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123
2월3일[연중 제4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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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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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3unz5QCdXnw
[서울대교구 강규원 토마스데아퀴노(번동성당 부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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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악령이 활개를 치는 순간!>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를 건너 배에서 내리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무덤에서 나와 그분께 다가왔습니다.
그는 무덤가에서 홀로 살고 있었는데, 당시 유다 문학 안에서 무덤은 ‘악령의 집’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수많은 악령들이 수시로 활개를 치니 한 인간으로의 기본적인 삶은 끝났다고 보면 정답입니다.
충혈된 눈, 온 몸의 상처, 기괴한 몰골, 엄청난 파괴력, 음산한 분위기...사람들은 다들 그를 보면 무서워서 줄행랑을 치곤했습니다. 왕따도 그런 왕따가 없었습니다. 자연스레 그의 거처는 인간 세상에서 멀리 떨어진 무덤 속 토굴이었습니다.
악령의 괴롭힘으로 고통 받는 그의 모습이 너무나 안타까웠던 예수님께서 악령에게 이름이 어떻게 되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아주 특별한 대답이 입에서 흘러나왔습니다. “제 이름은 군대(軍隊)입니다. 저희 수가 많기 때문입니다.”(마르 5,9)
악령의 이름은 독특하게도 ‘군대’입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 로마 군대는 6100명의 사병과 726명의 기병, 합해서 총 6826명의 군사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군대라는 표현은 그 사람 안에 수많은 악령이 활개치고 있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한 마리 두 마리, 열 마리 스무 마리가 아니라 수많은 악령들의 무리가 그 사람에게 들어가 있었습니다. 악령들은 수가 엄청나게 많음에도 불구하고 똘똘 뭉쳐 그 사람 안에 들어가 괴롭히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 안에 들어있는 수많은 악령들을 쫓아내시어 근처에 있는 돼지 떼 속으로 들어가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천 마리나 되는 악령 들린 돼지 떼들은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려 달려 빠져 죽고 말았습니다.
수많은 악령들의 무리, 군대라는 표현을 묵상하며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 안에 존재하는 무수한 악령들을 바라봅니다.
악령은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비약적인 경제성장 그 이면에 깃들어진 죽음의 문화가 곧 악령들입니다. 극단적 이원화, 부익부빈익빈의 현실, 집단이기주의, 물질만능주의, 경제지상주의, 학벌주의, 외모지상주의, 왕따 현상, 마약, 자살에의 유혹...
이 모든 악령들이 우리 주님의 권능과 자비에 힘입어 하루 빨리 사라지기 바랍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선이 악의 세력을 물리치기 바랍니다.
군대라는 악령 집단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은 그야말로 인간의 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한 인간의 끝에서 당신의 일을 시작하십니다.
이 한 세상 살아가다보면 우리도 악의 세력에 휘둘릴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악령이 활개를 치면서 한 인간을 극단으로 몰고 갈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내 인생에서 하느님이 부재(不在)하실 때입니다. 내 삶에서 성령께서 부재하시는 순간이 곧 악령이 활동하는 순간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자비하신 하느님 현존 체험 안에 머물러야겠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하느님 그분과 나 사이의 가느다란 끈을 끊지 말아야겠습니다.
때로 하느님께서 아니 계신 듯 여겨지는 부재 체험 가운데서도 언제 어디서든 하느님께서 내 곁에 현존하고 계신다는 진리를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때로 여기가 끝인가 보다 느껴질 때도 하느님께서 개입하실 순간이 멀지 않았음을 꼭 기억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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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372bp4VlT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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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을 받아들이는 법: 시험에 들어보라!>
찬미 예수님. 오늘은 마르코복음 5장에 나오는 게라사 지방 주민들의 이야기를 다시 한번 깊이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귀신 들린 이에게서 악령을 쫓아내시자, 수천 마리에 달하는 돼지 떼가 호수에 빠져 몰살당했는데, 그 광경을 본 주민들은 놀라고 두려워하여 예수님을 자기네 고장에서 떠나 달라고 청합니다.
왜 그들은 ‘하느님의 권능을 직접 목격하고서도’ 예수님을 배척해야만 했을까요? 바로 손에 잡히는 재산(돼지 떼)을 잃는다는 두려움이, 구원과 은총을 놓고 저울질했을 때 더 크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자주 반복됩니다. 세속·육신·마귀가 제공하는 그럴싸한 유혹이 너무 익숙하고 실체감 있어 보이기에, 영원한 가치를 제시하는 성령을 뒤로 미루거나 아예 포기해 버리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느님께 특별한 은총을 받았다가, 욕망에 빠져 이를 스스로 내려놓고 만 인물들의 예가 많이 나옵니다. 먼저 사울을 살펴보면, 그는 이스라엘의 초대 임금으로서 기름부음을 받고 출발했지만(1사무 10장 참조), 점차 자신의 권력에 도취 되어 교만해집니다.
1사무 13장과 15장에 보면, 그가 사제로서의 권한도 아닌데 마음대로 제사를 집전하고, 주님의 명령을 어겨 전리품을 챙기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내가 왕이니 이 정도쯤이야” 하는 교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사무엘이 “주님께서 당신을 버리셨습니다.”(1사무 15,26)라고 선언할 정도로,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과 사명을 사울이 스스로 무너뜨렸다는 사실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이 사울의 교만한 행보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몰락과도 닮았습니다. 나폴레옹은 뛰어난 군사적 재능으로 유럽을 호령하며 황제 자리에까지 올랐지만, 점차 자신의 절대 권력에 빠져 무리한 원정(특히 러시아 침공)을 감행함으로써 결국은 파멸로 치달았습니다.
겸손히 한계를 인정하기보다 자신을 절대화하면, 하느님이 부어 주시는 은총의 그릇이 거꾸로 뒤집혀 버리는 것이지요. 그는 교회에 의해 씌워지던 황제의 왕관을 자신이 직접 쓴 최초의 황제가 됨으로써 교회에서 오는 은총을 스스로 단절해 버렸습니다.
다음으로 다윗을 떠올려 봅시다. “당신은 내 마음에 드는 사람”(1사무 13,14 참조)이라는 칭찬을 받을 정도로 하느님께 사랑받던 임금이었지만, 2사무 11장에서 밧세바의 아름다움에 눈이 멀어 간음죄를 범하고, 그 남편 우리야까지 제거해 버렸습니다. 한순간의 육체적 욕망이, 하느님께 받은 뛰어난 은총과 왕으로서의 위엄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는 회개를 통해 다시금 하느님께 돌아가지만, 가정사에서부터 정치적 분열까지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이는 잉글랜드의 헨리 8세와도 흡사합니다. 헨리 8세는 자신의 결혼 문제(육체적 욕망과 후계 문제 등)를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교황청과 불화를 일으키고, 결국 영국 국교회를 분리시키며 파란만장한 역사를 만든 인물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열쇠는 교황에게 있지만, 성공회를 교황과 단절되게 함으로써 자기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교황한테서 오는 성령의 은총을 단절시켰습니다.
솔로몬 역시 지혜의 왕으로 불릴 만큼 은총을 받았으나, 재물과 쾌락에 집착하다가 영적 중심을
잃어버립니다.(1열왕 11장)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사치와 이방 아내들이 늘어가면서, 하느님을 버리고 이방 신까지 섬기는 어리석음을 범합니다. 이것이 훗날 이스라엘 왕국이 남북으로 갈라지는 원인이 되었다는 점은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러한 몰락은 영화 「월 스트리트(Wall Street)」에서 잘 드러납니다. 1980년대 뉴욕 증권가를 배경으로, 주인공인 젊은 주식중개인 버드 폭스(Bud Fox)는 부와 성공을 좇다가, ‘탐욕은 선(Greed is good)’을 외치는 대부 격인 고든 게코(Gordon Gekko)의 꾐에 빠져 불법과 비리를 저지릅니다.
