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122
2월2일[주님 봉헌 축일(축성 생활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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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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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ojVqQHEzcL8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류지인 야고보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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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존재 자체로 세상의 빛이요 등불인 축성 생활자들!>
오늘 주님 봉헌 축일인 동시에 축성 생활의 날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라 마리아와 요셉은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을 예루살렘 성전으로 모시고 올라가 하느님께 봉헌했습니다.
축성 생활자들, 수도자들을 각별히 사랑하셨던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이 날을 축성 생활의 날로 제정하셨습니다. 그들이 더욱 신원에 맞는 걸맞는 삶을 살아가도록 기도하자고 초대하셨습니다. 그들이 각자 부여받은 고귀한 성소와 카리스마를 기쁘고 충만하게 실현하도록 기도하는 축성 생활의 날입니다.
‘축성(祝聖, consecration)되다’ 라는 말의 의미는 성화(聖化)되다, 성(聖)스럽게 변화되다, 거룩하게 되다, 신성하게 되다, 봉헌되다, 라는 말과 유사합니다.
오늘 축성 생활의 날은 맞아 세상의 모든 수도자들이 아기 예수님처럼 자신의 모든 시간과 미래, 삶 전체를 관대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하느님께 봉헌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특별히 선별되고 축성된 수도자로서의 신분에 걸맞게 하루하루 모든 순간을 거룩하고 향기롭게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수도자로서 가난하고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을 위한 사도직 활동도 중요하겠습니다만, 그에 앞서 한 작은 수도자로서, 주님의 겸손한 종으로서, 기도 안에 기쁘고 환한 얼굴로 살아간다면,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그보다 더 좋은 선물을 다시 또 없을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수도자들이 자신이 발한 삼대 서원이 하느님 나라와 지상의 교회를 위해 얼마나 큰 가치와 의미를 지니고 살아간다면, 뭐 그리 대단한 일을 하지 않더라도, 거룩하고 맑게 살아 존재 자체로 교회와 세상 앞에 큰 선물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저희 수도자들의 ‘존재’ ‘신원’은 마치 날카로운 날이 서 있는 양날의 검과도 같습니다.
우리가 비록 나약하고 부족한 존재이지만, 매일 가슴을 치면서 거듭 자신을 갈고닦으며, 주님의 종이라는 수도자로서의 신원에 걸맞게 살고자 발버둥 칠 때, 우리는 존재 자체로 세상의 빛이요 등불이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존재 자체로 하느님과 동료 인간을 위한 멋진 이기(利器)로 변모될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수도자로서의 신원을 망각한 채, 흥청망청, 빈둥거리며 살아갈 때, 세상의 고통과 절규에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높은 수도원 담장 안에서 우리끼리만 희희낙락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하느님과 세상과 교회 앞에 그 어떤 증거도 되지 않고, 그저 놀림거리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수도자라는 존재 자체, 신원 자체가 하느님과 동료 인간을 해치는 흉기(凶器)로 돌변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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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QjSYRnJHc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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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에 이르는 봉헌은 오직 하나뿐: 용서를 위한 봉헌>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성모님은 아기 예수님을 주님께 봉헌합니다. 아프지 않으면 봉헌이 아닙니다. 예언자 시메온은 성모님께서 장차 영혼이 칼에 찔리듯 아프실 것이라 예언합니다.
구약에서의 봉헌과 신약에 와서 그리스도께서 알려주신 봉헌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구약 봉헌의 목적은 첫째, ‘저는 당신 것이고 제가 가진 것도 당신 것입니다.’입니다. 이와 같은 의미로 바쳤던 제물이 번제와 곡식 제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친교’입니다. 하느님과 이웃과의 친교를 위해 바치는 화목제가 있었습니다. 이는 오고 가는 것이 없다면 친교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세 번째는 ‘속죄’입니다. 빚을 진 상태로는 친교가 지속될 수 없습니다. 어느 정도는 탕감해주더라도 그분을 바보로 만들지 않으려면 자신도 할 수 있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속죄제나 보상제가 이것입니다.
만약 이런 봉헌으로 구원이 가능했다면 예수님께서 오실 필요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신약의 봉헌은 반드시 ‘용서’가 목적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골고타에서 당신 자신을 아버지께 봉헌하시며 이렇게 청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문신을 한 신부님’(2019)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영화 속 주인공은 다니엘이라는 청년입니다. 그는 소년원 겸 교정시설에서 생활하던 중, 우연히 본당 신부님이 집전하는 미사를 돕게 되면서 ‘사제의 길’을 꿈꾸게 됩니다. 하지만 살인 및 폭력 전과 때문에 “사제가 될 수 없다.”라는 답을 들었고, 결국 다른 직업 훈련을 받게 되었습니다. 출소 후 노동 현장으로 파견되던 중, 다니엘은 시골 작은 마을에 들르게 되고, 우연히 그곳 본당 신부님을 만나야 할 상황이 생깁니다.
다니엘은 내면에 깊은 갈망과 불안, 그리고 죄책감을 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을에서 누군가가 “본당 신부님 맞나요?” 하고 묻자, 그는 순간적인 충동으로 “예, 제가 신부입니다.”라고 대답해 버립니다. 그리고 빈 사제관에 머무르게 되면서, 그 마을의 임시 ‘신부’ 역할을 시작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서툴렀지만, 의외로 진솔한 그의 모습은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씩 움직입니다.
알고 보니 이 마을에는 큰 상처가 있었습니다. 얼마 전 끔찍한 교통사고가 발생해 여러 주민이 목숨을 잃었는데, 그 사고의 원인을 제공한 ‘운전자’ 역시 사망했습니다. 그러나 사고 당시 운전자가 술에 취해 있었다는 이야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그 운전자를 철저히 미워했습니다. 마을 곳곳에는 희생자들을 기리는 표시가 있지만, 정작 그 ‘가해자’였던 운전자는 묘지에조차 들어오지 못한 채 쫓겨난 상태였습니다.
다니엘은 처음에는 이 사건에 깊게 관여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누구보다 “용서받지 못함의 고통”을 잘 아는 그였기에, 점점 그 가족과 죽은 운전자를 묻지 못한 채 애도하지 못하는 상황이 신경 쓰였습니다. 다니엘은 한 가지 결심을 합니다. “이 운전자를 위한 장례를 제대로 치러 주자.” 모든 마을 사람이 반대하고, 심지어 다른 사제나 경찰관도 “장난질이 너무 심하다.”라며 그를 몰아세우지만, 다니엘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장례식 당일, 분노로 가득 찬 마을 주민들은 장례식장에 몰려와 고성을 지릅니다. 이즈음에 그의 신분도 조금씩 들통이 나기 시작합니다. “가짜 신부가 무슨 장례를 치른단 말이야!” “이딴 식으로 저 인간까지 구원받게 해 줄 순 없어!” 다니엘은 위축되면서도, 용기를 내어 운전자의 관이 놓인 곳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목소리를 높여 모두에게 호소합니다. “여러분, 저 역시 용서받지 못한 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알게 된 건, 하느님께서는 제게 기회를 주셨고, 저도 여러분께 기회를 드리고 싶다는 겁니다. 이 사람에 대한 증오가 우리를 구원해 주지 못합니다. 죽은 이에 대한 복수나 증오는 우리 모두를 갉아먹을 뿐입니다.”
다니엘은 장례식을 시작하며 조용히 기도문을 읊고, 마을 사람들과 함께 묵주기도(또는 해당 지역 미사 의전)를 이어 갑니다. 이 순간, 관 앞에서 울부짖는 운전자의 가족을 보고 몇몇 주민들은 눈물을 글썽이며 “사제가 아닌 저 사람(다니엘)이 어떻게 우리를 이렇게까지 마음 돌리게 하나…” 하고 충격을 받습니다. 이미 그의 진심을 느꼈던 사람들은 묵묵히 참여하기 시작하지요. 장례식을 마치고 다니엘은 신자들 앞에서 사제복을 벗고 문신이 새겨진 몸을 드러낸 채 그들을 조용히 떠나갑니다.
그는 어떻게 그런 용기를 낼 수 있었을까요? 그가 먼저 사제로 인정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당연하지 않은 우리 죄를 덮어주시기 위해, 곧 에덴동산에서의 가죽옷을 선물하시기 위해 아드님을 죽이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입고 그분의 의로움으로 하느님 앞에 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제복은 그리스도의 용서를 위한 봉헌을 의미합니다. 그 용서를 받은 사람에게 합당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도 용서하고 덮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자기를 봉헌하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봉헌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유다가 베냐민을 위해 자기 자신을 대신 감옥에 갇히도록 내어놓겠다고 말한 장면(창세기 44,33 참조)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대신 십자가 형벌을 받으신 모습을 예표하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배신당했지만, 되레 그들을 살리기 위해 양식을 베풀었고(창세기 50,19-21 참조), 그 누구도 원망하거나 보복하지 않았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을 때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벌주시는 대신 가죽옷을 입혀 주십니다.(창세기 3,21 참조) 누군가의 죄를 덮어 주기 위해 다른 생명이 희생된 것은 최초의 봉헌을 상징합니다. 신약에서는 의로운 요셉이 마리아가 임신한 사실을 깨닫고도, 세상의 조롱 속에서 그녀를 보호해 주려고 몰래 파혼하려 했습니다.(마태오 1,19 참조)
구약의 유다와 요셉이 살아 낸 봉헌과 희생이, 신약에서 예수님께서 완성해 주신 속죄와 사랑으로 이어지며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으면, 우리의 봉헌은 더 이상 의무적 제사가 아니라 서로의 죄를 짊어지고 가는 ‘그리스도의 봉헌’이 됩니다. 이 봉헌만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새롭고 영원한 봉헌입니다. 나는 이웃의 죄를 덮어주는 봉헌을 하며 미사에 참례하는지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면 참다운 신약의 예배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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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이며, 동시에 교회가 축성 생활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우리는 아기 예수님이 성전에 봉헌된 순간을 묵상하며, 우리의 삶을 하느님께 드리는 의미를 되새기고자 합니다. 저는 봉헌의 순간을 기억합니다. 1991년 8월 23일 사제서품을 받을 때입니다. 서품 예식 중에 ‘모든 성인 호칭 기도’ 시간이 있습니다. 그때 교구장님을 비롯한 서품식에 참석한 모든 분이 무릎을 꿇고 새 사제들이 주님이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사제가 될 수 있기를 청하면 모든 성인의 전구를 청하며 기도합니다. 서품 대상자들은 바닥에 엎드려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며 기도합니다. 그렇게 엎드려 있는 동안 신학교에서 있었던 시간이 떠오릅니다. 부족한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셨던 분, 은사 신부님, 함께 사제 성소의 꿈을 키웠던 동료, 갈등과 번민의 시간이 떠오릅니다. 모든 성인 호칭 기도가 끝나면 엎드렸던 서품 대상자들은 일어나서 주님의 부르심에 ‘예’라고 응답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와 요셉은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합니다. 이는 단순히 유대 율법을 지키는 행위가 아니라, 하느님께 자신들의 모든 것을 내어드리는 헌신의 표현입니다. 봉헌은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갈망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모두 무언가를 위해 살고, 무언가를 위해 헌신하며, 더 큰 가치를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존재입니다. 19세기 미국의 작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는 자신의 책 ‘월든(Walden)’에서 삶의 본질을 찾기 위해 숲에서 단순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삶에서 본질적인 것만 남기고 나머지는 버려야 한다"라고 말하며, 헌신을 통해 진정한 자유와 충만함을 찾고자 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이러한 단순함과 헌신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으며, 무엇을 하느님께 봉헌하고 있습니까? 저는 보스턴에 있는 월든 호수를 몇 번 다녀왔습니다. 미국의 위대함은 경제와 문화에 있는 것 같지만, 그 뿌리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와 같은 사상가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전은 단순한 물리적 건물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가 이루어지는 공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시메온과 한나는 성전에서 예수님을 만나며, 평생 기다려온 약속이 성취되는 순간을 경험합니다. 성전은 하느님과 깊은 만남과 이웃과의 관계를 성화하는 공간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성전은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교회일 수도 있지만, 가정과 직장, 우리의 일상 속 관계가 성전이 될 수 있습니다. 철학자 마르틴 부버(Martin Buber)의 "나-너 관계" 이론은 성전을 관계의 공간으로 확장해 줍니다. 우리가 이웃과 진정으로 만나고 사랑할 때, 그곳이 곧 하느님이 현존하시는 성전이 됩니다. 군대에서 군종 신부님은 전방 철책선을 찾아와서 병사를 위해서 미사를 봉헌합니다. 그때는 철책선이 제단이 됩니다. 찬 바람 부는 초소가 성전이 됩니다. 저도 광야에서 미사를 봉헌했던 적이 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과 하느님께 예배드렸던 광야, 그 광야가 제단이고, 바위가 제대였습니다.
