볕이 좋은 가을날은 어김없이 바람까지 상쾌하다.
올 가을도 반짝이며 이렇게 흘러가고 있는데, 무엇일까, 내 영혼이 자극 받는 일은?
나를 움츠리게 하는 모든 것들에 저항해 보고 싶다. 결심은 마음이 아니라 행동하는 것,
완벽한 지도를 가져야만 떠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지 않던가?
백두대간에서 슬며시 빠져나온 산맥이 금강의 물결과 만나 어우러지며, 고산준령들이지만
그 사이를 교차해서 곡선으로 강물이 어우려져, 아기자기한 풍경을 빚어낸다는 영동에서의 울트라 마라톤 개최 소식을 들었다. 그러고 보니 영동 울트라마라톤은 가보지 못한 대회였던지라, 한번은 가보고 싶었고, 작금에 자꾸만 나는 누구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가 삶을 대하는 스타일이 되다보니, 나의 의지와 진정성에 대해 생각하게 했던 그 길 위에서 어제의 나를 지우고 오늘의 나를 일깨우고 싶기도 했다. 그래서 내 마음과도 다시 만나고, 나 자신에 대해 열중한 상태가 되었던 그 시간과도 만나서 천천하고도 빠르게 뭉클하고 따뜻한 기분도 느끼고 싶었다.
두어해, 달리기와 담을 쌓았던지라, 길을 온 몸으로 느끼기 위해서 우선 몸과 마음을 단속했다. 연습할 수 있는 시간이 절대 부족하지만, 억지로 무리하게 되면 고장 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 일부러 우레탄 깔린 길을 연습장소로 삼아 추석 연휴동안에는 낙동강 자전거 도로길 위에서 자전거도 타며, 달리기도 하면서 지냈다.
토요일 가을날, 따사로이 내리쬐는 햇볕과 함께 주저하지 않고 새로운 길로 나선다. 혼자서, 여행자 차림으로 느림의 미학으로 바뀐 무궁화 열차를 타니 신선한 설렘과 타성의 길에 묻어가지 않고 심중의 길, 혼자 스스로 내는 그 길로 간다는 생각(?)으로 약간의 흥분도 된다. 길이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면, 첫 발자국을 떼는 이곳이겠지.(^^)
구포역에서, 밀양역에서 영동 마라톤 대회 참가자들이 달리기 복장을 하고 속속 탄다.
마침 내 옆자리에 여성분 울트라 런너께서 가방을 내려놓는다. 잠시 후 혼자 마시기 그런지 나에게도 보온병의 커피 한 잔을 권한다. 그러찮아도 무궁화 열차에는 판매수레가 다니지 않아 카페 열차 칸으로 갈까 말까 망설였는데 감사하기도 하다. 나도 영동 대회에 참여한다니까 차창 풍경의 사진이나 찍고 있는걸 보고 여행자인줄 알았다면서 잠시 달리기 얘기를 나누다가 각자가 따사로운 가을 햇살 아래의 풍경이 된다.(잔다는 이야기이다^^)
영동은 가로수 길에 심은 나무도 감나무이다. 일단은 보기에도 풍성하고 가을에 어울리는 길이다. 아침을 늦게 먹어 점심을 먹지 않아 역 앞에서 우동 한 그릇 먹고 가니 출발 30분 전이다. 서둘러 등록하고 옷을 갈아입고, 출발선에 선다.
달리기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바닥을 만나게 되어 폴짝 다시 한 번 뛰어 보려는 것일까, 지나온 시간들을 투명하게 지워나가려는 것일까, 아니면 바람을 가르며 만나게 되는 공기가 그리워서일까, 그것도 아니면 몸이 극렬하게 저항하는 것을 몸소 겪어 보기 위해서일까.....
어쨌튼 길을 지워나가는 일이다. 누군가가 마라톤을 완주하는 방법은 1킬로미터씩 차근차근42번만 하면 된다고 하였지만, 지금 달려 나가야 하는 이 길은 101번을 지워나가야 한다.
출발선에 선 생기 넘치는 동반주자들의 표정에서 나의 살아있음이 증명되고, 뛰는 심장이 나를 유쾌한 긴장 속으로 빠뜨리는 것을 보니 잘 지워나갈 수 있을 것 같기도 같다.
