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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무오성에 대한 연구
목차
제 Ⅰ 장 서 론
1. 문제 제기
2. 연구 목적
3. 범위와 방법
제 Ⅱ 장 성경의 영감
1. 영감의 정의
2. 무오성의 정의
3. 오류의 개념
제 Ⅲ 장 성경무오에 관한 7대 오해
1. 가현설적 성경관
2. 학문적 황무지
3. 연역적 성경관
4. 프린스턴 학파의 고안
5. 형식적(formal) 성경관
6. 과학적 도구(scientific tools) 무시
7. 해석학적 획일성
제 Ⅳ 장 무오성에 대한 증거
1. 성서적 증거
2. 철학적 증거
3. 정통 신학자들의 증거
1) 아우구스티누스(354-430)
2) 루터(1483-1546)
3) 칼빈(1509-1564)
제 Ⅴ 장 무오설에 대한 반론
제 Ⅵ 장 무오성에 대한
1. 성경은 인간의 말들이다.
1) 고대 문헌 중 하나이다(자유주의)
㈀ 독일의 자유주의
㈁ 미국의 자유주의
2) 좋은 가르침도 있다(실존주의).
2. 인간의 말이지만 하나님의 말이 될 수도 있다.
3. 인간의 말과 하나님의 말씀이 섞여 있다.
제 Ⅶ 장 비판에 대한 반론
1. 이론의 배경에 대한 반론
1)계몽 사조에 대한 비판
2) 역사 비평 방법론에 대한 반론
2. 비판이론에 대한 반론
1) 자유주의 성경관
2) 실존주의 성경관
3) 신정통주의 성경관
4) 신복음주의 성경관
제 Ⅷ 장 예수와 성경
1. 예수와 성경의 권위
2. 그리스도와 구약
3. 그리스도에 대한 모세의 기록
4. 그리스도와 말씀의 불가분성
제 Ⅸ 장 결 론
참 고 문 헌
제 Ⅰ 장 서 론
1. 문제 제기
한국에도 복음이 들어온지 1세기가 지났다. 그 동안 우리의 교회는 주의 은혜로 여러 방면에서 많은 발전을 거듭해 왔다. 많은 영혼들이 주님을 영접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이들을 교회는 신앙으로 잘 양육하여 믿음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노력하였다.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시행하며 성도들을 올바르게 교육하는 등 사역자들은 저마다 이에 관심을 갖고 정성을 다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축복과 감사와 은혜도 충만하지만 한가지 염려되는 것은 이 성도들이 방황하지나 않을까 하는 문제이다.
왜냐하면 과거 서구와 북미에서 실제 이러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열심을 갖고 있던 성도들이 자유주의의 신학의 영향을 받아(특히 성경의 무오성 비판)들여 신앙이 점점 식어지고 냉냉한 가운데 정리되지 않은 생각 속에서 방황했던 것이다.
이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전적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인본주의의 신앙을 가지고 있음을 볼 때,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확실히 믿고 깨달아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도록 하여야 된다는 문제가 제기된다.
2. 연구 목적
아직까지 우리 한국의 교회에는 말씀이 살아 있고 이 말씀에 대한 신뢰와 확신과 열정이 있음을 감사하며, 성경을 사랑하고 있다는 데 대해서는 매우 고무적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다는 증거이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정하지 않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특히 젊은이들은 더욱 더 그렇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 우리들은 무방비로 당할 수 없음을 깨달으며 진정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깨닫고자 한다.
본 논문은 성도와 우리 자신이 성경의 무오와 비판에 대한 최소한의 사전 지식을 갖게 함으로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당황치 않고 이론적 대항을 할 수 있도록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며, 순종하는 삶을 살도록 하고 성경의 유오성을 주장하는 자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3. 범위와 방법
성경의 무오성을 다루고자 할 때 살펴보아야 할 영역은 너무도 많고 광범위하다. 고고학, 자연과학, 지질학, 역사학, 철학, 윤리학, 사본학, 원어문법, 위경, 외경 등 어떤 분야든지 관계되지 않는 영역이 없을 정도이다.
특히 사본 문제는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성경이 얼마나 원본에 충실한가 하는 것인데 일단 이 논문에서도 현재 성경의 신빙성을 전제하고 이에 대한 자세한 연구는 미루기로 한다. 또한 성경 66권이 정경인가 하는 문제도 간단한 것이 아님을 느끼며 논문의 방향과 명료성을 위해 제외시켰다. 그리하여 무오성에 대해 초점을 맞추고 여기에 중심의 범위를 한정했다.
본 논문의 구성을 보면, 제1장에서는 문제의 제기와 연구 목적, 연구 방법, 제2장에서는 성경의 영감을, 제3장에서는 무오에 관한 오해를, 제4장에서는 무오성에 대한 증거를 그리고 5장에서는 무오설에 대한 반론을 다루었고, 제6장에서는 무오성에 대한 적극적 비판을 다루었으며, 제7장에서는 비판에 대한 반론을, 그리고 8장에서는 예수와 성경을 다루었으며 마지막 9장에서 결론을 맺어 보고자 한다.
제 Ⅱ 장 성경의 영감
성경의 무오성에 대해 말하려면 무엇보다도 성경의 영감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따라서 먼저 영감의 정의부터 짚어 보기로 하자.
1. 영감의 정의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3:16-17)
먼저 이 본문의 주석을 보면,
모든 성경은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사 그라페’(πάσα γραφἠ)의 문자적인 뜻은 ‘모든 책’으로 구약 성경을 의미한다. 그런데 ‘모든’의 헬라어 ‘파사’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다. ① ‘파사’는 ‘단일체로서의 전체’(all)를 의미한다. ② ‘그라페’ 앞에 관사 ‘헤’(ἠ)가 없으므로 ‘각각의 개별 성경을 강조하는 모든’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하나님의 감동’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오프뉴스토스’(θεόπνευστοꐠ)는 문자적으로 ‘하나님께서 호흡하시는’의 의미로 사람이 하나님의 생기로 생령(生靈)이 된 것 같이 성경의 말씀도 하나님의 영감으로 되었음을 시사한다. 교육하기에‘παιδεὶα’는 ‘모든 삶 가운데 어린아이를 올바로 교육하고 훈련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책망 ‘엘레그몬’(ἑλεγμόν)은 ‘유죄판결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잘못된 교리나 행동의 오류를 바로잡고 이단자들의 거짓을 밝혀내는 것을 시사한다. 바르게 함 ‘에파노르도신’(ἐπανόρθωσιν)은 ‘추를 바로 세우다’를 의미한다. 의 ‘디카이오쉬네’(διχαιοσύνη)는 법률적인 용어로 ‘엄격한 정의’를 뜻한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일반 신자를 가르키기도 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은 교사들을 가리키는 두 견해가 있다. 이 견해 중에 후자가 더 타당하다. ‘하나님의 사람’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하는 선지자에게 적용되었다.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본절은 성경으로 교육한 또 다른 결과이다.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의 헬라어 ‘엑세르티스메노스’(ἐξηρτισμἐνοꐠ)는 ‘완전히 구비된’, ‘완전히 공급된’이란 의미이다. 따라서 본절은 성경으로 교육을 받아서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충분히 준비된 사람으로 변화됨을 시사한다.1)
‘영감된’ 이란 원래의 라틴어의 뜻은 ‘숨을 불어넣다’이다. 희랍어 ‘θεοπνευστοꐠ;데오프뉴스토스’는 ‘신’과 ‘숨결’의 합성어인데 하나님에 의해 ‘영감 받다’는 의미이다. 문자적으로 이 말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God-spirated), ‘하나님의 입김이 발산됨’(God-breathed-out)을 의미한다.
“영감”이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 대로 기록하시기 위하여 성경을 기록하도록 선택하신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내적 역사로 정의할 수 있다. 성경의 모든 부분은 인간을 위하여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그 어떠한 오류도 없다.
성경의 기록자들이 거룩한 성경을 기록할 때는 성령의 인도 아래 역사적, 과학적 혹은 어떤 다른 오류들이라도 범하지 않도록 보호하심을 받았다. 그러므로 거짓과 실수와 결점이 없이 무오하다. 영감은 기록된 하나님 말씀의 모든 부분에까지 미치며 성경의 단어 선택에 있어서 조차 성령의 인도하심이 미친다. 더욱이 성경은 하나님과 선택된 인간의 공동 작품이다. 성경 저자들은 자신의 문체의 특성을 지니고 있고, 이런 인간의 상황 내에서 역사 하시는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는 것을 감독하셔서 결국 성경은 하나님의 것이 되게 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감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류가 있을 수 없다. 성령 하나님의 본성적으로 거짓말을 하실 수 없으시며 비진리의 저자가 되실 수 없음을 인정하여야 할 것이다.
2. 무오성의 정의
앞에서 영감에 대한 정의를 살펴 보았다. 여기서는 무오성의 정의를 살펴보기로 하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1장 2조는 신구약 성경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신앙과 행위의 규칙이라고 밝혀 두었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 문답(Westminster Larger Catechism) 제 3문에 대한 답변에서는 성경이 “신앙과 순종의 유일한 규칙”이라고하여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유일한 권위를 지니고 있음을 지적해 두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1장 4절과 5절은 이러한 성경의 권위는 어떤 인간이나 교회의 증언에 의존하지 않고 성경의 저자이신 하나님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것과 성경의 자증과 성령의 내증이 이를 입증한다는 것을 덧붙여 밝혀 두었다.2)
워필드의 성경 무오 사상은 1978년에 국제성경무오협회(ICBI, International Council on Biblical Inerrancy)에 의해 발표된 “성경무오에 관한 시카고 성명”(“The Chicago Statement on Biblical Inerrancy”)에 현대적 조명을 받으며 잘 나타나 있다. 지면상 이 성명의 요약 진술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3)
첫째, 자신이 진리이시며 진리만을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자신을 상실된 인류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창조자, 주, 구속자, 심판자로 계시하시기 위해 성경을 영감하셨다.
둘째, 성경은 하나님 자신의 말씀이며 성령에 의해 준비되고 감독된 사람들에 의해 쓰여진 것으로 그것이 다루는 모든 문제들에 있어서 무오한 신적 권위서이다. 그것은 그것이 주장하는 모든 것에 있어서 하나님의 교훈으로 신앙되어야하며, 그것이 요구하는 모든 것에 있어서 하나님의 명령으로 복종되어야하며, 그것이 약속하는 모든 것에 있어서 하나님의 보증으로 수납되어야 한다.
셋째, 성경의 신적 저자이신 성령은 그의 내증에 의해 그것을 우리에게 확증하시고 우리의 마음을 열어 그 의미를 깨닫게 하신다.
넷째, 성경은 전체적으로, 또 축자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개인 생활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구원적 은혜 면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창조 행위와 세계 역사의 사건들과 하나님 하에서의 그 자체의 문헌적 기원에 대한 진술 면에서, 즉 그 모든 가르침에 있어서 오류나 결함이 없다.
