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미 해군 장교가 2021년 5월 29일 일본 후지산에 놀러갔다가 일본인 남녀 둘을 차로 치여 숨지게 한 사건이 있었다. 도쿄 남쪽 요코스카 해군기지에서 복무하던 릿지 알코니스 중위는 85세 장모와 그녀의 54세 사위를 부주의 운전 탓에 숨지게 한 사실을 순순히 시인했다. 당시 미 해군 의료진은 알코니스가 고산병 증세를 앓고 있었다고 변호했다. 일본 법원은 같은 해 10월 그에게 징역 3년형을 선고했다. 지난해 12월 그는 석방돼 미국에 신병이 인도됐다.
두 일본인이 목숨을 잃었는데도 이 사건은 일본에서 그다지 관심을 끌지 못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본도 주일미군의 처우에 있어 현저히 불평등한 권리를 강요당하는 SOFA 협정을 체결하고 있다. 쉬쉬하고 넘어가고 싶었던 탓도 있었다. 툭하면 터지는 주일미군의 비행과 범행을 유야무야하는 것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미-일 SOFA 협정은 1960년 체결돼 그 뿌리가 깊고 튼튼하다.
그런데 지난달 13일 미국 CNN 앵커 제이크 태퍼의 트윗을 본 일본인들은 깜짝 놀랐다. 3년 만에 풀려나 귀국한 알코니스(36)가 아내, 세 자녀와 자동차 안에 앉아 환한 미소를 짓는 모습의 사진을 올렸기 때문이다. 태퍼는 "오늘 아침 미국 가석방위원회는 해군 중위 릿지 알코니스에게 어떤 감시도 붙이지 않는 완전 가석방 조치를 명령하며 즉각 풀어줬다"고 적었다. "대단하며 놀라운 소식"이라고 덧붙였다.
일본인들은 알코니스의 아내 브리태니와 변호인들이 미국에서 그의 석방을 요구하는 캠페인을 성공적으로 전개한 사실을 미처 알지 못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2022년 국정 연두교서를 발표하며 브리태니를 껴안았으며, 커말라 해리스 부통령은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면담하며 알코니스 중위 사건을 언급했다.
마이크 리 유타주 상원의원은 여러 차례 기시다 총리 트위터에 태그를 걸면서 그의 석방을 요구했다. 그리고 풀려나자 "일본은 그의 가족과 미국에게 사과할 빚을 졌다"고 트윗을 날렸다.
리의 트윗이 일본인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한 일본인은 "왜 너희들이 축하하고 있는 거냐?"고 따졌다. 다른 이는 "먼저 그와 그의 가족이 희생된 일본인 가족에게 사과했느냐?"고 물었다.
대중과 일부 미디어는 분노했지만 정작 일본 정부는 일언반구 반응이 없다. 제임스 D 브라운 템플대 교수는 영국 BBC에 이 사건을 크게 떠들어봤자 일본 정치인들과 주류 언론에게 득 될 것이 없다고 단언했다. 미일 관계를 훼손하기만 할 것이라는 취지다.
제프리 홀 칸다 국제관계대학 교수는 "많은 일본인들은 힘이 넘치는 미국이 절대 자신들을 동등하게 취급하지 않을 것이라고 체념하는 분위기가 있다. 알코니스 사건은 미국에서 집권당이나 대통령이 교체돼도 불평등은 여전하다는 점을 드러낸다"고 말했다.
식민 지배에 대한 기억을 떨쳐버릴 수 없는 한국민들이 보기에 이런 일본인들의 피해 의식은 상당히 이중적이며, 전쟁 패배로 인해 자신을 희생자나 피해자로 여기려는 허위의식으로 비치기도 한다. 군국주의의 부활이나 이른바 '보통 국가'로의 복귀를 위해 자신을 피해자로 분식하는 몸짓으로 읽히기도 한다.
어쨌든 미국은 일본 전역에 120개 기지를 두고 5만 4000명의 장병을 복무시키고 있다. 오키나와에만 32개 기지가 몰려 거의 3만명 이상이 소속돼 있다.워낙 대만과 가까운 곳이라 중국군의 침략 시 이에 대응하기가 용이해 미국으로선 이곳을 포기하기 어렵다.
원래 미국은 1972년에 오키나와 주둔을 끝내기로 했지만 1970년 오키나와 주민들과 미군 헌병들이 충돌한 고자 봉기 때문에 계속 눌러앉았다. 한국의 매향리처럼 이곳 주민들은 해변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밤낮 없이 전투기가 저공 비행을 해 소음을 일으키는 등 온갖 피해를 겪고 있다.
지난해 오키나와 주민의 70%는 미군 주둔이 "불공평하다"는 데 동의했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발표됐다. 미군 철수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는 등 미군기지 반대 목소리가 커지지만 동시에 젊은 일본인들이 미군 주둔을 아예 체념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점도 확인된다.
하지만 소음과 환경 오염, 사병들의 음주 사고나 행패, 성폭력 등은 여전히 벌어진다. 1995년 사병 셋이 12세 소녀를 윤간한 사건 때문에 몇개월에 걸쳐 항의시위가 벌어졌다. 그런 사건이 터지면 미군 기지들은 일단 문을 걸어 잠그고 현지 주민들과 접촉을 못하게 한다. 이어 미군 고위 관계자다가 현 지사를 찾아 사과하면 그만이다. 그렇게 하면 일단락됐다.
대학생 다무라 유이(24)는 BBC에 태퍼의 트윗을 보고 "지독한 충격을 받았다"고 털어놓으면서도 미군기지를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였다. 그러면서도 "전투기들이 그렇게 낮게 날아 엄청난 소음을 일으키고 소중한 바다가 새로운 기지 건설 때문에 훼손되는 것을 지켜볼 수 없다. 오키나와 주민들이 무시당한다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그런데도 미군 주둔을 어쩔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이는 것은 지정학적 필요 때문이다. 북한의 위협에다 점점 중국은 대만을 그냥 두지 않겠다고 공언하고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침공을 통해 제국을 키우겠다는 욕심을 숨기지 않는다. 미군 기지를 물리는 일은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이런 이유 때문에 과거에는 도저히 생각도 할 수 없었던 일이 현실이 되고 있다. 일본의 전력 강화가 빠른 속도로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예산 가운데 국방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2차 대전 종전 이후와 비교해 곱절이 됐다.
자위대는 자국민의 신변과 안전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다른 나라 군대를 돕고 있다. 브라운 교수는 대다수 일본인이 탐탁치 않아 하지만 미국은 일본을 핵심 우방으로 "대체 불가능하다"고 여기고 있다고 지적했다. 홀 교수는 미일 동맹이 이보다 강한 적이 없었다며 "안보 환경이 워낙 심각해 일본 지도자들이 (알코니스 사례 같은) 일은 피하고 싶어하며 미국이나 다른 우호적인 국가들과 군사협력을 강화하는 계획 같은 일에 집중하고 싶어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브라운 교수는 언젠가는 큰 대가를 치를 것이라고 경고했다. "북한과 중국, 러시아처럼 미일동맹에 반대하는 이들은 미군이 이런 식으로 동맹의 근심을 방자하게 무시할 때마다 기뻐할 것이다. 이런 일은 미국과 일본의 적들에게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