처음에는 급격히 성장하는 듯 보이지만, 결국 모든 진실이 폭로되면서 재산과 명예를 잃고, 스스로도 깊은 자괴감에 빠지게 됩니다. 결국 “돈이 곧 행복을 보장해 줄 것”이라는 착각이 얼마나 위험하고 허망한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사람이 얼마나 영혼의 평화와 정직을 포기하게 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이처럼 교만, 육체적 욕망, 재물에 대한 집착이 크면, 눈에 보이지 않는 성령의 은총보다 눈앞의 돼지 떼가 훨씬 더 커 보이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제가 직접 체험해 보니, 이 벽은 ‘한 번도 내려놓아 보지 않았을 때’ 더욱 견고하게 느껴질 뿐, 막상 용기를 내어 내려놓으면 정말 큰 자유와 기쁨이 찾아옴을 알게 됩니다.
저 자신도 세속을 이기기 위해 처음 십일조를 결심할 때 “이러다 생활이 힘들어지면 어쩌지?” 하고 걱정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처럼 “나를 시험해 보아라.”(말라 3,10)를 실제로 해 보니, 오히려 돈에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마음이 생기고,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하느님께서 채워 주시는 경험을 했습니다.
또 사제로서 여자 없이 살아야 한다는 것이 한편으로 두렵기도 했지만, 그 길 위에서 오히려 더 폭넓게 사랑하고 자유롭게 기도할 수 있게 되었음을 체감했습니다. 한 여인을 사랑하거나 사랑하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혀 있을 때가 오히려 감옥처럼 느껴집니다.
그리고 술 역시 “피부병 때문에 안 마셔야 한다.”라고 결심하고 한 달을 안 마시고 살아 보니, 몸도 좋아졌을 뿐 아니라 “왜 그동안 술의 즐거움에 애써 의존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마음이 가뿐해졌습니다. 결국에는 ‘해 보기 전에는 두렵고, 한번 내려놓아 보면 예상치 못한 은총이 열린다.’라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게라사인들이 돼지 떼를 지키려 예수님을 내쫓은 사건은, 결국 하느님께서는 “너희는 나를 시험해 보아라.”(말라 3,10)라고 하신 말씀을 듣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며칠만 예수님께서 함께 계셨다면 분명 더 성령의 열매, 곧 기쁨과 평화가 샘솟아 행복해짐을 느끼지 못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너무 서두르고 시험해 볼 생각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자기 생각이 맞는다고 교만해 있었던 것입니다.
성령은 분명 세.육.마.를 이기는 만큼 내 안에 들어와 나에게 은총의 성물을 주십니다. 그런데 세.육.마.를 이기는 방법은 한 번 시험해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짜 행복해지는지 느껴보는 것입니다. 해 보고 안 되면 돌아오면 됩니다. 그러나 해보지도 않고 물리치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십일조부터 1년 동안 시험해 봅시다. 돈도 넉넉해지고 성령도 자신 안에 넉넉해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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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징어 게임 시즌 2를 보고 있습니다. 3년 전에 오징어 게임이 처음 나왔을 때도 보았습니다. 코로나 팬데믹 시기였습니다. 넷플릭스 상영 순위 1위를 기록하며 많은 사람이 보았습니다. 한국 사람에게 친숙한 게임을 보여주었고, 인간이 자본이라는 거대한 괴물 앞에 한없이 약하다는 것도 보여주었습니다. 오징어 게임은 적자생존, 약육강식, 승자독식이라는 이기적인 세상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게임에는 자비와 양심은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오징어 게임에 열광했던 것은 그 게임이 현실 세계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오징어 게임 시즌 2는 오징어 게임에서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주인공은 오징어 게임을 만든 사람을 찾아가서 그 게임을 더 이상 못하게 하려고 합니다. 그 방법이 실패하면서 주인공은 다시 오징어 게임이 있는 곳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선포’합니다. 이 게임은 비인간적인 게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게임을 하면 단 한 사람만 남고 모두가 죽는다고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이 받게 될 상금은 옆에 있는 사람의 목숨값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게임을 중단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주인공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비슷한 이야기를 성서에서 볼 수 있습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입니다. 부자는 세상에서 좋은 옷 입고, 맛있는 음식 먹고 신나게 살았지만, 죽어서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이 타오르는 지옥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집 앞에서 빌어먹던 라자로는 세상에서 종기투성이로 배고프게 살았지만, 죽어서는 아브라함 품 안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부탁했습니다. 이 세상의 삶이 끝나면 영원한 생명의 세상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기를 청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라자로와 같은 거지를 도와주어야 한다고 알려주기를 청합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그들이 마음을 바꾸지 않으면, 죽은 사람이 가서 이야기해도 듣지 않을 거라고 이야기합니다. 욕망의 덫에 걸리면, 열등감의 덫에 걸리면, 게으름의 덫에 걸리면 영원한 생명이 눈앞에 있어도 알아보지 못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용기 있는 사람만이 영원한 생명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포도원 소작인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주인이 먼 길을 떠나면서 포도원 소작인에게 포도원을 맡겼습니다. 소작인들은 포도원을 돌보면서 주인에게 소작료를 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시간이 가도 오지 않았고, 소작인들은 포도원이 이제 자기들의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주인은 때가 되어도 소작료를 보내지 않자, 하인을 보냅니다. 소작인들은 겁도 없이 주인이 보낸 하인을 때리고, 쫓아냈습니다. 주인은 아들은 알아볼 거로 생각했습니다. 주인은 아들을 보냈습니다. 소작인들은 아들을 죽이면 포도원이 영원히 자기들의 것이 될 거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주인이 보낸 아들마저 죽여버렸습니다. 주인은 화가 났습니다. 소작인에게서 포도원을 빼앗았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소작인에게 포도원을 맡겼습니다. 소작인들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이 있는 지옥으로 갔습니다. 포도원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세상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드려야 할 소작료는 무엇인가요? 겸손과 인내입니다. 나눔과 헌신입니다. 그렇게 하면 이 세상은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하느님의 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아끼는 돼지들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악령을 쫓아내는 것보다, 병든 사람을 치유하는 것보다 자신들의 재산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사제들이 독신의 의미를 온전히 깨닫고,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사제들이 교회의 가르침보다 자신의 신념과 세상의 것들을 전하려고 한다면, 사제들이 교회의 권위를 따르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보다는 자기의 뜻을 먼저 이루려고 한다면 이는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던 마을 사람과 다를 바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귀에 걸린 사람은 치유를 받았습니다. 고마운 마음에 건강을 회복한 사람은 예수님 곁에서 시중을 들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치유의 대가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이제 건강을 회복하였으니, 가족들에게 돌아가서 예전처럼 지내라고 하셨습니다. ‘사랑과 비움’은 우리를 건강하게 해 주는 선물입니다. 내 마음에 원망과 미움이 있다면, 근심과 걱정이 있다면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이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셨던 나눔과 비움을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마음은 곧 따뜻해지고, 행복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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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삼의딸들수녀회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님]
오늘 복음은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인간의 비참함과, 그에게서 풀려나 제정신으로 돌아온 인간 사이의 차이를 극적 과정으로 매우 뚜렷하게 보여 줍니다. 그 과정에 예수님께서 지니신 절대적 권능이 마귀에게 작용합니다.
