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10월 7일)
16세기 중엽 오스만 제국(현재의 튀르키예를 중심으로 한 이슬람 제국)이 지중해로 세력을 뻗치자,
1571년 10월 7일 그리스도교 연합군(신성 동맹)은
그리스의 레판토 항구 앞바다에서 벌인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 제국을 무찔렀다.
그리스도인 군사들은 이 전투에서 크게 승리한 것이 묵주 기도를 통한
성모님의 간구로 하느님께서 함께하신 덕분이라고 여겼다.
이를 기억하고자 성 비오 5세 교황께서 '승리의 성모 축일'을 제정하셨다.
1960년 성 요한 23세 교황께서는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로 이름을 바꾸셨다.
누가 우리의 이웃인가?
바로 옆집에 산다고 이웃인 것은 아니다.
구체적으로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다가가
그와 함께할 때 참으로 이웃이 된다.
이웃은 공간적 거리가 아니라 마음의 거리이다
(루가 10,25-37).
티벳의 성자로 불리는 ‘선다 싱’(1889-1929년)이 직접 겪은 이야기입니다.
선다 싱이 눈보라 치는 어느 날 산길을 걷다가 동행자를 만났습니다.
동행자와 함께 길을 걷다가 살을 에는 듯한 추위에
어느 노인이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선다 싱이 동행자에게 노인이 길에서 얼어 죽을지 모르니
함께 데리고 가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동행자는 버럭 화를 내며 “우리도 죽을지도 모르는데
이 사람을 어떻게 데리고 간다는 말이오?” 하고는 먼저 가 버렸습니다.
선다 싱은 그 노인을 차마 외면할 수 없어서
노인을 혼자 등에 업고 눈보라 속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힘겨웠지만 노인은 선다 싱의 체온으로 점차 살아나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서로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기고 마을을 찾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을 입구에는 한 사내가 꽁꽁 언 채로 죽어 있었습니다.
그는 혼자 살겠다고 먼저 떠난 바로 그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착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 말씀을 듣거나 읽을 때마다 생각나는 이야기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는 길에 강도를 만나 쓰러져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길을 가던 사제도 레위인도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정작 유다인에게 멸시당하던 사마리아인만이
쓰러진 사람을 낫게 해 주고 안전한 곳으로 옮겨 도와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말씀하시고 진정 누가 이웃이냐고 물으십니다.
선다 싱은 한 노인의 이웃이 되어
노인의 목숨을 구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명도 지켰습니다.
그러나 이웃이 되기를 외면한 그 사내는 결국 목숨도 영혼도 다 잃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한 이웃은 만나서 그저 수다나 떠는 대상이 아닙니다.
내 필요로 사람을 만나는 것도 이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 내가 그 곁에 있어 주어야 하는 사람,
그래서 자신의 사랑이 전달되는 사람이 바로 내 이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수많은 사람을 만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에서 내 이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됩니까?
묵주 기도의 성모 발현
도미니코회에 전해 내려오는 전승에 따르면,
1214년 성 도미니코가 프랑스 프루예에 창궐한 알비파 이단자들을
가톨릭 신앙으로 회심시키기 위해 나섰다고 한다.
그러나 이 젊은 사제는 그다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는데,
하루는 성모 마리아가 그에게 발현하여 이단에 맞서는 도구로서 묵주를 주었다고 한다.
성모 마리아가 성 도미니코에게 묵주를 주었다는 이야기는
일반적으로 전승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묵주 기도 형태의 발전은 15세기 도미니코회 사제이자 교사인
복자 알라노 데 루페를 비롯한 도미니코회원들에 의한 것이다.
승리의 성모
16세기에 교회가 분열된 틈을 타서
터키의 이슬람교도들이 로마를 정복하고자 침공해왔는데,
교황 비오 5세는 키프로스에 있는 기독교계 주민들을 구하기 위해
스페인과 기타 기독교 왕국 및 공화국으로 구성된 연합 함대를 편성했다.
그러나 파마구스타에 있는 베네치아군 기지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오랜 포위 공격을 받은 끝에
결국 기독교 연함 함대가 출항하기 전인 8월 1일에 항복하고 말았다.
1571년 10월 7일 유럽 남부 해양 국가들의 연합으로 구성된 가톨릭 신성 동맹군은
시칠리아의 메시나 항구에서 출항하여 오스만 함대를 만나 레판토 해전을 벌이게 되었다.
객관적으로 오스만 함대와 비교해볼 때, 기독교 연합 함대가 열세였기 때문에
교황은 기독교 연합 함대의 승리를 위해 유럽 전역에 묵주 기도를 바칠 것을 호소했으며,
본인도 직접 로마에서 묵주 기도를 바치는 행렬에 앞장 섰다.
당시 비오 5세 교황은
성모님의 도움을 청하며 묵주기도를 바칠 것을 권하는 가운데
전투에 나가는 병사들에게도 묵주를 나누어 주어 기도하게 하였다.
비오 5세 교황은 그리스도교 연합군들의 레판토 해전의 승전을 기념하고자
10월7일을 승리의 성모 축일로 정하였다.
그리스 서부에서 떨어진 코린토스 만 북부 끝에서 약 5시간에 걸친 치열한 전투 끝에
교황청과 베네치아, 스페인의 연합 함대는 오스만 함대를 상대로 간신히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하여 오스만 제국은 서유럽으로의 진격을 멈추게 되었으며,
동시에 대서양과 아메리카에 접근할 수도 없게 되었다.
만약에 오스만 제국이 이겼더라면 이탈리아로의 침입으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크며,
그렇게 된다면 스스로 로마 황제의 후예라고 자처하던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
과거 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폴리스와 로마를 모두 점거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을 수도 있었다.
오스만 제국은 아직 군함을 더 건조할 수 있었지만,
레판토 해전에서 잘 훈련된 많은 해군 병사를 잃음으로써 막대한 손실을 입게 되었다.
이후 오스만 제국은 레판토 해전에서의 피해를 끝내 완전하게 회복하지 못했으며,
결국 지중해 해군력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하기 이전 세기 수준으로까지 후퇴하였다.
승리의 성모 축일
레판토 해전에서 승전한 후,
교황 비오 5세는 승리의 성모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
연중 축일로 승리의 성모 축일을 제정하였다.
비오 5세보다 먼저 제5대 레스터 백작 시몬 드 몽포르는
1213년 9월 12일 뮈레 전투에서 알비파 이단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승리의 성모를 위해 최초로 성당을 지어 봉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