다섯째, 이런 전체적 신적 무오성이 어떤 방식으로든지 제한되거나 무시되거나, 성경 자체에 위배되는 진리관에 상대화되면, 성경의 권위는 피할 수 없이 저해된다. 이런 탈선은 개인과 교회에 심각한 손실을 안겨 준다.
무오성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정의한다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나, 몇몇 학자들의 견해를 종합하면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4)
성경 무오성이란 “신구약 성경 66권이 가르치는 바 내용은 그것이 무엇에 관한 것이든 간에 - 신앙, 실천, 역사, 지리, 연대, 과학 등 - 그 원본에 있어서는 아무런 오류가 없는 진리이다”는 의미이다.5) 여기서 특별히 유의해야 될 것은 성경에 포함된 것 모두가 다 진리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가르치는 바(what the Bible teaches or affirms)만이 진리인 것이다.
성경의 영감은 모든 내용이 정확하게 기록되었다는 것은 보장하지만, 모든 것이 다 진리라는 것은 보장하지 않는다. 성경이 가르치는 바는 다 진리이지만, 성경이 포함하고 있는 바가 다 진리인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성경은 사탄의 거짓말도 포함하고 있고(창3:4), 라합의 거짓말도 포함하고 있지만(수2:4), 성경이 이것을 가르치고 있지는 않다. 성경이 바보들의 말을 정확하게 기록은 하고 있지만(시14:1), 무신론을 가르치거나 주장하고 있지는 않다. 성경이 다윗의 부도덕한 행위를 기록은 하고 있지만(삼하11:4), 부도덕을 가르치거나 주장하고 있지는 않다.6) 그러기 때문에 이러한 것들은 성경에 기록은 되어 있지만 성경이 가르치는 바가 아니기 때문에 진리가 아니다. 오직 성경이 가르치거나 주장하는 바만이 절대무오한 진리이다.
무오성이라 할 때에는 다음의 몇 가지 명제들이 이해되어져야 한다.7)
1) 일반 모든 역사와 같이 성경 역사도 어떤 목적 하에 조심스럽게 사건을 선택하여 기록하였다.
2) 성경에서 자연 세계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 언어는 단순하고 직관적으로 관찰할 때 쓰는 언어이지 학문적 경험주의의 언어가 아니다.
3) 성경에는 비유적이고 상징적이며 신화적인 언어가 사용되었는데 그 이유는 주체와 문학 형태가 그것들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4) 가끔 똑같은 사건이나 비유가 비슷하고 나란히 두개의 얘기가 나오는 데 그 둘은 서로 다른 묘사법을 사용하고 서로 다른 관점에서 기록되었다.
5) 신약에서 구약을 인용할 때 현존하는 히브리어, 헬라어 사본과 반드시 문자적으로 정확하게 맞지 않는다. 이는 신약이 구약을 인용할 때에는 어떤 목적이 있는 것인데 그때 반드시 문자적으로 정확한 인용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성경 기록자들은 구약을 인용하는데 있어서 완전히 자유로와서 자신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 엄밀하면서도 자유롭게 구약을 인용하였다.
6) 성경에 나타난 여러 가지 표현의 특성은 대부분 기록자의 재능에 따라 달라진다. 요한계시록의 경우에 알 수 있는 것은 저자가 섬세하게 구약의 스타일을 모방하여 헬라어로 표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특성이 무엇이든 간에 성경의 언어는 전달하기 위한 것이며 또 그것이 사명이다.
성경은 고대 문서로서 이와 같은 여러 가지 특성들을 가지고 있으나 이 특성들이 하나님의 뜻을 교회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은 역사적, 도덕적 그리고 신학적인 속임수를 지니고 있다고 비난하는 비판적인 가설도 있다. 바로 이와 같은 것들이 성경의 무오성이 당면한 난제들이다. 왜냐하면 이 난제들이 성경 영감 교리를 제한하고 하나님의 진리를 성경으로부터 발췌하여 확립하는 전 과정을 위태롭게 하기 때문이다.
무오성이 무엇인지 정의하기가 매우 어려움을 인식하며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참 진리를 깨닫게 하기 위하여 성경을 영감하시고 감독하셔서 기록하였기에 성경은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깨닫게 된다.
3. 오류의 개념
앞에서 무오의 의미를 알아 보았는데, 무오성에 대해 보다 더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그 반대 개념인 “오류”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된다.
일반적으로 오류라 함은 우발적이든 고의적이든 진리에서부터 일탈(逸脫)하는 것을 의미한다.8)
그러나 신복음주의자들은 오류를 전혀 달리 정의한다. 미국의 신복음주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화란의 베르쿠버(G. C. Berkouwer)에 의하면, 인간의 유한한 지식이나 시간적으로 제약성으로 인한 우발적인 실수는 의도적인 기만이나 거짓말과는 달리 오류가 아니라는 것이다.9) 베르쿠버의 지도 아래 박사 학위를 받아 현재 풀러 신학교에서 교수하는 라저스(Jack Rogers)도 그의 스승의 견해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10)
라저스에 의하면, 오류라는 것은 사람을 의도적으로 기만하거나 오도하는 것을 뜻하지 우발적 실수를 뜻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성경은 권위가 있을 뿐만 아니라 오류가 없다는 것이다.11) 다시 말하면, 성경은 역사나 과학이나 연대 같은 문제를 취급할 경우 인간의 유한성으로 인해 본의 아니게 실수를 한 경우는 있지만, 독자를 기만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사실을 왜곡시킨 경우는 없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성경에서는 진리가 사실과의 부합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사실과 일치되지 않는 것은 그 의도 여하에 관계없이 오류인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라저스의 견해를 받아들일 수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제 Ⅲ 장 성경무오에 관한 7대 오해
우리는 성경무오 사상 확립을 통한 권위 회복의 필요성이 요구된다. 왜냐하면 한국의 기독교에도 역사 비평과 바르트 신학과 민중 및 해방신학 등의 영향을 받아 유사한 권위의 위기를 겪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에 성경 권위의 위기에 부딪혀 있으므로 성경권위 확립을 위한 성경무오 사상의 정립이 한국 교회에도 절실히 요청된다.
여기에서는 성경 무오에 관한 오해를 지적함으로써 성경무오를 정립하는데 하나의 초석을 놓고자 한다. 7대 오해란 오해가 일곱 가지 밖에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전형적인 오해들을 일곱 가지로 정리해서 독자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기 위한 구조에 불과하다. 이렇게 7대 오해를 지적하고 이러한 오해를 막기 위해 어떤 방향으로 성경관 논의가 있어야 할 것인지 간단히 방향 제시를 하도록 하겠다.
1. 가현설적 성경관
성경 무오에 관한 첫째 오해는 그것이 가현설적인(Docetic) 성경관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을 마치 인간의 손이 없이 하늘로부터 떨어진 계시 보따리인 것처럼 생각함으로써 성경의 인간 저자들을 무시한 성경관이라는 것이다.
혹시 성경이 무오하다고 믿는 자들 중에 성경이 “푸른 하늘에서부터 내려온 계시 보따리”인 것처럼 생각하는 자들이 있을 지 모르겠지만,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는 자들은 소수일 뿐 아니라, 성경 자체보다 더 보수적인 자들이다. 이것은 기계적 영감설과 비슷하다.12)
정작 워필드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길을 차단했다. 워필드는 구술설(dictation theory)을 반대했다. 그가 신적 저자와 인간 저자들의 ‘동류적 작용’을 지적한 것은 구술설이 들어설 자리를 없앤 것이다.
그러나 이 가현설을 주장하는 자들은 성경에 신적 요소와 인적 요소가 있을 때, 이 인적 요소를 인정한다면 성경은 필연적으로 유오하다는 것이다.
즉 성경이 인간에 의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은 곧 성경의 유오성을 의미한다는 논리적 비약이다. 물론 인간이 유한하지만 그렇다고 항상 오류를 범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하나님이 인간을 영감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의 기록 과정에서 오류를 벗어나게 할 수도 있음을 간과하는 것은 정당한 추리가 될 수 없다.13)
2. 학문적 황무지
성경무오에 관한 둘째 오해는 그것을 받아들이면 발전적 학문활동을 전개할 수 없고 그 결과는 학문의 황무지가 된다는 것이다.
성경무오의 이슈는 “본질적으로 성경의 권위에 집착하면서 동시에 어떻게 신학작업을 하겠느냐 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이런 오해는 성경무오는 가현설적 성경관이라는 첫째 오해와 직결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가현설적 성경관이란 결국 성경 산출에 있어서의 인적 요소를 무시하는 성경관인데, 인적 요소가 무시되면 인적 요소를 밝혀 나가는 학문활동이 마비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무오를 주장하여 실제로 학문적 황무지가 형성되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성경무오 사상의 토대 위에서 활발한 학문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단체의 한 예로 국제성경무오협회(International Council on Biblical Inerrancy)를 들 수 있을 것이다.
ICBI는 1977년 “성경무오를 성경권위의 필수요소로서, 교회를 이 역사적 입장에로 복귀시키기 위한 도시에서 그리스도의 교회의 건강을 위해 필요한 요소로 보고 이것을 정의하고 변호하고 적용하기 위하여” 조직되었다. 이로 인하여 성경무오의 기치를 들고 적극적인 학문활동을 전개하는 하나의 신학교를 들어 보라면 여러 학교가 있겠지만, 웨스트민스터 신학교(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를 들 수 있는데, 최근에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는 피상적이고 반작용적인 정통주의나 무방비한 학문적 사변을 경계하면서 성경무오의 전제 하에 활발한 학문활동을 전개하고 있다.14)
3. 연역적 성경관
성경무오에 관한 셋째 오해는 성경무오 사상이 “성경은 하나님 말씀이다”라는 명제를 놓고 이 명제로부터 연역해낸 성경관이라는 것이다.15) 다시 말해서 성경의 현상을 주석적으로 관찰해서 귀납적으로 추론하는 대신에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완전 무오하시다, 따라서 성경은 무오하다는 식의 연역적으로 추론한 것이 성경무오설이라는 것이다.
성경무오가 연역적 성경관이라는 오해에 대해서 폴 파인버그(Paul D. Feinberg)가 다음과 같이 반론하였다.16)
먼저 성경무오를 주장하는 자들이 단일 방법론을 사용하지 않았고, 연역적 방법을 사용한 자들을 무조건 교조주의적이고 패쇠된 자들로 매도할 수 없으며, 성경무오설을 포함해서 일반적으로 복잡한 학문 이론을 정립할 때, 단순히 연역법과 귀납법 중의 어느 하나만을 선택해서 사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성경무오를 연역법적 성경관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다. 실제로 이론을 세울 때는 귀납법과 연역법이 미묘하게 상호작용할 뿐 아니라 이 이상으로 나가서 창조적 사고나 갑작스런 통찰 등으로 논리를 전개하기도 한다.