예수님을 보고 달려와 신앙 고백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마르 5,7)라며 그분의 권능이 개입하지 못하도록 막으려던 더러운 영들은 결국 자기들이 살길을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군대라는 이름의 더러운 영들에 사로잡힌 사람을 살리시려고 그 청을 들어주십니다. 사실 악령은 인간에 대한 권한이 없습니다. 예로니모 성인의 말대로 주님께서는 ‘전적으로 당신 소유인 사람’을 사로잡고 있는 악령을 제 가고 싶은 곳으로 보내시어 그를 해방시키시려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의 소유인 인간의 해방을 위하여 돼지 이천 마리를 잃는 것쯤은 대수롭지 않은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머물러 계셔야 하는 사람 안에 더러운 영이 머무르는 것을 허용하시지 않고 그 영을 내보내십니다. 사실 사람 안에 악령이, 예수님께 어울리지 않는 어떤 것이 머무른다는 것은 그분에 대한 모독입니다. 인간에게 육신을 마련해 주시고 그 안에 머무르시는 분은 바로 주님이십니다. 우리 몸은 그분의 몫이니 다른 어떤 영도 우리 몸을 소유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군대라는 이름의 더러운 영이든 돈과 허영과 탐욕이라는 세속의 영이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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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5,1-20: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예수님께서는 게라사로 가셨다. 이 지방의 본이름은 게르게사인데 성경을 필사하면서 잘못 옮긴 이름이다. 게르게사는 쫓아낸 자들이 사는 곳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마귀 들린 사람을 만나신다. 악령 들린 사람은 무덤에 거처하면서 쇠고랑과 쇠사슬로 묶여 있으면서 밤이나 낮이나 산에서 소리를 지르고 돌로 제 몸을 짓찧곤 했다는 것은 그가 더는 비참해질 수 없는 삶을 살고 있었다. 마귀들은 그분이 하느님이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본다. “하느님의 아드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7절). 예수께서는 악령 들린 사람에게 구원의 손길을 펴주신다.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8절). 마귀들은 그에게서 나와 돼지 떼들에게 들어갔고 돼지들은 물에 빠져 죽었다.
마귀에게 사로잡혔던 사람은 성한 몸으로 예수님을 따르려고 한다. 마귀들의 군대가 자기에게서 쫓겨난 것을 알았다. 이제는 모든 것을 잊고 오로지 주님의 발치에서 마냥 쉬고 싶다고 한다. 그러나 주님은 그 사람의 뜻과는 달리 이렇게 말씀하셨다. “집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 주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19절).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데는 지금까지의 나의 생활에서 어떠한 근본적으로 변화해야 한다. 이 변화는 나의 희생과 노력의 결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못 알아들을 때, 우리도 그 주민들처럼 예수님께 떠나 달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도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 나 자신의 희생이 따를 때, 그 희생을 꺼려 예수님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하는 마음의 자세가 아니고 그것을 기쁜 마음으로 수용하고 주님께 감사드릴 수 있는 자세를 갖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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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이방인 지역에서 처음으로 복음을 선포한 첫 번째 선교사>
“마침 그곳 산 쪽에는 놓아기르는 많은 돼지 떼가 있었다. 그래서 더러운 영들이 예수님께, ‘저희를 돼지들에게 보내시어 그 속으로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허락하시니 더러운 영들이 나와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이천 마리쯤 되는 돼지 떼가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리 달려, 호수에 빠져 죽고 말았다. 돼지를 치던 이들이 달아나 그 고을과 여러 촌락에 알렸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려고 왔다. 그들은 예수님께 와서 마귀 들렸던 사람, 곧 군대라는 마귀가 들렸던 사람이 옷을 입고 제정신으로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그만 겁이 났다. 그 일을 본 사람들이 마귀 들렸던 이와 돼지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께 저희 고장에서 떠나 주십사고 청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마귀 들렸던 이가 예수님께 같이 있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집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 주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 그래서 그는 물러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해 주신 모든 일을 데카폴리스 지방에 선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마르 5,11-20)
1)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마귀들을 쫓아내셨다는 단순한 ‘구마 이야기’가 아니라, 이방인 지역에 ‘복음의 씨’를 뿌리셨음을 전해 주는 이야기이고, 동시에 이방인 지역에 복음을 전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나타내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2) 마귀들이 예수님께 돼지들 속으로 들어가게 해 달라고 청한 것은, 그 지역에서, 또는 인간 세상에서 완전히 쫓겨나는 것을 피하려고 ‘타협안’을 내놓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마귀들의 청을 허락하셨는지, 그 이유는 모릅니다. 돼지들이 집단 자살을 했기 때문에 ‘군대’ 라는 이름의 그 마귀들은 인간 세상에서 완전히 제거되었고, 곧바로 지옥으로 떨어졌을 텐데, 결과만 놓고 보면, 예수님께서 마귀들의 청을 허락하신 일은, 돼지들 속에서 살아도 좋다고 허락하신 것이 아니라, 쫓겨나기 전에 스스로 지옥으로 가는 것을 허락하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돼지들의 주인들 입장에서는 큰 손해를 본 일입니다. 그 일을 겉으로만 보면, 예수님께서 마귀 들린 사람 하나를 구하려고 다른 사람들에게 큰 손해를 입히신 셈인데, 어쩌면 하느님은 섬기지 않고 재물만 섬기는 그 지역 사람들을 깨우쳐 주려고 그렇게 하신 것인지도 모릅니다. <말 못하는 짐승인 돼지들은 마귀들이 자기들 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면서 집단 자살을 했는데, 사람들은 ‘군대’ 라는 이름의 마귀들과 함께 사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았던 것 같습니다. 마귀들과 함께 사는 것에 익숙해졌거나, 아니면 마귀들에게 길들여졌거나......>
3) “군대라는 마귀가 들렸던 사람이 옷을 입고 제정신으로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그만 겁이 났다."라는 말은, 그 지역 사람들이 마귀가 제거된 것을 기뻐하지는 않고, 예수님을 무서워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 저희 고장에서 떠나 주십사고 청하기 시작하였다.”라는 번역은 “예수님께 저희 고장에서 떠나라고 요구하였다.”로 바꾸는 것이 옳습니다. 그 지역 사람들은 사실상 예수님을 쫓아냈습니다. 마귀보다 더 힘이 센 예수님의 권능이 무서워서 그랬을 것이고, 또 유대교와 유대인들에 대한 적대감도 품고 있었을 것이고, 그리고 예수님 때문에 생기는 변화를 받아들이기가 싫어서 그랬을 것입니다. ‘살던 대로 살게 내버려두라는 것’이 그들의 요구입니다. <변화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보수’ 라는 간판을 내걸고서 고집을 부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악을 물리치고, 잘못된 것을 고쳐서 바로잡는 일은, 진보든지 보수든지 간에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누구나 당연히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단순히 변화를 싫어하고 거부하면서 잘못된 것들과 악을 그대로 두려고 고집을 부린다면, 그 고집 자체도 죄이고, 악입니다.>
4) 마귀 들렸다가 예수님 덕분에 해방된 사람이 예수님께 같이 있게 해 달라고, 즉 예수님을 따라다니게 해 달라고 청한 것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싶다고 청한 것인데, 아마도 그 지역을 떠나고 싶은 심정도 작용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요청과는 다르게 그에게 새 임무를 주셨는데, 그 임무도 ‘부르심’(성소)입니다. “집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 주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를 선교사로 삼아서 파견하신 것과 같습니다.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그 사람은, 사도들보다 먼저 이방인 지역에서 예수님의 복음을 선포한 사람, 즉 첫 번째로 이방인 지역에서 활동한 선교사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5) ‘군대’ 라는 마귀들의 이름은 그것들의 폭력성을 나타내는데, 당시 로마 군대의 폭력성이 배경에 있습니다. 오늘날의 군대라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에 국민을 보호하지는 않고 정권만 지키려고 한다면, 또는 자기들 집단의 이익만 추구한다면, ‘군대’ 라는 이름의 마귀들과 다를 것이 없게 됩니다. <‘마귀들’이라는 이름의 군대와 ‘군대’ 라는 이름의 마귀들이 사실상 같은 집단이라는 것입니다.> 어떻든 모든 ‘악’과 ‘악의 세력들’은 메시아의 나라가 완성될 때 모두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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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예수님께서 허락하시니.”>
마르코 복음사가는 갈릴리 호수 건너편 게라사인들의 지방에서 예수님의 기적 이야기를 상세하게 전하고 있습니다.마태오도 이 이야기(8,28-34)를 비교적 간단하게 전하는데 비해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루카복음도 상세하게 전하는데 마르코 복음 저자는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이의 처지를 더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루카는 ‘옷을 입지 않고 무덤에서 지냈다.’라는 설명에 비해 마르코는 쇠사슬로 묶었는데 ‘여러 번 쇠사슬도 끊고 족쇄도 부수어 버려’라는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그는 밤낮으로 무덤과 산에서 소리를 지르고 자신의 몸을 치곤 하였다.’(마르 5,4)라고 더 첨부해서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그 만큼 그의 형편이 비참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마르코는 더러운 영에 사로 잡힌 이가 예수님께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말합니다.’라는 말을 붙여서 자기들을 괴롭히지 말아달라고 청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이름이 무엇이냐고 질문하시자 숫자가 많아서 ‘군대’라고 부른다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더러운 악령은 단수가 아니라 복수로 “자기들을 그 지방 밖으로 쫓아내지 말아 달라고.” 예수님께 간곡히 청하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청하는대로 그곳에 있던 돼지 떼에 들어 갑니다. 더러운 악령이 들어간 이천이나 되는 돼지들은 호수로 내리 달려 빠져 죽습니다.
