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수 작사 라음파 작곡 고운봉 노래
명동 부르스
1939년 약관 20세에
국경부두, 아들의 하소를 취입하며
가수 데뷔하여
1940년 남강의 추억을
1941년에는 선창으로
인기가수가 된 고운봉이
해방 후인 1958년 불러
히트시킨 곡이다.
이곡은 1956년 김용만이
직접 작사, 작곡, 노래까지 했으나
일본 가요와 유사하다는 얘기가 있자
작곡가 라음파가 곡을 손보고
작사가 이철수가 가사를 새로 써서
고운봉에게 주어
1968년 취입시켰다는 곡인데
처음 불렀다는 김용만의 노래는
찾아 들을 수 없었다.
이철수 작사 라음파 자곡 고운봉 노래
명동 부르스
https://youtu.be/hb6dMJAoFTM
궂은 비 오는 명동의 거리
가로등 불빛 따라
쓸쓸히 걷는 심정
옛 꿈은 사라지고
언제나 언제까지나
이 밤이 다 새도록
울면서 불러보는
명동의 블루스
깊어만 가는 명동의 거리
고요한 십자로에
술 취해 우는 심정
그 님이 야속턴가
언제나 언제까지나
이 청춘 시들도록
목메어 불러보는
명동의 블루스
고운봉의 소리는
"짙은 우수가 깔려 있으면서도
깔끔하고 젊잖은 창법과
적당한 울림으로
깊은 호소력을 발휘한다"는
평을 받았는데
이 명동부르스에서도
그의 그런 우수에 젖은 소리가
잘 어울려 나오고 있다.
곡은 발표 후 가수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는데
1983년 김수희,
1984년 조용필, 백승태,
1985년에는 남진, 주현미가
연이어 녹음하면서
이 곡의 진가를 드러내기 시작하여
이후 많은 가수들이
리메이크하기도 하였다.
이들 중 몇 곡을 찾아 들어본다.
새로운 편곡에 가사도 조금씩 달라져 있다.
원곡의 멋이 충분하기에
원곡의 감흥에서 크게 벗어난 곡은 없지만
가수들의 개성은 충분히 비교 감상할만하다.
1983년 김수희의 눈물의 기타에 실린 곡
이철수 작사 라음파 자곡김수희 노래
명동 부르스(1983)
https://youtu.be/aU0WNUdUUjI
1984년 조용필 옛노래에 실린 곡
이철수 작사 라음파 자곡 조용필 노래
명동 부르스(1984)
https://youtu.be/qXEaNQSzfEA
1985년 주현미 쌍쌍파티 5집에 발표한 뒤
주현미 리듬파티 5집에도 실은 곡
이철수 작사 라음파 자곡 주현미노래
명동 부르스(1985)
https://youtu.be/0bAD1ij2Z3c
원창자인 고운봉은
가장 고졸한 맛이 있는 것이고
이후 김수희의 곡은
빗소리를 배경으로 깔면서
끈적이는 창법이 마치 비에 젖는 듯하다.
조용필의 담백하면서
한음한음 공을 들이는
교과서적인 창법과
주현미의 간드러지는
명동의 부르스가 다 좋다.
궂은 비 오는 명동의 거리 가로등 불빛 따라
쓸쓸히 걷는 심정 옛꿈은 사라지고
언제나 언제까지나 이 밤이 다 새도록
울면서 불러보는 명동의 부르스여
깊어만 가는 명동의 거리 고요한 십자로에
술취해 걷는 심정 그님이 야속턴가
언제나 언제까지나 이 청춘 시들도록
목메어 불러보는 명동의 부르스여
명동이란 이름은
조선시대 한성부의 행정구역 중의 하나인
명례방(明禮坊)의 명자를 따서 지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명치정(明治町)으로 불리다가
해방 후 1946년
밝은 마을, 밝은 고을이란 뜻으로
명동(明洞)이라 개칭하였다.
70년대 명동의 최고 멋쟁이 아가씨들
명동이 형성되기에는
원래는 무교동을 시작으로
다동, 관철동, 충무로, 북창동을
주변으로 두고
한때는 우리나라의 패션 중심지로서
날렸던 시절이 있었으나,
강남의 신도시 개발에 밀려
얼마간은 시들해지고 있었다.
80년대까지만 해도
다동과 무교동의 월드컵이란
극장식 술집을 시작으로
무교동은 낚지복음으로 유명하였다.
그리고 청진동 선지국집이며
다동의 하동관 설농탕은
밤새도록 끓인 사골국물에
밥을 말아 주었는데
방자 놋그릇에
계란을 하나씩 넣어 주었으며
두 개씩 집어가도
빙그레 웃고 있는
주인의 싸인은 인심도 좋았었다.
그 맛에 인이 박인 궁용선사는
지금도 가끔 그 맛을 그리워하고 있다.