오늘은 축성 생활의 날이기도 합니다. 수도자들은 자신의 삶을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하며, 세상에 사랑과 희망의 빛을 비추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축성 생활은 수도자들만의 특권이 아닙니다. 모든 신자는 자기의 삶 속에서 하느님께 헌신하며 축성 생활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키우는 사랑의 헌신을 통해, 직장인은 정직과 성실로 하느님께 봉헌할 수 있습니다. 작은 일상에서 하느님을 기억하며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우리의 축성 생활입니다. 소화 데레사 성녀는 "작은 길(Little Way)"을 통해 일상의 작은 일들을 하느님께 봉헌함으로써 거룩한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도 일상의 작은 일들을 하느님께 봉헌하며 축성 생활의 정신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주님 봉헌 축일에 우리는 초를 축성합니다. 촛불은 어둠 속에서 빛을 비추며, 소멸하면서도 다른 이에게 빛과 온기를 전합니다. 이는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할 모습입니다. 2024년 추운 겨울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은 촛불을 넘어 응원봉을 들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습니다. 우리의 작은 빛도 누군가에게는 삶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희생과 헌신이 세상에 빛과 희망을 전할 수 있도록 초대받고 있습니다. 오늘 주님 봉헌 축일을 맞아 우리의 삶을 돌아봅시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으며, 우리의 삶을 누구에게 봉헌하고 있습니까? 하느님께서 우리를 성전으로 부르시며, 우리를 통해 세상에 빛을 비추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서 사랑과 희망을 실천하며, 우리의 삶을 온전히 봉헌하는 축성된 삶을 살아갑시다.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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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삼의딸들수녀회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님]
오늘 교회는 예수님의 부모가 율법에 따라 성전에서 아기를 주님께 바친 일을 기념합니다.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히브 2,17) 하였던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백성의 다른 맏아들들처럼 부모의 손으로 성전에 바쳐지십니다. 아기 스스로 자신을 바친 것이 아니라 부모가 바칩니다. 실제로 그리스 말 원문은 ‘봉헌’과는 조금 다른 ‘나타내 보이다, 출현하다, 소개하다’(present)라는 뜻을 가집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오늘 복음을, 드디어 오신 구세주께서 성전에서 백성을 대표하는 두 예언자를 통하여 당신 백성을 처음 만나는 자리라고 하십니다. 일종의 상견례인 셈이지요. 제1독서에서 구세주께서 “자기 성전으로 오[시]리라.”(3,1)라고 한 말라키 예언자의 말도 이를 뒷받침합니다. 곧 아기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뒤 처음으로 성전에서 아버지 앞에, 그리고 백성 앞에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에서는 ‘축성 생활’(vita consecrata)의 날을 꽤 오랫동안 ‘봉헌 생활’의 날로 불러왔기에 축성 생활자들이 주님께서 성전에 바쳐지신 것과 같은 의미로 봉헌된다고 여기는 것 같습니다. 5년 전 이를 ‘축성 생활’로 번역하여 쓰기로 한 주교회의의 결정은 이런 혼란을 바로잡고 축성 생활의 뜻을 바르게 이해하도록 돕기 위한 것입니다.
사실 ‘축성’은 오늘 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봉헌’과는 쓰인 낱말과 그 뜻이 다릅니다. ‘축성 생활’은 “서원을 통하여 …… 세 가지 복음적 권고의 의무를 받아들이는” 삶, 곧 “복음적 권고의 서원으로 이루어지는 신분”(교회 헌장, 44항)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수도자를 포함하여 복음 권고를 서약하는 모든 이가 축성 생활자입니다. 올해 ‘한국 교회 축성 생활의 해’를 지내면서 축성 생활 성소를 위하여 더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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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2,22-40: 주님의 구원을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이다. 맏배는 모두 하느님께 바쳐야 한다는 율법을 지키는 것은 언제나 하느님 앞에 먼저 우리의 모든 것을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살아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신 행위는 바로 우리에게도 좋은 교훈이다. 우리의 삶 속에서 작은 것이나 큰 기쁨, 심지어 아픔까지도 그분 앞에 겸손하게 바칠 수 있어야 한다. 거기에서 우리는 더욱 큰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성모님과 요셉은 아기 예수를 성전에서 봉헌하신다. 율법에 “씨를 받아”(레위 12,2 칠십인 역) 아이를 낳은 여인은 부정한 몸이 되었으므로, 일정 기간이 지난 뒤에 낳은 자식과 함께 하느님께 희생제물을 바쳐야 깨끗해진다고 한다. 이 율법과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23절)는 율법을 따르기 위함이었다. 의인 시메온은 아직 아기를 보고서도, 위대한 신성을 지니신 분임을 알아보았다. 시메온은 그분을 마음으로 보고 아기가 누군지 알아보았다. 그리고 동정녀에게서 태어난 하느님의 아들을 품에 안고 기도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29-30절)
그 아기는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쓰러지게 하고 믿는 다른 민족들은 일어나게 하실 분이다.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34절) 십자가가 바로 그 반대를 받는 표징이다. 구세주의 모든 것이 반대를 받고 있다.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속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35절) 마리아는 당신의 평생 아드님 때문에 많은 고통을 겪으셨다. 그리고 아드님께서 수난을 당하실 때 모두 겪으셨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아드님이 죄인으로 몰려 죽어가는 모습을 보았을 때, 어머니의 가슴은 칼에 꿰찔리듯 아마 그 이상으로 아팠을 것이다. 시메온의 뒤를 이어 한나가 등장한다. 한나 역시 성전에서 봉헌되는 구세주 아기 예수가 누구신가를 알아보고 기뻐하며 다른 이들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증언하였다. 한나는 일찍이 사별하였지만, 성전에서 일생을 봉사와 기도로써 살았다. 마침내 한나는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구세주 아기 예수를 두 눈으로 볼 수 있는 기쁨을 맛보게 되었다. 나이를 먹고 기운이 없어져도 오늘 복음의 한나처럼 믿음 안에서 주님께 봉사하며 기도하는 속에서 구세주 그리스도를 찾고 만나는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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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봉헌’은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것을 바치는 일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그들은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 그들은 또한 주님의 율법에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치라고 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성령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셨다. 그가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기에 관한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려고 부모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들어오자, 그는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루카 2,22-32)
1) ‘주님의 봉헌’을 겉으로만 보면 성모님과 요셉 성인이 아기 예수님을 하느님께 봉헌한 일로, 즉 예수님이 ‘봉헌되신’ 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또는 신앙의 관점에서는)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봉헌하신’ 일입니다. <예수님이 하느님께 ‘바쳐진 일’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바치신 일’입니다.>
요한 사도는 요한복음의 머리글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
또 바오로 사도는 필리피서에서 이렇게 찬미했습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6-8)
아기 예수님이 자라서 나중에 메시아가 된 것이 아니라, 메시아께서 아기 예수님으로 오셨는데, 그 일은, 또 사람들과 똑같은 사람이 되어서 사신 것은, 당신이 원해서 하신 일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봉헌’도 수동적으로 ‘봉헌되신’ 일이 아니라, 당신이 원해서 능동적으로 당신 자신을 ‘봉헌하신’ 일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하느님이신 분이기 때문에 ‘봉헌’을 하지 않아도 되는데, 세례와 마찬가지로 겸손과 순종의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 당신 자신을 봉헌하신 것으로 해석합니다.>
2) ‘봉헌’은 내가 나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일입니다. ‘남이 나를’ 바치는 것도 아니고, ‘내가 남을’ 바치는 것도 아닙니다.
만일에 남의 목숨이나 남의 재물을 바친다면, 그것은 봉헌이 될 수 없고, 죄를 짓는 일이 될 뿐입니다. ‘판관 입타’의 경우에, 전쟁에서 이기게 해 달라고 간청하면서, 자기를 맞으러 처음 나오는 사람을 번제물로 바치겠다고 서원했습니다.(판관 11,30-31) 자기 목숨이 아니라, 남의 목숨을 바치겠다는 그 서원은 옳은 것일까?