돼지를 기르던 자들인 달아나서 고을이나 촌락으로 다니며 이 소식을 알립니다. 그곳 사람들은 더러운 악령들린 사람이 제 정신으로 앉아 있는 모습과 돼지에게 일어난 일들을 보면서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자기들 지방에서 떠나 주십사고 청합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시려 배에 오르자 더러운 영에 걸렸던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갈 것을 청하지만 주님께서는 거절하시며 말씀하십니다.“집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 주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19절)
그는 이방인의 지역인 마을인 데카폴리스 지방을 다니며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해주신 놀라운 일들을 알리기 시작했고 그 사실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놀라는 것입니다.
오늘 날, 성경학자들도 ‘마귀’ 또는 ‘악령’의 존재 대해서 서로 다른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그 해석 중에서 그 옛날에는 밝힐 수 없는 어떤 악의 세력보다는 정신병으로 몰아가려고 합니다. 물론 그들의 주장에는 일부가 일리는 있지만 전적으로 악령, 마귀의 존재를 무시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서 밤낮 사십일을 마귀에게 시험을 당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풀리지 않는 것은 예수님께서 마귀들이 청하는대로 남의 소중한 돼지 몸속에 들어가도록 허락하신 것인지, 또 더러운 영들이 자기의 이름을 숫자가 많다고 해서 ‘군대’라고 했는지 그 실체를 규명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면서 불가항력(不可抗力)의 순간을 체험할 때가 있습니다. 본인의 의지와는 다른 방향으로 끌려간다는 것입니다. 술, 마약, 매스컴의 인간 지배는 때로 인간의 자유까지 통제하지요. 가끔씩 사이비 종교가 인간을 세뇌해서 엉뚱한 삶으로 저락시키는 슬픈 소식을 접할 때도 있습니다.
이와같이 인간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물리적이든 정신적이든 불가항력적인 힘에 의해 인간을 악의 방향으로 몰고 가는데 이 힘이 성경의 표현으로는 더러운 영, 악령, 마귀등으로 표현됩니다.
이 악의 세력은 인간의 이익을 둘러싼 이기적이라는 집합소를 최대한 이용하여 자신 세력을 키워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며 악의 세력은 평화를 깨고 폭력과 불의를 현실화하면서 인간을 옭아맵니다.
악의 세력 앞에 인간은 불가항력이 됩니다. 마르코가 전해주는 복음의 내용을 우리가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확실한 것은 악의 세력은 ‘군대’라고 하듯 막강한 세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고 인간을 파괴하는 힘도 갖추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앞에 인간은 속수무책인 것이지요. 하느님이 아들이신 예수님만이 그 힘을 창조 때에 하느님 아버지께서 말씀 한마디로 하셨듯이 예수님께서도 말씀으로 악의 세력을 제압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둠과 혼돈에서 이 세상을 조화로 꾸미셨지만 악의 세력은 반대로 조화의 세계를 혼돈과 어둠으로 몰아 넣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세례자 요한이다 유다인들의 이미 있는 기도문처럼 기도하는 법을 청했을 때, 우리가 현재까지 외우며 기도하는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기도문에서 하느님께 청하는 것 중에 한가 불가항력적이고 막강한 힘을 갖고 있는 악에서의 구원입니다.
인간은 문화가 발달될수록 얻는 혜택도 크지만 악의 세력은 여기에 버금가는 전문화 되고 고도의 수준으로 뻗쳐 나갑니다. 인간은 어리석어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교만에서 폭력과 전쟁까지도 불사하며 결국 인간을 불행의 노예로 저락시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까지 실천하신 주님의 그 ‘사랑’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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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는 두 가지 주제가 섞여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악령을 쫓아내셨다는 것과 예수님의 업적을 사람들에게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이미 공생활의 시작에 예수님의 능력을 구마로 소개한 바 있는 마르코 복음은 다시 한번 비슷한 이야기를 전합니다.(1,21-28 참조) 두 이야기 모두 악령들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전합니다.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1,24)과 오늘 복음의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라는 표현은 예수님에 대한 전통적인 호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기적과 함께 복음 선포라는, 예수님의 업적을 널리 알리는 것에 초점을 맞춥니다. 예수님께서는 악령의 외침에도 그것을 막지 않으셨으며, 이 사건은 주민들을 통하여 그 지방에 퍼져 나갑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에 악령이 들렸다가 제정신을 찾은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있기를 청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마르코 복음에서 함께 있기를 청하는 것은 제자가 되기를 청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뽑으신 첫째 목적이 ‘함께 지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3,14 참조)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대신 치유받은 이에게 새로운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그는 자신이 체험한 모든 것을, 주님의 자비를 선포해야 합니다. 자신이 바라던 사명은 아니었지만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충실히 따릅니다.
여기서 부르심에 대하여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부르심을 통하여 우리는 저마다 서로 다른 사명을 부여받습니다. 자신의 원의가 아니라 부르심에 충실히 응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하느님 나라는 우리 각자의 선포를 통하여 세상에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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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의말씀(2025.2.3.연중제4주간.월.)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루카.5,7)
현대 사회는 좋은 말과 많은 정보를 아주 쉽게 접할수 있습니다. 성찰할 시간도 없이 우리는 보고 듣는 그대로를 쉽게 빠져들기도 합니다. 특히 대중매체에서 전하는 말을 우리는 여과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기 쉽습니다.
대중 매체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 중에 그들이 의도하는 특정 부분만 선정하여 우리에게 짧고 쉽고 호소력이 있게 보여줍니다. 생각할 시간도 없이 바쁘게 사는 우리는 비판도 없이 주어지는 그대로 그들의 메시지를 믿게 됩니다.
돌아가신 김수환 추기경님은 그런 대중매체를 ‘바보상자’라고 부르셨습니다. 우리의 영을 흐리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식별이나 더 깊은 성찰을 거치지도 않고 ‘바보상자’에서 들은 것을 말씀이나 교회의 가르침보다 더 확신하기도 합니다.
‘바보상자’가 전하는 세상을 온 세상이라고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믿고 삽니다. ‘바보상자’가 전하는 말을 심지어 진리처럼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교회의 가르침이나 사제의 강론은 ‘바보상자’의 말보다 더 싱겁고 시시하게 여깁니다.
