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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혜선사 행장
禪師는 宣州寧國縣人也라. 姓은 奚氏니라. 母夢에 神人이 携一僧하되 黑頰隆鼻라 造於臥室이어늘 問其所居하니 對曰 北岳이라. 覺(音에敎)而有娠이고 及誕之日에 白光이 透室하니 擧邑이 驚異러라 卽是年(南宋哲宗元祐四年己巳)十一月十日巳時에 生하다.
師의 諱는 宗杲니라. 年이 十三에 入鄕校하여 與同學으로 戱할새 以硯投之라가 誤中先生帽하고 償金三百而歸에 曰하되 讀世書가 曷若究出世之法乎아. 十六에 投東山惠雲院惠齊大師出家하다.
선사는 선주 영국현 사람이며, 성은 혜(奚)씨이다. 어머니 꿈에 신인이 까만 얼굴에 코가 높은 스님을 한 분 모시고 침실로 오기에, 그들이 사는 곳을 물었더니 북악이라 대답하였다. 그 꿈에서 깨어나자 태기가 있고 태어나던 날 방안에서 흰빛이 뻗어 나오니, 온 마을 사람들이 경이롭게 여겼다. 이때가 남송 철종 원우사년(1089), 기사 십일월 십일 사시였다. 스님의 휘는 종고이다.
나이 13세에 향교에 들어가서 동학들과 장난을 치면서 벼루를 던졌는데 마침 선생님의 모자를 맞히게 되었다. 배상금 300냥을 물어주고 돌아와서 탄식하며 “세간의 책을 읽는 것이 어찌 출세간의 법을 탐구하는 것보다 낫겠는가?”하고는 향교의 공부를 그만 두었다. 16세에 동산 혜운원의 혜제(惠齊)대사에게 출가하였다.
十七에 薙髮受具戒하고 十九에 遊方하다. 至太平州隱寂庵이라. 庵主가 迎待甚厚하며 曰하되 昨夜夢에 伽藍神이 囑曰 明日에 雲峰悅禪師가 到院이라하더니 子가 是耶아하며 乃悅禪師語錄으로 示之라. 師가 一見하고 成誦하니 從此로 人謂雲峰師後身이러라.
初叅曺洞師하여 盡得其旨하나 師猶不滿이라. 徽宗大觀三年己丑(師年二十一)에 叅湛堂無準和尙하고 執侍七年하며 大有領解더라. 湛堂이 臨終에 指令參圓悟勤하고 成就大事라.
17세에는 머리를 깎고 구족계를 받았다. 19세에는 다른 지방으로 돌아다니다가 태평주에 있는 은적암에 이르렀다. 암주가 맞이하여 손님 대접을 대단히 후하게 하고는 말하였다. “지난밤 꿈에 가람신이 부촉하기를, ‘내일 운봉열(雲峰悅,998-1062)선사가 이 절에 올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혹시 그대가 아닌가?”라고 하고는 운봉열 선사의 어록을 보여줬다. 선사가 한번 보고는 다 외웠다. 이로부터 사람들이 그를 운봉열 선사의 후신이라고 불렀다.
처음에는 조동종(曺洞宗)의 스승들을 참례하고 그 종지를 다 얻었으나 선사는 오히려 만족하지 못하였다. 휘종 대관 3년 기축년(1109) 선사의 나이 21세에 담당무준(湛堂無準,1061-1115)화상을 참례하여 7년간이나 시봉하고 크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 담당이 임종을 맞이하여 스님에게 말하기를 “원오근 선사를 참배하고 큰일을 성취하라”고 하였다.
師於宣和四年壬寅(師年三十四歲)에 欲叅圓悟而時師가 遠在蔣山故로 姑依太平寺平普融會下이라. 宣和七年乙巳(師年三十七)에 始叅圓悟勤 於汴京天寧寺이나 才經四十日이러니 一日은 圓悟開堂하며 擧하되 僧이 問 雲門하되 如何是諸佛出身處인가하니 門이 曰東山水上行이니라. 天寧(圓悟自稱)은 卽不然하여 唯向他道하되 薰風이 自南來하니 殿角에 生微凉이라. 師가 聞之에 忽前後際斷커늘 悟가 令居擇木堂하여 不釐務侍者하고 專心保任케하더라.
선화 4년 임인년, 스님 나이 34세에 원오 선사를 참례하려고 하였으나, 원오 선사는 멀리 장산 땅에 계셨다. 그래서 태평사의 평보륭(平普融) 선사의 회상에서 지냈다. 선화 7년 을사(1125), 선사의 나이 37세에 비로소 변경 천령사에서 원오선사를 참례할 수 있었으나 겨우 40일만 같이 보내게 되었다.