식구들과 하인들을 모두 자기 재산으로 생각하던 당시의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것은 원천적으로 무효인, 잘못된 서원입니다. 그런데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간 입타를 맞으러 처음 나온 사람은 바로 ‘하나밖에 없는 딸’이었습니다.(판관 11,34)
그때 그는 자기가 잘못된 서원을 했다는 것을 깨닫고, 자기 죄를 고백하고, 그 잘못을 바로잡았어야 했는데, 즉 잘못된 서원을 취소하고 올바른 서원으로 바꿨어야 했는데, 그는 한 번 서원한 것은 그대로 지켜야 한다는 생각만 하면서 딸을 번제물로 바쳤습니다.(판관 11,39) 잘못된 서원으로 인한 잘못된 봉헌이니, 그것은 결코 봉헌으로 인정받을 수 없는 일이고, ‘큰 죄’를 지은 일입니다.
3) ‘봉헌’은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것을 바치는 일입니다. 판관 입타의 경우를 다시 생각하면,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사람의 목숨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신 적이 없습니다. <입타의 서원에 대해서 하느님께서는 한 마디도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입타는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는 생각하지 않고, 또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예물이 무엇인지도 생각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판단해서 ‘남의 목숨’을 바쳤습니다. 선하신 하느님께는 ‘선한 예물’만 바쳐야 합니다.
만일에 도둑질이나 강도짓을 해서 마련한 것을 예물로 바치면 하느님께서 그것을 받으실까? 도둑질이나 강도짓도 큰 죄이지만,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는 더 큰 죄입니다.
4) ‘봉헌’은 ‘나의 것’을 하느님께 바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하느님의 것’을 돌려드리는 일입니다. 나의 목숨과 나의 인생 전부를 봉헌한다고 해도 그렇습니다.
그것은 원래 하느님의 것이고, 하느님께서 잠시 나에게 맡겨 주신 것일 뿐입니다. 그러니 봉헌을 자랑할 것도 없고, 생색낼 것도 없습니다.
5) ‘봉헌’은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일입니다. 뭔가를 많이 바치면 하느님께서 복을 많이 주실 것이라는 생각으로 하는 일이라면, 그것은 봉헌이 아니라 하느님과 거래하는 일이 될 뿐입니다.
은총은 무상으로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느님과 거래하는 생활이 아니라,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생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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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황창희 알베르토 신부님]
<어느 늙은 예언자의 기도>
시메온은 예루살렘에 살면서 의롭고 독실하게 살았던 사람으로, 이스라엘이 구원받게 될 때를 평생 기다리며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성령께서는 항상 시메온과 함께하였는데, 성령께서는 시메온이 구세주를 뵙기 전에는 그가 죽지 않을 것임을 미리 알려주셨습니다.
예수께서 태어나신 후 정결례를 바치기 위해 예수의 부모는 아기 예수를 정해진 율법대로 하느님께 바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정결례를 바치기 위한 제물을 바치려 성전에 들어왔을 때 시메온은 아기 예수와 그의 부모를 만나게 됩니다.
꿈에도 그리던 구세주를 만난 시메온은 자신의 평생소원이었던 구세주를 직접 만나게 되는 감동의 순간을 맛보게 됩니다. 노인이었던 시메온은 아기 예수를 두 팔에 안아 들고 하느님께 감동의 기도를 바칩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루카 2,29-32)
평생 구세주를 만날 생각으로 매일 같이 성전에서 기도를 바치던 늙은 예언자의 꿈이 현실로 이루어진 순간, 시메온은 아이의 어머니였던 마리아에게 예수가 지닌 구원자로서의 삶과 고통에 관해 예언합니다. 예수께선 이스라엘의 많은 사람이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반대를 받게 될 것이고, 결국 어머니의 가슴이 칼에 꿰 찔리는 고통을 얻게 될 것이고, 모든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밖으로 드러날 것임을 예언합니다.
가장 축복받을 은총의 순간에 가장 고통스러운 메시지를 받은 성모님의 마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생각해 보면 우리의 봉헌 역시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 알 수있습니다. 축하와 축복의 순간에도 고통과 죽음을 받아들여야 할 운명을 지니고 태어난 예수. 그분의 삶에 비추어 우리 자신도 겪게 될 고통과 죽음에 대해 묵상해 봅니다.
거룩한 교회는 성무일도의 끝 기도에서 매일 밤 자기 전에 바치는 기도로 이 늙은 예언자의 기도인 ‘시메온의 노래’를 바칩니다. 교회는 우리 신앙인들이 매일 밤, 잠들기 전 어떤 기도를 바쳐야 하는지 후렴구를 통해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낮 동안 우리를 활기 있게 해 주신 주여,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리니, 자는 동안도 지켜주시어 편히 쉬게 하소서.”
주님 봉헌 축일은, 우리 신앙인에게 예수의 부모가 당신의 어린 아들을 하느님께 정결하게 바쳤던 것처럼 우리 역시 우리 자신을 봉헌된 삶으로 이끌어 가야 함을 강조합니다. 주님 봉헌 축일이 단순히 축성된 생활을 수행하는 성직자나 수도자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신앙인의 축제가 되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이러한 봉헌된 삶이 모든 이에게 열려 있는 하느님의 초대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주님 봉헌 축일을 보내면서 우리는 과연 지금까지 하느님께 무엇을 봉헌하며 살아왔는지, 그리고 앞으로 무엇을 봉헌하며 살 수 있을지 다시 한번 자기 삶을 돌아봅시다.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이 바로 우리 자신이 될 때, 우리는 구세주를 평생 기다려온 늙은 예언자였던 시메온이 고백했던 것처럼 우리 자신도 이렇게 고백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주님!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루카 2,3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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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김준교 스테파노 신부님]
<내가 할 수 있는 봉헌은?>
'주님 봉헌 축일'에는 본당과 가정에서 일 년 동안 사용할 초를 미사 중에 축복합니다. 예로부터, 초는 특별한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거룩한 전례에 쓰일 초를 축복하는 오늘, 초의 의미에 대해서 잠깐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초는 무엇보다 어둠을 뚫고 이 세상을 밝히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세상 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셨고, 우리 역시 이 세상의 빛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촛불은 빛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심을 드러내는 표지이며 동시에, 세상 의 빛으로 살아갈 것을 약속하는 우리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두 번째로, 밀초는 죄 없이 순결한 성모님을 통하여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벌들은 꿀 을 보관하고 알과 애벌레를 키우기 위해 벌집을 짓는데, 이때 벌들이 만드는 순수한 물질을 '밀랍'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밀초의 재료인 밀랍의 순결함 안에서 교회는 그리스도를 발견합니다.
세 번째로 초가 스스로 타면서 빛을 내듯이, 이 초는 당신 자신을 희생하심으로써 인류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결한 희생을 상징합니다. 전례와 기도 안에서 초를 봉헌하는 우리는, 예수님처럼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여 사랑을 위한 희생과 헌신을 결심하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는 초를 켤 때마다,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순결함과 희생을 본받아 우리 자신을 봉헌하겠다고 다짐해야 합니다. 사형을 선고받은 아들 안중근에게 어머니 조마리아가 수의와 함께 보냈다는 편지 내용이 떠오릅니다.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다른 맘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를 위해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세상 어떤 어머니가 아들에게 죽으라고 할까요? 하지만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는 아들을 하느님께, 아들을 나라에 봉헌했습니다. 그 결과, 안중근 의사는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지 않고 당당히 나라를 위해 목숨을 내놓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성모님과 요셉 성인은 가장 소중한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였습니다. 성모님께서 시메온의 예언을 듣고 두려워 예수님을 봉헌하지 않았더라면 구약의 예언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느님께 봉헌되십니다. 이에 우리도 합당한 봉헌을 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다음의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무엇을 했는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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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장훈철 바오로 신부님]
<참된 봉헌은 자기비움입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지 40일째 되는 날로써 아기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느님께 봉헌된 것을 기념하는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지금껏 많은 신자분과 면담을 하면서 가장 빈번하게 받은 질문이 ‘주님께서는 언제쯤 제 기도를 들어 주실것 같습니까?’라는 것이었고 그리고 그 다음이 ‘주님께서는 제 기도만 들어 주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에 대해 일정 부분 이해가 되는 면도 있기는 합니다. 특히 삶의 역경을 겪고 있거나 병고의 아픔이 닥쳐왔을 때면 더더욱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 여겨지기에 그 마음을 이해해 주려 하고, 함께 아파하며 기도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신앙인으로서 주님께 대한 좀 더 굳건한 믿음과 확고한 의탁이 부족하고 주님의 사랑과 자비로우심을 기다리는 인내가 부족함에 못내 아쉬울 때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이럴 때 자칫 잘못하면 청원기도나 예물 봉헌을 하는 것이 자기만족이나 자기보상 혹은 세속적인 이익을 얻기 위한 방편 혹은 수단으로 여기게 되는 유혹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인간이 그들이 믿는 신에게 바치고 신의 마음에 들어 그에게 어떤 혜택을 준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청원과 봉헌에 대한 잘못된 이해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봉헌을 통하여 인간이 하느님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우리 인간이 변화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청원기도나 봉헌은 나의 능력으로 하느님을 움직여 원의를 얻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섭리를 믿고 따르겠다는 겸손된 기도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봉헌에 따른 원의의 실현은 내가 원하는 때가 아니라 주님께서 허락하신 그때를 믿고 기다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이를 확실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죽기 전에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안을 것이라는 약속을 믿고 기다려온 시메온 예언자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주님께서 하신 약속은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을 믿어 고백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정성 어린 봉헌의 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봉헌이 손해 보는 것 같이 느껴지고 바보처럼 어리석어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참된 봉헌은 자기만족과 성취를 이루기 위함이 아니라 자기희생이며 자기를 내어줌으로 이미 주님께 받은 것을 되돌려 드리는 비움임을 고백해야 하겠습니다.
오늘은 제대에 쓰일 초를 봉헌하는 날입니다. 정성된 봉헌을 통하여 세상의 빛으로 오시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우리 모두 자신을 녹이며 세상의 빛으로 타올라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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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 (루카.2,23)
내가 태어났을 때 어머니는 너무 힘드셨기에 할머니는 나를 안고서 “성모님, 차라리 종오를 얼른 데리고 가이소.”라며 탄식이 섞인 기도를 바치셨다고 합니다.
갓 태어난 내가 싫어서가 아니라, 어머니의 고통을 지켜보시던 할머니의 마음이 너무 안타까우셨던 것입니다.