교회의 가르침보다 ‘바보상자’가 전하는 사이비 진리와 정의와 사랑에 우리는 더 쉽게 취하여 삽니다. 우리의 입맛에 맞추어 주는 ‘바보상자’는 교회의 말씀보다 더 설득력이 있게 다가옵니다. 우리는 주님께 취하기보다 세상에 취하는 바보가 되었습니다.
‘바보상자’에게 우리의 생각마저 조종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때로 의식하지도 못합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 라며 교회의 가르침에 저항도 합니다.
교회는 한 발자국 떨어져서 세상을 꿰뚫어 봅니다. 우리는 교회를 사랑해야 합니다. ‘바보상자’보다 교회를 더 신뢰하여야 합니다. 때로는 교회마저 분열시키는 ‘바보상자’의 ‘영’을 경계해야 합니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편리한 세상을 사는 우리는 영적 식별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이데올로기에 세뇌되어 우리가 믿고 따라야 할 주님의 말씀은 자꾸만 권위를 잃어갑니다.
자신의 고집이 점점 강해지거나, 교회의 가르침이나, 사제의 강론이나, 사랑과 진리와 정의의 삶을 사는 것이나, 성당에 가는 것이나, 기도하는 것이 자꾸만 거추장스럽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어쩌면 벌써 마음속으로 우리가 주님께 이 말을 속삭이고 있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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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성공의 과정에는 모멘텀의 법칙이 적용됩니다. 외부의 방해를 차단하고 내면의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이면 목표를 향한 동기는 절대 줄어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작심삼일(作心三日)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굳게 마음을 먹고 행하지만, 외부의 방해 때문에 쉽게 포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살을 빼고 싶다면 다이어트를 시작하고 2주 동안은 몸무게를 재지 말라는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분명 변화가 일어나고 있지만 겉으로는 아무런 변화가 보이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실망감을 안겨주고 자포자기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식단을 조절하고 운동을 해도 나는 아무런 변화가 없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힘이 빠집니다. 그러나 2주가 지나고 몸무게가 줄어드는 것이 눈으로 보이는 순간부터는 자신감이 붙습니다. ‘확실히 효과가 있구나. 할 수 있어. 노력할 가치가 있다고!’라는 생각이 들고 이때 누군가가 “혹시 살 빠졌어?”라고 묻기라도 하면 성공으로 향하는 모멘텀은 더 커지게 됩니다.
모든 것은 믿음에 따라 모멘텀이 커지고 성공으로 나아갑니다. 주님과 우리의 관계로 그렇습니다. 외부의 방해로 우리는 그 관계를 너무 쉽게 포기합니다. 모멘텀을 키우기 위해 더 큰 믿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호수 건너편 게라사인들의 지방에 갔습니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을 마주하게 되지요. 사람들은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사람에게 괴로움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이 영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잘 알고 있었기에 이렇게 말합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
말씀 한마디로 마귀 들린 사람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군대라는 마귀들은 이천 마리의 돼지 떼 속으로 들어갔고, 돼지 떼가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리 달려 모두 호수에 빠져 죽고 말지요. 돈벌이가 되는 돼지 떼들의 죽음으로 마을 사람들은 크게 실망하지요. 그리고 다음에도 그런 일이 생겨 손해를 볼지 두려워서 예수님께 자기네 고향에서 떠나 주십사고 청합니다.
마귀를 쫓아내는 예수님을 직접 보았고, 예수님과 함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외부의 방해가 작동했습니다. 바로 재산의 손해였습니다. 그리고 이 방해에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하는 길을 포기하고 맙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없애는 외부의 방해를 따를 때가 얼마나 많았을까요? 그 결과 예수님께서 주시는 은총과 사랑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외부의 방해에 대해 “당장 내게서 나가라.”라고 명령할 수 있는 용기와 믿음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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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대, 하느님을 닮은 사람아>
마르코 5,1-20 (마귀들과 돼지 떼)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호수 건너편 게라사인들의 지방으로 갔다. 예수님께서 배에서 내리시자마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무덤에서 나와 그분께 마주 왔다. 그는 무덤에서 살았는데, 어느 누구도 더 이상 그를 쇠사슬로 묶어 둘 수가 없었다. 이미 여러 번 족쇄와 쇠사슬로 묶어 두었으나, 그는 쇠사슬도 끊고 족쇄도 부수어 버려 아무도 그를 휘어잡을 수가 없었다. 그는 밤낮으로 무덤과 산에서 소리를 지르고 돌로 제 몸을 치곤 하였다.
그는 멀리서 예수님을 보고 달려와 그 앞에 엎드려 절하며, 큰 소리로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말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시자, 그가 “제 이름은 군대입니다. 저희 수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 자기들을 그 지방 밖으로 쫓아내지 말아 달라고 간곡히 청하였다.
마침 그곳 산 쪽에는 놓아기르는 많은 돼지 떼가 있었다. 그래서 더러운 영들이 예수님께, “저희를 돼지들에게 보내시어 그 속으로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허락하시니 더러운 영들이 나와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이천 마리쯤 되는 돼지 떼가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리 달려, 호수에 빠져 죽고 말았다.
돼지를 치던 이들이 달아나 그 고을과 여러 촌락에 알렸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려고 왔다. 그들은 예수님께 와서 마귀 들렸던 사람, 곧 군대라는 마귀가 들렸던 사람이 옷을 입고 제정신으로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그만 겁이 났다. 그 일을 본 사람들이 마귀 들렸던 이와 돼지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께 저희 고장에서 떠나 주십사고 청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마귀 들렸던 이가 예수님께 같이 있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집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 주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 그래서 그는 물러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해 주신 모든 일을 데카폴리스 지방에 선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
<그대, 하느님을 닮은 사람아>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 1,8)
“예수님께서 허락하시니
더러운 영들이 나와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마르 1,13)
그대,
하느님을 닮은 사람아
그대에게 걸맞지 않으니
더러운 영을 쫓아내고
그대다울 수 있도록
깨끗한 영을 품으시게나
그대,
하느님을 닮은 사람아
그대에게 걸맞지 않으니
악한 영을 쫓아내고
그대다울 수 있도록
착한 영을 품으시게나
그대,
하느님을 닮은 사람아
그대에게 걸맞지 않으니
음울한 영을 쫓아내고
그대다울 수 있도록
활기찬 영을 품으시게나
그대,
하느님을 닮은 사람아
그대에게 걸맞지 않으니
무관심한 영을 쫓아내고
그대다울 수 있도록
사랑하는 영을 품으시게나
그대,
하느님을 닮은 사람아
그대에게 걸맞지 않으니
체념하는 영을 쫓아내고
그대다울 수 있도록
희망하는 영을 품으시게나
그대,
하느님을 닮은 사람아
그대에게 걸맞지 않으니
거짓된 영을 쫓아내고
그대다울 수 있도록
진실한 영을 품으시게나
그대,
하느님을 닮은 사람아
그대에게 걸맞지 않으니
교만한 영을 쫓아내고
그대다울 수 있도록
겸손한 영을 품으시게나
그대,
하느님을 닮은 사람아
그대에게 걸맞지 않으니
탐욕스러운 영을 쫓아내고
그대다울 수 있도록
베푸는 영을 품으시게나
그대,
하느님을 닮은 사람아
그대에게 걸맞지 않으니
억압하는 영을 쫓아내고
그대다울 수 있도록
해방하는 영을 품으시게나
그대,
하느님을 닮은 사람아
그대에게 걸맞지 않으니
배척하는 영을 쫓아내고
그대다울 수 있도록
보듬는 영을 품으시게나
그대,
하느님을 닮은 사람아
그대에게 걸맞지 않으니
군림하는 영을 쫓아내고
그대다울 수 있도록
섬기는 영을 품으시게나
그대,
하느님을 닮은 사람아
그대에게 걸맞지 않으니
죽이는 영을 쫓아내고
그대다울 수 있도록
살리는 영을 품으시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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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수님을 만나면 인생이 바뀝니다>
그날의 기분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습니다. 마음에 둔 사람을 만나면 기쁨이 크고, 보기 싫은 사람을 만나면 가슴이 아픕니다. 좋은 스승을 만나 훌륭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못된 사람 만나서 잘못된 길을 걷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면 운명이 바뀔 수도 있습니다. 만남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인생이 바뀝니다. 그분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이시기 때문입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예수님께 마주나왔는데 그것은 큰 은총입니다.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무덤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무덤이란 곧 죽음을 의미하는데 사랑이 없는 미움과 시기, 질투, 분노, 적개심, 무관심 등으로 지옥같이 사는 상태를 말합니다.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이 족쇄와 쇠사슬에 묶여 있었다는 것은 무질서와 혼란 상태에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소리를 지르며 돌로 제 몸을 치곤 하였다는 것은 분노와 자학으로 괴로워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그 어둠에서 나왔으니 얼마나 큰 은총이겠습니까? 그는 결국 제정신으로 돌아왔습니다.(마르 5,15) 제정신으로 돌아왔다는 것은 새 삶을 시작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그분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로마 12,2)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 새 삶을 시작하게 되었고 예수님 곁에 같이 있고 싶어 하였습니다. 반면,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이 자기 고향에서 떠나주기를 바랐습니다. 심지어 벼랑까지 끌고 가 떨어뜨리려고 하였습니다.(루카 4,28) 더러운 영이 들렸던 사람도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저를 괴롭히지 말아주십시오”(마르5,6).하고 외쳤습니다. 여기서 악령의 속성을 볼 수 있습니다. 악령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정확히 알고 인정하였지만, 그분과 소통하고 친교를 나누는 일은 거부합니다. 이렇게 악의 세력은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 잘 알면서도 그릇된 삶에 고집스레 집착하고 거기에서 벗어나기를 극도로 싫어합니다.(손희송) 그런데 제정신이 들자, 예수님께 “같이 있게 해 주십시오.”(마르 5,18) 하고 청하였습니다. 이 청은 제정신이 들기 전과는 전혀 다른 청원입니다. “이제 낡은 것은 사라지고 새것이 나타난 것”(2코린 5,17)입니다.
