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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김호정
관심
‘드라마’.
한 시대를 풍미한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1923~1977)의 삶은 이 한 단어로 요약됩니다. 그의 목소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번 주엔 오페라의 디바 마리아 칼라스를 만나보겠습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소프라노 황수미와 함께 칼라스의 드라마, 칼라스의 소리를 분석해 보겠습니다.
1954년 오페라 '베스타의 무녀'에 출연했던 마리아 칼라스. 사진 홈페이지
1959년 8월 모나코의 몬테카를로.
높이 5층, 길이 100m의 축구장만 한 요트가 준비됐습니다. 시가 300만 달러 짜리 초호화 요트입니다. 황금과 대리석으로 치장한 욕실과 서재·수영장에 공연장 겸 라운지까지 갖췄죠. 명화와 불상, 그리스 골동품, 그랜드 피아노도 놓여 있습니다. 승무원만 60명인 이 배가 3주간의 크루즈를 시작합니다.
이 항해는 엉뚱하게도 오페라의 역사를 바꾸게 됩니다.
배에 탔던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 때문입니다. 당시 35세였던 칼라스는 ‘바다 위의 궁전’에서 소녀처럼 좋아하며 뛰어다녔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배가 튀르키예의 이스탄불에 정박했을 때 배의 주인과 함께 내려 하룻밤을 지내고 돌아오게 되죠. 배에는 크루즈에 함께 나섰던 남편이 혼자 남아 있었습니다.
이런 음악을 들으며 읽을 수 있습니다
🔹설득되는 거친 목소리
🔹당대 라이벌과의 비교
🔹노래로 보여주는 죽음
🔹그의 삶과 닮은 노래
➕부록
-뉴욕타임스가 뽑은 ‘칼라스의 명곡’
-20세기의 환승남, 오나시스에 대해
이제 전 세계 오페라 팬에게 암흑기가 시작됩니다. 마리아 칼라스는 당대 최고의 스타였습니다. 청중은 공연 며칠 전부터 침낭을 챙겨 들고 길에서 잠을 자며 칼라스를 기다렸죠. 전성기인 1948년부터 52년까지 18개 배역을 맡아 173차례 공연했던 가장 뜨거운 소프라노였습니다. 호화 요트에 승선하기 전인 1958년엔 28차례 오페라 공연을 했죠. 그런데 1960년 7회, 1961년 5회, 1962년에는 단 두 차례만 오페라 무대에 섰습니다. 1965년 42세 때 마지막 두 차례의 오페라에서 노래한 뒤 은퇴했습니다. 그 뜨겁던 오페라 디바가 이 크루즈 여행을 기점으로 서서히 식어갔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부족할 것 없는 최고의 스타가 어떻게 이런 선택을 하게 된 걸까요.
이상하게도 칼라스의 삶은 마치 오페라 작품들이 조목조목 예언해둔 것처럼 흘러갔습니다. 칼라스가 출연한 마지막 오페라는 ‘노르마’였습니다.
‘노르마’의 여주인공 노르마는 금지된 사랑을 합니다. 적국의 장군과 사랑에 빠진 거죠. 하지만 그 장군의 마음은 변했습니다. 그가 다른 여성과 사랑을 약속한 것을 알게 된 노르마는 자신의 몸을 불에 던져 파멸시키며 모든 관계를 끝내는 선택을 합니다. 다음은 유명한 아리아 ‘정결한 여신‘입니다.
〈1분25초에서 시작되는지 확인해보세요〉
오페라 역사상 가장 힘과 기품이 있는, 칼라스의 노르마입니다. 칼라스는 이 작품을 인기 오페라의 반열에 올려놨습니다. 노르마를 제대로 부를 소프라노가 마땅찮았을 때 칼라스는 25세에 처음 이 역을 맡아 드라마틱한 성공을 거뒀습니다. 평생 88차례 노르마로 출연했죠.
그리고 노르마처럼, 뜨겁게 빠졌던 상대에게 치명적 상처를 입게 됩니다. 그 호화 요트의 선주인 오나시스가 1968년 재클린 케네디와 결혼을 발표하면서죠. 칼라스는 TV의 저녁 뉴스로 이 소식을 들었다고 합니다. 오나시스의 배를 타고 함께 시간을 보냈던 그날 이후 꼭 10년 만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칼라스는 삶을 일으켜 세웠던 노래도 멀리하고, 20대에 만났던 남편과 억지로 이혼하면서 오나시스에게 빠져들었습니다. 그 끝에 폭력적으로 이별을 당한 칼라스는 자신을 파괴하는 길에 접어듭니다. 마치 노르마가 그랬던 것처럼요.
사람들은 칼라스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여성을 수집하는 남자에게 기꺼이 수집 당했던 디바. 그리고 열일곱 살 많은 오나시스에 대해서는 이렇게 수군댑니다. 칼라스의 명성과 젊음을 모두 빨아들이고 떠난, 비뚤어진 율리시즈라고요. 그만큼 팬들의 상심이 컸습니다. 당시 칼라스를 잃는 일은 오페라 전체를 잃은 것과 다름없었으니까요.
