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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너는 내 것이라
(사 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 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 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사 43: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사 43:3)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
(사 43:4)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사 43:5)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쪽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쪽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사 43:6) 내가 북쪽에게 이르기를 내 놓으라 남쪽에게 이르기를 가두어 두지 말라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며
(사 43:7)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옛날에 가짜 중, 다시 말해 돌중이 시주한답시고 동네방네 다니면서 빈집에 들어가 여인네들을 농락하다가 붙잡혔습니다. 목에 칼을 채우고 포박해서 포졸을 붙여 귀양지로 보냈습니다. 해가 저서 주막에서 하룻밤을 묵게 됐는데, 포졸은 그 돌중을 기둥에 꽁꽁 묶어 놓고 식사를 했습니다.
그때 돌중이 “포졸님, 포졸님, 죄송합니다. 나 때문에 이렇게 고생하시는데 술이나 한잔 하십시오.” 그러니까 포졸이 “야, 이 사람아, 돈이 어디 있어서 술을 마시나?” 그때 돌중이 “포졸님, 돈이야 제 호주머니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것을 갖고 귀양지에 가야 쓸데가 어디 있겠습니까? 자 어서 갖다 쓰세요.”
그 말에 솔깃해진 포졸은 돌중의 돈으로 술을 실컷 마시고 곯아 떨어졌습니다. 돌중은 ‘기회는 이때다’ 생각하고 주막 아주머니를 불러서 화장실이 급하니 포승을 풀어 달라고 했습니다. 주인아주머니는 잠결에 포승을 풀어 주었습니다.
중은 곯아떨어진 포졸의 호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어 자기 목의 칼을 풀었습니다. 그리고는 제 목을 옥죄이던 칼을, 술 취한 포졸의 머리에 채우고 면도칼로 포졸의 머리를 싹둑 깎아 중머리로 만들고는 도망을 가버렸습니다.
술에 취해 자다가 아침에 깨어난 포졸은 그때까지도 술기운이 있었습니다. 그제 서야 “어, 중이 어디로 갔지?” 하며 중을 찾았습니다. 그러다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놀라면서 “어, 중은 여기에 있는데, 나는 어디 갔지?” 말하더랍니다.
이 풍자적인 얘기 속에 소중한 인생 교훈이 있습니다. 사람들도 자기를 잃어버리고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술에 취하고 정욕에 취한 가운데 하나님도 잃고 자신도 잃어버렸습니다. 여기서부터 인간의 비극이 시작됐습니다.
그렇습니다.
1. 인간의 비극은 자기를 잃어버린 데서 시작됐습니다.
소위 ‘자아 정체성의 상실’ 때문입니다. 자신이 누군지 모르고 삽니다. 내가 어떤 존재인지, 내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며 왜 사는지를 모릅니다. 다른 것은 다 알면서 왜 자기는 누군지 모르는가? 이게 문제 아닌가요? 인간은 왜 자신을 잃어버렸는가? 하나님을 잃어버린데 그 원인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나니 자신도 잃어버렸습니다.
어린 아기가 부모를 잃으면 그 순간 자기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어린 아이가 자기 이름을 아는가? 생일을 아는가? 집주소를 아는가? 아무 것도 모릅니다. 얼마나 불쌍한 아이인가? 천애의 고아가 됩니다. 부모 앞에서 얼마나 소중한 아이인데요.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있으면 얼마나 존귀한 자인가? 하지만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자기를 잃어버리고 가치 없는 인간으로 전락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생명 경시 풍조가 이 지경까지 온 것입니다. 사람을 우습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려서 외국으로 입양 간 아이들이 청년이 돼서 고국을 찾아와 자기 친부모를 찾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자기 정체성, 자기의 뿌리를 찾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찾으면 너무 기뻐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누군지를 찾은 것입니다. 하지만 끝내 찾지 못하면 고민 고민하다가 자살까지 하는 것입니다. 돈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자기가 누군지 몰라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야 잃어버린 자기를 찾습니다. 자기를 찾지 않고는 결코 인간은 행복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풍요로워도 마음의 만족을 얻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사랑스런 자식이나 손주를 잃어버렸다고 가정해보세요. 손주가 시장을 배회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 손주를 사랑하고 귀히 여기는 만큼 누가 인정해 주겠는가? 어림도 없지요. 속된 말로 ‘개밥의 도토리’가 되는 것입니다. 천덕꾸러기가 되는 것입니다. 부잣집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등지고 떠났을 때 어떻게 되었는가?