영동군민 운동장을 출발하여 한적하고 정겨운 읍내 길에서 주민들의 응원도 받고, 경찰차의 호위 속에 난계 박물관을 지나 좁은 도로로 들어서면서부터 강 따라 한적한 가을 시골길이 펼쳐진다. 아직 해는 떨어지지 않아 새털구름 하늘 위를 장식하고 탈곡기 앞에서는 가을걷이가 한창이다. 영국사를 알리는 표지판을 보니, 천태산 자락의 은행나무 한그루가 가슴에 품어왔던 천년의 사연들과 함께 댕기머리 아가씨가 팔던 더덕 막걸리가 떠올라 사진 한 컷 찍어도 보면서 기분 좋게 달린다.
죽청교 부근에서 우물에 두레박 떨어지듯 가을해는 떨어져 사위가 어슴푸레해진다. 영동의 깊은 산과 더불어 쉼 없이 흘러내리는 강물이 나에게 다가오면서 무언의 메시지를 던져준다. 삶은, 아무것도 아닌 풍경 앞에서도 종종 엎드리게 하는 것. 지금부터는 가장 아마추어적인 열정으로 무장하여만 할 때, 그래야만 진정한 프로가 되어 잘 달려 나갈 수 있는 법이다. 모처럼 맛보는 가슴 벅찬 여행으로 자신으로 돌아가는 길을 발견하는 일이 그리 만만하지 않겠지만 한편의 로드무비를 찍는다는 심정으로 달려봐야지.(^^)
날이 저물어 캄캄해지면 달리고 있는 이 길은 다른 길과 똑같아진다. 그 어떤 길도 지금의 이 길과 같음을 인정하고 알바(?)를 하지 않으려면, 중간 중간 안내표지판과 앞서 간 주자의 꼬리불빛을 따라 선을 잘 이어야 한다. 길 위에서는 더 풍요로워지고, 현자가 되어 마치 앞서 간 선인들의 과거의 경험과 지금 현재의 시대적 상황에 맞는 도덕율을 좇아 책임감과 맑은 눈과 열린 가슴을 가진, 의욕이 넘치며 상식을 거스리지 않는, 그냥 보통의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것처럼.......
한강 이남의 울트라 코스 중 가장 높다는 언덕들을 앞두고 잠시 숨을 고른다. 길고 서늘한
이 밤을 건너가려면 마음에 불을 지피고 찾아가야 할 터, 피워 둔 모닥불 앞에선 마을 분들이 삼삼오오 모여 도덕재, 용화재, 그리고 도마령까지 넘어 한여름에도 한기가 돈다는 물한계곡, 민주지산 산자락을 지나가야 되는데 반팔 티셔츠에 팬츠만 입은 나의 복장을 염려하신다. 그리고 집 앞에서 높은 재를 넘어가려는 주자들에게 따뜻한 허브차를 아들과 함께 끓여 내며 힘을 실어 주시는 아주머니, 한밤중에 자지도 않고 나와서 응원해 주는 꼬맹이들까지, 참으로 고마운 사랑과 관심들이시다. 역시 산다는 것은 무엇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해야 함을 느끼게 해준다.
허지만, 춥다. 산이 깊을수록 고요의 자리는 깊고, 달려도 달려도 다음 길은 나오지 않고, 캄캄한 사위 속의 이 밤, 오한을 느끼며 나무들 사이에서 어두운 언덕을 오르는 나는 누굴까? 곡선 길을 가로질러가며 숱한 마음들을 밟아도 보고, 발을 땅에 밀착시키고 그 단단함과 하나 되어 발에 그 흔적들을 새겨도 보지만, 쉽게 지치며 힘줄이 당기고, 중심이 흔들리고, 다리와 몸을 뒤적여도 보면서 몇 번씩 마음의 로드 킬을 이어간다. 그저 뛰고 달리면 되는 것, 지금 이 순간은 오직 그것만이 세상의 전부인 것, 길 위에서의 몸과 마음은 뛰고 달리는 것만큼 움직여 주는 명료한 것이다.
