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정지용
들에
그늘이 차고
다로 몰리는
소소리바람
앞섰거니 하여
꼬리 치날이어 세우고
종종 다리 까칠한
산새 걸음걸이
여울 지어
수척한 흰 물살
갈갈이
손락 펴고
멎은 듯
새삼 듣는 빗날
붉은 잎 잎
소란히 밟고 간다
(『문장』 22호. 1941. 1)
[어휘풀이]
-소소리바람 : 음산하면서도 살 속으로 스며드는 듯한 맵고 찬 바람.
회오리바람을 말하기도 한다
-듣는 : 떨어지는, ‘듣다’는 ‘떨어지다’의 옛말
[작품해설]
이 시는 먼저 1연부터 6연까지 가을비가 내리기 직전의 소란스런 산골짜기의 분위기를 보여 준다. 비가 내리려면 구름이 모여야 되는데 그것을 시인은 1연에서 ‘돌에 / 그늘이 차’는 것으로 표현한다. 가을 비는 스산한 바람과 함께 오는데 그것을 2연에서 ‘따로 몰리는 / 소소리바람’ 이라고 하여 빗방울이 막 떨어지기 직전의 분위기를 미세하게 포착한다. 3연에서는 비가 올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 차린 산새 한 마리가 화자의 눈앞에 등장한다. 비를 몰아오는 산골짜기의 바람을 느끼면서 산새는 꼬‘리 치날리어 세우고’ 종종갈음을 친다. 마치 산새가 비바람을 몰고 오는 것 같아서 이를 시인은 ‘앞섰거니 하야’라고 표현한다. 5,6연은 마르다시피한 가을 산골짜기의 계곡물을 보여준다. 여름 내 넉넉히 흐르던 골짜기의 물은 가을이 깊어가면서 거의 말라 버려서 ‘여울 지어 / 수척한 흰 물살’로만 흐를 뿐이다. 돌 틈을 지나 졸졸 흐르기 때문에 시인은 이를 두고 ‘갈갈히 / 손가락 피고’라고 표현한다.
7,8연에서는 비로소 비가 내리는 장면을 묘사한다. 가을비는 내리는 양이 많지 않고 산골짜기에 내리는 비라서 그친 듯 하면서도 다시 내린다. 그것을 시인은 ‘멎은 듯 / 새삼 듣는 빗날 이라고 하여 빗방울 하나하나까지 주의를 기울인다. 시인은 붉게 물든 가을 잎에 내리는 비를 8연에서 ’붉은 닢 닢 / 소란히 밟고 간다‘라고 표현한다. 4연에서 ’까칠한‘ 산새가 밟고 갔을 ’붉은 닢 닢‘을 이번에는 비가 후두둑 ’소란히 밟고 가‘는 것이다. 이 구절은 시각과 청각이 함께 어울린 공감각적 이미지의 독창적 표현이라고 할 것이다.
이렇듯 이 시에는 짧은 시행의 절제된 감각, 주관적 감정이 철저히 배제된 명징(明澄)한 이미지 등이 뚜렷이 드러난다. 이런 점에서 이 시는 정지용의 언어 감각과 시적 상상력의 진면(眞面)을 확인할 수 있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작가소개]
정지용(鄭芝溶)
1903년 충청북도 옥천 출생
1918년 휘문고보 재학 중 박팔양 등과 함께 동인지 『요람』 발간
1929년 교토 도시샤(同志社) 대학 영문과 졸업
1930년 문학 동인지 『시문학』 동인
1933년 『카톨릭청년』 편집 고문, 문학 친목 단체 ‘구인회’ 결성
1939년 『문장』지 추천 위원으로 조지훈, 박두진, 박목월, 김종한, 이한직, 박남수 추천
1945년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1946년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
1950년 납북,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