(눅 15: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눅 15:16)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자녀는 부모 앞에, 손주는 할아버지 앞에서 그 존귀함이, 그 진가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그런 미아 앞에 무슨 형용사를 붙인들 행복하겠는가? 돈 많은 미아, 예쁜 미아, 공부 잘하는 미아가 무슨 의미가 있나요? 행복의 비결은 근본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미아’나 ‘고아의 근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가? 간단합니다. 부모를 만나면 됩니다. 부모를 만나면 고생 끝, 행복 시작입니다.
저는 지난 주간 TV ‘인간극장’ 프로를 감명 깊게 보았습니다. 프랑스로 입양 간 딸이 프랑스 남자와 결혼해서 제주도에 와서 친모 곁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 딸의 말입니다. “저는 입양을 두 가지 때문에 싫어해요. 첫 번째는 버림을 받았다는 고통이 너무 커요. 그리고 과거의 모든 기억을 지워버려야 하는 것이 너무 싫었어요.” 그랬던 그녀가 고국으로 돌아와 엄마를 만나 행복을 찾게 된 것입니다. 돈 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프랑스인 남편의 말입니다. “나의 와이프가 엄마를 만나고 얼굴이 확 달라졌어요. 너무 행복하게 됐어요.”
뭐니 뭐니 해도 인간은 잃어버린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야 합니다. 그것이 급선무입니다. 그때 잃어버린 자기 정체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 행복할 수 있습니다.
아까 포졸에게 시급한 일은 무엇인가? 술기운으로 그냥 돌중 행세를 하며 살면 되는가? 안 돼지요. 정신 차리고 잃어버린 자기를 찾고 자기 본분을 감당해야지요. 여러분도 하나님을 믿음으로 잃어버린 자아를 되찾고 행복한 인생을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과연 인간은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2.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귀한 자입니다.
인간이 존귀한 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창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뜻은 인간에게 이성과 양심과 도덕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의미는 인간에게 영혼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영혼이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이 영혼이 거듭나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예배드리고 찬송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천하보다 귀한 것은 이 영혼의 가치 때문입니다. 이 영혼은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보배롭고 존귀한 자입니다.
(사 43:4)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그렇게 보배롭게 존귀한 자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볼지는 문제 되지 않습니다. 지나가다 보니까 보석이 진흙탕에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보석에 흙이 묻었습니다. 그래도 보석입니까? 아닙니까? 보석에 진흙이 묻어도 보석은 보석입니다.
우리가 때로 부족할 때가 있습니다. 때로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죄를 지을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보석은 보석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보배롭게 여긴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존귀한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노라”
그렇습니다. 인간은 어쩌다가 우연히 세상에 태어난 존재가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분명한 계획에 의해 지음 받은 존귀한 자입니다. 성경은 인간을 하나님의 피조물이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셨습니다. 어떻게요?
(창 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인간은 스스로 존재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지으시고 모든 주권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여러분이 선택한 것이 무엇인가? 여러분 중에 이 세상에 오고 싶어 온 분이 있는가? 우리나라를 여러분이 선택했는가? 부모를 여러분이 선택했는가? 생김새를 여러분이 선택했는가? 아닙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 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 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 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멘인가?
스코틀랜드의 한 숲 속에서 아주 더럽고 지저분한 개가 발견됐습니다. 몹시 굶주려있었고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저 개가 뉘집 개냐’고 쳐다보면서 지나갔습니다. 한 경찰관이 지나가다가 그 개를 보았더니 목덜미에 이름표가 달려있습니다. 그 이름표를 유심히 봤더니 그 이름은 ‘밥스’라는 개인데 그 밑에 이런 글이 쓰여 있었습니다. ‘이 강아지는 왕궁에 속한 강아지입니다.’
경찰관은 깜짝 놀랐습니다. 즉시 강아지를 데리고 가서 목욕을 시켜주고 약을 발라주고 잘 먹여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강아지를 왕에게 전달해주었습니다. 국왕 부처가 에든버러에 휴가를 왔다가 강아지를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얼마나 국왕이 기뻐했는지 모릅니다.
그 강아지는 바로 국왕의 소유였습니다. 비록 개라도 아무나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가치가 있었습니다. 소유자가 누구냐가 중요합니다. 인간은 누구의 소유인가? 저와 여러분의 소유주는 누구인가? 우리는 숲속에 버려져 지저분하고 몹시 굶주려 병까지 앓고 있는 개와 같은 존재인가? 결코 아닙니다. 인간의 소유주가 따로 있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소유권을 주장하십니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여러분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인정하십시오.
여러분이
3. 하나님의 소유임을 인정할 때 하나님이 지켜주십니다.