예수님께 “같이 있게 해 주십시오” 하는 청은 곧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제정신이 들어 청원한 기도이니만큼 우리도 기도 할 때 제정신으로 해야 합니다. 그래야 무턱대고 청하지 않고 효과적인 기도, 꼭 이루어지는 기도를 할 수 있으며 주님의 뜻에 의합한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는 기도’가 아니라 ‘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때로는 기도가 들어지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적 유익을 위해서 거절하신 것으로 믿고 주님께 대한 신뢰를 잃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더러운 영이 들렸던 사람이 주님을 만나 새 생활을 시작하였듯이 우리도 주님을 만나 ‘새로 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지상 것들에 마음을 두지 말고, 천상 것에 마음을 두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누군가가 나를 만나서 기쁨을 간직할 수 있는 날이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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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함승수 세례자요한 신부님]
“그들은 예수님께 저희 고장에서 떠나 주십사고 청하기 시작하였다.“
주님께서 마귀에 들려 고통받던 이를 구원해주셨습니다. 그를 괴롭히던 마귀떼를 쫓아내고 그가 사람다운 삶,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겁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사소한 문제’가 하나 생겼습니다. 마귀들이 주민들이 놓아기르던 돼지들에게 들어가자 그 돼지들이 기겁을 해서는 호수에 빠져 죽고 만 것이지요. 그 사실을 알게 된 게라사 고을 주민들은 예수님께 ‘자기들 고장에서 떠나달라’고 청합니다. ‘청했다’라고 표현했지만 점잖게 부탁한 게 아니라 나가라고 등을 떠민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과 함께 살던 사람이 고통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졌음을 함께 기뻐하지 않고, 자기들이 그로 인해 재산상의 피해를 입은 것에 분노했던 겁니다. ‘저 사람이 건강해지든 말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왜 내가 저 사람 때문에 손해를 봐야 하는건대?’
그들과는 달리, 예수님 덕분에 마귀군단의 괴롭힘에서 해방된 사람은 예수님 곁에 머무르며 그분과 함께 하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슨 이유에선지 그의 청을 거절하시지요. 왜 그러셨을까요? 더러운 영에서 해방되었다고 해서 바로 ‘성인’이 되는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제야 평범한 ‘인간’이 되었을 뿐이지요. 사실 마귀를 쫓아내는 것 자체는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예수님 당시 많은 이들이 실제로 여러가지 방법으로 구마를 행했으니까요. 그보다 더 어려운 것은 우리 안에 있는 부정적인 감정과 생각들을 비워내는 것인데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게라사 주민들에게서 보이는 ‘탐욕’입니다. 마귀는 예수님께서 당신 능력으로 얼마든지 쫓아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의지와 결정으로 탐욕을 붙들고 있는 이들은 경우가 다르지요.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시는 주님이시기에, 그들이 당신을 배척하고 밀어내도 그저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보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방금 마귀에서 해방된 그 사람이 그들과 같은 전철을 밟지 않도록 그에게 ‘복음 선포’라는 소명을 맡기신 겁니다. 그 소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주님께 대한 그의 믿음은 점점 더 깊고 단단해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더 이상 마귀들에게 휘둘릴 일도 없어질테니까요.
말 못하는 짐승들도 마귀들이 자기에게 들어오는 것을 적극적으로 거부하는데, 스스로 만든 탐욕이라는 마귀에 사로잡혀 예수님을 거부하는 게라사인들의 모습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또한 우리도 주님 뜻에 깨어있지 않으면 언제든 그들처럼 될 수 있음을 생각하니 참으로 두렵습니다. 주님 뜻에 따라 살지 않으면 그분과 함께 있는 게 불편해지고, 그 상태가 오래 지속될수록 우리 영혼은 죄악의 어둠에 점점 더 익숙해져 결국엔 주님께서 비춰주시는 구원의 빛을 스스로 거부하게 되지요. 그러니 힘들고 어려워도, 손해보고 희생하는 거 같아 부담스럽고 억울해도 주님 손을 꼭 붙들고 이렇게 외쳐야겠습니다. “더러운 영아,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들아 내 마음 속에서 나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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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우리는 우리 스승님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 주위에 모여 있었습니다. 그때 엄청난 군중 사이를 비집고 스승님을 외치며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보자 모두 길을 내주었습니다. 그가 스승님 발 앞에 엎드렸는데 사람들이 수군거렸습니다. ‘저 사람은 회당장이 아닌가? 저렇게 높은 사람이 여기 어인 일인가?’라고 말입니다.
그가 자기 딸을 살려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스승님은 회당장이라는 사람의 집을 향해 걷고 계셨습니다. 하늘의 구름이 움직이듯 군중도 스승님을 호위하며 따르고 있었습니다. 길을 가시던 스승님이 뒤를 돌아보시며 누군가를 찾고 계십니다. 그렇게 둘러보시는데 한 여인이 스승님 앞에 나와 울음을 터트립니다. 아주 왜소한 모습에, 남루한 옷차림이 그녀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그녀가 울음과 말을 섞어 뱉어내는데 잘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스승님은 환하게 웃으셨습니다. 그렇게 웃는 모습의 스승님을 저는 좋아합니다. 스승님이 그녀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몸뿐이 아닌 마음의 병에서도 벗어나 건강해지거라.”
다시 길을 가려 돌아서는데 회당장의 얼굴빛이 하얗게 변해 있었습니다. 아마도 딸이 죽은 모양입니다. 그런데 스승님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집에 도착해 딸이 죽어있는 방에 들어갔습니다. 스승님은 그녀 곁에서 손을 잡고 다정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그 순간 모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소녀만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아까 그 여인도 일어난 것입니다. 믿음이 부족했던 주위의 모든 사람도 다시 일어서게 된 것입니다. 넘어져 있던 믿음을 일으켜 세워주신 것입니다.
