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대 전 고 교 ★ │
├──┬───────────────┬──┬───────────────┤
│창단│1945년 │우승│ 3회 (전국 17위) 청룡기 - 87년│
│ │ │ │ 봉황대기 90년│
│ │ │ │ 대통령배 94년│
│ │ │ │ │
│프로│33명 (전국 14위) │결승│ 4회 (전국 24위) │
├──┼───────────────┼──┼───────────────┤
│투수│김연철(77빙그) 이효봉(82빙그)│포수│홍순만(77해태) 김진홍(81오비)│
│ │구대진(86쌍방) 가득염(88롯데)│ │강인권(91한화) │
│ │구대성(89한화) 길배진(90한화)│ │ │
│ │정민철(92한화) 김병준(95한화)│ │ │
│ │오창선(95한화) 장재혁(96한화)│ │ │
│ │고상천(97한화) 김재현(98한화)│ │ │
│ │마일영(00현대) │ │ │
│ │ │ │ │
│내야│정구선(75청보) 한대화(79해태)│외야│유해덕(82빙그) 김석연(87빙그)│
│ │이광길(79빙그) 박종호(82오비)│ │박상현(91한화) 김대헌(92한화)│
│ │김수길(82빙그) 황대연(85한화)│ │최만호(93엘지) │
│ │강석천(85한화) 조규철(88롯데)│ │ │
│ │안희봉(91현대) 장진성(91한화)│ │ │
│ │김승권(95삼성) 최동연(98한화)│ │ │
└──┴───────────────┴──┴───────────────┘
━━━━━━━━━━━━━━━━━━━━━━━━━━━━━━━━━━━━━━
★ 대전고교 올스타 (2001년 기록)
┌──┬───┬────────┐ 강원도를 제외하고 전국에서 가장 뒤 늦게 야
│투수│베스트│승리 패전 방어율│
├──┼───┼────────┤ 구 붐이 일어난 충청도에서 세광고와 함께 가
│ │정민철│109 62패 2.80│
│ │구대성│61승 57패 2.79│ 장 오랜역사를 가지고 있는 대전고이다. 현재
│ │가득염│24승 37패 4.42│
│ │마일영│15승 10패 3.74│ 광역시 중에 유일하게 단 한팀 만을 보유하고
│ │김연철│ 5승 12패 4.15│
├──┼───┼────────┤ 있는 대전의 야구사를 간단하게 짚어 보면 해
│평균│대전고│43승 36패 3.58│
└──┴───┴────────┘ 방 직후 창단된 대전고를 중심으로 50년대 초
┌──┬───┬────────┐
│타순│베스트│타율 HR RBI ST│ 반 대전공고가 창단되었고, 그리고 50년대 후
├──┼───┼────────┤
│1 三│강석천│.277 87 512 185│ 반에는 대전사범이 잠시, 그리고 60년대 초반
│2 二│이광길│.229 7 120 48│
│3 유│정구선│.250 84 316 18│ 에는 대전상고가 야구부를 창단하면서 대전고,
│4 지│한대화│.279 163 712 79│
│5 一│황대연│.226 41 177 12│ 대전공고와 함께 한때, 세팀까지 유지된 적이
│6 포│강인권│.230 8 73 5│
│7 右│최만호│.223 10 36 14│ 있었지만, 70년대 초반에 대전상이 해체된 대
│8 中│박상현│.208 0 10 8│
│9 左│김승권│.249 10 44 3│ 신 대성고에 야구팀이 운영된적이 있었다. 그
├──┼───┼────────┤
│평균│대전고│.241 46 222 41│ 러나 충남 예선을 통과하는 팀은 대부분 대전
└──┴───┴────────┘
고였고 이는 70년대 후반 충남에 공주고와 북일고가 창단되기 전까지 계속 되었다.
대전고가 처음으로 좋은 성적을 보인 것은 72년 청룡기 4강진출이었다. 이때 외야
수 박상범과 함께 두각을 보인선수가 1학년의 2루수 정구선이다. 정구선이 대전고
가 낳은 첫번째 스타 선수가 된것은 이재환, 윤동균 등 이전의 대전출신 재목들이
대부분 고교를 서울로 진학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때의 호성적을 계기로 대전
의 동문들은 야구부 육성에 보다 많은 투자를 결의하였고 73년 이재환씨를 대전고
감독으로 영입하면서, 비로소 대전-충남에도 야구부의 열기가 달아올랐다. 정구선
을 시작으로 79학번 동기생인 한대화와 이광길 등 대형 내야수들이 간간히 배출된
대전고는 80년 대구출신의 특급투수였던 이효봉을 영입 하면서 첫우승을 노렸지만
이효봉이 청룡기 4강진입 이후 유급생 출전금지의 첫케이스로 걸리면서 이후 출장
금지를 당하는 불운을 겪었다. 77년 충청권 첫 우승 당시의 공주고 감독이자 80년
대전고 감독이었던 김영빈씨 역시 대전이 고향인 인물로, 바로 김영빈감독의 아들
인 김의수가 대전고 3학년이 되던 87년 드디어 대전고는 첫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물론 이때의 주역은 대전지역에서 모처럼 등장한 대형투수 구대성이다. 87년은 대
통령배를 북일고가, 그리고 이어서 벌어진 청룡기를 대전고가 차지한 충남 야구의
기념비적인 해였다. 대전고는 그 이후인 90년 봉황기에서 안희봉의 역투로 두번째
우승을 차지한다. 문동환-위재영과 함께 전국 최고투수 트로이카를 형성했던 안희
봉은 그 전해였던 고2 시절 교통사고로 한쪽 다리를 다친 상태로 투혼을 발휘해서
얻어낸 우승이었지만, 결국 이 후유증이 오래 남으면서 투수로서의 안희봉의 모습
은 사실상 그뒤로는 다시 볼수 없었다. 90년 봉황기 당시 안희봉의 완투행진속에
거의 등판을 볼수 없었지만 당시 고2로 좋은 신체조건을 가지고 있던 정민철도 빼
놓을수 없는 선수이다. 90년의 우승이 안희봉의 원맨쇼였다면 94년의 대통령배 우
승은 김병준과 오창선의 절묘한 조화로 이뤄낸 것으로 당시 결승에서 돌풍의 부천
고를 만나 7 - 6으로 힘겹게 이기면서 세번째 우승을 거둔바가 있다. 대전이 87년
직할시(지금의 광역시)로 승격함에 따라 대전고는 지역예선을 거치지 않고서 모든
전국대회에 참가할 수 있게 되었는데, 과연 이것이 축복받은 호조건으로 작용한것
일지, 아니면 대전고를 실전경험이 부족한 온실속의 나무로 만드는 것인지는 논란
의 여지가 충분히 있겠지만, 이를 받아들이는 선수들의 정신자세에 달려있을 것이
다. 2002년 프로에 입단하는 대졸신인 서승화와 고졸신인 박희수, 그리고 이미 정
상급투수로 성장한 마일영 등이 대전고의 이름을 드높여 줄 젊은 선수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
천리안야구동호회 - 한화게시판
카페 게시글
┏이글이글 야구게시판┓
★ 충청·지역 ★ (04) 대전고교(전국 14위)
까망꿈
추천 0
조회 223
02.05.18 08:01
댓글 0
다음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