할머니가 바치신 탄식 어린 봉헌 기도 덕택인지 나는 중 고등학교 때부터 매일 바치던 저녁기도 중에 특히 ‘봉헌기도’가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봉헌 기도 중 아직도 “찬미와 봉사의 제물로 드리오니”라는 부분에 이르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설레고 때로는 감격스럽기도 합니다,
개정 전 그 봉헌 기도문을 오늘은 다시 한번 더 봉독하며 오늘은 축성 생활을 다시 다져봅니다.
“천주여 나를 사랑으로 내시고 나에게 영혼 육신을 주시고 다만 주를 위하고 사람을 도우라 명하셨나이다. 내 비록 죄가 많사오나 주께 받은 몸과 마음을 오롯이 찬미와 봉사의 제물로 드리오니 어여삐 여기시어 받아들이소서.”
할머니의 기도대로 예수 성심과 예수 성심의 우리 어머니께 나를 봉헌하며 축성 생활을 위한 서원을 발한 지 36년이 다가옵니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어느 설날에 오랜만에 고모님을 찾아 뵌 날이 있었습니다. 나의 수도 생활에 대해 그다지 말씀도 드리지 않았는데, 내가 겪은 봉헌 생활의 아픔을 어떻게 아시고 나를 만나 우시는 것을 보고 나도 함께 눈시울을 적셨던 일이 생각납니다.
봉헌 기도를 바칠 때 뿐 만 아니라, 나의 축성 생활이 사람들과 세상에게 설렘을 주고 싶은데, 아직도 온전히 바치지 못하고 있는 미숙한 나의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 한 곳이 저려옵니다.
주님 봉헌 축일이며 축성 생활의 날을 맞이하여 가난과 순명과 독신 수도 서원과,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라는 서품 성구를 가슴에 다시 새겨봅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2장 18절 말씀을 묵상하며 용기의 은총을 청합니다.
"그분께서는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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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00년 초반, 스티븐 코비의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이라는 책이 엄청난 인기를 끌었습니다. 광고에 “부자 되세요~~”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사람들은 성공에 집착했습니다. 저 역시 이 책을 읽으며 세속적인 성공은 아니더라도 나의 변화가 필요함을 깨달았고, 특별히 시간 관리의 중요성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엄격하게 시간 관리를 했습니다.
엄격한 시간 관리 안에서 커다란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생활이 경직되는 것입니다. 틀에 갇혀 인생의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마음의 여유와 즐거움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래서 큰 틀을 짜고 그 안에서 자유롭게 생활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아마 어렸을 때, 방학 중 하루 일과표를 만들어 본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그대로 하루를 산 적이 있습니까? 분명히 또 당연히 그렇게 살 수 있을 것만 같은데 실제로는 살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은 큰 틀을 짜고 저만의 루틴을 만들어 가며 삽니다. 굳이 몇 시간 책을 읽고, 1시간 운동하고, 기도 시간 2시간…. 이런 식으로 배분하면서 살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세상은 틀 안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한 가지, 주님의 뜻을 잃어버리면 목표 없이 살게 됩니다. 주님의 뜻을 간직하면서 자유롭게 사는 것이 진정으로 이 세상을 누리면서 살 수 있습니다.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성모님께서 모세의 율법대로 정결례를 치르시고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하느님께 봉헌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주님의 봉헌을 바라보면서 성모님과 요셉 성인의 마음을 떠올려 봅니다. 예수님의 탄생 전까지 얼마나 많은 일이 일어났습니까?
예수님의 탄생 예고를 듣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얻은 아기, 파혼해야 마땅할 것 같지만 꿈에서 들은 천사의 메시지를 받아들여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인 일, 예수님의 탄생 후 동방박사의 방문, 헤로데의 학살을 피해서 이집트로 피신한 일 등…. 믿기 힘든 일들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모님과 요셉 성인은 큰 틀에서 일치했습니다. 바로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시메온 예언자와 한나 예언자도 마찬가지였지요. 그들 역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삶에서 벗어나지 않았기에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알아보고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그들의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큰 틀에서 벗어나, 세상의 틀에서만 바라봤다면 아기 예수님을 알아볼 수도 그래서 하느님을 찬미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틀은 과연 어떤 것일까요?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틀에만 매여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우리와 함께하는 주님의 사랑을 전혀 알아채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철저히 하느님의 뜻이라는 틀을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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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오롯한 만남>
루카 2,22-40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봉헌하다, 시메온과 한나의 예언)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 그들은 또한 주님의 율법에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치라고 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성령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셨다. 그가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기에 관한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려고 부모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들어오자, 그는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아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기를 두고 하는 이 말에 놀라워하였다. 시메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한나라는 예언자도 있었는데,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 출신이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그런데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 그들은 갈릴래아에 있는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갔다.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오롯한 만남>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루카 2,22)
당신께서 빚으신
나를 만납니다
나를 빚으신
당신을 만납니다
당신께 받는
나를 만납니다
나에게 주시는
당신을 만납니다
당신께 드릴
나를 만납니다
나를 받으실
당신을 만납니다
당신께 드리는
나를 만납니다
나에게 받으시는
당신을 만납니다
당신께 드린
나를 만납니다
나를 받으신
당신을 만납니다
당신을 만나는
나를 만납니다
나를 만나시는
당신을 만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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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 마음에 드는 제물>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동정녀 마리아와 성요셉이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당시 모세의 율법은“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되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봉헌은 하느님께서 주신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온전히 쓰임 받기를 원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의 삶이 봉헌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봉헌되었듯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축성된 우리도 매 순간 자신을 주님께 봉헌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세상의 모든 재물보다 더 가치 있는 보물을 찾은 사람들”입니다. 축성 받을 때, 마귀의 모든 허례허식을 끊어버리기로 약속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바라보며 우리를 위한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제단의 초를 바라보며 자신을 불태워 빛을 밝혀야 하는 사랑의 응답을 일깨워야 합니다. 십자가를 사랑하면 할수록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고, 우리를 위해 모두를 내어주신 그분처럼 행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초는 자신을 녹여야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자신을 내어놓는 우리의 희생과 헌신을 통하여, 더 큰 사랑을 통하여 세상은 새롭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시메온 이라는 사람의 시선을 봅시다. 시메온은 의롭고 독실하였고, ‘주님께서 약속하신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는 성령의 알림을 받았으며, 이스라엘에 내려질 위로, 곧 메시아가 가져다줄 구원을 기다렸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기다릴 줄 알았으며 마침내 주님을 직접 뵈었습니다. 주님을 향한 시선을 놓치지 않고“끝까지 기다렸습니다!” 끝까지 말입니다. 우리의 시선은 어디를 향하고 있나요? 주님인가요? 아니면 나 자신인가요? 은총을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합니다.
시메온은 성령께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고 아기 예수님을 두 팔에 받아 안고 하느님을 찬양할 수 있었습니다. 시메온은 기다림의 열매 앞에서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안히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루카2,29-32).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이 고백은 세상의 빛이신 주님을 만났으니,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성령의 이끄심에 자기 자신을 내어 맡기며 자발적으로 걸어가야 하는 소명을 일깨워줍니다. 우리는 걸어가야 합니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성전으로 나와야 하고, 성령의 힘을 얻어 세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구원을 선포해야 합니다.
구세주를 알아본 후 시메온은 자신을 ‘당신 종’이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종입니다. 예수님께 시선을 두는 우리는 ‘주님의 종’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웃을 섬기고 봉사해야 합니다. 내 삶의 자리를 사랑을 실천하는 자리로 만들어야 합니다. 가난한 예수님을 환대한 시메온처럼 이웃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연민의 시선이 필요합니다. 항상 예수님을 주시하고 그분을 찬미하면서 이웃을 직접 만날 수 있길 바랍니다.
옛말에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도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간직하고, 희망하는 대로 살아감으로써 ‘죽어도 여한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백년을 살든 천년을 살든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깊이 알아서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신앙의 목적도 바로 구원입니다. 영원한 생명, 하느님의 나라에 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의 권력과 부가 아니라 주님을 차지해서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하고,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열망이 있는 만큼 하느님의 뜻에 걸맞은 삶으로 기다림을 간직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축성된 사람이고, “사람이 하느님에게 바칠 제물은 감사하는 마음이요, 사람이 지킬 것은 지존하신 분에게 서원한 것을 갚는 일”(시편50,14)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봉헌은 우리의 봉헌을 재촉하고 있으며 그 봉헌은 삶의 자리에서 이루어집니다. 의롭고 독실하게 살아온 시메온은 성령과 함께 기다림의 삶을 살아왔고 그 안에서 위로와 구원이 이루어졌으니, 지금 내 삶의 자리가 바로 천상과 연결되고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천상을 갈망하는 만큼‘지금, 이 순간’을 잘 살아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마지막 기회일 수 있고, 내가 살고 있는 삶의 자리가 구세주가 찾아오는 자리이며, 그 자리를 가꾸는 것은, 우리 각자의 몫입니다. 지금 삶의 자리에서 이 순간을 사랑할 수 있기를 희망하며 날마다 순간마다 주님으로 만족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형제 여러분, 내가 하느님의 자비에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로마12,1).
온 마음으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가 될 수 있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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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함승수 세례자요한 신부님]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어떤 농부가 기르던 암소가 한 번에 두 마리의 송아지를 낳았습니다. 보통 잘 일어나지 않는 특별한 일이었기에 농부는 너무나 기뻐했지요. 독실한 천주교인이었던 그는 그것이 하느님께서 많은 은총을 베풀어 주신 덕분이라고 생각하여 두 송아지 중 한 마리는 하느님께 봉헌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소를 하느님께 봉헌할 지를 결정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두 송아지가 겉모습이나 하는 행동, 성향까지 똑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내에게 의견을 물었습니다. “여보, 두 마리 중 어느 것을 ‘하느님의 소’로 하고, 어느 것을 ‘우리 소’로 하지?” 그러나 아내도 결정을 내리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 먼저 눈길이 가는 소를 ‘하느님의 소’로 결정해서 봉헌하자고 했습니다. 이튿날 아침 농부가 마당으로 나가보니 한 송아지가 기운이 넘치는지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송아지가 보이지 않아서 찾아보니 간밤에 맹수의 공격을 받았는지 집 뒷 뜰에 피를 흘리며 죽어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농부는 어두운 표정으로 한참을 고민하더니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여보, 이 일을 어쩌면 좋지? 글쎄 ‘하느님의 소’가 죽고 말았구먼.”