‘탈리타 쿰, 탈리타 쿰, 탈리타 쿰’ 여인처럼, 회당장처럼 주님 앞에 나와 믿음을 고백하십시오. 그럼 기꺼이 우리의 집에 오시어 우리를 일으켜 세우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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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첫 이방인지역 나들이인데, 게라사인 지역에서 더러운 영을 쫒아내시는 장면입니다.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거센 돌풍’을 잠재우시고 호수를 건너오셨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거센 돌풍’을 마주하게 됩니다. 마치 모세가 갈대바다를 건너왔지만, 여전히 사막에서 또 다른 거센 돌풍을 마주했듯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다에 부는 거센 돌풍을 잠재우셨듯이, 이제는 또 다시 인간에게 부는 거센 돌풍을 잠재우십니다. 곧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이 족쇄나 쇠사슬로 묶어둘 수 없을 만큼 거센 돌풍에 휘둘려 밤낮으로 소리 지르며 무덤을 헤집고 다녔습니다. 그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은 무덤에서 나와 예수님께 마주 왔다.”(마르 5,2)
그리고 이제 그에게서 영들의 군대가 나가고, 그는 “옷을 입고 제 정신으로 앉아”(마르 5,15) 있었습니다. 곧 더러운 영에 들렸던 왜곡된 인간성을 버리고, ‘제 정신이 든’ 것입니다. ‘제 정신이 들었다’는 것은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와 같이, ‘제자리로 돌아왔다’(루카 15,17-20)는 것, 곧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새사람으로 되었다.’(에페 4,21-24)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옷을 입었다’는 것은 이제 바오로 사도의 표현을 빌리면,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었다.”(갈라 3,27)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마귀를 내쫓는 이 이야기는 병을 고치는 다른 이야기들의 범위를 넘어서, 사탄의 왕국에 대한 예수님의 승리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돼지 떼들의 익사는 이 고장에 대한 마귀들의 권세가 끝났음을, 곧 그곳이 더러움에서 해방되었음을 말해줍니다. 그렇지만 이곳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배척을 받으셨습니다. 어둠은 빛을 반기기보다 오히려 배척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 들렸던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집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 주님께서 너에게 해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마르 5,19)
이렇게 그는 첫 ‘이방인 선교사’로 파견됩니다. 곧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알리는 ‘자비의 선교사’로 파견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물러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해 주신 일을 데카폴리스 지방에 선포하기 시작하였다.”(마르 5,20)
오늘, 우리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해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주신 일”을 알려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먼저 “주님께서 우리에게 해주신 일과 자비를 베푸신 일”을 깨달아야 할 일입니다. 그래야 우리도 ‘주님께서 하신 일’과 ‘자비’를 베풀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죽은 이들의 무덤 가운데가 아니라, 살아계신 주님의 사랑 가운데 앉아 있어야 할 일입니다. 제 정신으로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그리스도의 말씀 앞에 앉아 있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먼저 베풀어지고 선사되는 하느님의 사랑’을 수락하고, 그를 증거 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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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그들은 그분을 보고 저희 고장에서 떠나가 주십사고 청하였다.”(마르 5,17)
주님!
어둠을 몰아내소서.
제 안에 돼지 떼가 판치지 않게 하소서.
저는 본래부터 주님의 거처이니, 제 안에 빛을 밝히소서.
오늘도 죽은 이들의 무덤이 아니라, 살아계신 당신의 사랑 가운데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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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복음 선포자의 온전한 삶>
-구원자 주님을 갈망하는 사람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이자 우리의 빛이시다.”(Jesus is our salvation and our light.)
“희망하는 것은 하느님께 방향을 돌리는 것이다.”(To hope is to turn around to God.)
새벽 교황청 인터넷을 열었을 때 교황님 강론 제목이 신선한 깨우침이었습니다. 사람은 섬이 아닙니다.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습니다. 더불어의 삶에 더불어의 여정에 더불어의 구원입니다. 예수님 중심에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공동체 삶이어야 합니다. 예전 수도원을 찾았던 분들과의 문답이 생각납니다. 수도원의 주변환경이 좋다며 이구동성의 찬탄과 더불어 주고 받은 대화입니다.
“아, 여기가 천국입니다.”
“환경이 좋아서 천국이 아니라, 서로의 관계가 좋아야 천국입니다. 주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자연환경과의 관계가 날로 좋아지고 깊어질 때 그 어디나 천국입니다. 아무리 환경이 좋아도 고립단절의 혼자의 삶이라면 거기가 지옥입니다. 제가 몸담아 살고 있는 여기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상호보완의 수도공동체’는 저에겐 최고의 스승입니다. 수도공동체에 늘 감사하며 배우는 마음으로 삽니다.”
그렇습니다. 지옥이나 천국은 장소 개념이기 보다는 관계 개념입니다. 환경은 좋지 않아도 서로 섬기며 화목하게 지내면 거기가 천국입니다. 오늘날 세상을 보십시오. 국내 안팎이 온통 치열한 싸움터입니다. 국내 상황을 봐도 분열의 골이 얼마나 깊은지 격화된 시위현장을 보면 심리적 내전 상태요 제정신들이 아닙니다.
정상적이고 상식적인 사람들이 많지 않아 보입니다. 곳곳에 더러운 영이 들린 광신의 미친 자들이 널려 있는 모습입니다. 옛 현자도 공부할 것을 강조한 가르침에 공감합니다. 언제 어디서든 구도자요 수행자로 살아야 함을 배웁니다.
“책을 읽는 것은 지식을 얻는 것을 넘어 자기 자신을 정리하고 다듬는 과정이다.”<다산>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는 것이 없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로워진다.”<논어>
끊임없이 배우며 생각하며 실천해야 온전한 지성인의 지혜로운 삶이겠습니다.
여전히 대두되는 물음이 “어떻게 살아야 하나?”입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의 실현이 목마르게 절실한 현실입니다. 오늘 복음과 제1독서 히브리서 말씀이 우리에게 좋은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의 상태가 너무 비참합니다.
공동체로부터 떠난 고립단절된 삶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깨닫습니다. 더러운 영에 들린자의 치유과정과 공동체로의 복귀 과정이 깊은 묵상감입니다. 복음의 더러운 영에 들린 미친자의 구제불능의 적나라한 묘사가 충격적이요 바로 이런 상태가 지옥입니다.
‘그는 무덤에서 살았는데, 어느 누구도 더 이상 그를 쇠사슬로 묶어 둘 수가 없었다. 이미 여러 번 족쇄와 쇠사슬로 묶어 두었으나, 그는 쇠사슬도 끊고 족쇄도 부수어 버려 아무도 그를 휘어잡을 수가 없었다. 그는 밤낮으로 무덤과 산에서 소리를 지르고 돌로 제 몸을 치곤 하였다.’
흡사 구원자 주님을 찾는 울부짖음이요, 몸부림치고 발버둥치는 모습처럼 보입니다. 공동체로부터 고립격리되어 그 마음 중심 자리에 예수님이 자리잡지 않아 더러운 영에 사로잡힐 때 누구나의 가능성입니다. 오늘 히브리서에서 이와 흡사한 그리스도 예수님 이전의 불완전한 믿음의 사람들의 비참한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어떤 이들을 석방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고문을 받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을 당하고 결박과 투옥을 당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어떤 이들은 돌에 맞아 죽기도 하고 톱으로 잘리기도 하고 칼에 맞아 죽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궁핍과 고난과 학대를 겪으며 양가죽이나 염소 가죽만 두른 채 돌아 다녔습니다.
