世宗大王(24세) 생애
조선왕조 5백년 역사에 있어 아니, 우리나라의 모든 역사 속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을 들라고 하면 대개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지목하는 이가 있다.
한민족의 가슴속에 찬란한 문명과 영화를 꽃피웠던 시대의 주인공으로서, 만백성의 어버이로서 추앙을 받는 바로 조선의 4대째 왕인 세종대왕(이하 세종이라 함)이다.
그의 생애는 개인의 삶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공인의 삶으로서도 모든 영광을 안고 있었다.
태조 6년인 1397년 4월 초10일, 하늘은 맑고 인왕산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계곡물은 며칠전에 내린 비로 그 수량이 많음을 뽐내기라도 하듯 시원스레 소리를 내고 있었다.
더구나 수목은 호랑이가 자주 출몰할 정도로 깊고 푸르렀다. 이러한 풍광이 합쳐진 준수방(俊秀坊)은 궁실과 가까운 곳에 위치하여 있었다. 바로 이곳 준수방에 위치한 태종의 잠저에서 세종은 정안군 즉 태종과 원경왕후의 셋째 아들로 고고한 울음을 터뜨리며 탄생하였다.
풍운의 시대는 아버지 태종을 사직의 책임자로 만들었고, 태종은 그의 모든 역량을 동원하여 혼미한 정국을 자기의 의도대로 만들어 나갔다. 세종의 유년기는 이러한 태종의 품속에서 많은 것을 보면서 배워나갔다.
세종이 12살이 되던 태종 8년 2월 11일에 부왕이 그를 충녕군(忠寧君)에 봉하였다. 또한 같은 달 16일에 당시 우부대언(右副代言)인 심온(沈溫)의 딸을 맞아들여 가례(嘉禮)를 올렸다.
그녀는 1395년(태조 4) 9월에 경기도 양주(楊州) 사제에서 태어났으며, 가풍을 이어받아 재색을 겸비하여 정숙하였다.
당시 12살인 세종보다 두 살이 위였다. 가례를 올린 다음 날 그녀는 경숙옹주(敬淑翁主)로 봉하여졌고 1417년(태종 17)에는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으로 봉하여졌으며 1418년에 세종이 즉위하면서는 경빈(敬嬪)으로 책봉되었다.
얼마 안되어 공비(恭妃)로 승진되었고 1432년(세종 14) 왕비가 되었으니 바로 소헌왕후(昭憲王后)인 것이다.
충녕은 대단한 호학불권(好學不倦)의 학구파였다. 이미 왕실에 소장된 서적을 어느 누구보다도 많이 읽고 익혔다.
또한 아무리 날이 덥거나 추워도 개의치 않고 하루종일 독서에 열중하곤 하였다. 이것은 훗날 세종으로 하여금 눈병으로 고생하게 하는 원인이 된다.
그만큼 그는 주위에서 건강을 돌보면서 독서를 하라는 충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독서에 몰두하였던 것이다.
큰형인 양녕은 왕세자로서 태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게 되어 있었지만 그의 돌출된 행위는 태종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제왕학에 대한 공부를 게을리하고 오락에 신경을 쏟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양녕의 소행은 마침내 여러 신하와 원경왕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태종으로 하여금 왕세자를 폐하게 하는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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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다시 보기⑧>세종---이어서-----
一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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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4.23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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