거친 소리에 설득 당한다
한 시대를 떠들썩하게 했던 칼라스의 매력은 뭐였을까요. 타고난 아름다움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칼라스를 발탁해 키웠던 지휘자 툴리오 세라핀은 칼라스의 소리에 대해 ‘위대하고 추한 목소리(grande vociaccia)’라고 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곱고 예쁜 소리가 아니라는 겁니다.
소프라노 황수미는 “뼛소리나 쇳소리 같은 거친 소리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사랑에 빠질 수는 없다”며 “하지만 테크닉과 표현력 면에서 반드시 설득 당하고 마는 소프라노”라고 했습니다. 칼라스의 독창적인 표현과 소리는 다음과 같은 부분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페라 ‘토스카’의 아리아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 중의 한 부분입니다.
〈2분40초〉
이 노래를 들어보면 음높이가 내려가는 부분에서 칼라스는 소리를 줄이지 않고 끝까지 뻗어 나가도록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명한 라이벌이었던 레나타 테발디의 같은 노래를 들어보면 확연히 차이가 납니다. 부드럽고 깨끗한 소리를 내는 테발디의 크리미한 피아노(p, 작은 소리)를 들어보세요. 황수미는 “칼라스는 토스카라는 인물에 자신의 감정을 호흡과 함께 실어 다 쏟아붓는다. 테발디는 아주 교과서적인 정제된 테크닉으로 노래한다”고 분석했습니다.
〈3분7초〉
칼라스의 강력한 무기는 드라마였습니다. 좋은 소리에만 집중하던 기존의 오페라에 진한 연기력으로 감정이입을 했죠. 그래서 오페라 역사에서 B.C.는 ‘칼라스 이전(Before Callas)’이란 뜻으로 쓰입니다.
황수미는 다음과 같은 부분에서 칼라스의 드라마를 발견합니다. 버림받은 여성이 죽어가며 부르는 ‘라 트라비아타’의 마지막 노래 ‘지난날이여 안녕’입니다. 소리는 무거운데 힘은 빠져 있습니다. 황수미는 노래의 마지막 부분에 대해 “칼라스가 빨대로 빨아 마시듯이 소리를 내면서 목소리로 연기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거대한 오페라 극장에서는 가수가 잘 안 보이기 때문에 몸과 얼굴로는 연기를 할 수 없다. 목소리의 색깔과 호흡으로 드라마를 표현해야 하는데, 그게 바로 칼라스의 주특기였다.”
〈2분43초〉
칼라스의 경력은 신화에 가깝습니다. 소프라노의 소리 중 가장 무거운 바그너의 ‘발퀴레’와 가장 섬세한 벨리니 ‘청교도’를 동시에 공연한 성악가는 지금까지도 칼라스가 유일합니다. 높은 음, 중간 음, 낮은 음에서 각각 다른 색깔의 소리를 내는 것도 매력적인 특기였죠. 음원으로 듣는데도 마치 4D로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은 입체성, 거기에 홀딱 반해 칼라스의 추종자가 된 팬이 전 세계에 많습니다.
미운 오리에서 원톱 디바로
이 놀라운 소프라노는 원래 미운 오리였습니다. 일곱 살 위인 미모의 언니에게 늘 주눅이 들었고, 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먹성이 좋아 몸무게가 90㎏이 넘은 상태에서 오페라 무대에 데뷔했죠. 식사할 때면 남의 접시 음식을 조금씩 먹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지독한 근시라 오페라 무대가 어두울 때는 눈을 감고 공연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고도 합니다.
칼라스의 성공은 무서운 노력 덕분에 가능했습니다. 그리스에서 칼라스를 가르쳤던 선생님 엘비라 데 이달고는 “다른 학생의 레슨까지 모두 참관한 뒤 온종일 노래 연습을 하는 학생이었다”고 회고했습니다.
오페라를 위한 또 다른 노력도 역사에 남았습니다. 1953년부터 1년 만에 무려 37㎏을 감량한 사실이죠. 배우 오드리 헵번을 본 뒤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지만, 오페라 출연을 위해서였다는 쪽이 더 설득력 있습니다. 바로 ‘메데아’라는 오페라입니다. 역시 배신한 남편에게 복수하기 위해 자신을 파멸시키는 내용이죠.
체중 감량 이전의 마리아 칼라스. 사진 워너뮤직
이렇게 어렵게 정상에 올라가 그렇게 순식간에 내려왔습니다. 칼라스는 어려서부터 노래에만 집중 했기 때문에 인간관계에 서툴렀고, 불안할 정도로 자신을 혐오했으며, 가학적 사랑에 빠져 자신을 돌보지 못했습니다. 결국 마지막엔 파리의 호화로운 아파트에 홀로 살면서 매일 수면제를 먹는 날이 반복됐습니다. 수면제 먹은 사실을 잊어 또 수면제를 먹고, 아침이면 “하루가 줄어 감사합니다”라고 되뇌는 날을 보내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의 비올레타처럼요.