가톨릭 교회는 주님 성탄 대축일 후 사십일 째 되는 날을 “주님 봉헌 축일”로 지냅니다. 소중한 외아들을 하느님께 기꺼이 봉헌하신 성모님과 요셉 성인의 모습을 본받아, 내가 가진 것을 하느님을 위해, 그분 뜻을 이루기 위해 기꺼이 봉헌하겠다는 마음가짐을 되새기는 것이지요. 그렇게 하는 이유는 앞서 들려드린 예화 속 농부처럼, 욕심과 집착에 쉽게 휘둘리는 우리 마음이 참된 봉헌을 어렵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삶에서 하느님께 내어드리는 참된 봉헌이 어떤 의미이며 왜 중요할까요? 그건 먼저 ‘부모’의 입장에서 아들을 하느님께 봉헌한 성모님과 요셉 성인의 모습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신앙으로 하느님께 봉헌하지 않고 자기 뜻대로 휘두르려 하면, 자녀는 그 부모의 품 안에 갇혀 버리게 됩니다. 독립할 때가 지나도 어미의 주머니 속에 사는 새끼 캥거루처럼, 제 힘으로는 제대로 걷지도 먹이를 구하지도 못하는 나약하고 불완전한 존재로 점점 퇴화되다가 캥거루로써의 삶을 제대로 펼쳐 보지도 못하고 죽고 마는 겁니다. 그래서 부모는 자녀를, 스승은 제자를, 친구는 다른 친구를 하느님께 봉헌해야 합니다. 그 사람을 내 고집과 집착 속에 가두려 들지 말고, 하느님의 커다란 섭리 안에서 맘껏 뛰놀며 제 행복을 온전히 누리도록 이해와 포용, 존중과 배려, 사랑의 힘으로 그를 응원하고 격려해주는 것이지요. 그런데 ‘사람의 봉헌’만큼 중요한 것이 ‘사물의 봉헌’입니다. 우리는 보통 사람보다는 ‘내 것’이라고 생각되는 사물을 대할 때 더 강한 집착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 손에 있다고 그것을 ‘내 것’이라 여기며 집착하지 말고, 그것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잘 쓰일 수 있도록, 그렇게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뜻이 온전히 실현되도록, 나눔과 봉헌을 통해 내 손에 쥔 것들을 하느님 섭리 속으로 흘려보내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모는 그런 마음으로 외아들을 하느님께 바쳤습니다. 율법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기에, 그렇게 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 여겼기에 기꺼이 따른 것이지요. 가장 소중하고 귀한 것을, 내 생명과도 바꿀 수 없는 ‘전부’를 하느님께 내어드렸으니, 그 대가로 더 큰 것을 달라고 욕심낼 일도, 세상 일에 대한 걱정이나 근심으로 마음이 갈라질 일도 없었을 겁니다. 오직 하느님만 바라보며 그분께서 이끄시는대로, 감사하고 기쁜 마음으로 다른 모든 것들도 기꺼이 하느님께 내어드릴 수 있었습니다. 봉헌은 내 것을 하느님께 억지로 빼앗기는게 아니라, 내가 가장 아끼는 소중한 사람 혹은 사물이 전능하신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자기 존재의 의미를 온전히 실현하도록 하느님께 맡겨드리는 일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통을 겪어도 억울하지 않았고, 시련이 닥쳐와도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자비로운 손길로 나를 참된 행복으로 이끄시니, 그분을 굳게 믿고 그분의 선한 뜻을 신뢰하며 따르기로 결정하신 겁니다. 그 결정이 아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걸을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지요.
마리아와 요셉의 그런 모습은 우리에게도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도록 재촉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봉헌은 성당에서만이 아니라, 삶의 자리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시메온이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의롭고 독실하게 살았듯이 우리도 성령의 인도에 따라 하느님 보시기 좋은 일들을 충실히 행하며 그분과 깊은 친교를 맺어야 합니다. 한나가 하느님만 오롯이 바라보며 밤낮으로 그분을 섬겼듯이, 우리도 세상의 유혹에 휘둘리지 말고 하느님만 바라보며 그분 뜻에 맞는 일들을 충실히 실천해야 합니다. 그것이 나 자신을 하느님께 온전히 내어드리는 참된 봉헌이며, 그런 참된 봉헌을 행할 때 우리가 희망하는 구원이, 하느님 나라가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깨닫고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이 고된 세상살이를 이겨낼 힘을 우리에게 줄 것입니다.
오늘 주님 봉헌 축일을 맞이하여 각 본당에서는 1년 동안 전례에 사용할 초를 축성합니다. 봉헌 축일에 초를 축성하는 것은 초가 가지고 있는 세 가지 특성을 예수님의 모습에 연관지어 묵상하며, 나 자신을 하느님께 어떻게 봉헌해야 할 지 그 길을 찾기 위함입니다. 첫째, 초는 밝은 빛을 줍니다. 예수님께서도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육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눈 먼 우리의 눈을 뜨게 하시어 구원의 빛을 보여주셨습니다. 둘째, 초는 따뜻함을 줍니다. 예수님께서도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 희망을 주시고, 고통을 겪는 이들을 위로하셨습니다. 돌아온 탕자를 따듯하게 맞이하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를 행동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셋째, 초는 자신의 모든 것을 태워 세상을 밝게 비춥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바치심으로써 죄악의 어두움을 몰아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우리가 이 말씀처럼 주님의 뜻과 가르침을 충실히 실천하며 살면 하느님을 닮은 거룩한 모습으로 변화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런 우리에게 은총과 복을 충만하게 베푸시어 우리 각자가 ‘존재의 의미’를 완전히 실현하게 하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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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이며, 특별히 금년은 ‘한국 교회 축성 생활의 해’를 기념하면서 축성된 남녀 수도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오늘 강론은 봉헌 축일에 적절한 이야기로 시작하렵니다. 프랑스 파리의 어느 성당에서 봉헌 축일을 맞아 어려운 이웃을 위한 헌금을 하는 중이었습니다.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지만, 서양에서는 봉헌 바구니를 돌릴 때 만약 큰돈을 가졌는데 적게 내고 싶으면 봉헌 바구니 안에 큰돈을 놓고 잔돈을 거슬러 갈 수도 있다고 합니다. 자기 형편대로 그리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만큼 하는 것은 흉이 되지 않기 때문이지요. 아무튼 그 봉헌 바구니가 어느 눈먼 사람 앞에 멈추었습니다. 그 사람은 주변의 사람들도 잘 아는 사람으로 단 1유로도 헌금할 수 없는 형편의 가난한 사람이었지요. 그런데 자그마치 27유로를 접시에 세어서 놓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란 옆 사람이 “당신이 어떻게 그 많은 돈을?” 하고 묻자, 눈먼 사람은 웃으며 이렇게 말하더래요. “저는 눈이 안 보이지요. 그런데 제 친구에게 물어보니 저녁때 불을 켜는 비용이 일 년에 27유로가 든다고 하더군요. 나는 불을 켤 필요가 없으니 일 년이면 이만큼의 돈을 저축할 수 있겠구나, 생각하고 모은 거죠. 그래서 예수님을 몰라 어두운 곳에 있는 어려운 이웃들에게 참 빛이 비치도록 하고 싶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 봉헌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도록 합니다. 자기에게 쓰고 남은 것만을 봉헌해야 한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우리, 그러다 보니 제대로 된 봉헌을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늘 부족하다는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지요. 특별히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이고, 축성 생활의 날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율법에 기록된 대로 성전에서 봉헌되셨다고 전해 줍니다. 그런데 교회는 주님 봉헌 축일을 2월 2일로 지냅니다. 어떤 의미일까요? 40은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가나안에 이르기까지 광야에서 떠돌던 그 40년이고, 주님께서는 광야에서 유혹받으신 그 40일입니다. 이 40은 시련과 정화의 과정을 거치는 기간이고 이 과정을 거쳐 아버지에게서 오신 주님께서 다시 아버지께 돌아가시는 기간입니다. 그러므로 40일의 첫날인 주님의 성탄은 주님께서 하늘에서 세상으로 봉헌되심을 뜻하는 것이라면, 40일의 마지막 날인 주님의 봉헌 축일은 주님께서 십자가 위, 즉 이 세상에서 하늘로 봉헌되심을 뜻하는 것이고, 주님의 성탄이 하늘의 성부께서 아드님을 이 세상에 봉헌하신 것이라면, 주님의 봉헌은 지상의 부모가 아드님을 성부께 봉헌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첫 번째 주님 봉헌은 육화의 봉헌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을 우리에게 봉헌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세상 가운데로, 우리 가운데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두 번째 주님 봉헌은 십자가 희생, 수난의 봉헌입니다. 주님께서 성부께 순종하여 우리를 위해 당신 목숨을 바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 봉헌의 축일에 시메온은 어머니 마리아에게 아주 섬뜩한 예언을 합니다. 장차 예수님을 하느님께 봉헌한 마리아는 장차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영혼이 예리한 칼에 찔릴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주님은 육화와 수난의 두 봉헌을 통해 세상의 빛이며 구원자로 세상을 밝히시겠지만, 그 빛 가장 가까이 서 계신 어머니 마리아는 등잔 밑이 상대적으로 묵직하고 어두운 아픔을 겪게 되실 것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교회는 모든 남녀 수도자의 삶이 다른 이들에게 빛이 되길 바라면서 봉헌의 날로 제정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많은 수도회는 이를 기억하면서 서원식을 통해서 주님의 이 봉헌을 본받아 자신을 하느님께 바칩니다. 수도 생활을 축성 생활이라 칭함은 아마도 수도 생활의 본질이 바치는 데 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하는 것이다, 라고 생각합니다. 바치는 삶, 비우는 삶, 결국 자신은 없어지는 삶이 수도 생활이란 말입니다. 축성 생활의 날을 맞이하면서 수도자인 저는 무엇을, 얼마나 주님께 바쳐드리고 살아왔는지 반성해 봅니다. 저의 서원 생활을 되돌아보면서, 과연 내 삶이 바치는 삶이었는가? 끝없이 비우는 삶이었는가? 끝없이 자신을 죽이는 삶이었는가?