어느 날 원오 선사가 법당을 열고 법문하였다.
“어떤 스님이 운문문언(雲門文偃,864-949) 선사에게 물었다.
‘무엇이 모든 부처님이 나온 곳입니까?’
운문 선사가 말씀하였다.
‘동산이 물 위로 간다.’라고 하였는데
천령사의 원오는 그렇게 여기지 않는다. 나는 그 스님에게 이렇게 말하겠다.
‘훈풍이 남쪽에서 불어오니 집 모퉁이에서 서늘한 기운이 생긴다.’”
라고 하였다.
대혜 선사가 이 말을 듣고는 홀연히 앞뒤가 끊어졌다. 원오선사가 그를 택목당에 살게 하여 시자의 일은 하지 말고 오로지 보임(保任)에만 힘쓰게 하였다.
後에 聞 悟室中에 問僧 有句無句가 如藤倚樹話하고 師가 遂問曰하되 聞和尙이 當時에 在五祖하여 曾問此話인데 不知道甚麽라. 悟가 笑而不答이라. 師曰하되 和尙이 旣對衆問인데 今說何妨이오. 悟가 不得己하여 曰 我問五祖에 有句無句가 如藤倚樹意旨가 如何오하니 祖曰하되 描也描不就하고 畵也畵不就니라. 又問에 樹倒藤枯時如何오하니 祖曰하되 相隨來也니라.
뒷날 원오선사가 그의 방에서 어떤 스님에게 “유(有)와 무(無)가 마치 등칡이 나무를 의지하는 것과 같다.”라는 화두에 대해서 묻는 것을 듣고, 대혜 선사가 드디어 물었다. “들으니 당시에 오조법연(五祖法演,?-1104) 선사에게서 일찍이 이 화두에 대해서 물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때 무어라고 말씀하셨습니까?”라고 하니 원오선사가 웃기만 하시고 답을 하지 않았다.
대혜 스님이 “화상께서 이미 대중들이 있는데서 물었는데 지금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이 문제이겠습니까?” 라고 하니, 원오 선사가 부득이해서 말씀하였다. “내가 오조 선사에게 묻기를, ‘유와 무가 마치 등칡이 나무를 의지한 것과 같다는 뜻이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오조 선사가 말하였다. ‘본을 뜨려고 해도 본을 뜰 수 없고 그림을 그리려 해도 그릴 수 없다.’고 했다.
또 물었다.
‘나무가 넘어지고 등칡이 말라버릴 때는 어떻습니까?’라고 하자, 오조선사가 말하였다. ‘서로 따르느니라.’라고 하였다.”라는 말을 하였다.
師가 當下에 豁然大悟하여 曰하되 我는 會也니라. 悟가 歷擧數段因緣하여 詰之하나 皆酬對無滯라. 悟가 喜謂之曰에 吾不欺汝也라하며 乃着臨濟正宗記付之하고 俾掌記室커늘 師가 仍爲圓悟弟子니라. 未幾에 圓悟返蜀하니 師仍韜晦하고 結庵以居하다. 後에 度夏虎丘寺하며 閱華嚴이라가 至第七地菩薩이 得無生法忍處하여 忽洞明 湛堂所示인 央掘摩羅가 持鉢救産婦因緣이라.
그때 대혜 선사가 그 자리에서 활연히 크게 깨달았다. 그리고 말하였다. “저는 알았습니다.”라고 하니
원오 선사가 몇 가지 인연을 하나하나 들어가면서 따져 물었는데 모두 다 대답하여 막힘이 없었다. 원오선사가 기뻐하여 선사에게 말하였다. “나는 그대를 속이지 못하겠구나.”라고 하며 임제정종기(臨濟正宗記)를 지어서 전해주고 자기의 법맥을 잇게 하니 선사는 이에 비로소 원오 선사의 제자가 되었다.
선사가 깨달음을 얻고 얼마 되지 아니하여 원오 선사는 촉(蜀)땅으로 돌아가시고, 대혜 선사는 자취를 감추어 암자를 짓고 살았다. 뒷날 호구사에서 여름을 지내는데 『화엄경』을 보다가 제7지 보살이 생멸이 없는 진리를 얻은 곳(무생법인)에 이르러, 홀연히 담당화상이 보여준 앙굴리마라가 발우를 가지고 산모를 구제한 인연에 대해서 환하게 밝아졌다.