4. 프린스턴 학파의 고안
성경무오에 관한 넷째 오해는 그것이 구프린스턴 학파의 신고안(innovation)이라는 것이다. 샌디인(Ernest Sandeen)은 그의 저서 「근본주의의 뿌리」(Roots of Fundamentalism: British and American Millenarianism 1800-1930)17) 에서 하지와 워필드가 성경 원본의 무오성 신앙을 일부 장로 교인들을 위한 교리적 차원으로 끌어 올림으로써 성경무오 교리를 창안했다고 했다.18)
로저스와 맥킴은 프린스턴 학파가 성경무오 교리를 창안할 때, 연역법에 의존했기 때문에 성경무오는 연역법 성경관이라는 셋째 오해와 넷째 오해는 관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혹자들은 칼빈이 행 7:16절에 관해 성경의 오류를 인정했다는 것이라고 하였지만 결코 칼빈은 성경 원본의 오류를 인정하지 않다는 것을 칼빈의 성경관에서도 밝혀진다. 칼빈은 성경 영감에 관한 고전적인 구절인 디모데후서 3:16절의 주석에서 이렇게 말했다. “성경에서 유익을 보기를 원하는 자마다 무엇보다 먼저 율법과 선지서는 인간들의 의지와 쾌락에 의해서 전달된 교훈이 아니라 성경에 의해서 구술된 교훈이라는 것을 확고한 포인트로 정해 두어야 한다.” 칼빈은 복음서들의 영감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의 증인들이 미리 합의한 계획에 의해 말한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성령의 구술하신 것을 각자 독자적으로 자유롭고 정직하게 썼다는 것이 명백할 때, 하나님의 진리가 더 명백하고 뚜렷하게 나타날 것인데, 이것이 하나님의 의도이다.”19)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성경무오 사상을 역사적으로 개관한 바에 의하면, 성경무오가 프린스턴 학파의 창안으로서 역사적 기독교 및 개혁주의 전통과 단절된 것이라는 주장들은 타당하지 못하다.
5. 형식적(formal) 성경관
성경무오에 관한 다섯째 오해는 성경의 권위는 본래 ‘신앙의 행위’ 영역에만 국한되고 역사와 과학 등의 영역에는 해당되지 않는 것인데 성경무오가 바로 이 점을 무시한 사상이라는 것이다.
성경무오를 가리키는 말이 40년 전까지만 해도 불오(infallibility)이었는데 이 용어의 의미가 점차 수정되서 성경의 권위가 구원적 문제에만 국한된다고 주장되면서 40년 전의 의미를 그대로 살리기 위해 무오(inerrancy)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이것은 성경무오가 컴퓨터식 정밀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폴 파인버그(Paul D. Feinberg)는 이점을 밝히기 위해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20)
첫째, 성경무오는 문법규칙들을 엄격하게 고수하는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둘째, 성경무오는 비유법이나 주어진 문학 장르의 사용을 배제하지 않는다.
셋째, 성경무오는 역사적 혹은 의미론적 정밀성을 요구하지 않는다.
넷째, 성경무오는 현대 과학의 전문 술어를 요구하지 않는다.
다섯째, 성경무오는 신약의 구약 인용에 있어서 여자적 정확성을 요구하지 않는다.
여섯째, 성경무오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가 쓴 정확한 단어들(ipsissima verba)과 정확한 음성과 정밀하게 일치함을 요구하지 않는다.
일곱째, 성경무오는 어떤 하나의 기록이나 관련되고 결합된 기록들의 철저한 포괄성을 요구하지 않는다.
여덟째, 성경무오는 성경 저자들이 사용한 자료들의 불오(infallibility)나 무오(inerrancy)를 요구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성경무오가 현대 과학적 정밀성과 동일시될 수 없다. 우리는 성경을 성경의 용법이나 목적에 생소한 진위의 표준들에 따라서 평가하는 것의 적절성을 부인한다. 그러나 성경무오가 이처럼 현대과학적 정밀성과 동일시될 수 없다고 하는 말은 성경이 역사나 과학 등 구원 외의 문제를 다룰 때 오류를 범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여기서 간단히 한가지 지적하고 넘어갈 것은 성경이 그 구원적 기능 면에서는 무오하나 과학과 역사 면에서는 유오하다는 것은 기능과 형식을 분리하는 이원론적 전제를 깔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이원론은 부당하다. 왜냐하면 구원적 기능이 성경의 형식을 통해 제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의 기능과 형식을 떼어놓을 수 없다.
6. 과학적 도구(scientific tools) 무시
성경무오에 관한 여섯째 오해는 성경무오를 주장하는 자들이 과학적 분석의 도구들을 무시한다는 것이다.
이 오해에 대해 우선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과학적 도구’(scientific tools)니 ‘문학적 도구’(literary tools)니 하는 것이 마치 기계공의 연장과 같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라는 점이다. 기계공의 연장은 그 자체로서 아무런 사상의 영향이 없는 것이지만, ‘문학적 도구’는 중립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이 지적되어야 한다.
가령 마태복음 2:1-12절에 관한 주석에서 “마태는 이제 그 지방의 유대 목자들의 방문(눅 2:8-20)을 외국으로부터 온 이방인 매기에 의한 경배로 바꾼다.”21) Gundry는 이와같이 매기의 방문을 비역사적인 것으로 보고 마태가 이방인들도 예수를 왕으로 경배한다는 신학적 주제를 살리기 위해 조작한 얘기로 평한 것이다. 이런 점이 바로 그가 선한 의도를 가졌다 하더라도 편집 비평이란 ‘도구’로 성경무오를 허문 점이다.
성경무오를 주장하는 학자들도 성경의 내용비판을 하지 않고 그 내용을 밝히는 데 도움들이 되는 ‘문학적인 도구들’을 비판적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도구들’을 무시한다는 것은 하나의 오해에 불과하다.22)
7. 해석학적 획일성
성경무오에 대한 일곱째 오해는 그것이 해석학적 획일성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아마 이 오해는 극보수주의자들 편에서 발생하는 오해일 것이다. 이것은 어느 구절에 대한 특정 해석만이 성경무오를 세워준다는 오해로서, 학문적 도구들을 사용하여, 혹은 해석자의 시각의 차이 때문에 생기는 해석의 다양성을 수용하지 못하는 데서 야기되는 오해라는 점이다.
성경은 무오하지만 해석학은 유오할 수 있고 따라서 다양할 수 있다. 그러나 다양한 해석은 성경 권위를 무너뜨리려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참으로 발견하기 위하여 마치 가재를 잡기 위해 모든 돌을 다 들쳐내는 것처럼 성경을 자세히 연구하는 자세에서 오는 것으로 보고 해석학적 융통성을 보여야 할 것이다.
이상에서 성경무오에 관한 7대 오해를 살펴 보았다. 성경 무오를 주장하는 자들은 그것의 뉴앙스를 바로 알아서 성경의 권위를 세운다는 명목하에 성경보다 더 보수적인 자세를 가짐으로 오히려 성경의 권위를 세울 수 있는 길을 차단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아울러 단편적으로 몇 마디를 읽거나 들어서 마구 비판하고 매도하는 폐쇄성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성경무오에 대한 오해를 살펴보면서 마지막으로 성경관 논의의 방향설정에 관해 몇 가지 제의를 하면,
첫째, 어떤 경우에라도 성경의 절대 권위는 수호되고 주장되어야 한다. 성경 무오는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권위 아래서 바른 지도를 받는 올바른 길이므로 반드시 견지되어야 한다.
둘째, 성경 무오를 견지하는 방법에 있어서 보수주의적 복음주의자들이 너무 수비적 자세만을 취해서 마치 포위된 성벽 안에서 간혹 창이나 몇 번 던지고 또다시 숨어버리는 태도를 과감히 탈피하고 성령의 검을 담대히 휘두르는 공세를 취하여야 한다.
셋째, 성경을 현대 속에 넣어 현대를 변혁시키도록 한다는 점에서 성경의 지평과 현대의 지평 간에 ‘지평의 융합’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성경무오의 연구는 삶을 변혁시키는 방향으로 역동적으로 전환될 필요가 있다.
넷째, 성경무오와 함께 성경이 생명의 말씀이란 점이 발굴되고 주장되어야 할 뿐 만 아니라 아울러 생명의 말씀인 성경이 왜 삶의 현장에서 생명으로 나타나지 않는지가 해석학적으로 규명되어야 한다. 이것이 규명되면 생명의 말씀을 생명적으로 체험하게 됨으로써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바로 경배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경에 대한 오해를 능동적으로 극복하고 성경의 권위를 전향적으로 정립하는 길이 아니겠는가?
제 Ⅳ 장 무오성에 대한 증거
성경의 가르침 전체가 절대 무오하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증명될 수 있다. 그러므로 본 장에서는 성서적 증거와 철학적 증거, 그리고 역사적인 증거를 살펴 봄으로서 성경이 무오하다는 사실을 알아보고자 한다.
1. 성서적 증거23)
첫째, 성경은 그 자체의 영감을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필연적으로 무오성을 내포한다. 이미 1장에서 디모데후서 3:16절을 본바와 같이 성경은 성령이 감독하시고 인도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 성경은 하나님에게서 나왔고 하나님에 의해 감독된 책이기에 오류가 있다고 생각하기는 불가능하다.24)
둘째, 성경은 그 자체의 권위를 가르치고 있는데, 이는 필연적으로 무오성을 내포한다.25)
성경의 권위를 가장 명백하게 가르치고 있는 구절은 마태복음 5:17-20과 요한복음 10:34-35이라 할 수 있다. 이 두 구절은 우리 주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인데, 마태복음 5:17-20의 경우 율법의 세세한 부분 하나 하나가 다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천지가 없어지지 아니할 것을 가르치고 계신다.
여기서 특히 유의해야 될 부분은 “일점 일획”이라는 표현이다. “일점”은 헬라어의 ἰώτα(이오타)를 번역한 말인데, 이 단어는 히브리어 알파벳 י(요드)를 가리키는 말이며, 요드는 히브리어 알파벳 가운데 가장 작은 문자이다.