누구나 자기 소유에 대해서는 강한 애착을 갖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소유만 되면 아무 걱정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살이를 하며 때로 피할 수 없이 물을 만나고 또 불을 만납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홍해를 건너고 요단을 건너야 했듯이 말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느브갓네살 왕의 신상에 절하지 않아 풀무 불에 던져졌듯이 혹독한 시련을 통과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 이스라엘을 보십시오. 홍해를 건너고 넘치는 요단강을 건너다 희생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도 털끝 하나 상하지 않고 그 풀무 불에서 살아나왔습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셨습니다.
여러분은 보배롭고 존귀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지명하여 부르시며 ‘내 것’이라 하신 하나님의 값진 소유이십니다. 홍해가 닥치고 차고 넘치는 강이 여러분 앞을 가로막는다 해도, 혹 불구덩이를 통과해야 할지라도 결코 두려워 마십시오. 물에 침몰하지 않게, 불꽃에 타지 않게 하나님이 지켜주십니다.
(사 43: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본문 3절을 보십시오.
(사 43:3)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속하시고 지명하여 부르시며, 너는 내 것이라 하시기 위해 값비싼 대가를 치르셨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공짜로 우리를 당신의 소유로 삼으신 게 아닙니다. 그래서 이를 ‘속량’이라고 합니다. ‘속량’이란 대신 비싼 대가를 지불하고 자유인이 되게 하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세상과 마귀의 종으로 살던 우리를 당신의 독생자 예수님의 피를 바쳐 속량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피로 값 주고 산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장 보배로운 존재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분신이신 주님의 희생을 통해 구원하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소유가 되어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는 존귀한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우리가 사는 이유는 무엇인가?
4.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삽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데는 그만한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목수는 목재를 가지고 여러 가지 가구를 만듭니다. 문짝도 만들고 탁자도, 의자도 만들고 집을 짓기도 합니다. 이렇게 목수가 만든 모든 물건 가운데 아무런 목적과 용도가 없는 물건은 하나도 없습니다.
자, 여기 마이크가 있습니다. 이거 누가 만들었는가? 사람이 만들었습니다. 그러면 이 마이크의 존재목적은 마이크 자체에 있는가? 이것을 만든 사람에게 있는가? 당연히 만든 사람에게 있는 것입니다. 어찌 마이크뿐인가?
여기 꽃이 자기를 위해 존재하나요? 이 마이크가 자기를 위해 존재하나요? 이 컵이 자기를 위해 존재하나요? 아니지요. 오로지 이 컵을 만든 사람을 위하여, 값을 치르고 산 주인만을 위하여 쓰여 지기를 기뻐하고 영광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을 지으신 목적은 무엇일까요? 인간을 지으신 목적은 인간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거룩한 목적을 위해 인간을 지으셨습니다. 그 거룩한 목적이 무엇인가?
(사 43:7)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우리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그 분의 기쁨과 찬양이 되기 위해서 사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를 위하여 삽니다. 하나님의 피조물 중에 자기를 위해 사는 피조물은 오직 인간뿐입니다. 다른 피조물은 아예 그런 생각조차 안합니다. 이 꽃은 자기를 위해 피어 있지 않습니다.
인간은 왜 그렇게 살까요?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피 값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제 본래의 목적대로 하나님을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을까요? 우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고전 6: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맡겨주신 달란트와 재능을 하나님을 위해서 쓰는 것입니다. 매사를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십시오. 아주 평범한 일을 통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이보다 고상한 목적이 없습니다. 목적과 비전이 그 사람을 만듭니다. 고상한 목적이 고상한 사람을 만듭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 거룩한 목적을 위하여 산다면 그만큼 존귀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인생은 마치 고장 난 자동차와 같았습니다. 누가 이 고장 난 인생을 고칠 수 있는가?
어느 자동차 정비사가 여행 도중에 차가 고장이 나서 고생을 하고 있었습니다. 스스로 차에 대해서는 뭐든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기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고장 난 차를 고칠 수가 없었습니다. 아이들은 빨리 가자고 야단입니다. 그때 차를 몰고 가던 한 노신사가 차를 멈추더니 다가와서 말했습니다. “제가 도와드릴까요?” 그때 정비사는 무뚝뚝하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1급 정비사에요. 그런데도 고칠 수 없습니다.”
노신사가 다시 “제가 도와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다가와서 고장 난 차를 몇 군데 손으로 대자마자 곧 시동이 걸렸습니다. 노신사는 바로 그 자동차를 설계하고 제작한 포드 회장이었답니다. 그 덕분에 정비사 가족은 ‘룰룰 랄랄’ 신나는 여행을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고장 난 인생은 창조주 하나님만이 고치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을 인생의 정비사 되시는 하나님께 맡기면 새것을 만들어 주십니다.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이제 멋지고 신나는 인생 여행을 시작하십시오. 나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말입니다. 반드시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