비올레타의 노래를 마지막으로 들어보겠습니다. 노래라기보다는 독백인데요. 편지를 읽는 장면입니다. 죽음을 앞둔 비올레타의 감정을 이보다 적절하게 표현할 수는 없을 겁니다. 칼라스 이후 한동안 어떤 소프라노도 이 역할에 도전하지 못했습니다. “사랑에 빠져 죽음을 맞이하는 여성을 너무 많이 연기했다”는 자신의 말이 예언이 된 듯 칼라스는 54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처음부터〉
뉴욕타임스가 뽑은 ‘칼라스의 노래’
그리스 혈통인 마리아 칼라스는 1923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났다. 2021년 뉴욕타임스는 ‘마리아 칼라스와 사랑에 빠지는 5분’이라는 기사를 통해 칼라스의 음악을 재조명했다. 소프라노, 지휘자, 뉴욕타임스의 비평가 등이 꼽았던 최고의 노래 중 3곡을 소개한다.
투란도트 중 ‘이 궁전에서(In questa reggia)’
“50초쯤 지나 그녀가 납치돼 살해된 조상의 이름을 부르며 부드럽게 올라가는 구절을 부를 때면 항상 눈물이 난다.”
앤서니 토마시니, 뉴욕타임스 수석 클래식 비평가
https://youtu.be/0hJXUy3UfNQ?si=OuWJsmWHRjO2ssag
라트라비아타 중 ‘이 말을 전해주세요(Dite alla giovine)’
“이미지에 대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독특한 음색. 흠잡을 데 없는 음악적, 극적인 본능이다”"
르네 플레밍, 소프라노
https://youtu.be/aeE53u9-Kic?si=IOrbCRTa5V9lJ7m0
맥베스 중 ‘여기 아직도 핏자국이(Una macchia e qui tuttora)’
“가수가 진실을 아름답게 말하는 것뿐만 아니라 가장 어두운 진실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말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노래.”
스티븐 워즈워스, 연출가
https://youtu.be/tmxDPLD2c7o?si=anz7jmyc-y9L-yQL
20세기 최대의 환승연애 스캔들
새벽 3시가 넘었다. 1959년 6월 런던 공연 이후 칼라스를 위해 오나시스가 열어줬던 파티의 한 장면이다. 왼쪽부터 오나시스, 칼라스, 칼라스의 첫 남편인 메네기니. 두달 후 칼라스는 오나시스와 함께 살게 된다. 중앙포토
‘선박왕’ ‘희대의 부자’로 알려진 이 사람의 퍼스트 네임은 뭘까. 바로 아리스토텔레스다. 게다가 중간 이름은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소크라테스 오나시스의 요트에 그리스 혈통의 마리아 칼라스가 올라탄 것은 운명적이었다.
오나시스는 배 두 척으로 시작해 항공사와 선박 회사를 이끈 데 이어 정치와 경제까지 움직이는 갑부가 된 사연을 칼라스에게 그리스어로 들려줬다. 칼라스는 여기에서 매력을 느꼈다. ‘수도원’과 같은 오페라 무대에서 노래만 하던 칼라스가 진짜 세상의 이야기를 들었던 순간이다. 돈은 많아도 문화적 자본이 없었던 오나시스에게 문화계의 여왕인 칼라스는 좋은 먹잇감이었다.
칼라스는 미국 국적을 포기하고 첫 남편과 헤어지면서까지 오나시스와 결혼을 준비했다. 그러나 오나시스는 진심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재클린 케네디의 여동생을 배에 태우고, 그 다음에는 재클린에게 접근했다. 존 F 케네디의 암살 5년 후 그는 결국 재클린과의 결혼에 성공했다.
오나시스는 요즘 말로 하면 ‘환승 연애’의 달인이었다. 재클린과의 신혼여행지에서도 칼라스에게 전화를 걸었고, 파리의 집으로도 찾아갔다. 칼라스는 그때마다 흔들렸고 그의 목소리도 그랬다. 결국 “지친 말(馬)이 부르는 노래 같다”는 식의 혹평도 쌓여 갔다.
사실 칼라스의 쇠퇴는 오나시스와 크루즈 여행을 하기 전부터 예견됐다. 1958년엔 이탈리아 대통령이 관람하던 로마 공연에서 최악의 노래를 했다가 결국 청중을 중간에 돌려보냈을 때부터다. 무대 위의 프리마돈나를 넘어 사교계의 디바로 올라서며 노래보다는 파티에 집착했던 결과였다. 오나시스도 거기에서 만났고, 그 파괴적인 관계가 몰락을 가속화했다.
오페라의 역사를 바꾼 칼라스의 전성기는 결과적으로 무척 짧았다. 이탈리아 베로나에서 혜성처럼 떠오른 1946년부터 로마의 떠들썩한 공연 취소까지 불과 12년이었다.
김지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