”이 예수님께 대한 믿음과 신뢰였듯이 말입니다. 바로 이 믿음이 예수님께서 그 거센 돌풍 속에서도 간직할 수 있었던 평화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 4,40) 하시며 제자들의 믿음을 일깨우십니다.
그러니 우리도 <시편>작가처럼 ‘함께 계시는 주님’께 믿음의 노래를 불러야 할 일입니다. 주님, “비록 죽음의 그늘진 골짜기를 간다 해도, 당신 함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나이다.”(시 22,4) 아멘.
----------------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 4,40)
주님!
잠들어 있는 이는 당신이 아니라 저 자신입니다.
깨어나야 할 이는 당신이 아니라 저 자신입니다.
당신이 함께 계시건만 불신으로 제가 두려워합니다.
주님, 풍랑을 맞아 가라앉으면서야 비로소 제가 키잡이가 아님을 봅니다.
풍랑 속에서 잠들어 계셔도 바람과 호수를 복종시키시는 분,
당신이 저의 주님이십니다.
당신은 주무셔도 주님이시오, 깨어 계셔도 주님이십니다. 아멘.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믿음의 여정, 믿음의 전사>
-“믿음이 답이다”-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주님께 노래하여라, 온 세상아.”(시편96,1)
다산어록 2월 주제는 형창설안(螢窓雪案)으로, ‘책상 안 반딧불과 창밖의 눈빛을 등불 삼아 공부한다’는 뜻으로 갖은 고생을 다해 가며 학문을 연마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공부란 환경에 굴하지 않는 꾸준함’이란 뜻으로 이런 공부야말로 한결같은 믿음의 자세를 뜻합니다. 옛 현자의 말씀이 깊은 묵상자료가 됩니다.
“시는 시대의 진실한 울음이다. 우리는 시를 닮기 위해 시를 읽는다.”<다산>
“시경(詩經)에 있는 시삼백편의 시를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생각이 거짓이 없다’는 것이다.”(詩三百 一言以幣之 曰 思無邪)<논어>
새롭게 마음에 와닿는 참신한 말마디입니다. 영혼에 깊은 울림을 주는 시들이야 말로 그대로 구원입니다. 사랑하면 누구나 시인이 되기 마련입니다. 우리 수도자들이 평생 날마다 끊임없이 공동 시편성무를 기도로 바치는 ‘믿음의 훈련’은 얼마나 믿음생활에 큰 축복인지요!
역시 믿음의 훈련, 믿음의 습관화입니다. 제 평생 정주수도생활에 항구할 수 있도록 결정적 도움을 준 것도, 힘들 때 마다 선물처럼 찾아 와 믿음을 북돋아 준 '반가운 손님’과도 같은 무수한 자작시自作詩들 덕분임을 깨닫습니다. 두 짧은 애송 자작시 나눔입니다.
“나무에게
하늘은
가도가도 멀기만 하다
아예
고요한 호수가 되어
하늘을 담자!”
“밖으로는 산
천년만년 님기다리는 산!
안으로는 강
천년만년 님향해 흐르는 강!”
오늘 강론 주제는 믿음입니다. 믿음보다 수행생활에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참으로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불신불립, 믿음이 없으면 도대체 설수 없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도대체 불안과 두려움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돈을 잃으면 조금 잃는 것이요, 건강을 잃으면 많이 잃는 것이요, 믿음을 잃으면 전부를 잃는 것입니다. 인간관계에도 한번 신뢰를 잃으면 회복하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렵다해도 신뢰를 받는 믿음의 사람은 선한 이웃의 도움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믿음’을 주제로 한 제1독서 히브리서 11장은 정말 장관입니다. 40절까지중 일부를 다루지만 마치 믿음의 찬가처럼 들립니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믿음의 전사들의 실화를 읽다보면 우리도 저절로 용기백배, 믿음의 전사가 된 기분입니다. 수도원 제 주변에는 이런 ‘믿음의 장군’같은 자매님들이 많습니다. 또 우리 가톨릭교회는 믿음의 순교자들이 참 많습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이런 믿음의 도반들이 우리의 믿음 생활에 큰 도움이 됩니다. 오늘 제1독서 히브리서 내용을 일부 소개합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 사실 옛 사람들은 믿음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곧 이어 믿음으로 살았던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요셉, 모세, 창녀 라합, 무수한 판관들 이름들이 하늘의 별처럼 떠오르고 이 계보는 가톨릭교회를 통해서도 오늘까지 면면히 계승됩니다. 오늘 히브리서는 특히 아브라함의 믿음을 강조하며 결론같은 다음 말마디가 깊은 감동을 줍니다. 믿음의 선배들의 실상을 대하는 느낌입니다.