그들에게는 세상이 가치 없는 곳이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믿음으로 인정을 받기는 하였지만 약속된 것을 얻지는 못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내다보셨기 때문에, 우리 없이 그들만 완전하게 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역시 구원자 주님을 찾아 헤매는 목마르고 굶주린 모습들처럼 보입니다. 공부하는 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님 없는, 예수님 이전의 비참했던 믿는 이들의 현실을 살펴봤습니다. 바로 이런 삶의 현장에 말씀이 사람이 되신 분, 수난과 죽음과 부활로 하늘에 오르신 분,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그 삶의 한복판 중심에 우리와 함께 살려 오신 것입니다.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예수님의 호령에 더러운 영들은 돼지떼와 더불어 사라졌고, 더러운 영에 들렸던 이는 제정신이 들어 예수님과 함께 있고 싶다 하였으나, 예수님은 허락하지 않고 본래의 가족 공동체로 복귀시키며 자기 삶의 자리에서 복음 선포자가 될 것을 명령하십니다.
“집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 주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
공격이 최선, 최고의 방어입니다.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각자 공동체 삶의 자리에서 적극적 복음 선포의 삶을 살 때, 그대로 하느님 나라 공동체 꿈의 실현이요 마귀들의 영원한 퇴출이니 저절로 영육의 건강입니다. 이래야 현대판 더러운 영이 들린 극단의 광신자나 맹신자가 되지 않습니다.
유비무환입니다. 처방이나 치유보다는 예방이 백배 낫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항구히 열렬히 사랑하여 삶의 중심에 모시고 주님과 일치되어 사는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주님을 모시고 영적승리의 온전한 삶을, 복음 선포자의 적극적 삶을 살게 하십니다.
“예수님,
당신은 저의 모두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요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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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전 재산을 잃고 떠돌이가 되어도?>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마귀 들렸던 이가 예수님께 같이 있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오늘 복음은 군대라는 더러운 영에 사로잡혔던 사람이
주님의 도움으로 멀쩡하게 되는 얘기로 더러운 영이란
어떤 존재인지 여러 번 제가 다룬 바가 있는 얘기입니다.
곧 더러운 영이란 비록 더러울지라도 영적 존재이기에
당시 아무도 모르는 주님의 정체를 잘 알고 있다는 것,
그러나 주님이 자기를 쫓아내려고 오시는 것을 알기에
주님이 자기 영역에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는 영이라는 것, 더러운 돼지들 속에서라도 자기 영역을 떠나지 않으려 정말 더럽게도 집착하는 영이라는 것 등등을 봤습니다. 그래서 오늘 더러운 영에 관한 얘기는 이 정도로 하고, 이후 벌어진 일들과 사람들에 대해서 나눠볼까 합니다.
오늘 독서는 구약의 예언자들을 칭송하는 얘기를 합니다. 그들은 “더 나은 부활을 누리려고 조롱과 채찍질을 당하고”, “칼에 맞아 죽기도 하고” “궁핍과 고난과 학대를 겪었으며” 양가죽이나 염소 가죽만 두른 채 광야와 산과 들을 돌아다녔는데 “그들에게는 세상이 가치 없는 곳이었기” 때문이라고 얘기합니다.
이것은 오늘 복음의 마을 사람들과 대조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더러운 영들만 주님을 거부한 것이 아닙니다. 그 사건 후 마을 사람들도 주님을 거부하고 떠나달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자명합니다. 자기들 전 재산인 수천의 돼지를 주님 때문에 잃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수천의 돼지를 죽게 만든 주님의 처사는 이들의 입장에 보면 잘못돼도 너무도 잘못된 것이었지요.
그러니 이렇게 만든 주님을 때려죽이지 않고 순순히 떠나달라고만 한 것이 오히려 다행이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어쨌거나 이런 이유로 그들도 더러운 영처럼 주님을 거부했는데 그런데 같은 경우를 우리가 당하면 나는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전 재산을 잃어도 주님을 영접할까요? 주님을 모시기 위해 전 재산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르기 위해 히브리서의 예언자들처럼 떠돌이가 될까요?
사실 주님을 영접한 사람들을 보면 비록 자기가 원치 않았지만 전 재산을 잃고 난 뒤에야 영접했고 우리도 대부분 그랬습니다.
이 세상을 포기하지 않고 저세상을 가질 수 없고, 전 재산을 잃지 않고 주님을 영접할 수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가 또 봐야 할 사람은 더러운 영에 사로잡혔던 사람입니다. 마을 사람들과 달리 그는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이러는 것은 당연하지요. 그는 잃을 게 더 없을 정도로 이미 다 잃었고 그래서 오히려 구원을 체험하였으니 말입니다.
사실 모든 구원은 비 구원의 상태에서 구원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이 사람을 보며 나를 봐야겠습니다.
나는 지금 비 구원 상태에 아직도 있음을 알고 구원을 찾는 사람인가? 여전히 모르는 채 구원을 찾지도 주님을 따라나서지도 않는 사람인가? 전 재산을 다 잃고 떠돌이가 되어도 주님을 따라나설 사람인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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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5,8)
<악령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자!>
오늘 복음(마르5,1-20)은 '마귀들과 돼지 떼'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 건너편 이방인의 땅인 게라사인들의 지방으로 가셨을 때,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무덤에서 나와 예수님께 마주옵니다. 그는 어느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아주 강한 악령(마귀)에 시달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으로 알아보는 그에게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호통치십니다. 그러자 그 수가 너무 많아서 '군대'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던 더러운 영들이 예수님께, "저희를 돼지들에게 보내어 그 속으로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마르5,12) 하고 청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를 허락하시자, 더러운 영들이 돼지들 속으로 들어가고, 마침내 더러운 영이 들렸던 사람은 해방되어 다시 부활합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든 피조물들 중에서 유일한 '영적인 존재'이며, '영에 의해 움직여지는 존재'입니다.
영(靈)에는 '좋은 영'과 '나쁜 영'이 있습니다. '좋은 영'은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며, 우리를 살리는 '생명의 영'입니다. '나쁜 영'은 우리를 그릇된 길, 분열의 길로 인도하며, 우리를 죽이는 '죽음의 영'입니다.
'좋은 영'은 하느님의 영인 '성령'입니다.
성령의 모습은 '사랑,기쁨,평화,인내,호의,선의,성실,온유,절제'입니다.
'나쁜 영'은 '악령'입니다. 악령은 우리를 분열시키고, 멸망의 길로 인도하는 '교만,탐욕,분노,인색,시기(질투),인색,음욕,게으름(나태)'의 모습입니다.
'나는 지금 어느 영과 함께하고 있고, 어느 영을 따라다니고 있는가?'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믿고, 성령을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지금 여기에서 다시 부활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과 믿음의 선물인 '성령의 힘으로' 더러운 영인 악령과 싸워 승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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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 5, 8)
빛이신
하느님께서는
빛을
사랑하십니다.
더러운 영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영원하신
하느님을
만나면
어느새
더러운 영은
사라집니다.
더러운 영들의
존재방식은
복음의
존재방식과
전혀 다릅니다.
우리는 소중한
인격으로
존재합니다.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닌
짐승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끝내
아무 것도
아닌 것들이
우리의
쇠사슬이 되고
족쇄가
되었습니다.
빛을 만나면
어둠은
더 이상
어둠이 아닙니다.
빛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
살아가길
바라십니다.
마귀추방은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군대라는
마귀의 끝은
호수에 빠져
죽고 마는
파멸입니다.
그냥 세속적인
이름이 아닌
하느님의
자녀라는
자격과
이름으로
오늘을
기쁘게
살아갑시다.
어둠의 종결은
빛의 새로운
시작입니다.
더러운 영에게
사라질 것을
명령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의 삶이
우리의 세상이
다시 더
밝아지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스스로 빛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명령하십니다.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마르 5, 8)
더러운 영은
우리의 삶에서
나가고
사라져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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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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