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츄어의 명반사냥이야기 서른 네 번째
경계를 허물어 완성한 소리
서울공대지 2020 Spring No.116
나용수 원자핵공학과 교수
“宋萬甲(송만갑) – 농부가, 별주부타령” SP (일츅 죠션 소리판, 음반번호: K179)
송만갑(宋萬甲, 1865~1939)은 전라남도 구례읍 봉북리(1) 출신으로 조선 고종 때부터 일제 강점기까지 활동한 판소리 명창이다. 근대 판소리 5명창(2) 중 한 명이자 그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힌다.
순조 때 가왕(歌王)으로 칭송되던 송흥록(宋興綠)의
증손자이자 송광록(宋光綠)의 손자, 송우룡(宋雨龍)의 아들로서
가히 판소리 명문가 출신이며 7세부터 혹독하게 소리 공부를 시작하였다고 한다. 13세 때 전주대사습놀이에서 춘향가로 전라감사에게 특별상을 받아 이미 명창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였고, 후에 명창 박만순(朴萬順)을
사사하였다. 전라감사 이재각에게서 참봉의 벼슬을 받았고 고종의 부르심을 받아 어전에서 소리를 하였다. 고종은 송만갑의 소리를 아껴 광대임에도 불구하고 사헌부 정육품 벼슬인 감찰직을 제수하여 함경도에서 근무하기도
하였고, 충정공 민영환을 따라 중국 상해와 북경, 미국 등지를
다닌 명망 높은 명인이었다.
송만갑은 조선 최고의 명창이라는 영예에 안주하지 않고, 조선 신극 운동의 요람으로 창설된 ‘원각사’에서 활동하였으며 현대적 창극을 구성하였다. ‘조선음률협회’와 ‘조선성악연구회’를 결성하고 ‘협률사’를 창립하는 등 판소리의 창극화와 제자 양성에 힘써 장판개, 박록주, 박초월 등 내로라하는 명창 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명창을 키워냈다. 딱한
사정을 보면 참지 못하는 인성으로 인해 보수를 받지 않고 가르친 제자가 절반 이상이었다고 하는 등 따뜻한 성품으로도 제자들과 뭇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1939년 1월
1일 서울 상왕십리정 자택에서 향년 74세로 타계하였다.
그는 ‘벼가 익을 대로 익어 이삭처럼 그 빛깔이 노글노글하면서도 웅장한 서슬이
감도는 소리’라는 평을 듣는다. 쇠망치와 같이 견강(堅强)하고 딱딱한 성음인 고음의 철성과 배에서 뽑아내며 맑은 통상성(通上聲)으로 냅다 질러 떨어뜨리는 성조를 지니고 있었으며, 음의 높낮이를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비성과 비강공명을 피하였고 주로
뒷목을 사용하였다. 소리가 매우 정교하고 치밀한 것으로 유명하며 판소리 5마당에 모두 능했다고 한다.
송만갑은 1906년 미국 Victor Records에서 한국 최초의 판소리 음반을 낸 주인공이기도 하다.
(Victor Record, 음반번호: 13586)(3) 이 음반은 본인의 장기인 ‘농부가’를 녹음한
첫 번째 음반으로, 지금까지 단 한 장만 발견된 극희귀 음반이기도 하다.
<그림> 한국 최초의 판소리 음반. 송만갑 <농부가>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우리나라 음반 시장은 미국의
빅터 음반회사와 콜럼비아 음반회사가 진출하여 개척되기 시작하였다. 1910년 직후에는 일본축음 기상회를
위시한 일본의 음반회사들이 진출하였고, 이후 일제 강점기에는 거의 일본 음반회사들이 독점하여 한국 음악가들의
음반을 제작하였다.
송만갑은 1900년대 후반부터 1926년까지 ‘농부가’를 총 세 번 녹음했는데 필자가 소장하고 있는 음반은
일츅 죠션 소리판의 1913년 녹음이다. 우리나라는 6·25 전쟁을 겪으면서 많은 음반이 소실되어 유성기 음반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 그 중에서도 송만갑의 음반들은 좀처럼 실물을 구경하기 힘들 정도로 희귀한데 평소 눈여겨보던
국내 경매사이트에서 이 음반을 발견하여 치열한 경매 끝에 구매할 수 있게 되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1990년 7월부터 2005년 12월까지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재 발굴하는 기회로 만들기 위해 역사상 훌륭한 문화적 업적을 남긴 인물로서 전
국민의 귀감이 되고 청소년들의 삶의 사표가 되는 ‘이달의 문화인물’을 선정한 바 있다. 2001년 12월의 문화인물은 송만갑이 선정되었다. 증조부 송흥록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선정된 판소리 명창으로서 “독자적인 창법으로 판소리 예술의 신경지를 개척하였으며, 조선 성악연구회를 설립하여 판소리와
창극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조선 철종 때 활동했던 전북 순창 출신인 박유전(朴裕全, 1835~1906)이 서편제 (西便制)를 창시하기 전까지 판소리는 동편제(東便制)가 전부였다. 그러니
송만갑이 활동을 시작할 때만 해도 거의 정통 판소리=동편제 등식이 성립하고 있었다. 송만갑은 송흥록 이래 집안 전통으로 내려오던 동편제를 전수할 조선 최고의 소리꾼 집안의 금지옥엽(金枝玉葉)이었다. 그러나
어느 날 그가 듣게 된 서편제의 계를 잇는 정창업 (丁昌業)의
소리는 그의 정체성을 송두리째 흔들어놓고 만다. 서편제에 매료된 송만갑은 집안의 규율을 깨고 과감히
동편제에 서편제를 접목하여 부르기 시작하였고, 경기도 향토음악제인 경제(京制)를 활용하기도 하였다. 이에
아버지가 독살을 시도할 정도로 집안에서 배척을 받게 되고 결국 가문에서 할명(割名)을 당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꿋꿋하게 자신의 음악관을 지키며 창법을
일궈나가고 그럴수록 그의 명성은 높아만 갔다. 한편 그가 활동하던 시기인 구한말에는 서구의 신 문물
유입에 따라 판소리 무대가 마당이나 사랑방에서 서양식 극장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송만갑은 이러한 시대의
흐름을 읽어 판소리 자체도 새로운 모습인 창극으로 발전하도록 노력하였다.
“전방보는 사람이
어찌 모본단만 가지고 장사를 하겠느냐?”
옷감 사러 온 사람이 비단을 원하면 비단을 팔고, 무명을 원하면 무명을 팔듯이, 시대와 청중이 원하는 소리를 들려주었던
그는 조선 최고의 소리꾼 가문에서 보장된 출세의 길을 과감히 던져버리고, 동편제와 서편제의 경계를 허물며
그만의 음악 세계를 완성했던 시대의 명창이었다.
주:
1) 최근에 발견된 송만갑의 자서전에는 자신을 낙안 출신으로 밝히고 있어 출신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음.
2) 송만갑(宋萬甲), 김창룡(金昌龍), 이동백(李東伯), 김창환(金昌煥), 정정열(丁貞烈)
3)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 최초의 상품용 음반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최근 부산 동래 기생 옥도·앵앵과 대구의 내시 출신 명창 고자대감이 취입한 ‘매화사 (梅花詞)’ (Victor
Record, 음반 번호: 13509)가 발견되었다.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그림> 국창(國唱) 송만갑(宋萬甲, 1865~19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