“이들은 모두 믿음 속에 살다가 믿음 속에 죽어갔습니다.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하였지만 멀리서 그것을 보고 반겼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은 이 세상에서 이방인이며 나그네일 따름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본향을 찾고 있음을 분명히 드러냈습니다. 실상 그들은 더 나은 곳, 바로 하늘 본향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향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는’(homesick at home) 역설적 존재의 인간임을 깨닫게 되고, 이런 깨달음은 더욱 하느님을 찾게 하니 ‘믿음의 여정’에 큰 도움이 됩니다. 오늘 복음은 저절로 타고난 믿음이 아님을 깨닫게 합니다. 거센 돌풍속 호수 한복판 예수님과 제자들이 타고 있는 배가 풍전등화의 위기상황입니다. 흡사 세상바다를 항해여정중의 교회공동체는 물론 다양한 공동체들을 상징합니다.
얼마나 많은 공동체란 배들이 세상 바다의 격랑 속에 조난당하거나 파선당하는지요! 이런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가득 차게 되었는데도 예수님께서는 천하태평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십니다. 문제는 외부의 풍랑이 아니라 내면속 마음의 풍랑입니다. 제자들의 내면은 그대로 공포와 두려움에 혼비백산 혼란상태인데, 반면 예수님은 지극히 침착한 모습에 내적고요를 누리시니 참으로 깊은 믿음을 반영합니다. 제자들의 반응과 주님의 응답이 대조적입니다.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예수님은 깨어 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Be silent! Be still!) 명령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집니다.
그대로 하느님의 현존인 예수님은 하느님의 위력을 발휘합니다. 이런 예수님을 곁에 두고 믿음 부족으로 경거망동하는 제자들입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Why are you afraid? Have you still no faith?)
그대로 믿음 약한, 믿음 없는 우리들을 두고 하는 말씀같습니다. 제자들은 아직도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로 묻습니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우리가 평생 믿음 생활에 화두로 삼고 살아야할 물음이자 예수님이심을 깨닫습니다.
애당초 타고난 믿음은 없습니다. 믿음의 여정중에 주님과 날로 사랑의 일치가 깊어지면서 믿음도 날로 성장, 성숙되어갈 것이며, 언제 어디서나 주님 안에서 내적고요와 평화를 누릴 것입니다. 복음의 제자들 역시 이런 구사일생의 체험이 믿음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이 됐을 것입니다. 탓할 것은 주님이 아니라 우리의 부족한 믿음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의 믿음을 북돋아 주시어 성공적 믿음의 여정을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찬미받으소서,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 주님은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네.”(루카 1,68) 아멘.
=====================
[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잠자고 계신 것이 아니라 잠자코 계신>
오늘 독서와 복음은 떠남이 공통입니다. 독서는 아브라함의 떠남이고 복음은 제자들의 떠남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떠남은 떠나라는 주님의 명령에 따른 혼자 떠남이고, 제자들의 떠남은 같이 떠나자는 주님의 권유에 따른 같이 떠남입니다.
어쨌거나 아브라함의 하느님이나 제자들의 주님은 왜 그들을 가만 놔두지 않습니까? 왜 굳이 떠나라고 하는 것입니까?
왜 조용히 살게 또 편하게 살게 내버려 두지 않는 겁니까? 며느리 편한 꼴을 못 보는 고약한 시어머니처럼 인간의 편한 꼴을 못 보는 분이시기 때문입니까?
그런 분이 아니라고 믿는다면 그리고 우리의 행복을 위한 분이라고 믿는다면 그것은 그것 곧 떠나는 것이 우리의 피할 수 없는 인생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살다 보면 이사 가야 할 때도 있고, 아예 이 세상을 떠나 저세상에 가야 할 때도 있지요.
오늘 히브리서는 본향을 얘기합니다. 본향이라면 어디입니까? 고향일까요?
고향이 이 세상에서 돌아갈 곳으로서의 고향이라면 본향은 고향이 아니고 저 하늘 본향을 말함이고 그래서 히브리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자기들은 이 세상에서 이방인이며 나그네일 따름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함으로써 자기들이 본향을 찾고 있음을 분명히 드러냈습니다. 만일 그들이 떠나온 곳을 생각하고 있었다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 그들은 더 나은 곳, 바로 하늘 본향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본향이 다시 돌아갈 고향이라면 왜 떠나고, 하느님께서는 왜 떠나라고 하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인이라면 떠나는 것은 우리의 인생이고, 우리 정체성은 이 세상에서 이방인이고 천국의 나그네입니다.