“일획”은 헬라어의 μια κεραια(미아 케라이아)를 번역한 말인데, 케라이아란 히브리어 알파벳 가운데 비슷한 두 문자를 구별하기 위해 사용하는 돌출부를 가리킨다. 예를 들면 ר(레쉬)와 ד(달렛)를 비교해 볼 경우 앞의 문자는 오른쪽 윗부분의 둥그스름한데 반해서 뒤의 문자는 그 부분이 돌출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돌출부 때문에 앞의 문자는 레쉬가 되고, 뒤의 문자는 달렛이 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하셨을 때, 율법의 세세한 부분 하나 하나까지 빠짐없이 다 이루어지겠다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율법의 세세한 부분까지도 오류 없는 진리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 10:35에서는 주님께서, “성경은 폐할 수 없나니”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러 예수님께서 성전에 오셨을 때,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말하기를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여든 밝히 말하시오”(10:24)하니, 예수님께서 답변하시기를 “나와 내 아버지는 하나이니라”(10:30)고 하셨다. 여기서 “하나”라는 단어는 ἕν(헨)인데, 이 단어는 여기서 남성이 아니라 중성으로 사용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아버지와 예수님은 동일인임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동일인 본성을 가지고 있음을 나타낸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자 마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돌로 치려 하니 예수님께서 시편 82편을 인용하여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시키고 계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에 나타난 예수님의 논점은 이러하다. “시편 82:6에서도 엘로힘이란 단어를 가리키기 위해 사용했다고 해서 나를 참람하다 할 수 있느냐?” 예수님의 주장의 타당성 여부는 ‘신’이라는 단어 하나에 달려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여기서 우리 주님께서 보여 주시는 바는 성경의 미세한 부분 하나에 이르기까지도 영감되었고 무오하기 때문에 성경은 아무라도 폐할 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셋째, 한 저자가 다른 저자의 성경을 인용할 때 성경이 무오하다는 전제하에서 인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26)
이미 앞서 언급한 요한복음 10:34의 경우는 성경의 무오성이 단어 하나 하나에까지 이르고 있음을 보여 준다.
마태복음 22:23-33의 경우를 한번 보자.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7번 결혼한 후 죽은 여인을 예로 들면서, 부활 때에는 그 여인이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고 물었다. 이 질문에 대해 예수님께서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22:30)고 대답하신 후, 출애굽기 3:6을 인용하셨다. 즉,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10:32). 이 인용에서 핵심은 현재 동사인 ειμι(이다)라는 단어이다. 예수님께서 “이었다”는 과거 시제를 사용하지 않으시고 현재 시제를 사용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출애굽기 3장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 수 백년 전에 죽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살아서 하나님과 함께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었다”고 했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주장을 뒷받침하는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마태복음 22:41-46을 보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왔을 때, 예수님께서 물으시기를 “그리스도가 누구의 자손이냐?”(22:42)고 하시매, 바리새인들이 대답하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이라고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답변만으로는 불충분한 것을 아셨다. 메시야의 인성에 관한 한 바리새인들의 답변과 같이 다윗의 후손임이 분명하지만, 그는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시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신의 인성과 아울러 신성을 증명하시기 위해 시편 110:1을 인용하셨다. 즉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22:44). 여기서 예수님의 주장의 요점은 “내 주께”라는 구절에 있는 “내 혹은 나의”이라는 단어에 달려 있다. 다시 말하면, 다윗은 그의 후손으로 태어날 메시야를 가리켜 “나의 주”(יꔹꕌאָ)라고 했으니 다윗은 그의 후손이 인간 이상의 존재임을 알고 있었다는 말이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여기서 특히 유의해야 될 것은 히브리어에서 “주”(ןוֹדאָ)라는 말과 “나의 주”(יꔹꕌאָ)라는 말은 끝에 “요드”(י)가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라는 사실이다. 히브리어 문자 가운데 가장 작은 “요드”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예수님의 주장이 성립하느냐 않느냐가 판가름 나는 것을 볼 때, 예수님의 성경에 대한 태도가 어떠했는가 하는 것을 역력히 알 수 있다.
넷째, 성경이 가르치는 바 하나님의 성품이 진실한 것이라면 성경은 무오할 수 밖에 없다.27)
성경은 하나님이 거짓말 하실 수 없는 분이신 것을 거듭 주장하고 있다(민 23:19, 삼상 15:29, 딛 1:2, 히 6:18).
하나님이 거짓말하실 수 없는 분이시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성경은 무오할 수 밖에 없다. 이를 논리적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은 진실하시다(롬 3:4).
성경은 하나님에게서 나왔다(딤후 3:16).
그러므로 성경은 진실하다. 즉 오류가 없다(요17:17).
하나님은 결코 거짓말 하실수 없는 분임을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알 수 있기에 진실하신 하나님에게서 그 어떠한 오류가 있을 수 없음을 인식할 수 있다.
2. 철학적 증거28)
1) 먼저 인식론적으로 볼 때, 성경 전체가 다 무오하지 않으면, 성경의 어느 부분도 무오하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가 없다. 이 말은 성경 전체가 다 거짓이라는 뜻이 아니라, 만약 성경 전체가 무오하지 않으면, 성경이 어떤 사실을 가르칠 때, 우리는 그것이 진리인지 아닌지를 확실히 알 수가 없다는 말이다.29)
이 주장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거의 다음과 같이 반론을 제기한다.
예를 들어, 내 아내가 한 두 번 실수를 하고 거짓말을 했다고 해서 내 아내가 안 되는 게 아니듯이, 성경이 한 두 번 오류를 범했다고 해서 성경 전체를 문제로 삼아 갑론을 박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이 논리는 성립될 수가 없다.
첫째, 내 아내는 영감도 무오성도 주장하지 않기 때문에 한 두 번 오류를 범했다고 해서 크게 문제 될 것이 없다. 그러나 성경의 경우는 다르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스스로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단 한 번이라도 오류가 발견되면 성경이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그 자체의 주장을 깡그리 의심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둘째, 성경에 오류가 하나 발견되었다고 해서 물론 성경 전체가 다 오류라는 주장은 성립될 수 없다. 그러나 성경 전체가 의심을 받게 된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럴 경우에, 성경의 어느 부분에 오류가 있고, 어느 부분에 오류가 없나 하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나? 신복음주의자들은 구원과 실천에 관한 부분은 오류가 없고, 그 외의 부분은 오류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문제는 구원에 관한 부분과 그 외의 부분을 명쾌하게 구분해 낼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2) 논리적으로 볼 때, 성경의 무오성은 피할 수 없는 결론이다.30)
다음과 같은 연역 추리를 한번 고찰해 보자.
하나님은 진실하시다(롬 3:4).
성경은 하나님에게서 나왔다(딤후 3:16).
그러므로 성경은 진실하시다. 즉 오류가 없다.
귀납 추리의 경우 비록 대 전제와 소전제가 진리라 하더라도 결론의 진실성이 100% 보장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귀납 추리는 하나 하나의 개별적 사실을 다 탐구해야 하지만, 이것이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귀납 추리의 경우는 결론이 비록 타당하게 추론되었다 하더라도 그 진실성은 100% 보장될 수 없고, 고도의 개연성만 보장될 수 있는 것이다. 귀납 추리와는 달리, 연역 추리의 경우에는 대전제와 소전제가 진리이면 거기서 추론되는 결론은 타당할 뿐만 아니라, 그 진실성도 100% 보장이 된다.
위에 주어진 삼단논법을 한번 보자. 하나님은 진실하시며, 거짓말하실 수 없는 분이라는 것을 부인할 신학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비록 성경의 무오성을 믿지 않는 신학자들 조차도 하나님이 진실하시다는 데에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하기에 성경은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진리일 수 밖에 없다.
3. 정통 신학자들의 증거
성경무오성을 지지하는 위대한 신학자들의 주장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1) 아우구스티누스(354-430)31)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서를 일별해 보면 그가 얼마나 정통적인 성서관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 밝혀질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32)에 의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으며, 따라서 그것은 최고의 권위를 갖게 된다. 성경은 그 내용이 서로 모순되거나 충돌되지 않으며, 아무런 오류가 없다. 우리가 종종 발견하는 오류는 복사자들이나, 반역자들에 의해 생긴 것이며, 그 원본에서는 전혀 오류가 없다. 만약 원본에 단 하나라도 오류가 발견된다면, 그것은 성경 전체의 권위를 해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성경의 무오성은 역사적 사실이나 과학적 사실에도 해당된다. 이상의 몇 가지 증거를 종합해 볼 때, 아우구스티누스가 성경의 무오성을 믿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2) 루터(1483-1546)33)
루터34)가 성경의 무오성을 믿었느냐 안 믿었느냐에 관해서는 다소 논란의 여지가 있다. 라인홀트 제에베르크(Reinhold Seeberg)의 견해35)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라저스는 다음의 세 가지 이유로 루터가 무오성을 가르치지 않고 있다고 주장한다. 첫째, 루터에 의하면 성경의 근본적인 목적은 구원(또는 복음)이므로, 구원 외의 부분은 중요성이 없는 게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둘째, 루터는 성경의 저자들이 당시의 상황에 적응했기 때문에, 그 당시의 잘못된 관념이나 내용을 받아들여 결과적으로 성경에 오류가 있게 된 게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셋째, 루터가 여기 저기서 성경을 비판적으로 고찰하고 있는 것을 볼 때, 그가 성경의 무오성을 믿지 않은 게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면 과연 루터가 성경은 무오가 있다고 믿었는가? 위에 열거한 세 가지 주장을 하나씩 고찰해 보자.
첫째, 루터의 신학이 그리스도 중심이란 데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루터가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에 관한 성경 이외의 부분에는 오류가 있다고 믿었다는 주장은 성립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루터에 의하면 성경 전체가 예수 한 분만에 관한 책이기 때문이다.
둘째, 루터는 성경의 저자들이 당시의 상황에 적응했기 때문에 그 당시의 잘못된 관념이나 내용을 받아들여 결과적으로 성경에 오류가 생기게 되었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셋째, 루터가 성경의 정경 문제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취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가 히브리서, 유다서, 계시록 등의 정경성에 관해 회의를 표했고, 야고보서를 가리켜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할 정도였다.
루터의 정경관이 문제점을 내포한 것은 사실이지만, 루터가 정경이라고 받아들인 책의 무오성을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는 것도 또한 사실이다. 루터는 정경의 범위와 성경의 무오성을 구분하여 일단 정경으로 받아들인 성경의 무오성은 의심하지 않았던 것이다. 루터는 성경이 모든 부분에서 오류가 없는 진리였다고 믿었으며 또한 그렇게 가르쳤다. 또한 그는 그의 모든 작품을 성경은 진리였다는 확신에 근거해서 썼으며, 진실성에 대한 자신의 신뢰를 보여주는 많은 증거를 남겨 놓았다.
역사적으로 루터가 “하나님의 말씀”이란 용어를 사용했을 때, 그의 심중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었고, 또 자주 이렇게 했던 것은 사실이다.36) 그러나 그가 항상 이렇게 했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더욱이 결과적으로 루터는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란 용어를 성경을 의미하며 사용했음을 증명할 수 있는 충분한 증거들이 있다. 그는 Scripture라는 단어도 사용했는데 그가 Scripture를 무오한 것으로서 간주했다는 증거들은 얼마든지 있다. 루터는 성육신 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의 두 종류가 있음을 분명히 알고 있었으며, 그는 둘 다 완전히 신뢰할 만한 것임을 주장했다.