명동입구에서 명동으로 들어오는 멋쟁이들
그리고 70년대 관철동에 있는
반줄 음악 까페와
무교동의 월드컵,
또 북창동의 무랑루즈,
카네기홀 같은 곳에는
일류 가수들과 코메디 배우들이
출연하였는데
모두가 극장식 무대라
일부러 쫓아다니면서
구경들을 한 적도 있었다.
60~70년대에
그렇게도 통행금지가 심했던 시절에도
명동으로만 숨어들면 만사가 끝이었다.
특히 '이사벨'다방 같은 곳은
아예 창가에 커튼까지 달아
전기불이 밖으로 새 나가지 못하도록
시설을 해놓고
늦게 들어오는 사람들을 받았으며,
'동방쌀롱, 천동다방, 갈채다방,
청자다방, 돌체다방,' 등
누가 말만 들어도 그리워지는
추억의 놀이터들이었다.
그당시 명동 한복판의 인파
그외에도 연기가 나던
아이스크림을 팔던
'몽쉘통통(Mon Cher Tonton.
몽(mon) = my,
쉘(cher) = dear ,
통통(tonton) = uncle =
my dear uncle 즉,
친애하는 삼촌(아저씨)이란 뜻이다)'
연극배우 추송옹의
'빨간 피터의 고백'이란
연극을 상연하던
'카페 떼아트르(Cafe Theatre)'
양희은이 노래를 부르던
'오비스 케빈(OB's Cavin)'
그밖에 락 음악을 들을 수 있었던
중앙우체국에서 코스모스로 열결되어 있던
중국대사관 옆길인
딸라골목의 '비 제이 에스(BJS)',
'예스(Yes)', '이브(Eve)',
'멕파이 하우스(Magpie House)',
'웨스트 스토리(West Story)',
'레드 옥스(Red Oxe)',
'뢰벤브로이(Lowenbrau)',
'태양의 길목(Street of Sun)',
'썸씽(Something)',
'훈목',' 청맥', 기타 등등등등...
화재로 사라져버린 곳이긴 하지만
70년대의 폼생폼사( form生form死,
폼에 살고 폼에 죽는다는 뜻으로,
겉으로 드러나는 멋을
최우선 순위로 두는
태도나 생각을
속되게 이르는 말) '신즈 볼링장'도
빼놓을 수 없었던 명소였다.
지금처럼 자동이 아닌 수동으로
즉 사람이 핀쪽으로 들어가
볼링 핀을 정리해주던
그야말로 원시적 볼링장이긴 했으나
국내 최초로 기억되고 있는
이 볼링장은
그야말로 엄친아들만이 출입하여
즐길 수 있었던 고급놀이터 중 하나였다.
코스모스백화점 앞을 걷는
당시의 패셔니스타와 엄청난 인파
'레드옥스'에서 팔던 생맥주의 거품은
디스크 자키 보경이의 나즈막한 멘트와
적절한 선곡으로 인해
소녀의 뛰는 가슴과 함께
풍성하게 솟아 오르기도 했고
하얀 벽으로 만들어져 있던 주점
'학림2'의 소주는
무상이의 말도 안되는
주사를 만들어 냈으며
유네스코 회관 뒤에 있던 선술집
'겨울나그네'의 물섞은 약주와
조개탕은
가난한 우리들을
아무런 이유도 없이
미치게 만들었던 것 같다.
그러던 명동이 요새는
'엔'고가 오르면서
명동 거리에는 '일본' 사람들이 부쩍늘어
언제부터서는 '한국' 사람들이
별로 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90% 이상이 일본 사람과
중국사람들이고 보니
우스개 소리로
한국 말 할 기회가 별로 없다고도한다.
요즈음의 명동거리엔 한글간판이 별로 안 보이는군
하기야 가끔 명동엘 나가봐도
한국어로 쓴 간판은 별로 찿아보기가 힘들며
분위기가 서구식으로 바뀌어서
정말 요즘말로 수준맟추기가
보통 힘든 게 아니다.
하물며 '교리'를 '전도'하는
'교인'들마저도
'핸드 피켓'이나 '마이크'들,
모두가 일본말로 떠드는 통에
더더욱 헷갈릴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곱게 단장해 새로 개관한 명동예술극장
그나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뻔 했던
명동이 요즈음 다시 살아나기
시작하고 있는 것은
그동안 '장충동'으로 빼앗겻던
명동예술극장이 36년
(1957년 개관 1973년 장충동으로 이전함)만에
부활하여 2009년 6월
다시 개관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바로크 양식의 건물 속에다가
서양식 '레스토랑'과 '휴게실'을 마련하고
552석 규모의 관람석도 준비되어
강북 사람들에게는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그런의미에서
오늘은 고운봉의 명동부르스를
한번 들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