紹興七年에 詔住雙徑寺라. 一日 圓悟訃音이 至커늘 師自撰文致祭하고 卽晩小叅에 擧하되 僧이 問長沙하되 南泉이 遷化에 向甚麽處去오하니 沙曰 東村에 作驢하고 西村에 作馬니라. 僧이 曰 意旨如何오하니 沙曰 要騎에 便騎하고 要下에 便下니라. 若是徑山이면 卽不然이라. 若有僧이 問 圓悟禪師遷化에 向甚處去오하면 卽向他道하되 向大阿鼻地獄이니라. 意旨如何오하면 曰 飢飡洋銅하고 渴飮鐵汁이라.
소흥 7년(1137)에 임금의 조서를 받고 쌍경사(雙徑寺)에 머물게 되었는데 하루는 원오 선사가 열반에 들었다는 부음(訃音)이 왔기에 대혜 선사가 스스로 글을 지어 제사를 지내고 나서 곧 저녁에 소참법문(小參法門)을 하였다.
“어떤 스님이 장사(長沙) 선사에게 물었다. ‘남전(南泉)선사가 돌아가셨는데 어느 곳으로 갔습니까?’라고 묻자, 장사 선사가 말하였다. ‘동쪽 마을에서 나귀가 되고 서쪽 마을에서 말이 되었다.’고 하였다. 다시 그 스님이 물었다. ‘그 뜻이 무엇입니까?’ 장사 선사가 말하였다. ‘올라타고자 하면 올라타고 내려오고자 하면 내려온다.’”라고 답변을 하셨다.
만약 나 경산(徑山,대혜자신)이라면 그렇지 아니하다. 만약 어떤 스님이 묻기를, “원오선사가 돌아가셨는데 어느 곳으로 갔습니까?”라고 묻는다면 곧 그에게 말하기를, “큰 아비지옥에 갔느니라.” 고 할 것이다. “그 뜻이 무엇입니까?” 라고 하면, “배가 고프면 구리를 먹고 목이 마르면 쇠 물을 마신다.”라고 할 것이다.
還有人이 救得也無아. 曰 無人救得이니 如何救不得이오. 是此老의尋常茶飯이니라.
十一年五月에 奸相秦檜 以師로 爲張九成黨이라하고 秦請하여 毁其衣牒이라. 竄衡州十五年이라가 二十六年十月에 詔移梅陽이라. 不久에 復其形服하고 放還이라. 十一月에 詔住阿育王寺니라.
“‘어떤 사람이 그를 구제할 수 있는가?’라고 하면 ‘구제할 사람이 없다.’ ‘왜 구제하지 못합니까?’ 이 늙은이의 평소의 다반사(茶飯事)다.’라고 하리라.”하였다.
소흥 11년(1141)년 5월 요사스런 재상 진회(秦檜)라는 사람이 대혜 선사를 장구성(張九成)의 일당이라고 모함하여, 가사와 도첩(道牒)을 빼앗고 임금에게 청하였다. 그래서 형주에서 귀양살이를 15년이나 하게 되었다. 소흥 26년(1156) 10월에는 임금의 명령으로 매양(梅陽)이라는 곳으로 옮겼다가 오래지 아니하여 그 형색과 가사를 회복하고 풀려났다. 그해 11월에 다시 임금의 부름을 받고 아육왕사(阿育王寺)에 머물게 되었다.
二十八年에 降旨하여 令師로 再住徑山寺하여 大弘圓悟宗旨아니 道法之盛이 冠于當世하여 衆至二千餘人이라. 辛巳春에 退居明月堂인데 明年壬午(高宗三十二年)에 上이 賜號曰 大慧禪師라하다. 孝宗隆興元年癸未에 仍居明月堂이라. 一夕 衆見一星이 落於寺西에 流光이 赫然이라. 師가 尋示徵疾이더니 八月九日에 謂衆曰 吾가 翌日 殆行이라하고 是夕 五鼓에 手書遺表하며 幷囑後事라.
소흥 28년(1158)에 임금은 교지를 내려 선사에게 재차 경산사에 머물게 하여 원오선사의 종지를 크게 드날렸다. 선사의 법이 융성하여 당세에 으뜸이었다. 대중은 2천여명이나 되었다. 신사년(1161)봄에 명월당에 물러앉아 있었는데 이듬해(1162) 임오년 고종 32년에 임금이 호를 대혜 선사라고 내려주었다.
