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시절 무악재
개성쪽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관문 무악재. 무악재는 안산(鞍山, 296m)과 인왕산(仁王山, 338m) 사이에 있으며, 의주가도(義州街道)인 국도 1호선이 지나고 있다. 안산과 인왕산은 화강암 산지이고, 무악재는 두 산 사이에 형성된 안부(鞍部)이다. 무악재는 여러 번에 걸쳐 깎여 고개가 점점 낮아졌다.
무악재, 조선 태조 이성계가 개성에서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기 전에는 모래재 또는 사현(沙峴)이라고 불렸다. 또 말안장 같은 안산 기슭을 따라 넘는 고개라고 하여 길마재라고도 불렸다. 무악재라고 불리게 된 것은 조선 초기에 도읍을 정하면서 풍수지리설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즉, 삼각산(三角山)의 인수봉이 어린 아이를 업고 나가는 모양이라고 하여 이것을 막기 위한 방편으로 안산을 어머니의 산으로 삼아 무악(毋岳)이라 하고, 이 고개를 무악재라고 하였던 것이다. 또한 별칭으로 무학재 또는 무학현이라고도 한다. 이는 이성계가 하륜(河崙)의 건의에 따라 무악의 남쪽을 도읍으로 정하려고 하였으나 일부에서 명당이 좁다고 반대를 하였고, 결국 무학대사(無學大師)의 의견에 따라 북악산 밑으로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영조는 부왕 숙종의 능인 명릉(明陵)의 역사를 시작하고, 이 고개에 올라서서 명릉을 바라보며 고개의 이름을 추모현(追慕峴)이라고 하였다. 명릉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의 서오릉 안에 자리잡고 있다. 무악의 정상에는 조선시대의 봉화터가 두 군데 있다. 이곳의 봉화대는 평안도·황해도는 물론, 부산·회령까지 급보를 전하였다. 무악재는 조선시대에 의주와 통하는 주요 교통로였고, 지금도 서울 시내와 서대문 외곽을 연결하는 주요 고개이다.
무악재를 넘는 땔감장수들
독립문에서 홍은동 쪽으로 가기 위해 올라가는 무악재
홍은동 쪽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무악재
무악재에 있었던 주막
1960년도의 무악재
1968년도에 남산쪽에서 바라본 무악재
1974년도의 무악재 겨울풍경
독립문 쪽에서 바라본 무악재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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