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인은 하느님의 창조 질서이기에 인간이 마음대로 바꿀 수 없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완고한 바리사이들에게
혼인의 근본 취지를 거듭 확인해 주신다(복음).
예수님께서는 남성 위주의 시대에
여인들을 존중해 주시며 인간의 품위를 인정해 주셨습니다.
이는 당시 이스라엘에서 파격적인 일이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태도를 못마땅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율법을 내세워 예수님을 궁지로 몰아넣으려고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하고 질문합니다.
그들은 이혼이 율법에 어긋나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으면서도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일부러 이런 질문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창조의 두 이야기를 예로 들어 말씀하시면서
혼인의 근본적인 의미를 일깨워 주십니다.
창조의 첫 번째 이야기는 남녀의 평등성입니다.
여자는 물건이 아니므로 남자의 재산에 속하지 않습니다.
여자는 남자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인격체입니다.
여자와 남자는 하느님의 모습으로 평등하게 지어졌고,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평등합니다.
혼인이란 남녀 당사자들이 모두 하느님께 속한다는 사실에서
평등한 남녀의 결합입니다.
창조의 두 번째 이야기는 남녀의 보완성입니다.
남녀는 서로 협력하여 살아가는 보완성을 지닌 존재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아직도 많은 사람의 사고 속에 남아 있는
남성 우월주의를 되돌아보게 합니다.
남녀의 평등이 없는 부부 사이는 결코 건강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부부가 서로 협력하여야 하는 동반자 의식이 없으면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없습니다.
인간은 모두 부족하고 약한 존재입니다.
부족한 부분은 서로 보완해 주고 약한 부분은 서로 책임져 줄 때
가정이 풍요로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협력자와 짝이 어떻게 다를까?
협력자는 도와주는 사람이고, 짝은 함께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협력자는 여럿이 될 수 있지만 짝은 오직 하나 뿐이다.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마르 10,2)
“안 된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아내가 남편을 버려도 됩니까?”
어디에서 “예” 하고 대답하자 모두가 웃었다.
오죽했으면 그가 “예” 하고 대답했을까?
그래도 불쌍하니 데리고 살아야한다.
능력 있고 좋을 때만 남편이어야 하는가?
젊고 예쁠 때만 아내이어야 하는가?
능력 없고 힘들 때에도 함께 있어주고
늙고 아플 때에도 옆에 있어주는 사람이 짝이다.
짝은 둘이 한 몸이 되었기 때문이다.
부부의 인연을 죽을 때까지 유지하기 위해서는
첫째는 사랑이 필요하다.
사랑 없는 부부생활은 지옥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도와주는 마음이 필요하다.
내가 상대방에게 해주는 분량만큼 되돌려 받기 때문이다.
셋째는 자녀가 필요하다.
자녀는 부부를 이어주는 마지막 끈이기 때문이다.
오늘을 내가 가족들을 위해 무엇을 했고,
가족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를 성찰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협력자와 짝이 어떻게 다른가?
협력자는 도와주는 사람이고, 짝은 함께 가는 사람이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맺어 준 사람에게 충성하며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