3) 칼빈(1509-1564)37)
칼빈이 성경의 무오성을 신봉했다는 것은 바르트38)와 브루너39)는 물론, 많은 다른 학자들에 의하여서도 인정되고 있다. 그러나 유독 맥닐(John McNell)40)과 라저스41)를 비롯한 소수의 학자들만은 이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
맥닐의 주장을 한번 살펴보면, 성경 무오설은 기계적 영감설과 관계있기 때문에, 만일 칼빈이 기계적 영감설의 신봉자가 아니었다는 것이 증명되면 칼빈이 성경의 무오성도 믿지 않았다는 주장이 성립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칼빈은 물론 기계적 영감설을 신봉하지 않았고, 완전 영감설을 신봉했다. 그렇기 때문에 칼빈은 성경의 무오성을 믿지 않았다는 것이다.
맥닐이 칼빈의 견해를 잘못 이해하고 있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다음의 몇몇 인용문을 보면 칼빈이 무오성을 철저히 믿었다는 것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칼빈42)에 의하면, 성경은 “무오한 표준”이며, “점이나 흠이 없고”, “확실하고 무오한 법칙”이며,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라저스가 해석하는 칼빈은 루터와 별로 다름이 없다. 즉 성경의 무오성은 성경 전체에 긍하는 게 아니라, 구원에 관한 부분에만 해당되며, 구원 이외의 부분에서 발견되는 오류는 고의적이고 의도적인 것이 아니라 시대의 상황을 반영한 적응 때문이라는 것이다.
“신학자 칼빈에게 있어서 성경상의 오류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따라서 모순인 것 같고 정확하지 않은 것 같은 구절들은 끊임없이 조화를 이루어서 설명하고 해석한다.”43)
아우구스티누스와 칼빈, 그리고 루터에 대해 읽고 그들을 성경의 무오성을 부인하는 현대의 저술가들과 비교하는 사람은 그 개혁자들의 태도와 현대의 무오성을 반대하는 사람들 간에 차이점은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후자는 틀림없이 성경을 훼손하고 인간화하며 낙타를 삼키고도 하루살이를 길러내는 자세라고 할 것이다.44) 그러나 이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그들의 태도는 존경과 겸손 그것이었으며 성경을 권위가 있고 어떠한 오류도 없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긍정적인 모습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45)
하지만 이 세 사람의 주장이 완전하지는 않다는 것을 인식한다.
현 사회를 이끌고 있는 우리들도 이들처럼 성경은 권위가 있으며 또한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었던 것 처럼 우리도 이 말씀앞에 겸손으로 무릎꿇어 대하는 삶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제 Ⅴ 장 무오설에 대한 반론
신구약 66권 전체가 절대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며, 성경이 가르치는 바는 반드시 진리라는 주장에 대해 많은 반론이 제게되고 있는데, 여기서는 그 중에 중요한 것 몇 가지를 검토해 보도록 하겠다.46)
첫째, 반대자들은 흔히 주장하기를 무오설은 성서적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이 자체의 영감은 주장하고 있지만, 자체의 무오성을 언급한 적은 한번도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 반론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기 때문에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는 게 좋겠다. 성경에 “무오성”이란 단어가 한번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고, 어느 한 구절을 바로 석의하면 무오성에 이른다는 주장을 할 수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무오성이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느냐?
삼위일체의 교리를 한번 예로 들어 보자. 이 교리가 성경에 근거하고 있고, 따라서 성서적인 교리라는 것을 의심하는 신학자는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삼위일체>란 말은 나타나지 않고 있으며, “성부, 성자, 성령은 위격(位格)은 상이하나 동일한 본체이다”는 것을 직접 가르치고 있는 구절도 분명히 그렇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자료들을 한번 종합해 보자.
⑴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신 6:4, 딤전 2:5).
⑵ 성부는 하나님이시다(요 6:27, 롬1:7, 갈1:1).
⑶ 성자는 하나님이시다(요1:1, 20:28, 딛 2:13, 벧후 1:1).
⑷ 성령은 하나님이시다(행 5).
⑸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상이하시다(사 48:16).
이상의 여러 자료들을 종합해 볼 때, 얻을 수 있는 타당한 결론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나(즉, 동일한 본체이시나) 그 위격은 상이하시다”는 것이 될 수밖에 없지 않는가? 그러기 때문에 성경에 비록 삼위일체를 가르치는 특정한 구절이 없더라도 삼위일체의 교리는 성서적인 교리인 것이다.47)
동일한 논리가 무오성에도 그대로 적용이 된다. 성경에 “무오성”이란 단어가 나타나지도 않고, “성경이 가르치거나 주장하는 바는 항상 진리이다”는 것을 명명백백하게 가르치는 구절도 없다. 그러나 이미 앞에서 논의했던 바와 같이 성경에 나타난 여러 자료들을 종합할 때, 무오성은 피할 수 없는 결론이며, 따라서 그것은 지극히 성서적인 교리인 것이다.
둘째, 혹자는 반대하기를 무오성의 교리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성경에 나타난 미세한 내용의 진실 여부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관계가 중요하기 때문에 무오성이란 것은 대수롭지 않은 게 아니냐는 것이다.
반대자들의 주장하는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와의 개인적 관계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데는 이의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만일 성경이 무오하지 않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가르침을 바로 이해할 수 없다. 따라서 무오성은 지극히 주요한 교리인 것이다.
셋째, 반대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성경의 무오성은 원본에만 국한되는 것이며, 오늘날 원본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무오설이란 것은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48)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무오한 원본을 보존하시지 아니하셨는가에 대해 우리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최소한 두 가지 이유는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⑴ 만약 원본이 존재한다면, 미련한 인간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대신에 원본을 숭배할 것이기 때문이다.
⑵ 만약 원본 하나만 존재한다면 그것을 왜곡시키기가 아주 용이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존재하는 사본은 신약의 경우 약 5,300개인데(헬라어만 생각할 때), 이렇게 많은 사본이 각지에 산재할 경우 그것을 왜곡시킨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면 현존하지 않는 원본의 무오성을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49)
⑴ 무오성은 하나님의 성품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완전하시고, 거짓말하실 수 없는 분이기 때문에 당신의 종들을 통하여 기록된 원본의 말씀에 오류가 있게 하실 수 없으신 것이다.
⑵ 만약 원본 조차도 오류 투성이였다면 본문 비평학, 즉 현존하는 사본들을 비교·대조·분석하여서 원본을 회복하려는 노력은 무용지물일 수 밖에 없다. 원본이 무오하다는 확신이 없을 경우에는 사본을 하나 하나 비교·검토한다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행위에 불과하다.
⑶ 무오한 원본과 불완전한 사본과의 관계는 무오한 예수 그리스도와 불완전한 제자들과의 관계에 비교해 볼 수 있다.
넷째, 반대자들은 흔히 주장하기를 무오설은 분파를 조장하고 복음적인 학자들간의 화합을 방해하는 요소라고 말한다. 성경 무오설은 분파를 조장하고, 성경 유오설은 화합을 조장한다면, 오히려 화합보다는 분파를 택하는 게 나을 것이다. 우리의 신앙과 실천의 유일한 권위인 성경이 오류가 있다고 믿는 무리들과 하나가 되는 것보다는 그들에게서 떠나서 순수한 신앙을 보존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50)
다섯째, 혹자는 주장하기를 현존하지 않는 원본의 무오성에 대한 주장은 그 진위성이 증명될 수 없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무의미하다는 것이다.51)
원본이 무오하다는 주장의 진위가 증명될 수 없다면, 원본이 유오하다는 주장의 진위도 증명될 수 없기 때문에 두 주장은 평행선상을 달릴 수 밖에 없다.
실제적으로 원본의 무오성을 증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나, 이론적으로 볼때는 가능하다. 자연 과학의 경우 과학자들이 사용하는 법칙이란 것은 그 진위가 증명된 게 아니다. 만유인력의 법칙을 보면 이것은 진위성이 정확하게 증명되기 위해서는 지구상의 모든 장소에서 낙하 실험이 행해져야 된다. 그러나 사실상 그렇지가 못하다. 그러하기에 원리상으로 그 진위가 가려질 수 있으면 족한 것이다. 이 자연 과학법칙이 무리없이 받아들여 진다면 성경의 무오성도 무리없이 받아들여 지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제 Ⅵ 장 무오성에 대한 적극적 비판 이론
성경은 하나님 말씀이고 그렇기 때문에 정확 무오하다는 주장에 대해 반박할 때는 결국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경우이다.
첫째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전적으로 인간의 말들이다.
둘째는 인간의 말이지만 하나님의 말이 될 수도 있다.
셋째는 하나님의 말과 인간의 말이 섞여 있다.
모든 반박이 크게 이런식으로 분류할 수 있다.
1. 성경은 인간의 말들이다.
1) 고대 문헌 중 하나이다(자유주의)52)
계몽 사조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복음주의적 기독교의 근본 교리를 문제시하는 흐름을 통털어 “자유주의”라 할 수 있으나 여기서는 19세기 중엽부터 1차대전 까지의 유럽과 미국에서 성행했던 운동으로 기독교 신앙을 모든 인간 문화와 조화시키려는 사조를 말한다.
성경의 역사적, 과학적 신빙성의 문제는 받아들이지 않고 부정확하다는 전제하에서 성경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를 문제 삼았다. 특히 Hegel의 변증법을 받아들여 과학적 진보와 문화적 진보에 관심을 가졌다. 독일과 미국의 자유주의가 대표적임으로 이들 학자들의 성경에 대한 주장을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 독일의 자유주의
A. 알브레히트 리츌(Albrecht Ritschl)53)
정경 문제에 있어서 사도성의 기준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사도들이 쓰지 않은 책도 많고, 사도가 쓴 책도 별로 가치가 없다. 성경은 신학과 근본 도덕 문제에만 사용될 수 있다.
B. 빌헬름 헤르만(Wilhelm Herrmann)54)
현대인의 삶의 정황과, 예수와 성경의 세계와는 전혀 다르다. 예수의 관점을 현대 생활에서 받아들일 수 없다.
C. 아돌프 폰 하르낙(Adolf von Harnack)55)
기독교는 정확한 교리의 문제가 아니라 인생의 전체가 개입되는 문제이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나는 유대적 제한성을 벗겨내야 한다. 기독교인의 자유를 위해서 성경의 말씀들을 거스릴 필요가 있는 것이다.
㈁ 미국의 자유주의
성경의 권위의 본질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단지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사용한다는 것만으로 만족해 한다.
A. 와싱턴 글래든(Washington Gladden)56)
정경의 역사와 사본상의 차이점을 들어 성경의 무오성을 거부한다. 성경은 역사적, 과학적, 도덕적으로 유오하다.
B. 월터 라우쉔부시(Walter Rauschenbusch)57)
성경 저자들의 가르침을 뛰어넘어 그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 그 방향이란 다분히 이 시대의 기독교인의 책임을 강조하여 이상적인 기독교 사회의 구현에 목표를 둔 것이다.