수도 생활에 입문할 무렵, 되돌아보니 그땐 참으로 순수했습니다. 사도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바칠 기세였습니다.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라는 사도 바오로의 고백이 저의 삶인 듯 여겼습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흔적 없이 흘러가는 강물처럼 흘렀습니다. 예전 아홉 분의 수녀님들이 저희 수도회에 오시어 미사를 함께 봉헌하면서 지난 한 해를 되돌아보고, 서원 갱신을 하셨습니다. 이 예식을 하고 난 뒤 수녀님들은 자신들의 수도 생활에 대해서 나누는 귀한 시간 가졌습니다. 어느 수녀님은 지난 수도 생활을 되돌아보면 부족하고 부끄러운 삶을 살아온 듯싶어서 하느님 앞에 한없이 초라하고 부끄럽기 그지없다고 하더군요. 과거 저 역시 그런 느낌이 들었지만, 지금은 어떤 삶도 잘못된 삶이나 부끄러운 삶은 없다고 느낍니다. 잘 살았는지 못 살았는지 판단은 하느님께서 하실 것이며 다만 얼마큼 충실했는가 충실하지 않았는가를 되묻고 충실히 살면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잘 살면 얼마나 잘 살겠습니까? 어떤 누구인들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면 직선이라기보다 곡선이었을 것입니다. 곡선을 직선으로 바꿔주시는 분은 바로 주님이시기에 주님 앞에 도달할 때까지 충실히 살면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내어 드리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또 자기의 생각으론 저 많은 부끄러움이나 후회스러움은 하느님의 눈에는 전혀 후회스럽지 않고 부끄럽지도 않게 보실 것입니다.
다만 필요한 것은 항구한 충실성과 기다림이라고 봅니다. 수도자들에게 오늘 예수님께서는 두 노인을 축성 생활의 이정표로, 또 다른 새 출발의 표지로 세워주십니다. 그들이 바로 예루살렘의 시메온과 한나입니다. 그들은 기다림의 사람이었습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뜻이 드러날 때까지 충실히 기다리는 것이다, 라고 생각합니다. 다들 메시아를 기다리다 지쳐 포기하고 말았는데, 다들 내 나이에, 내 주제에 메시아는 무슨, 하고 절망의 세월을 보내다가 세상을 떠났는데, 그들만큼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숱한 사람들이 끝내 구원의 빛을 보지 못한 채 이 세상을 하직했는데, 그들은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고 ‘때’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던 것입니다. 시메온은 그런 기다림 끝에, 마침내 부모의 팔에 안겨 성전 안으로 들어오시는 메시아 하느님을 뵙는 일생일대의 행운을 잡게 됩니다. 과분하게도 하느님을 자신의 두 팔에 안아보는 기쁨을 누립니다. 그 기쁨이 얼마나 컸었던지 시므온 예언자는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주님,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이 종은 평안히 눈감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구원을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한평생 오로지 주님께만 희망을 두며 주님께만 충실했던 시므온 예언자였기에 주님께서는 그에게 주님을 직접 눈으로 뵙는 기쁨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또한 한나 역시 무려 60년 가까이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봉헌 생활을 해오신 결과, 자기의 눈으로 하느님을 뵙게 되었습니다. 시메온과 한나처럼 끝까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항구하게 충실히 살아가는 봉헌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상상을 초월하는 하느님의 상급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그 열렬한 기다림을 바탕으로 우리는 하느님 사랑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인내 끝에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가 얼마나 큰 것인지, 그분 사랑이 얼마나 감미로운 것인지를 제대로 깨달을 수 있습니다. 결국 신앙생활, 수도 생활, 축성 생활의 핵심은 충실성이며 지속성입니다.
지금 삶의 자리가 어디인지가 아니라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각자에게 맡겨진 삶을 통해서 주님처럼, 성모님처럼 우리 역시도 봉헌의 삶을 살아야겠지요. 수도자만 주님의 봉헌을 본받아야 한다면 굳이 교회 전체 축일로 오늘을 지낼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봉헌해야겠습니까? 주님께서 하신 대로입니다. 봉헌의 참된 의미를 실제로 보여 주신 주님의 빛을 받고 세상 가운데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촛불이 자신을 희생해서 불을 밝히듯이, 세상을 밝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자신의 촛불을 함지나 침상 밑에 두지 않고 자기의 삶을 통해서 어두운 주변을 비추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고 하느님께 속한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세상 가운데 살아가지만,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닮아서는 아니 됩니다. 마치 연꽃이 흙탕물에 피지만 결코 그 물에 잠기는 법이 없이 세상에 아름다움과 향기를 풍기듯이, 우리도 하느님께 속한 사람이고 봉헌된 사람으로 세상을 복음화하되 자기가 세속화되는 일 없이 세상 한 가운데서 복음의 향기를 풍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연등처럼 어둠을 비추는 작은 촛불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뜻으로 교회는 오늘 1년 동안 쓸 초를 축성하는 것입니다. 축성된 초를 받아 들고 집으로 돌아가 매일 그 초를 켜고 기도를 드림으로써 먼저 자신을 성화하고 또한 자신이 이 초와 같이 세상을 밝히겠다, 고 다짐을 하는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여러분이 아시는 수사님과 수녀님을 기억하시면서 기도해 주길 바랍니다. 그 옛날 예수님께서 자신을 성전에 봉헌하시고 마침내 십자가상의 봉헌으로 봉헌 생활을 완성하셨듯이 모든 수도자도 자신의 서약으로 봉헌한 삶을 통해 끊임없이 비우고 버리고 바쳐드리는 삶을 통해 세상의 빛으로 살아가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저 또한 이 미사 안에서 해외에서 활동하고 계시는 모든 수도자를 기억하고 기도드립니다. 더욱더 봉헌의 삶, 아름다운 비움의 삶에 정진하길 바라며 저희에게 빛을 비추어 주길 바랍니다. 저는 이 아름다운 성소로 불러 주신 주님께 오늘 하루 질퍽하게 감사를 드리며, 동반하고 있는 모든 신자분 모두에게 감사합니다. 특별히 오늘 복음에서 가장 눈에 뜨이는 것은 봉헌하신 부모님과 봉헌된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토라의 후대 작품인 탈무드에서는 자녀는 부모의 소유가 아니고 하느님의 소유이며 부모에게 잠깐 맡긴 것으로 설명합니다. 이 정신은 구약의 토라에서 비롯되어 맏자식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입니다. 성가정의 부모님이신 성요셉과 성모 마리아의 위대하심은 율법 전통에서 아드님 예수를 봉헌하셨지만, 중요한 사실은 그분들은 진정한 본보기는, 하느님의 것을 자기 소유라 취급하지 않고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돌려 드리는 신앙의 자세에 있다고 봅니다. 이런 점에서 모든 봉헌의 삶을 살아가는 분들의 뒤에는 자식을 자신들의 소유라 여기지 않고 기꺼이 하느님께 봉헌하신 부모님이 있다, 는 사실을 잊지 말기 바라면 여러분들 또한 그런 신앙의 정신으로 자녀들을 봉헌하길 바랍니다. “주님, 제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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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어찌 저 아이들을 그 누가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찬미예수님
요즘 우리 성당에서 열심히 새벽미사를 드리고 있는 스무명의 신입 복사단 아이들을 바라보면 저의 어린 시절이 생각납니다.
저의 성당은 집에서 약 20분 정도 떨어져 있었는데 어머니의 손을 잡고 걸었던 그 길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특별히 겨울은 말할 수 없이 추웠습니다. 꽁꽁 언 손을 호호 불어가며 당시의 가건물 성당에 들어가던 것이 엊그제 같습니다.
현재 우리 성당은 복사단을 중학교 1학년까지 하지만 제가 다녔던 성당은 고등학교 2학년까지였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부터 고등학교 2학년까지 거의 10년에 가까웠던 시간을 제대에서 봉사 한 셈입니다. 복사를 서면서 느낀 것은 신부님들과 수녀님들, 그리고 신자분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신부님과 함께 뛰어 놀고 사춘기 때에는 여러 가지 고민도 털어 놓았던 시간들은 저에게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습니다.
많은 신자분들이 해주시던 기도와 격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실제로 복사단을 하게 되면 여러 가지 특혜를 받게 됩니다. 당장 우리 성당만 해도 그렇습니다. 지금은 코로나로 인해 잠시 멈추어 있지만 신부님과 선생님들과 여름 캠프를 따로 가기도 하고 겨울 역시 그렇습니다. 졸업식 때에는 그동안의 노고를 치하하며 금으로 된 묵주반지를 수여하고 많은 선물도 받습니다. 오랜 시간 신부님들과 함께 하니 사제는 아이들의 이름을 잊어버릴 리 없고 특별한 친구로 오래도록 기억합니다.
이렇게 복사단 어린이들이 특별한 혜택을 받고, 신자분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는 이유는 단순히 가장 드러나는 곳에서 활동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정말 결정적인 이유는 하느님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자신을 봉헌하며 봉사를 하는 아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에도 아이들을 소개하며 말씀드렸지만 이 봉헌에는 분명한 희생이 뒤따릅니다. 우리 스무 명의 신입 복사 친구들은 현재에도 졸린 눈을 비비고 나와 고사리 같은 손으로 기도 손을 한 채 미사에 참석합니다. 곧 제대 위에 올라와서는 자유롭게 움직이고 싶은 마음을 참아가며 하느님께 몸을 맡긴 채, 경건한 마음으로 신부님을 돕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자신을 봉헌하겠다는 온전한 의지에서 비롯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봉헌 생활의 세 가지 의미가 드러납니다.
첫 번째로 봉헌이란 자발적으로 자신의 것을 바치는 행위를 뜻합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나의 모든 것이 하느님으로부터 왔으니 마땅히 하느님께 되돌려 드린다는 생각이 담겨져 있습니다. 나의 몸, 나의 생각과 지식, 감정까지 모두 주님께서 주신 것이니 당연히 주님의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봉헌의 전제인 것입니다.
두 번째로 봉헌이란 투신을 의미합니다. 이는 곧 주님의 뜻에, 하느님 나라에 투신하겠다는 다짐입니다. 나를 지으신 것도 보살피는 것도 주님이시니 주님을 기꺼이 따름을 뜻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의탁이기도 합니다. 우리 자신의 미소함을 인식하며 모든 것을 주님께 바치는 의탁. 자신의 시간을 봉헌하여 주님께 내어드리고 그에 따르는 은총을 받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 의탁입니다.
자발적으로 자신의 것을 바치며 하느님께 투신하고 온전히 의탁하는 자세. 이러한 의지를 품고 새벽에 나오는 복사단 아이들을 감히 그 누가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성탄 대축일 이후 40일이 지난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즉 오늘은 복음 말씀에서 들은 바대로 성모님께서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치르고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하느님께 봉헌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이 봉헌의 자세는 오늘 복음의 마리아에게 그대로 드러납니다. 자발적으로 자신의 아들을 주님께 바치며 하느님의 뜻에 투신하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마음, 그리고 모든 것을 하느님의 섭리에 의탁하는 마음이 복음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입니다.
