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5일 [연중 제18주간 금요일]
마태오 16,24-28
다정한 것만 살아남는다. 그런데 다정해지려면….
송곳니를 드러낸 사자와 이를 피해 달아나는 사슴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구해주고 싶습니까?
세상에 더 많은 사자가 있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착한 사슴이 뛰노는 숲을 원하십니까?
아마 두 종 중 하나가 멸종한다면 사자가 먼저 멸종할 것입니다.
인간은 세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을 지배하는 인간은 인간처럼 강한 존재가 아닌 다정하고 온화하고 순종적인 사슴과 같은 존재가 세상을 채우기를 원합니다. 왜 그럴까요?
왜 인간은 사슴 같은 순수하고 착한 것을 살게 하고 싶을까요?
인간은 히틀러처럼 한 민족을 말살하고 싶을 정도로 잔인한 존재인데도 말입니다.
토머스 헉슬리는 『생존을 위한 투쟁: 프로그램』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늑대에게 공격받는 사슴을 보면 동정심이 든다. 사슴 같은 자를 순수하고 착하게, 늑대 같은 자를
독하고 악하게 여길 것이다.
용기와 열정으로 사슴을 지키며, 피가 철철 흐르는 무시무시한 늑대 소굴에서 구해내고 싶을 것이다.”
강한 자의 특징은 의외로 자비심에 있습니다.
그 이유는 강한 자는 집단을 형성하는데
그 집단생활에 적응하기 위한 능력이 자비심이기 때문입니다.
상대에 대한 자비심이 없다면 무리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상대의 아픔을 느낄 수 있는 마음이 자비심입니다.
이 자비심이 클수록 더 큰 공동체를 형성하게 됩니다.
진화론적으로 볼 때 네안데르탈인은 그 친화력이 10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호모 사피엔스는 그들보다 100배 이상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당연히 숫자가 많은 호모 사피엔스입니다.
더 많은 호모 사피엔스들이 모이다 보니 언어와 같은 소통 능력과 함께 거주하기 위해 기술적인 능력들이 발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이들에게 신이 모든 인간을 창조했다는 믿음이 있을 수 없기에 히틀러처럼 다 약한 종족을 사정없이 죽이는 잔인함도 동시에 표현되었습니다.
어쨌건 브라이언 헤어의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에서는 이 지구상에서 생존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친화력’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친화력이란 타인에게 손톱과 이빨을 절제할 줄 아는 능력입니다.
이 친화력을 마치 늑대가 강아지가 된 것처럼 ‘자기 가축화’(self-domestication)라고 부릅니다.
20세기 러시아 학자 벨라예프와 류드밀라는 동물의 가축화 과정을 알아보는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그들은 야생 여우 중에 친화력이 강한 여우들을 선택하여 몇 번에 걸쳐 교배시켰습니다.
그랬더니 주둥이가 짧아지고 송곳니가 줄어들었을 뿐 아니라 포식성과 호전성이 감소하여 더 귀여운 모습으로 변했습니다.
또한 신경전달물질인 세로토닌이 야생의 보통 여우들보다 5배 많아졌던 것입니다.
자 그럼 세로토닌은 어떤 역할을 할까요? 인간에게 길든 여우는 사람의 손짓 의미를 알 수 있었습니다.
음식이 들어있는 그릇을 사람이 손으로 가리키면 개와 같은 길든 동물은 그 손짓을 알고 음식을 찾지만, 침팬지와 같은 동물은 그것을 믿지 않고 본인 능력에 의존하여 찾으려 합니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그래서 개는 사라지지 않겠지만, 침팬지나 늑대는 사라질 것입니다.
보호를 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개만 가축화 한 것일까요? 이 책에서는 인간도 살아남기 위해 가축화하였다고 합니다.
인간 사회도 더 강한 자가 있고 약한 자가 있습니다.
강한 자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송곳니를 숨기고 그 지시하는 바에 순종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려면 타인의 마음을 읽는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자비심입니다.
[참조: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유튜브 채널, ‘요요’]
자비심이 가장 강한 동물이 인간입니다. 자비가 없는 인간은 세상을 파괴하지만,
자비심이 큰 인간은 세상을 창조합니다.
그런데 그 자비심은 바로 자기 안에 있는 발톱과 송곳니를 덜어내는 십자가를 통해 형성됩니다. 내가 죽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 살아남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사랑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밥은 안 먹어도 40일은 살지만, 사랑을 4일만 받지 않아도 죽고 싶은 마음이 든다고 합니다.
지금 코로나로 하루에 10명이 넘는 사망자가 나오지만 사실 매일 자살로 죽는 사람이 40명 가까이 됩니다.
어느 게 더 큰 병이겠습니까? 눈에 보이는 바이러스일까요,
아니면 우리 마음 깊숙이 있는 사랑 받지 못하는 바이러스일까요?
금쪽같은 내새끼 107회에 ‘소아 무기력증’을 앓고 있는 금쪽이가 나옵니다.
인생 공허하고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고 살고 싶지 않은 모습의 초1 여자아이입니다.
아이가 무기력하고 두렵고 불안해하는 이유는 아이 부모의 부부싸움 때문입니다.
부부는 서로 이혼 직전까지 간 상황이기 때문에 아이들은 부모가 헤어질까 봐 더 불안합니다.
싸움은 왜 일어날까요? 내가 죽지 않아서입니다. 피 흘리지 않아서입니다.
친화력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친화력은 결국 내 송곳니와 발톱을 자르는 일입니다.
