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린 겨울을 맨몸으로 품었던 가지, 묵언에 들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물렁물렁한 봄볕으로 제 몸 툭툭 상처 내더니 이내 허공에 푸른 정자 하나 만들어 놓았다. 어느 때부터인가 그러니까 어머니 돌아가신 그 해, 파랑새가 물어다 심었는지 뒤란 언덕바지에 그리움 넌지시 오디나무 한그루가 자라기 시작했다.
듬성듬성한 머리로 묵직한 나날을 이고 살았던 어머니, 자식들을 위해 구근처럼 끊임없이 뿌리를 뻗었어야 했을 먹먹한 생이 기억될 때마다 나는 창 너머 오디나무를 바라보는 습관이 생겼다. 무덤에 든 당신의 바람이었을까. 올핸 작년보다 더 많은 오디가 열렸다. 넓은 품을 새들의 쉼터로 내어주고, 겨우내 갈무리한 바람을 풀어 길손의 땀을 식혀주는 이파리들. 그 그늘에서 오디를 따 입에 넣는 사람들 표정이 햇살처럼 밝다.
텃밭 풀을 베다 까맣게 익은 오디 하나 눈에 들어와 따려는 순간, 부정한 손이라는 듯 제 몸에 닿기도 전에 스스로 떨어진다. 생사의 기로에서 하얗게 질린 풀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 손끝에 머문다. 이미 낫으로 베어져 풀의 허리에 맺힌 투명한 핏방울들도 나를 바라본다. 삶의 이유가 세워지기도 전에 베임을 당한 생명들. 그들의 눈을 피해 슬며시 낫을 내려놓는다. 저만치에 있는 그늘을 당겨 앉아 딴전 부리듯 유년의 갈피를 넘긴다.
초가지붕이 슬레이트로 바뀌고 새마을운동 노래가 새벽 골목을 깨우고 다닐 때, 친구 달용이네 집은 아담한 기와집이었다. 집 앞에는 수양버들 늘어진 개울이 있었고 뒤편엔 뽕밭이 있었다. 달용이네 할머니는 뽕잎을 한 아름씩 안고 헛간처럼 생긴 곳으로 가져가곤 했는데, 그때 그곳이 잠실蠶室인지 몰랐다. 갈라진 흙벽 틈으로 보이던 푸른 방, 호기심으로 안을 훔쳐보고서야 누에를 키우는 곳인지 알았다. 가랑비 이파리에 드는 소리처럼 들리던 뽕잎 갉아먹는 소리, 그 소리를 들으며 나도 한 살 한 살 허물을 벗곤 했다.
누에는 뽕잎을 먹고 우리는 달큰한 오디를 훔쳐 먹었던 그때, 해마다 유월이면 그 달콤한 유혹에 또래 녀석들은 달용이의 환심을 사려했고 입은 늘 뽕밭에 가 있었다. 밭고랑에 앉아 하나라도 더 먹을 요량으로 가지를 훑어서 먹다 보면 손과 입 그리고 옷은 온통 보라색이었다. 확실한 증거 때문에 들킨 서리는 오리발이 통하지 않아 달용이 할아버지에게 몇 대의 알밤을 받아왔다. 이런 사실이 부모님께 알려지면 또 한 번 혼이 나곤 했으나, 알록달록 익어가는 유혹은 다음 날도 울타리를 넘게 만들었다.
뽕나무 그늘은 여정에 지친 사람들의 시름을 잊게 하기도 하고 누구에게나 있을법한 추억으로 안내하기도 한다. 지금이야 내가 사는 부안은 뽕(오디)으로 만든 술이 대세가 되었지만, 해학적인 이름만큼이나 사연도 많은 것 같다. '뽕'하고 입안에서 그 여운을 궁굴려보면, 뽕 시리즈의 영화가 떠올려지곤 한다. 그 옛날 숱한 염문들이 고랑을 타고 설레었던 뽕밭, 그리고 목화밭, 보리밭. 이 에로틱의 장소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보일 듯 말 듯 아릇아릇한 곳이다. 소문이 울타리를 넘는 것을 두려워했던 시절, 어쩌면 주변 사람에게 자신들의 사랑을 알리려는 다소곳한 의도 때문은 아니었는지. 사랑처 중에서도 뽕밭은 단연 첫째였던 것 같다. 지금도 달, 흐벅지거든 뽕밭에 들어보라. 그러면 안다. 은근해지는 심사를.
개울물에 내려온 별빛이 졸졸 흐르고, 싸리 울타리에 소변을 누다 미루나무에 걸친 달을 보면 멀미 나던 새벽녘, 일그러진 달을 보고 놀란 강아지 짖는 소리가 어둠을 밀어낼 때쯤 어머니는 허기진 물동이를 이고 물을 길러 나섰다. 마른 세월, 평생 기침을 달고 살았어도 똬리 끈에 매달린 육 남매를 위해 육장 새벽을 걷어내고 다녔다. 당신의 천식이 맴도는 뒤란 언덕배기, 이제 그곳에 터를 잡은 뽕나무의 호흡이 여유롭다.
바람이 드는지 뽕나무 그늘이 흔들린다. 잎맥을 흐르는 푸른빛 사이로 어머니의 얼굴이 얼비친다. 시장기 있는 이들에게 달달한 요깃거리가 되어주고, 잠깐의 쉼이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기꺼이 그늘이 되어주는 우리 집 오디나무, 왜가 아닌 그냥의 삶으로 나를 품었던 어머니처럼 그늘 깊어진다.
(배귀선 님의 수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