얼핏 보면 이 모든 봉헌 행위는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 같지만 사실 이것은 이 자리에 모여 있는 모두에게 주어진 자연스러운 의무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성당에 나오는 이유는 과연 무엇입니까? 온전히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 기도를 하고 성당에 나오는 것이라면 그것은 참된 신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성당에 나오는 이유는, 우리 스스로를 위한 것이기도 해야겠지만, 한편으로는 이와 더불어 우리의 것을 봉헌하기 위한 태도가 반드시 동반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모든 것들에 감사하는 마음, 그러므로 모든 것을 봉헌하고 의탁하는 마음이 있을 때 우리는 더욱 하느님의 성실한 은총을 느끼게 되며 그 사랑을 확신하게 됩니다. 바로 그 때에 우리 모두가 저 작고 어린 복사단 아이들을 사랑하듯 주님께서도 우리를 사랑해주실 것입니다.
오늘 화답송에서 이야기 하듯, 만군의 주님, 영광의 임금님께서 우리를 사랑의 손길로 어루만져 주실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마음을 말라키 예언서는 다음과 같이 알려줍니다.
“주님에게 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하여라. 그러면 유다와 예루살렘의 제물이 옛날처럼, 지난날처럼 주님 마음에 들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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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민동규 다니엘신부님]
찬미 예수님
우리가 소유한 것이 우리의 노력으로 얻어진 것이라 우리는 생각합니다. 물론 맞습니다. 우리의 노력과 성실함과 근면함이 만들어낸 열매들입니다. 그러나 그 전에 하느님의 허락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항상 감사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과 성 요셉은 아기 예수님을 봉헌합니다. 두 분은 확실히 알고 있었습니다. 아기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러니 특별한 봉헌 예절이 필요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님과 성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고 하느님의 법에 따라 예수님을 봉헌 하십니다. 성모님은 자신의 전부인 아기 예수님을 봉헌하였는데 성모님께 들려온 말은 가시 같은 말이었습니다. ‘영혼이 칼에 찔리는 듯한….’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겸손히 받아들이십니다. 고통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라는 것을 내세우지도 않습니다. 다만 겸손한 마음으로 가슴에 새기십니다.
우리가 봉헌함으로써 받는 은총은 기쁨과 기적의 은총일 수도 있겠지만 오늘의 성모님처럼 아픔과 좌절의 은총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은총은 하느님을 만나게 하는 지름길이 되어줍니다. 즐거울 때 하느님을 찾기보다 슬프고 괴로울 때 하느님을 찾고 기도하는 모습에서 고통 또한 하느님을 만나는 하나의 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은 하나를 주면 하나를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세상의 셈법입니다. 그러나 봉헌의 셈법은 다릅니다. 봉헌은 바로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바라며 하느님과 협상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언제든 주십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길을 알려주시려고 우리에게 기쁨도 주시고 고통도 이용하십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즉 모든 것을 봉헌할 때 우리는 하느님의 품에 안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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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성탄을 지낸 지 벌써 40일이 지났습니다. 이날, 성모님께서는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치르시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셨습니다. 사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죄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 적용되었던 모세의 이 율법규정을 지키지 않으셔도 되셨지만, 율법 아래에 있는 이들을 속량하시려고 굳이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셨습니다.
이에 대해서, 사도 바오로는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율법 아래 놓이게 하셨습니다. 율법 아래에 있는 이들을 속량하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 되게 하는 자격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갈라 4,4-5)
바로 이날, 죽기를 결의하고 메시아를 기다렸던 한 노인과 밤낮으로 단식하며 메시아를 기다렸던 한 과부가 구세주를 뵈었습니다.
바로 이날을 기념하여, 원래는 성모 취결례축일로 지내오다가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에 “주님봉헌축일”로 개정하여 기념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날을 1997년(1월 6일)에 요한 바오로 2세 교종께서는 “축성생활의 날”로 제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한국 교회 축성생활의 해’를 지내고 있는 축성생활자들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남장협 부설기관인 ‘축성생활 신학회’는 2015년 “봉헌 생활의 해”를 지낸 후 10년이 되는 시점에서 다시금 축성생활의 의미를 상기하고, 수도생활의 쇄신과 수도자의 정체성 확립과 수도 성소 확산을 위해 ‘한국교회 축성생활의 해’를 지낼 것을 건의했고, 이를 남장협과 여장연은 주교회의에 공식 요청했으며, 주교회의는 작년(2024년) 3월 춘계 정기총회에서 「교회헌장」 ‘인류의 빛’ 반포 60주년인 올해 11월 21일부터 「수도생활의 쇄신에 관한 교령」 ‘완전한 사랑’ 반포 60주년인 2025년 10월 28일까지 1년여 간 ‘한국 교회 축성생활의 해’를 지내도록 승인했습니다.
“봉헌생활”이란 <교회법> 573조 제1항에서는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감도 아래 그리스도를 더욱 가까이 따르는 신자들이 복음적 권고의 선서를 통하여, 하느님의 영광과 교회의 건설과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새로운 특별한 명의로 헌신하고 하느님 나라에 봉사함으로써, 애덕의 완성을 추구하고 교회 안에서 빛나는 표징이 되어, 천상적 영광을 예고하려고 하느님께 전적으로 봉헌되는 고정된 생활양식이다.”
이는 여섯 가지 의미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성령의 감도 아래 그리스도를 더욱 가까이 따르는 신자들”이라는 표현은, 곧 봉헌생활이 성령의 감도로 이루어진 것으로 그리스도를 모범으로 삼고 살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이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권고인 <봉헌생활>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모범과 가르침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봉헌생활은 하느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당신 교회에 주신 은혜이다.”(제1항)
<둘째>, “복음적 권고의 선서를 통하여”, 곧 봉헌생활은 복음적 권고인 가난, 정결, 순명의 삶을 통하여, 하느님의 영광과 교회의 건설과 세상의 구원을 위하는 삶임을 말해줍니다. 이를 위의 문헌 <봉헌생활>에서는 “그리스도처럼 하느님 나라를 위해 봉헌된 삶”(제22항)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신의 영광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자기의 집을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건설을, 자신의 구원이 아니라 세상 구원의 삶임을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셋째>, “하느님 나라에 봉사함으로써, 애덕의 완성을 추구하고”라는 표현은, 곧 봉헌생활은 사랑의 완성을 향하여 지속적으로 전력을 쏟는 삶임을 말해줍니다. 이를 교황 요한 바오로 6세 반포한 “수도생활의 쇄신 적응에 관한 교령”인 <완전한 사랑>에서는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완전한 사랑을 복음적 권고의 실천으로 추구하는 것은 하느님이신 스승의 가르침과 모범에서 그 기원을 이끌어 온다.”(제1항)
결국, 봉헌생활은 예수님의 분부에 따라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데에 온 힘을 쏟아내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 사랑의 완성을 이루었듯이, 봉헌의 삶 역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사랑의 삶임을 말해줍니다.
<넷째>, “하느님의 영광과 교회의 건설과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새로운 특별한 명의로 헌신하고”라는 표현으로, 봉헌생활의 축성은 세례에 의한 축성에 깊이 근거하며, 이 축성을 더 완전히 표현하는 특별한 축성임을 말해줍니다. 이를 “수도생활의 쇄신에 관한 교황 바오로 6세의 사도적 권고”인 <복음의 증거>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수도자들은 특수한 축성으로 일생을 하느님께 봉헌하였고, 세례의 축성으로 이루어진 근본적 봉헌을 더욱 완전히 실현시키고 있다.”(제4항)
<다섯째>, “교회 안에서 빛나는 표징이 되어, 천상적 영광을 예고하려고”라는 표현으로, 봉헌생활은 인간의 궁극적인 생활을 예표 하는 생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를 공의회 문헌 <교회헌장>(제44항)과 <봉헌생활>(제26항)에서는 봉헌은 “미래의 부활과 천국의 영광을 더 잘 예고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봉헌생활은 교회 안에서 빛나는 표징이 되고, 천상적 영광을 예고해줍니다.
<여섯째>, “하느님께 전적으로 봉헌되는 고정된 생활양식이다”라는 표현을 통하여, 봉헌생활은 모든 것보다 우선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며,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바치는 삶임을 말해줍니다. 곧 일시적 충동에 따라 사는 임시적인 삶이 아니라, 공적인 선서로 평생토록 지속되는 고정된 생활 형식임을 말해줍니다. 이를 <봉헌생활>에서는 “가없는 헌신”(104항)이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봉헌축일”과 “축성생활의 날”을 맞이하여, 우리의 삶이 친정한 참 제물로 바쳐지는 삶이 되고, 주님의 축성을 충만하게 채워내는 삶이 되기를 희망해 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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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루카 2,37)
주님!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과부의 마음속 말을 들으시듯,
미처 말이 되지 않는 제 마음 헤아려 들어 주소서.
성전을 떠나는 일이 없게 하소서. 당신을 떠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언제나 당신 면전에서 기도하게 하소서. 밤낮으로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당신의 자비에 감싸여 감사와 찬양의 노래를 부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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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봉헌의 축복, 봉헌의 여정>
-“영적 승리의 삶”-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ㄴ)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이자 축성생활의 날입니다. 예수님 탄생후 40일째 되는 날, 마리아 요셉 부부가 아드님을 예루살렘에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친 날입니다.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 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기록된 대로 한 것입니다. 얼마나 하느님 법에 충실한 마리아, 요셉 부부였는지 깨닫습니다.
또 오늘은 자신을 특별히 주님께 봉헌한 수도자들을 위한 ‘축성생활의 날’이기도 합니다. 2025년 희년과 ‘축성생활의 해’에 맞이하는 축성생활의 날이 참 각별합니다. 한국 남자수도회, 사도생활단 장상협의회 회장 유덕현 야고보 아빠스는 “하느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기”를 주제로 담화문을 발표했습니다.
유아빠스는 “예수님 곁에 가까이 머무는 시간을 자주 가져야 한다.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그분에게서 우리 삶에 필요한 모든 사랑의 에너지를 받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예전 수도원을 자주 찾았던 어느 교구 사제의 “저에게 여기 요셉 수도원은 영육이 피곤하고 지쳤을 때 찾는 영적 주유소와 충전소입니다.”라는 고백도 생각납니다.
오늘 주님 봉헌 축일은 믿는 이들 모두의 봉헌 축일이기도 합니다. 한두 번 봉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살아 있는 그날까지, 봉헌의 여정을 살아가는 우리 믿는 이들에게는 매일이 봉헌 축일입니다. 세상에 ‘봉헌’이란 말보다 아름다운 말도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봉헌의 삶입니다.