그 일이 아니면 나도 죽고 자녀도 죽습니다.
자녀에게 가장 큰 교육은 부모의 행복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환경 안에서 자녀들은 나빠질 수 없습니다.
살고 싶어지기에 자녀들도 이를 감춥니다.
그러면 세상에서 살 생명력을 얻습니다.
이 프로그램에서 부모는 임종 체험으로 관에 들어감으로써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으로 다시 사랑하기로 결심합니다.
자녀들은 매우 행복해합니다.
무엇이든 흐르지 않으면 생명력을 잃습니다.
돈은 통장에 갇히면 생명력을 잃습니다.
생명도 마찬가지입니다.
흐르지 않으면 생명도 생명력을 잃습니다.
흐르는 것만 생명력을 갖습니다.
따라서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법칙입니다.
생명이 흐르려면 죽어야 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주님께 내어줄 수 없어서 가진 모든 것을 빼앗겼습니다.
가질 자격을 잃은 것입니다.
그 이유는 스스로 선악과를 내어줄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내어줄 수 없다면 나의 것이 아니라 내가 그것의 소유가 됩니다.
그것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재물도 마찬가지고 생명도 그렇습니다.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죽는 것입니다.
살려면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다정해집니다. 다정해야 살아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마태 16,24-25)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8월5일 [연중 제18주간 금요일]
신명기 4,32-40
마태오 16,24-28
십자가가 너무 무거워 고생하시는 분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는 예수님의 권고를 묵상하면서 ‘십자가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묵상을 해보았습니다.
저는 십자가를 이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방식으로 다가온다.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이 지니고 살아가는 갖은 결핍들, 결점들, 뜻하지 않았던 사고, 생각만 해도 가슴 미어지는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사별, 열악한 상황, 가난, 병고, 스트레스, 위기, 관계 안에서 오는 갈등 등.
지속적이며, 인간 삶의 한 부분이다.
‘이제 큰 십자가 하나 잘 극복했다’고 안심하는 순간, 어느새 또 다른 십자가가 찾아온다.
삶의 매 순간, 모든 국면에서 수시로 찾아오는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잘만 이해하고 극복하면 인생의 보약이다.
때로 십자가의 무게가 너무 크다 못해 끔찍할 때도 있다.
그러나 십자가가 주는 의미를 잘 깨닫고 끝까지 잘 견뎠을 때 찾아오는 기쁨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다.
영적성장의 가장 큰 도구이다.
우리 인생이 한 걸음 크게 나아가기 위해 가장 좋은 특효약이다.
그래서 결국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취해야할 모습은 이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시각의 긍정화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우리의 부정적인 시각을 긍정적으로 바꾸도록 하면 좋을 것입니다.
부정적인 시각은 불필요한 십자가를 양산할 뿐입니다.
십자가, 그 자체가 주는 괴로움에 집착하기보다는 십자가가 뜻하는 의미, 해결방안, 기능이 무엇인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중요하겠습니다.
십자가는 인생의 한 부분임을 명심하십시오.
십자가는 분명 우리 인생의 한 부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무의미한 일을 하지 않으십니다.
십자가 없는 인생을 기대한다는 것은 비현실적인 기대일 뿐입니다.
십자가 없기를 바란다는 것은 밥을 먹지 않겠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내 십자가가 좀 가벼워졌을 때 이웃들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십자가로 인해 너무나 힘들고 괴로워한다면 그 십자가를 나누어지려는 마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십자가를 보내시는 하느님을 바라보십시오.
우리의 십자가가 너무도 힘겨울 때 마다 십자가를 보내시는 하느님을 바라보면 좋겠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시기에 우리를 살리시려고 또 구원하시려고 노심초사하시며 애쓰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를 보내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모습은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간의 관계에서 명백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당신과 맺은 계약을 깨뜨리고 배신하며 언제나 옆길로 새는 불충실한 이스라엘 백성을 하느님께서는 안타까워하십니다.
어떻게 해서든 그 백성을 당신께로 돌아서게 하시려는 한 방편으로 십자가를 보내십니다.
십자가를 보내시는 하느님의 마음 한 가운데는
우리 인간들을 향한 그분의 열렬한 사랑이 자리 잡고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하느님은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시기에
그 사랑의 표현으로 십자가를 보내십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일수록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
십자가는 우리 죄인을 부르시는 하느님의 음성입니다.
십자가는 변장하고 찾아오시는 하느님의 얼굴입니다.
십자가는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가장 강도가 센 애정표현입니다.
오늘 등에 얹힌 십자가가 너무 무거워 고생하시는 분들, 주님께서 주시는 아래의 말씀을 묵상하시면서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겪는 시련은 모두 인간이 감당해낼 수 있는 시련들입니다.
하느님은 신의가 있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 힘에 겨운 시련을 겪게 하지는 않으십니다.
시련을 주시더라도 그것을 극복하고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실 것입니다”
(1 코린 10, 12-13).
“멸망할 사람들에게는 십자가가 한낱 어리석은 생각에 불과하지만 구원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 (1 코린 1,18; 23).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람답게>
2022. 08. 05 연중 제18주간 금요일
마태오 16,24-28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이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나라에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
<사람답게>
사람 아닌 것에
자리를 내주고도
사람일 수 있기에
사람으로
사는 것은
어렵지 않다
사람 아닌 것에
자리를 내주면
사람다울 수 없기에
사람답게
사는 것은
쉽지 않다
사람답게 사느냐
사람으로 사느냐
나에게 달렸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