이상에서 여러 학자들의 견해를 살펴 보았듯이 자유주의에서는 성경을 1세기 상황에서나 통용되는 인간의 책으로 보았고, 그 안에 현대에 사용될 부분이 있다면 사용할 정도의 책으로 간주했다. 성경의 권위는 논외로 밀려났고, 그들은 성경에 그렇게 큰 가치를 두지 않은 채 현재 생활에 맞추어 이상적인 문화적 사회 건설에 관심을 보여 주었다.
2) 좋은 가르침도 있다(실존주의).58)
자유주의는 성경을 고대 문헌중의 하나로 보고 그 가치에 대해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지만, 이 실존주의에 속하는 학자들은 성경안에 그래도 꽤 괜찮은 가르침이 있었으니 잘 가려서 취할 것은 취하자는 입장이다. 이들도 물론 성경과 계시를 동일시 하지 않는다.
이 실존주의는 오늘날 대부분의 신학에 대단히 많은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실존주의 신학자를 몇 명만 추린다는 것은 쉽지 않다. 여기에 제시하지 않는 신학자들도 사실 넓게 보면 이 안으로 다 들어올 만큼 그 영향은 엄청나다.
A. 존 멕커리(John Macquarrie)59)
성경은 신앙 공동체의 성스러운 글이나, 계시는 아니다. 성경에는 사본상의 차이와 신학 윤리의 모순이 많다. 저자와 작성 연대에 문제가 많다.
B.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60)
오늘날 성경은 현대 과학에 어울리지 않는다. 성경은 천당, 지구, 지하의 3층관의 신화인 것이다. 현대인이 이 신화를 받아 들인다면 그는 정신 분열 환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자유주의에 반대해 신화를 버릴것이 아니라 “재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비신화화”를 강조하였다. 그래서 “양식비평”을 갖고 제자들이 신화로 바꾼 역사적 예수 인물을 발견하고자 하였다.
C. 폴 틸리히(Paul Tillich)61)
성경은 신학의 한 원천이지 유일한 원천은 아니다. 성경은 계시의 매개체가 아니며, 오직 “경험”만이 계시의 매개체가 될 수 있다. 성경은 결코 신학 규범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성경은 수집되고 편집된 종교 문서이기 때문이다. 오직 규범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예수 안의 새 존재이다. 모든 존재는 계시 매개체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존재가 존재의 기반과 의미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이 그들은 실존주의 철학의 특징인 추상적인 사상 체계에 반발하고 오직 관심을 실존하는 인간 자체에 두었기 때문에, 성경 자체의 유일한 권위를 부인하고 오직 실존에 필요한 것만을 추구하고자 하였다.
2. 인간의 말이지만 하나님의 말이 될 수도 있다.
신정통주의는62) 제 1 차 세계대전 이후에 시작된 운동으로 1919년에서 1945년 사이에 주로 영향을 미쳤다. 신정통주의의 특징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고 기독교 신학의 근본 기초로서 성경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성경의 축자적 완전 영감과 성경의 정확무오를 부인하는 자유주의와 역사적 정통주의 사이의 신학적 중재를 명분으로 내세운 신정통주의는 성경의 권위를 확보하는 노력을 기울이기는 했지만 그 주장(성경이 인간의 말이지만 하나님의 말씀도 될 수 있다) 역시 고등비평의 결정을 그대로 수납하는 성경관에 기초한 자유주의의 한 형태이다.
여기서는 신정통주의의 기수 칼 바르트(Karl Barth)와 그의 유력한 추종자 에밀 브루너(Emil Brunner)의 사상을 살펴보자.
1) 칼 바르트(Karl Barth)63)
칼 바르트(Karl Barth)에 의하면 성경은 초자연적인 만남을 통해 하나님과 의사 소통했던 선지자와 사도들의 기록이다. 그에 의하면 기록된 말씀 자체는 계시가 아니다. 그는 주장하기를 그것을 계시로 보는 것은 성경 우상 숭배이다. 성경은 인간의 말로 인간들에 의해 기록되었으며 모든 점도 오류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개개인들을 만나기 기뻐하신다면 계시의 한 증언으로 하나님이 그것을 사용하실 수 있다. 이 경우 각 개개인은 하나님의 살아 계신 말씀에 부딪힘을 받는다. 하나님 자신의 약속 가운데에서 말씀 전체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불릴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주권적 자유에 따라 그것을 통해 인간들과 만나시기 때문이다.
성경의 권위와 그 신적 성격은 여하한 인간의 입증에 좌우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성경을 통해 말씀하실 때에만 개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된다. 성령의 이러한 사역은 자명한 것으로 입증에 좌우되지 않는다. 또한 성경은 66권의 정경서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교회가 그 책들에 특별한 권위를 부여하기 때문이 아니라 본래의 형태로서 계시를 증언한 자들의 기록이 그 속에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해서 정경은 종결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항상 자신이 원하시는 것을 자유롭게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유오한 인간들에 의해 인간의 언어로 쓰여진 성경은 모든 면에서 유오하며 역사·지리·자연·과학 등 지엽적인 문제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신학과 윤리에 있어서도 오류와 모순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 증언이 그 유오성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의해서 개개인에게 말씀하시고 대결하시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64)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실 수도, 안하실 수도 있는 하나님의 자유를 수호하려는 시도에서 바르트는 그 자체로써 하나님의 권위있는 말씀인 성경의 본질을 손상 시켰다. 논리적용을 마음껏 허용할 경우 성경의 참된 권위를 깡그리 허물어 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 바르트의 왜곡된 성경관에서 나왔다. 따라서 성경이 권위가 있다고 할 경우는 반드시 성경의 본래적 권위성에 근거해야 하는 것이다.
2) 에밀 브루너(Emil Brunner)65)
브루너의 성경관을 주로 지배하고 있는 사상은 계시 및 종교 영역에서 진리가 그 본질에 있어서 인격적(personal)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계시는 명제를 통해 표현될 수 없고 인격과 인격의 ‘나와 그대’(I-Thou)의 만남 속에서 찾을 수 있다.66)
본래 계시될 때 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현재의 독자가 인격적 만남을 체험하는 것이 필요하다.
특히 브루너는 역사·지리나 자연 과학 등 지상의 일들과 관련하여 성경이 상당한 오류로부터 결코 보호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고, 이런 일들은 성경의 주 목적인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만남을 촉진시키는 것에 전혀 부차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브루너는 칼 바르트 보다 훨씬 더 과감하게 여러 곳의 성경 교훈을 무시해 버렸다.67)
이와 같이 칼 바르트(Karl Barth)나 에밀 브루너(Emil Brunner)는 성경 자체의 무오성에는 관심이 없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발견하여 만나고 신앙을 갖고 살아가는 것을 중시하였다. 이들은 자유주의에 대항하여 성경의 권위를 높이려고 노력하였으나 오히려 더욱 성경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왜냐하면 성경의 오류를 인정하는 그 순간 성경의 권위는 확보되지 않기 때문이다.
브루너의 역사관은 특히 그리스도의 부활관에 있어서 성경 사관과 다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사건의 역사성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따라서 역사적 사실성을 타협한다고 하면 성경 사상과는 용납할 수 없이 충돌한다. 성경의 많은 부분이 역사이다. 또한 브루너의 정경관은 매우 유동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유는 진리전달에 있어서 어떤 하나의 책에 제한되어서는 않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브루너는 주장하기를 성경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데 가장 적절한 통로가 되는 것은 인격적 만남을 통해 참으로 계시를 받은 자들의 증언이 그 속에 담겨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성경만이 하나님의 말씀의 유일한 통로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다른 방식으로도 자신과의 만남을 매개하실 수 있고 또 매개하신다는 것이다.
3. 인간의 말과 하나님의 말씀이 섞여 있다.
자유주의의 심각한 도전에 대해 20세기 초까지는 근본주의라는 이름 아래 교파 구별없이 여러 교파가 연합 전선을 구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점차 그들 자체 내에 있던 다양한 신학들이 드러나면서 마찰과 분열을 일으키게 되었다. 점차 초기의 의도와는 변질되게 20세기 중엽에는 또다른 운동으로 치달았는데 이를 신복음주의(Neo-Evangelicasm) 라 한다.68)
1) Edward John Carnell
현대 정통주의의 성경관은 영감 문제에 대해 답변할 수 없다. 성경은 신학적, 역사적 신뢰성에 있어 회의적이다. 성경에 대해 축자보다는 완전한 혹은 충분한 영감을 믿는다.69)
2) Daniel P. Fuller
무오성은 사람을 구원에 이르도록 지혜롭게 만드는 지식을 가르치는 성경의 부분에만 기대해야 하고 구원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되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는 오류가 있을 수 있고 또 실제 있다고 보며 무오성을 “계시적” 구원의 내용에만 제한시키고 있다.70)
3) Everett F. Harrison
의심할 바 없이 성경은 그 자체 영감을 가르치고 있다. 무오가 완전한 영감(full inspiration)의 자연적인 필연의 결과이기는 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무오를 주장하도록 가르치지 않는다. 난해점들을 보여주는 현상들을 각하시키거나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 그 난해점들은 진실한 많은 신자들에게 영적 지도자로서의 성경의 확실성을 믿도록 하여 비계시적인 자료에 관한 수정된 입장을 주장한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마음으로 확신해야 한다.71)
이 신복음주의자들은 무오한 영감을 주변적 문제들이 아닌 성경에 있는 신앙과 생활의 문제들에만 한정시키도록 하였다. 여기서 주변적 문제(peripheral matters)는 신앙과 생활에 관한 문제가 아닌 우주의 기원, 태양계, 지구, 인간, 홍수의 크기와 결과들, 사소한 역사적 사건들, 그리고 문법적 구성 등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신앙과 생활에 관한 교리적 문제는 무오하게 영감되도록 하셨으나 주변적 문제들에 대한 비계시적 진술에 있어서는 오류있는 제한된 인간 저자들의 지식을 그대로 사용하셨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신복음주의의 주장이 보수주의 내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그 영향은 곧 보수주의 진영에 바로 미치게 되었고 그 도전이야말로 심각한 것이다.
칼 바르트와 에밀 브루너가 복음주의 입장을 왜곡하였음을 볼 때, 복음주의자들은 이것을 경고로 삼아 성경관을 밝히고 그 성경적 근거를 밝히며 하나님의 백성의 역사 전체와 그것의 관련성을 밝힘으로써 이들의 입장이 복음주의 것으로 인식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제 Ⅶ 장 비판에 대한 반론
앞장에서 성경 무오 비판이 발생한 원인의 이론적 배경과 그 이론들을 고찰하였다. 그 이론들은 계몽 사조를 바탕으로 역사 비평학이란 도구를 사용하여 성경 무오성에 대해 도전해 왔다. 이에 따라 크게 1) 성경은 절대로 인간의 말이다. 2) 인간의 말이나 경우에 따라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3) 인간의 말과 하나님의 말씀이 섞여 있다는 3가지 비판 이론이 대두되었음을 살펴 보았다.
이제는 이러한 비판 이론의 배경과 내용에 대해 반론을 제시해 보도록 한다.