효종 융흥 원년 계미(1163)에 명월당에 계셨는데 하룻밤 대중들이 보니 별 하나가 절 서쪽에 떨어지는데 유광이 환하게 밝았다.
선사가 곧 작은 병세를 보이더니 8월 9일에 대중들에게 말씀하였다. “내가 내일 갈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날 저녁 5경에 손수 임금에게 보낼 글을 쓰고 아울러 뒷일을 부탁하였다.
有僧了賢이 請偈어늘 師乃大書曰 生也祗麽요 死也祗麽어늘 有偈無偈에 是甚麽熱이요하며 怡然而逝니라. 世壽는 七十有五요 坐夏는 五十有八이라. 上이 痛悼不已하고 賜謚曰 普覺이라하며 塔曰 普光이라하다. 今擧生號死謚하여 云 大慧普覺者는 揀南岳讓和尙 亦號大慧故也니라. 有語錄八十卷이 隨大藏流行하고 爲法嗣者가 八十三人也라.
그때 요현이라는 스님이 임종게(臨終偈)를 청하니 선사가 이에 크게 써 주었다. “삶도 다만 그렇고 죽음도 다만 그렇거늘 임종게가 있고 임종게가 없는 것에 왜 그렇게 열성인가?”라고 하시고 편안히 돌아가셨다.
그때 나이 세수는 75세이고 법랍은 58세이었다. 임금님이 애도해 마지않고 시호를 내려 보각(普覺)이라 하고, 탑호는 보광(普光)이라하였다. 지금은 살았을 때의 법호와 돌아가신 뒤의 시호를 들어 대혜보각이라고 한 것은 남악양(南岳讓) 화상의 호가 또한 대혜임을 분간하기 위한 것이다. 어록이 80권이 있어서 대장경에 포함되어 널리 세상에 퍼지게 되었고, 스님의 법을 이은 제자는 83인이다.
주1)
앙굴마라가 탁발하다 어떤 장자 집에 이르렀는데, 마침 그 집 며느리가 난산으로 죽게 되었다. 장자는 "당신은 부처님 제자이니 우리 며느리를 도울 수 있을 것이요."하며 그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하였다. 앙굴마라는 "나는 그 방법을 알지 못하니 부처님께 물어서 가르쳐 주겠소."하고, 부처님께 물었더니 부처님께서는 "네가 빨리 가서 '나는 부처님의 법을 만난 뒤로 아직 살생을 한번도 하지 않았다.'라고 이야기해라" 말씀하셨다. 앙굴마라가 부처님의 지시대로 곧 가서 이야기를 하니, 그 집 며느리가 이야기를 듣고 편안히 아이를 낳았다는 내용이다.
주2) 재상 진회
대혜는 눈먼 종사와 머리 깎은 외도들의 묵조선 폐단을 없애기 위해 강한 어조로 그들을 물리쳐 버렸다. 이 때문에 대혜 스님에게 적의를 가진 사람이 많았다. 1141년 4월 10일, 장시랑이 그의 부친 제사를 경산사 대혜 스님에게 지내게 되었다. 당시 송상 진회가 장시랑이 경산사에서 부친의 재를 지낸 것을 구실로 반역을 모의했다 하여, 장시랑과 연관된 사람을 전원 파면하거나 추방하며 잡아들여 대혜도 함께 형주로 귀양을 보냈다. 그러나 스님의 공부를 사모하여 이참정, 왕한림 등 사대부들이 편지로써 오가는 사귐이 끝이 없었다. 진회는 이것도 꼴 보기 싫어 대혜를 15년만에 형주에서 편지 왕래가 순탄치 못한 회양으로 옮겨 버렸다. 귀양 16년 만에 장시랑이 승상이 되자 석방되었다. 이 16년 간을 대혜 스님이 머리를 길러 갓 쓰고 설법한 시기라고 한다.
출처: 禪 스승의 편지, 대혜 종고 『서장』, 원순 옮김

첫댓글 오늘로
대혜선사의 서장인 선스승의 편지는 마지막입니다.
때론 너무 알송달송하여 옮기는데만 급급한 적도 있고요.
때론 이것이 선이구나. 어렵지 않네~
우리의 생활이구나 이런 생각도 했습니다.
쭉 대혜선사님은 진정한 보현행자시구나 싶어 따뜻한 마음으로 공양 올렸습니다.
다음주부터는
유마경
공양 올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 _()()()_
덕분에 일대기를 한번 훑었습니다.
원을 세우고 다시 오는 것에 대해 생각합니다. 대단한 원력보살들이십니다.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