며칠 전 티브이에서 명사와의 대담을 봤는데 얘기 중에 자기는 신의 존재나 초월을 믿지 않는다고 공공연히 얘기하였습니다.
부모 없는 자식들이 찾아가야 할 곳이 없고 고향이 없듯이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갈 곳이 없고 본향도 없으며. 그들은 이 세상에서 이방인도 천국의 순례자도 아니겠지요.
그러므로 오늘 제자들이 주님과 함께 호수를 건너다가 풍파를 만난 얘기도 이 세상을 떠나 저세상으로 가는 우리의 인생 여정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하느님과 달리 제자들의 주님은 여정에 함께하십니다. 그리고 그런데도 도중에 풍랑을 만나고,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잠만 자고 계십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으면 다시 말해서 세례를 받아 신자가 되면 사는 동안 아무 풍랑이 없을 것을 기대하며 주님을 믿습니다. 그런데 오늘 얘기는 그렇지 않음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그리고 풍랑을 만나 고생고생하는데도 잠만 자고 계십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중에도 이런 주님을 곧잘 만납니다.
내가 엄청난 곤경에 처했는데도 주님께서는 나와 함께 계시지 않거나 잠만 자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보면 그런 것이 아닙니다. 잠자고 계신 게 아니라 잠자코 계셨던 겁니다.
왜?
더 큰 갈망으로 주님을 찾도록. 천국의 순례는 꼭 주님과 함께 그리고 주님을 따라서 가도록.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며 말씀하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마태12,49)
<참제자이신 어머니!>
오늘 복음(마태12,46-50)은 마태오 복음 사가가 전하는 '예수님의 참가족'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을 두고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마태12,48) 하고 반문하시면서,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이 바로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2월의 첫 토요일인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 신심 미사가 거행되는 날'입니다. 우리가 성모님을 기리며 미사를 드리는 이유는 누구보다도 성모님이 예수님을 끝까지 따랐던 제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런 성모님의 모범을 본받아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기 위함입니다.
성모님의 이 따름은 '성령으로 인해 이루어진 예수님의 잉태를 받아들이는 그 순간부터 시작된 따름'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의 모든 움직임과 말씀에 함께 했습니다. 예수님의 기쁨과 아픔에 온전히 함께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모님의 위대함'이며, '성모님을 공경하면서 성모님의 성덕을 따라가려는 이유'입니다. 성모 엄마의 이 온전한 따름의 결과가 '부활이고 승천'이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믿고, 성모 엄마를 공경하면서 따라가고 있는 우리의 목적 또한 '부활이고 승천'입니다. '언제나 지금 여기에서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부활하는 것이 신앙인의 목적'이고, 마침내는 '하늘에 마련된 영원한 생명이 있는 곳으로 승천하는 것이 또한 신앙인의 목적'입니다.
날마다 성모 엄마의 전구의 힘으로 이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하느님의 참제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입으로 생각으로만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성모 엄마처럼 몸과 마음으로 온전히 예수님을 따라가는 참제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입으로 떠들지 말고 성모 엄마처럼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면서 곰곰이 되새겨보는 참제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 4, 40)
믿음으로
사는 법을
다시 배우는
시간입니다.
호수와
바람이 있기에
배는
움직일 수
있습니다.
돌풍 속에서도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시련이 전하는
말들을
알아듣지
못하는
우리 마음을
되돌아봅니다.
수시로 변하는
변덕스러운
우리의 마음을
예수님께서
꾸짖으십니다.
잠잠하고
조용해야 할
우리들
마음입니다.
받아들여야 할
우리의
현실뿐만 아니라
현실에서 일어나는
삶의 시련까지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예기치 않은
돌풍은
우리 믿음의
시험대입니다.
돌풍은
지나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의 믿음은
결코 돌풍에
부러지지
않습니다.
떠다니는
믿음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믿음입니다.
믿음이
깊어지는 곳에는
사나운 돌풍이
있었습니다.
돌풍이라는
현실 안으로
들어가
주님께서 주시는
고요와 평화를
체험하는
선물의 시간입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모든 선물의
시간입니다.
믿음이
만들어가는
우리의
새로운
역사입니다.
그 가운데
우리가
있습니다.
이끄시며
함께하시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