1. 이론의 배경에 대한 반론
1)계몽 사조에 대한 비판
이성의 권위를 주장하고, 자연이 고정된 법칙에 의해 지배되는 규칙적인 체계라 하여 초자연 계시를 거부하는 계몽주의는 성경에 관해서도 회의적이다. 이 사조는 신적 영감을 부인하고 성경의 기적들을 거부하며 역사성을 무시하고 신화성을 부각시켜 결국 성경을 유오한 책으로 본다. 이에 따라 성경의 권위는 상실되고 만다. 이럴 때 발생하는 어려운 문제는 절대적 규범과 인간의 존엄성 문제이다.
진정한 권위를 잃고 각각의 주관적인 자유에 의해 모든 일이 결정될 때, 어떤 것이 옳고 그른지 최종적 답변을 상실하게 된다. 인본주의자에게 있어서는 존재하는 궁극적인 것, 즉 인격을 갖지 않은 우주는 선과 악에 대해서도 중립적이고 말이 없다. 잔인한 것과 잔인하지 않은 것 사이에서도 중립적이다. 인본주의는 절대를 제공할 방법이 없다.72)
진리의 권위를 이탈할 때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잃게 되며 그 결과 통합되지 않고 마음이 산란한 사람을 만들어 내며 무질서하고 무정부적인 사회를 형성하게 된다. 이것이 계속되면 가정과 정치, 경제의 모습이 절대로 온전해질리 없다.
인간의 자율 이성을 존중하고 인간을 “만물의 척도”로 높이 평가함에 따라 인간의 존엄성을 확보한 듯 하나 실제는 아무런 진실된 의미도 확보하지 못한다.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신념을 물려 받아 간직하고 있다. 이는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신 그 분이 우리에게 주신 생명을 잘 보호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고 우리가 생명을 스스로 끊어 버리면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라는 성경의 주장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와 달리 고금을 막론하고 이교 철학자들은 자살을 고귀하다고 칭찬한다. 과거에도 어린이나 여자의 인명을 경시하는 풍습이 있었지만 오늘날에도 필요에 따라 낙태나 안락사들이 논의되고 있다. 이러한 예는 성경의 권위가 인정되지 아니하면 생명이 더 이상 거룩한 것으로 남아 있을 이유가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또 사회에 아무런 유익이 없는 자를 은밀히 죽이는 것에 대한 실용주의적 주장도 대두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연약하고 무력한 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동기를 부여한다. 성경을 버릴 때 신이교주의의 실용주의적 주장이 나타날 수도 있는 것이다.73)
만일 인간이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성경적 입장을 받아 들인다면 거기에서 인간의 존엄성의 이유를 찾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2) 역사 비평 방법론에 대한 반론
1) 정경안의 정경을 발견할 수 없다.
성경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나 순수한 규범적 요소를 추출하고자 하는 시도는 불가피 “정경안의 정경”(canon in the canon)을 찾는 것이 될 수 밖에 없다. 이때 객관적 척도가 마련될 수 있는가?
지금까지 여러 시도 - 그리스도를 가리키는가? 바울의 칭의 교리, 신약의 케리그마 등등 - 가 있었으나 이들은 확고한 해결책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것은 그 척도들이 너무 신빙성이 없기도 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성경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을 분리시킬 아무런 열쇠도 제공하지 않는다는 간단한 사실 때문이었다.74)
2)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을 서로 분리시킬 수 없다.
이것도 위의 문제처럼 객관적 기준이 마련될 수 없다. Semler는 신적인 것은 공익성이라고 하였지만 그 공익성이 시대마다 같을 수 있겠는가? 또 이것이 진짜 신의 계시인지 무엇으로 확신할 수 있겠는가? 또 신앙 공동체 내의 해석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 기준은 어디에 근거를 둔 것인가? 왜 학자마다 의견을 달리 하는가?75)
3) 계시는 객관적 내용 이상이다.76)
신적 계시는 그 내용에 의해서 판단된다고 했다. W. G. Kümmel은 역사적 그리스도 계시, H. Braun은 하나님 앞에서 드러나는 “내적 중심”이 신적 계시를 결정한다고 주장했다. Strathmann은 성경적 진리의 개념은 교리적, 법적이 아니라 인격적인 것이라 했고, Ebeling도 결정적인 것은 고정된 교리나 법, 또는 계시책이 아니라 전승되어야 할 것의 총채로서 예수의 인격이라 했다.77)
그러나 어떻게 진리 개념이 인격적일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와 이미 예수의 인격에 대해 회의를 품고 있는 그들이 어떻게 이 방법을 사용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성경은 “말씀하시되”의 서언적 표현들이 중추를 이루며 이에 따라 인간은 임의대로 따져볼 수 없는 진리 앞에 서게 되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역사 비평은 신적 진리에 대한 객관적 내용의 증명에서 출발해 신의 말씀을 확인한다. 이 구별과 판단이 모호하다.78)
4)해석하기 전에 결과가 미리 전제되어 있다.
Käsemann은 성경에서 신앙과 미신을 구별하기를 원한다고 했는데, 무엇이 신앙인줄 어떻게 알았는가? 이는 어떤 “선 이해” 혹은 “일출의 최종적 임의 선택”이 그런 주장의 근거가 되고 있는 바, 결국 주관적 독단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79)
역사 비평의 시작과 더불어 더 이상 성경과 하나님 말씀을 동일시하지 않을 때, 무엇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진정한 신앙인가를 사전에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성경은 이를 구별할 수 있는 열쇠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미리 이런 전제를 갖고 시작하는 방법론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80)
5) 역사 비평을 사용하는 이성에 문제가 있다.
처음부터 성경에 하나님과 인간의 말이 있다는 전제도 근거가 확실하지 않지만 그것을 평가하는 이성 자체의 기능에도 문제가 있다. 과연 이성이란 도구가 무엇이 계시인가를 구별하여 분류하고 정리, 판단, 결정하는 일에 있어서 타당한 것인가? 만약 성경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 있다면 성경 밖의 관점에서 성경외의 척도를 갖고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하려는 목적으로 성경에 접근하는 과정이 옳은 것인가? 따라서 신학적 진술은 “증명”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요구가 계속되는데 이렇게 되면 이성의 법정이 계시 자체보다도 우월한 것으로 인정되는 것이 아닌가? 성경 안에 있는 계시 자체가 인간의 말을 판단해야할 것이다.
즉 성경 안에 부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 있다고 가정한다 할 때, 그 말씀에 의해 나머지가 판단되어야지, 이성이 이를 판단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이미 방법론의 모순을 안고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역사 비평은 “정경속의 정경”의 존재를 입증할 수도 없고, 신적 성격과 인간적 성격에 대한 명확한 구별도 제시할 수 없었다. 무엇이 순수 신앙인지, 하나님의 말씀인지의 뚜렷한 기준도 없었고, 계시를 파악하는 도구로써 이성을 절대적 권위로 높인 것도 역시 문제로 지적될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 역사 비평 방법은 타락한 인간의 심성에나 잘 어울리는 모순된 방법론이라 아니할 수 없다.
2. 비판이론에 대한 반론
앞에서 이론에 대한 반론을 제시하였고, 여기서는 비판이론에 대한 반론을 제시하고자 한다.
1) 자유주의 성경관
(1) 성경을 현대에는 적용할 수 없고 그 당시 문화에만 의미가 있다고 배척했는데 물론 당시의 습관, 문화를 반영하는 것은 사실이나 성경은 변치않는 인간의 존재 자체에 대해 관심을 갖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유대적 제한성
어떻게 유대 땅에서 살았던 예수가 역사적 환경을 무시하며 살았겠는가? 그가 진실로 인간의 모습을 갖고 이 땅에 오셨다면 당연히 그 주어진 역사적, 문화적 배경에 적응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러한 적응을 제한과 오류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 만약 그러한 적응이 없었다면 그는 단지 영적으로만 이 땅에 오셨다는 가현설(Docetism)을 지지하는 이론에 불과한 것이다.
(3) 유오한 책으로서의 성경
여러 전승들도 자체 모순이고 정경에 대해서도 분명치 않다고 회의하지만 그러나 오류와 모순이라고 지적하여 공격하는 이론이 말하기는 쉽지만 이를 확증하기는 어렵다. 더욱이 고고학이나 사본학의 발달로 그런 이론들이 약해지고 있다.
(4) 현대의 이상적 사회 문화 건설에 깊은 관심
그렇다면 헬라 신화 정도 밖의 비중을 두지 않는 성경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다른 책에서 그런 이론들을 도출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의 전체 내용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죄인의 구속과 이에 따른 거듭난 자의 삶이기 때문이다.
2) 실존주의 성경관
(1) 기독 공동체가 역사적 인물 예수를 신화로 바꾸었다.
이는 복음서가 쓰여질 당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믿을 만한 모든 기억이 상실되어 전혀 기억이 없다는 사실의 증명은 거의 불가능하다.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에게 지운 십자가는 순수한 역사적 사건이다. 그것을 부인한 역사가는 거의 없다.
(2) 계시의 매개체는 ‘성경’이 아니라 ‘경험’이다.
이는 실존주의적 해석으로 인간의 실존적 결단 없이는 하나님의 사역이 쓸데없게 된다. 계시를 인간 경험에만 국한시킴으로 슐라이어 마허의 계몽주의 신학과 맥을 같이하는 신자유주의를 대변하는 것이다. 칼 바르트의 지적대로 하나님 대신 인간을 신학 중심으로 삼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구원 문제에 있어서도 역사적 기독교와 대치된다. 참다운 역사상의 예수가 없어도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실존적 만남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원이란 참된 인간의 실존, 즉 사람이 자기 존재를 보고 이해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기독교 신앙이 인간의 책임과 개인의 실존에 역점을 두고 있긴 하나 참 성경적 신앙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개인의 하나님과 교제에 있는 것이지 참 실존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역설하지 않을 수 없다.81)
이 실존주의적 접근을 받아 들인다면 초월적인 것은 과학적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부되고, 우리의 구원과 내세는 철학의 이론으로 가리워지고 만다.
왜 “초월적인 하나님의 활동과 계시는 없다”라고 생각하게 되었는지? 그 근거는 어디에 있는 것인지? 이것에 대한 객관적인 답변이 요구된다. 결국 이런 실존주의적 접근은 현대 과학적 세계관과 타협해 복음을 변질시킨 것에 불과하다.
3) 신정통주의 성경관
(1) 어떤 때에는 인간의 말이고 또 읽는 자에게 성령의 역사가 일어날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성경 해석의 일관성이 없으며, 결국 우리 신앙에 확고한 근거를 제공하지 못한다. 성경 권위를 부정하면서도 성경이 마치 계시인듯 이용하고 있다는 것은 스스로 모순이다. 성경 자체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거부하면서 구원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의 권위를 재정립하려는 신정통주의의 노력은 그 자체가 이미 부조리한 것이다.82)
(2) 성경은 그리스도에 대한 증인으로 그 기능을 담당하기 때문에 그 권위를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나 어떤 때는 계시가 되고 어떤 때는 계시가 안되고 하니 결국 무용지물이 될 수 밖에 없다.
