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통문 Ⅲ-26(1)매천 황현의 형제애(兄弟愛)
10여년 전에 통독했으나, 내용조차 희미한 『매천 황현을 만나다』(이은철 지음, 2010년 심미안 펴냄, 303쪽)라는 책을 꺼내 이틀새 정독을 한 것은 “행운”이었다. 전남 광양의 고등학교 역사선생님이 한말의 문장가이자 시인이며 애국지사인 매천(梅泉) 황현(黃玹. 1855년 출생 1910년 9월 10일 순절) 선생을 운명처럼 만나 매천의 삶과 문학, 사상 등에 몰입해 쓴 평전같은 일대기이다. 이 책 한 권이면 매천의 저작물(매천집, 매천야록, 오하기문)의 구체 내용을 제외하곤 매천에 대한 모든 것, 이를테면 ▲춘추필법에 바탕한 사관 ▲스승 왕석보와 왕씨 4부자 관계 ▲15살 아래의 친동생 석전 황원(1870년 출생-1944년 순절)과의 돈독한 우애 ▲영재 이건창, 창강 김택영과 어울린 3인방의 신교(神交. 정신적인 사귐) ▲절명시 4수를 남기고 순절한 이야기 등을 알 수 있다. 저자는 대구출신으로 생명공학을 공부하다 사학으로 전공을 바꿔 광양에서 고교 선생을 하던 중 ‘매천 순국 100주년 추모행사’에 참가했다가 ‘매천’에 매료돼 정통 연구자가 됐다고 한다. 매천을 아주 깊이 천착하여 일반인도 쉽게 이해하도록 집필한 공로는 아무리 칭찬해도 부족할 듯하다.
10여년 만에 이 ‘좋은 책’을 다시 읽게 된 계기는, 현재 구례군에서 운영하는 ‘호양학교’(壺陽學校. 1908년 설립)에 계시는 한문학자 박소동 선생을 불쑥 찾아 뵙고 점심과 차를 마시며 매천선생의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한국고전번역원(전신인 민족문화추진회 포함)에서 30년도 넘게 봉직한 후 10여년 전 고향에 정착하신 분이다. 그분이 매천선생의 첫 스승 천사(川社) 왕석보 선생과 그의 세 아들 시문을 엮은 『개성가고』(開城家稿)의 교열을 봐 지난해 펴냈다며 선물을 했다. 귀한 문집을 선물받으며 이은철 선생이 쓴 매천 평전이 떠올라, 이틀간 정신없이 매천선생의 생애와 도저한 사상에 빠져들었다.
많은 분들이 매천 황현의 순절(한일합방이 된 직후 아편을 먹고 음독자살한 지식인 1호)과 『매천야록』은 들어보셨겠으나, 어떤 위인이냐고 물으면 답변이 몹시 궁할 듯하다. 하여, 저자보다 더 쉽고 매천선생을 알 수 있도록 네댓 꼭지(1꼭지당 3000-4000자)로 간략하게 ‘요점’을 정리 기술하여 이해를 돕기로 한다. 먼저 인간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춰, 매천의 동생 석전 황원과의 돈독한 우애, 이건창 김택영과의 신교 등 우정관, 그리고 스승과 왕씨 4부자의 얘기를 풀어간 후, 춘추필법에 바탕을 둔 매천의 사관(史觀)과 호양학교를 설립한 교육관 등을 살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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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천 황현과 석전 황원의 돈독한 우애
매천에게는 열다섯 아래의 친동생 석전(石田) 황원(黃瑗)이 있었다. 황원에게는 매천이 형이지만 아버지같이 모셨으며 한문을 배운 스승이었다. 망국지경에 이르자 형이 아편을 먹고 순국하는 과정을 자세히 기술해 놓았고, 형의 글들을 모아 『매천집』을 펴내려 동분서주, 국내에서는 총독부의 감시로 엄두도 못내자 1905년 중국 상해로 망명한 형의 절친 창강 김택영을 통해 형의 문집을 펴낸 일등공신이었다. 물론 문집 발간기금을 모으기 위해 전국에 모연문(募捐文)을 통문으로 보내는 등 매천의 제자 5인의 활약도 컸다. 당시 491원을 모았는데, 석전이 232원을 냈다고 한다. 오죽했으면 ‘석전이 없었다면 매천이 없다’는 말이 있었을까.
『매천집』을 발행해 널리 알리는 것이 바로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생각한 것이고, 실제로 그랬다. 총독부가 『매천집』을 압수하자 석전은 당당히 항의하여 되돌려받기도 했고, 향리에서 전혀 굴하지 않고 35년동안 꾸준히 항일운동을 벌였다. 매천의 아들 3.1만세운동을 지원하고 신간회 구례지회를 조직하는 등 일제와 타협하지 않고 창씨개명이나 총독이 만나자는 것도 거절했다. 의와 충을 위해선 목숨을 초개처럼 여긴 석전은 호를 ‘강호여인’(江湖旅人)이라고 스스로 짓고 애국시로 인하여 구속 수감되기도 했다. 75세인 1944년 일제의 포악이 극심하자 형 매천처럼 절명시를 남기고 저수지에 뛰어들어 순절했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고 국립묘지로 이장했다. 절명시 첫 구는 <푸른 바다 넘치고 날은 거꾸로 흐르는데/백성을 구하지 못하고 마침내 꾀도 다했네/헛되이 늙은 인간은 조금도 보탬이 안되니/먼저 하늘나라에 가 노는 것만 못하구나>였다. 가히 ‘그 형에 그 동생’이라고 누가 하지 않을 수 있으랴.
아무튼, 형 매천의 훈도(訓導)에 가장 뛰어난 제자가 된 석전은 남아있는 사진과 초상화로 보면 외모가 닮아도 너무 닮았으나, 체질조차 같아 어려서부터 병을 끼고 살 정도로 허약체질이었다 한다. 동생의 건강을 염려하는 형의 한시‘너를 위하여 나의 찬(餐)을 더하리라’는 구절이나, 형의 몸에 좋을 약재를 찾으러 만수산을 뒤지고 다닌 동생의 정성은 요즘 세상엔 볼 수 없는 가슴 저미는 형제애를 엿볼 수 있다. 매천이 숨지면서도 동생을 걱정하며 전답을 물려주는 등 각별한 사랑을 나타내고 있다. 이는 서양의 불운했던 화가 빈센트 반 고흐와 그의 경제적 지원자였던 테오의 일화가 떠오르게 한다.
형이 훌륭하면 아무리 똑똑한 동생도 묻히게 되는 것은 인지상정. 매천 황현의 뒤에 열혈동생 석전 황원이 있었음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것은 후생(後生)들의 몫인 것을. 매천을 기리는 사당 매천사(梅泉祠)에서는 박소동 선생의 제의로 올해부터 석전도 함께 배향 추모한다고 한다. “선생님, 향리에 내려오셔 정말 좋은 일, 큰일하셨네요” 만시지탄(晩時之歎)이나 너무나 잘한 일이 아닌가. 박선생님은 돌올한 학자 도올 김용옥 선생이 한문학의 깊은 내공을 인정하여 여순항쟁을 다룬 <우린 몰랐다>라는 책 서두에서 무조건 상찬(賞讚)한 분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