봉헌의 삶은 존엄한 품위의 맑고 향기로운 삶입니다. 비단 수도자들뿐 아니라 믿는 이들 모두가 평생 살아내야 할 봉헌 축복의 삶입니다. 봉헌의 기쁨, 봉헌의 행복, 봉헌의 생명, 봉헌의 축복, 봉헌의 아름다움등 봉헌은 바로 믿는 이들의 삶의 의미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이들, 봉헌이란 말의 개념조차 이해못할 것입니다. 제대 앞 봉헌된 꽃처럼 우리는 모두 주님께 봉헌된 삶을 살아갑니다. 작년 후반기 많이 나누며 행복해 했던 ‘꽃’이란 시도 생각납니다.
“꽃같은
하루
꽃같이
살자”
꽃 한송이를 선물하며 미안해 하던, 지금은 타계한 어느 자매에게 드린 덕담의 시도 생각납니다. 수없이 인용했어도 늘 새롭고 좋아 인용합니다.
“꽃이
꽃을 가져오다니요?
그냥 오세요.
당신은
꽃보다 더 예뻐요”
하느님 눈에는 봉헌된 우리 영혼들이 다 그러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봉헌 삶의 빛나는 모범을 여러분 발견합니다. 하느님 중심의 봉헌된 삶의 빛나는 모범이 바로 아기 예수님을 봉헌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을 찾는 예수님의 부모요, 성령의 인도따라 봉헌의 삶에 항구하다가 주님을 만난 시메온은 아름답고 품위 있는 봉헌 삶의 모범입니다. 다음 묘사가 이를 입증합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평생 봉헌 삶의 인도자와 보호자는 성령님이심을 깨닫습니다. 마침내 때가 되어 성령에 이끌려 성전에 들어갔다가 봉헌되시는 주님을 만난 시메온입니다. 그대로 다음 묘사대로 말라키 예언의 실현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시메온과 함께 이 거룩한 주님 봉헌 축일 미사를 통해 봉헌된 주님을 만나, 정화되고 성화되는 영적 레위의 후손들인 우리들입니다.
“보라,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그는 은 제련사와 정련사처럼 앉아 레위의 자손들을 깨끗하게 하고, 금과 은처럼 정련하여 주님에게 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하리니 주님 마음에 들리라.”
오매불망, 기다리던 아기 예수님을 만나 팔에 안고 감격에 벅차 찬미가를 부르는 시메온입니다. 이 시메온 찬가는 우리 가톨릭교회 모든 신자들이 매일 평생 끝기도 때마다 부르는 아름다운 찬가로, 이 찬가의 은총이 우리 모두 복된 선종을 맞이하게 할 것입니다. 첫절이 특히 아름답습니다.
“주님, 이제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말그대로 시메온의 봉헌생활 축복의 절정 체험입니다. 시메온과 쌍벽을 이루는 봉헌 삶의 대가가 한나 예언자입니다. 여든 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내면서,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기며 거룩하게 살다가 아기 예수님을 만나는 한나 역시 봉헌 삶의 빛나는 모범입니다.
봉헌 삶도 보고 배웁니다.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친후 귀향한 마리아, 요셉이요,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하고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으니, 그대로 부모의 봉헌 삶을 보고 배운 예수님께 쏟아진 하느님의 축복입니다. 세상에 봉헌의 축복을 능가할 축복은 없습니다. 아니 봉헌자체가 이미 축복입니다.
인간 무지와 허무에 대한 궁극의 치유제도 봉헌 축복의 삶뿐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유념할 사항이 있습니다.
봉헌의 삶은 늘 순탄대로의 평온한 삶도, 온실속의 따사로운 삶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로 시메온의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 바로 이를 입증합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은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봉헌된 삶의 모범인 예수님과 성모님, 그리고 성인성녀들이 겪었던 무수한 고통과 시련, 고난을 생각하면 힘과 용기가 샘솟습니다. 바로 우리의 모든 봉헌 삶의 현장 중심에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파스카 예수님이 자리잡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똑같이 피와 살을 나누어 지니시고, 죽음의 권능을 쥐고 있는 악마를 당신의 죽음으로 파멸시키시고 우리를 참으로 자유롭게 하신 파스카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우리들 도와 주실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 봉헌 삶의 중심에 이런 주님이 늘 살아 계시어 함께 해주시니, 영적승리의 삶을 살 수 있게 된 우리들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어떠한 처지에서든 봉헌 축복의 삶에 항구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우리를 격려하시는 주님입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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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우리의 봉헌은?>
주님 봉헌에는 삼중의 의미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를 위해 성부께서 주님을 세상에 봉헌하신 것. 우리를 위해 마리아와 요셉이 주님을 성부께 봉헌한 것. 우리를 위해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봉헌하신 것.
그렇습니다. 오늘의 전례는 주님 성탄 40일 되는 날에 주님의 부모가 율법 규정에 따라 주님을 성전에서 봉헌하신 것을 기념하지만 이 봉헌을 앞서는 봉헌이 성부께서 주님을 세상에 봉헌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일컬어 우리는 성탄이라고 하고 사랑이라고 하는데 이 봉헌은 또한 ‘위로부터 아래로’의 겸손의 봉헌이고, 신성을 포기하고 인성을 취하는 가난의 봉헌이기도 합니다.
필리비서의 그리스도 찬가가 이 의미를 잘 전해줍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런 성부의 주님 봉헌을 보면서 이 축일을 지내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프란치스코처럼 주님의 겸손과 가난에 무한 감동하고 사랑으로 충만해지는 것이고, 클라라처럼 그리스도라는 거울에 자신을 비추며 겸손과 가난으로 치장하는 겁니다.
성부의 주님 봉헌은 이제 주님의 십자가 위 봉헌으로 완성됩니다. 완성되었다는 것은 불완전했던 것이 완전해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강생과 육화로 시작된 주님의 봉헌과 사랑이 끝을 냈다는 뜻이며,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라고 요한복음이 한 말과 같은 뜻입니다.
사실 강생과 육화의 봉헌에 주님의 십자가 위 봉헌은 이미 들어 있었는데 주님께서 강생에서 시작된 사랑을 중단하지 않고 죽기까지 이루신 겁니다
이런 주님의 십자가 위 자기 봉헌을 보면서 이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우리도 봉헌하는 겁니다.
마리아처럼 봉헌하는 것이고, 프란치스코처럼 주님의 수난을 닮는 것입니다.
오늘 마리아가 주님을 성전에서 봉헌하는데 이 봉헌은 단순히 자기 아들을 자기의 것으로 소유하지 않음을 넘어 아들의 어머니로서 아들의 십자가상 고통에 함께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봉헌 때 시므온이 예언한 바이고 마리아가 들은 겁니다. “이 아기는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릴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수난(Passion)에 동참(Compassion)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동참은 마리아뿐 아니라 성인이라면 예외가 없으며, 프란치스코는 이런 성인들의 대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프란치스코는 죽기 전에 그리스도의 이 수난을 똑같이 경험하고 싶어 기도를 바쳤고 그 결과가 오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선 기도부터 바칠 것입니다. 기도에서 힘을 얻었다면 고통도 바칠 것입니다. 물론 사랑으로 기도와 고통을 봉헌할 것입니다.
이것이 부족하나마 주님 봉헌 축일에 우리가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봉헌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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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루카 2,22)
<봉헌의 삶!>
오늘 복음(루카 2,22-40)은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봉헌하는 말씀'과 '시메온과 한나의 예언'입니다.
오늘은 아기 예수님께서 성전에 봉헌되신 것을 기념하는 '주님봉헌축일'입니다. 그리고 수도자들과 수도 성소를 위해 기도하는 '축성 생활의 날'입니다. 그리고 일 년 동안 사용할 제대초와 가정초를 축복하는 '초 축복식이 있는 날'이기도 합니다.
아기 예수님께서 율법에 따라 하느님께 봉헌 되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세상 구원을 위해 자기를 봉헌하러 오셨습니다.
우리의 이제와 영원한 구원을 위해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셨고, 고난과 유혹을 받으셨고, 땀을 흘리셨고 마침내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구원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봉헌'입니다.
축성 생활의 날을 통해 기억하는 수도자들은 '가난과 순종과 정결의 덕'인 '복음 삼덕'의 삶을 '보다 더(radical)' 그리고 '죽기까지' 살겠다고 서약한 사람들입니다. 수도자들이 이 서약의 삶, 봉헌의 삶을 기쁘게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초는 자기를 태우면서 빛을 냅니다. 그리고 빛은 어둠을 몰아냅니다. 이는 '자기를 죽임으로써 너를 살리는 그리스도의 신비'와 같습니다.
예수님은 봉헌의 삶을 사셨습니다.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의 삶도 봉헌의 삶'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예수님께서는 믿는 이들에게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이 새 계명에 따라 믿는 이들도 예수님처럼 '너를 위한 희생적 사랑인 봉헌의 삶'을 살아갑니다.
예수님께서 사셨던 봉헌의 삶에 충실합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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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루카 2, 22)
하느님께
올리고
바치는 것이
봉헌입니다.
좋은 시작과
좋은 열매에는
언제나
봉헌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도
당신의 기쁨을
봉헌으로
우리와 함께
나누십니다.
정성스럽게
사는 것이
우리의
봉헌입니다.
믿음은
봉헌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꾸밈이
없는 봉헌이
중요합니다.
솔직한 고백도
하느님께 드리는
아름다운
봉헌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정성을 다해
마음을
나누는 삶을
사셨습니다.
신앙의 탄생은
봉헌의
탄생입니다.
봉헌은 또한
우리의 신앙을
키웁니다.
우리 삶의
여정 안에서
봉헌
아닌 것이
없습니다.
봉헌은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우리에게
줍니다.
으뜸되는 마음이
봉헌의 마음입니다.
봉헌은 서로를
알아보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서로를 도와주고
서로를 이롭게
하며 선한 일을
하는 것이며
행복으로 가는
가장 아름다운
실천이며
신앙의 올바른
방향이 봉헌입니다.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는
봉헌이 있습니다.
주님 봉헌을
따라
우리의 삶도
하느님과
기쁘게 나누는
봉헌의 삶이길
기도드립니다.
봉헌이
가리키는
은총의 선물을
뜨겁게 만나는
봉헌 축일
되십시오
삶의 본질은
우리자신의
봉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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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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