(3) 하나님 말씀을 인간이 표현하므로 오류가 있다고 하나,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음을 인정한다면 왜 꼭 인간의 표현에 오류가 있다고 상정해야 하는가? 왜 올바르게 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하는가? 또 시대와 세계관의 차이를 지적하나 그 차이가 오류로 연결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인간 본성은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중복과 모순을 주장하기도 하는데 이는 모순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다른 강조, 다른 접근, 다른 입장에서 기록된 것이라 볼 수 있다. 모순과는 다른 것이다.83)
4) 신복음주의 성경관
신앙과 생활의 문제에서는 무오하나 현상적 문제에서는 오류가 있다고 하였는데, 만약 1세기의 영감받은 사도가 진리와 오류를 혼돈했다면 20세기의 영감받지 않은 학자가 어떻게 진리와 오류를 구분할 수 있단 말인가? 또한 왜 신앙에만 오류가 있는가? 성경의 일부만 하나님이 감독했다는 것을 어떻게 변호할 수 있는가? 구원 문제에 무오할 수 있다면 왜 과학, 역사 같은 문제에는 무오할 수 없는가? 그리고 신앙과 행위에 대한 부분은 구체적으로 어느 곳인가? 어떤 표준, 어떤 원칙으로 진리와 오류를 구별할 것인가?
성경에는 구원에 관한 것과 역사에 관한 것 사이에 구분이 없다. 역사 자체는 하나님의 섭리적, 구속적 활동의 전개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영적 사역일 뿐 아니라 역사적 사역들이기 때문에 성경이 제공하는 구원의 복음 내용의 확실성은 그 구속 사역의 확실성과 직결되어 있어 역사나 과학에 있어서의 오류는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손상시키게 되는 것이다.84)
제 Ⅷ 장 예수와 성경
이제 본 장에서 성경과 예수는 어떠한 관계성이 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다.
1. 예수와 성경의 권위
“기록되었으되”하는 말로 로마서 저자는 자신의 전체 사상 체계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는데 곧 자신의 모든 가르침의 바탕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85)
일반적으로 권위라 함은 “복종할 것을 기대하면서 어떤 행동을 요구하거나 신념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이나 권리”를 뜻한다.86)
성경은 권위가 있는 책이다. 이 말은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것은 믿어야 하며 성경이 명령하는 것은 실행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규범이며, 모든 사람의 견해는 성경에 비추어 평가되어야 한다. 성경에 모순되는 것은 믿을 필요가 없다. 어떤 경우에 분명한 답을 가지고 있지 않은 문제에 대해서 우리는 모든 증거가 그 속에 있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분명한 모순들은 모순에 지나지 않는다. 일 천 가지 사례들 가운데서 부가적인 정보는 성경 비평가들의 잘못이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사람들에게 있어서 성경의 권위는 오직 성경 자체가 진리일 때만 존립할 수 있다. 성경의 신빙성을 파괴해 보라. 그러면 성경의 권위는 성경과 함께 사라지고 만다. 성경의 진실성을 인정하라. 그러면 권위는 규범이 된다. 성경의 권위의 개념을 수납하는 것과 동시에 유오성을 주장하는 것은 흐르는 모래위에 앉아 있는 것과 같다. 무오성과 권위는 함께 서든지 아니면 함께 무너진다.87)
2. 그리스도와 구약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히 10:5-7).
학자들 간에는 본 구절을 두고 의견이 다양하지만 본문을 정확히 따져보면 그렇지만도 않다. 뒷부분은 비슷하지만 전체 인용은 아니다.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치 아니하신다 하신지라”(시 40:6). 70인역은 이렇게 번역한다. “제사와 예물을 당신께서는 원치 않으시고 한 몸을 나에게 예비하셨도다”. 히브리서 10:5절은 시편 40편의 인용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시편에 예언된 바를 성취하러 이 세상에 오셨을 때 본인이 직접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어 본문과 헬라어 본문을 따로이 비교할 필요도 없이 이것은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기록한 것에 불과하다.
우리의 입장에서 볼 때 가장 중요한 구절은 맨 마지막 인용에 있다. 여기서 주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성육신이 구약에 예언되어 있음을 보여 주고 있으니 곧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하는 말이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성육신을 구약과 관련시키고 있는데 이것은 아주 의미심장한 것이다. 선택된 사람들을 통해 구약을 쓰게 하시고 이제는 친히 자신에 관해 예언된 바를 성취하러 오신 것이다. 그가 이 지상에 계시는 동안 그는 한 번도 기록된 예언을 떠나서 말씀하시거나 행동하시거나 생각하신 적이 없으시다. 마찬가지로 세상을 떠나시기 바로 직전에 그는 신약에 있어서도 똑같은 권위를 세우셨다.88)
3. 그리스도에 대한 모세의 기록
한번은 예수님께서 딱 잘라 말씀하신 적이 있다. 곧 모세의 저작을 우선 믿지 못하는 사람은 믿지 못할 것이라고. 그리스도께서는 벳세다 연못에서 병자를 고치시고(요 5:8f) 자신이 영생을 주는 자임을(21), 최종적인 심판관임을(22), 생명의 소유자임을(26), 죽은 자를 살리는 자임(28f)을 선언하셨다.
자기 원수들이 그리스도를 죽이려 할 때(18) 그는 말씀하셨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할까 생각지 말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의 바라는 자 모세니라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 (39-40, 45-47).
정직한 독자라면 누구나 그리스도께서 모세 오경을 모세의 저작으로 믿으셨다는 것과 그리고 모세의 저작을 부인하는 자들은 그리스도 자신의 말씀을 부인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신학에 있어서 이것은 아주 중요한 말이다. 왜냐하면 바로 여기에 왜 사탄이 인간들로 하여금 그토록 성경의 첫 다섯 권을 싫어하게 하는가 하는 해답이 있기 때문이다. 우선 모세의 저작을 못 믿게 해 놓으면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도 믿지 않을 것을 그는 뻔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89)
4. 그리스도와 말씀의 불가분성
이상과 같이 여러 이야기를 종합해 볼 때,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실 때 그는 그의 성육신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음을 미리 선포하셨다. 그의 활동을 시작하면서 그는 “기록되었으되” 하는 말로 세 번이나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셨다.
그리고 그는 여러 가지 자신에 관한 예언을 열거하면서 자기 자신이 이 모든 예언의 성취자라는 것을 말씀하셨다. 그는 한가지 동사의 의미에도 큰 가치를 부여하셨다. 그리고 모세를 믿지 못하는 사람은 믿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도 하셨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까지 그는 성취되지 않은 부분은 모조리 성취하게끔 하셨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는 하나님 말씀에 호소하시며, 거기 이미 자신에 관해 예고된 바를 설명하시며, 인간의 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살피지 못하는 데에 기인한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기록하였으되”, 이 말을 음미하면서 빼 놓을 수 없는 질문이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성경관을 갖지 않고서도 스스로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자처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살아있는 말씀으로서의 그리스도와 쓰여진 말씀으로서의 성경은 동일한 것이니 마치 우리 입에서 나온 말이 우리의 일부인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기록되었으되” 하고 말씀하실 때 그는 성경을 자기 자신과 그의 말씀을 두고 말씀하신 것이다.90)
제 Ⅸ 장 결 론
성경의 권위는 하나님의 권위와 연결되어 있다. 성경의 권위를 논할 때에는 항상 하나님의 권위라는 문맥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까닭에 그의 계시인 성경은 권위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성경이 무오하다고 믿는 이유는 역사상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성경관을 받아 들이기 때문이며 성경을 깨우쳐 주시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초대 교회 시대에는 인격, 신성과 인성 등 여러 문제들이 논쟁의 대상이 되었지만 오늘날의 논쟁은 무오성의 문제라고 본다. 하지만 이 성경 무오성의 교리는 쉬운 문제가 아니다. 간단히 대답하기는 어려움이 많다. 그래서 교회는 이 복잡한 문제를 건드리려 하지 않는다. 괜히 다루었다가 자칫 논쟁 거리만 되고 잘 생활해 오던 성도들이 불필요한 의심 거리만 제공하는가 하는 염려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이 점이 가장 큰 문제이다. 교회들이 이 교리에 무식할 때 무오성을 부인하는 이론을 듣게 된다면 그들은 당황하고 고민하다가 결국 그 이론에 동의하게 되고 차츰 신앙의 진리를 부인하는데 이르게 되고 말 것이다.
우리 나라의 교계에서는 서구와는 달리 비교적 무오성의 교리가 지켜지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안심해서는 안된다. 이미 일부 신학교에서는 성경의 무오성을 공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야 자유주의의 이론에 대항해 우리의 믿음과 신앙과 성경의 무오성을 지켜나갈 수 있겠는가?
첫째, 무오성 교리의 중요성을 인식하여야 한다.
우리는 이 무오성 교리의 중요성을 지금보다 훨씬 더 깊이 인식하여야하며 이를 철저히 강조하여야 한다. 어떠한 도전에도 이 부분만큼은 타협해서는 안되며 절대로 물러서지 않도록 다짐하고 각오하여야 한다.
둘째로, 연구하여야 한다.
무오성의 교리에 대한 도전 모두는 그 시대마다의 철학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므로 먼저 우리는 철학에 대한 깊은 연구를 해야 한다. 고고학과 철학, 역사, 원어 등 많은 학문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여야 한다.
셋째로, 교회에서 무오성의 교리를 가르쳐야 한다.
주저없이 자유주의의 이론들을 가르치고 또한 복음주의 입장에서 연구된 것을 가르쳐야 한다.
넷째, 성경을 가르쳐야 한다.
성경공부를 활성화하고 설교도 성경 중심의 말씀으로 바꾸어 져야 한다.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여 주께 사로잡힌 자답게 담대함으로 가르쳐야 한다.
다섯째 성경 중심의 생활이 있어야 한다.
무오성을 믿는다고 그냥 성도의 삶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권위에 우리의 삶이 붙잡혀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이루어져야 한다. 말씀을 불순종하면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는 설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야 한다. 무오성을 믿는다면 말씀에 순종할 수 밖에 없다.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깨달아 하나님의 섭리와 권위에 순종하는 삶이 되기를 원한다.
현재의 한국 기독교인의 과반수 이상이 성경을 한 번 이상 읽은 것으로 통계에 의하면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이 성경을 이해하는 이해도는 매우 낮은 것으로 밝혀 짐에 따라 체계적인 성서 공부가 필요함을 인식할 수 있다. 또한 3분의 1이나 성경을 한 번도 읽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는 것을 통하여 이제 우리들은 완전 무오한 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어떻게 가르쳐야 될까? 먼저 목회자부터 정확한 성경의 이해와 신학적 지식을 갖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는 지금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