도마령을 목전에 두고 중간 체크를 하자마자 배낭에서 타이즈와 바람막이 자켓을 꺼내 입는다. 잠시 휴식 후 야식을 두 그릇이나 먹고 다시 몸을 추스린다.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이 밤이 다 새도록 달려 나가야 한다. 도마령 정상에서 바라다 본 밤하늘의 별들은 낮에 보았던 수많은 들꽃들이 해가 지자 하늘에 올라 별이 된 것일까, 다시 해가 뜨면 별은 떨어져 꽃이 되는 것이고.... 힘드니까 어려우니까 근본충동으로 별것을 다 사유케하나 보다.(^^)
지친 두 발, 기진한 육신, 허기진 비애를 안고서 나는 아직도 길 위에 있다. 빨리 돌아가 쉴 정처를 찾고 싶지만, 아직도 아직도 길은 멀기만 하고, 날이 밝아올 기척은 요원한 것만 같다. 이제부터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 몸도 마음도 지치면 어물전 개조개 맨발의 움직임처럼 꼭 그만한 속도로 천천히 걷다 달리다 하다가 이 길을 돌아가면 되는 것. 조금 느리면 어때, 생각보다 오래 걸리면 또 어때, 도중에 포기만 않는다면 도착하게 될 것이며 조용히 갈수록 더 멀리 간다고 하지 않았던가.....완주 바람의 끈을 놓지 않으며 혼자서 길 위에서 중얼거리고 있다.
출발할 때만 해도 여행 삼아, 사진도 찍어가며 즐겨야지라는 생각이 후반에 들면서부터 카메라를 끄집어 낼 힘조차 없다. 그러니 인생이란 얼마나 예측불허의 것인가? 그러니 흘러 가는대로 그대로 내버려 둘 수 밖에...... 노근리 그 현장을 지나가고 있지만, 아직도 날은 어둡다. 그렇게도 많은 총탄자국의 사연들이 정처를 찾아 아직도 길 위에 서 있듯이, 나 역시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하늘이 희붐해지고, 주위가 조금씩 밝아지고 있다. 와인코리아 앞 CP에서 포도즙 한 모금 목에 넘기고 마지막 힘을 낸다.
제법 만만찮은 세월을 살아왔는데도, 늘 만져지지 않는 날들, 그 하루가 하루씩 지나가고 있다. 하얗게 씻긴 별빛 속에 내가 달려온 이 길 위에서 날은 샜다. 쨍하고 분명한 시간들이 지나가니 뭉클하고 따뜻한 기분이 든다. 나 자신에 대해 열중한 상태가 되었던 시간, 같이 달려던 친구들, 그리고 많은 동반주자들.... 충일한 아름다움이였다. 이 모든 것을 말하지 않고 말 할 수 있었더라면 더 좋았었을 것을...................
첫댓글 울트라마라톤 후기 같지는 않고, 시 같기도 하고 소설 같기도 하네...
첨에 잘 몰라서 실수했는데 미안코...주로에서 자주 보자.
와우~ 울트라 후기 감동이네... 낮에 본 수많은 들꽃들이 밤 하늘에 별이됐다가 다시 꽃이된다는 멋진표현 정말 죽인다.
울트라여행과 인생, 삶
그기 머시라꼬. 따박따박 걸어면 되는것을...
시인의 후기 즐감하고 간다.
행복한 경험 했구나 회복잘하시길...
작가가 따로 없네......ㅎㅎ
출발전에도 보고 ..뛰는 도중에도 ...본것 같은데...
나중에 뒷풀이 자리에서 함께 하고야 울58친구라는것을 알았으니..
미안하고..
친구는 날 알고 있었다고 하는 말에 더 미안했다오...
영동 울트라 난 이번이 세번째 ...
긴산속 어둠속에 다른곳보다 귀신들이 더 많은지.....
또 오라고 늘 마음을 흔든다네..ㅎ..
정말 아름다운 표현이다 역시 소문대로 이구만
멋진 후기 완전감동 이다
자주 주로에서나 선술집에서나 보자
우물에 두레박 떨어지듯 우리네 삶도 찰나인듯.....
감나무가 보고싶다
말하지 않고 말할 수 있었다면,,, 시고 그림이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느끼네요
샛별이도 시인 소질이 다분히 있는데...
감동이다 ^^
어두운 밤, 시리도록 아름다운 별 밤!
그ㅡ 어둠이, 블랙 홀에 이끌리 듯 난 흡입이 되어 어디론가 날으고 있다
홀가분한 나의 몸과 맘
아직도 어둠이 깔린 영동 주로를 헤매이고 있다
거친 나의 숨결만이 들리는 ......
그래도 행복한 달리기였구먼
말이 필요 없다~~캬~~~ㅎ
사탕과 채찍만 필요하지 그쟈
주로에서 함께 동행했건만 58친구인줄 나도 몰랐네!~ㅎ.반가웠고
가슴에 한페이지의 인생추억의 장이되길바라네 글구 사진 고맙네^^
나두 영동은 첨인데 넘 멋진코스 도마령에 별들이 지금도 보이는듯하다.
고생 마이했고 항상건강해라~~~
여전한 인생 오래만이네..울트라때 자주 만났었는데..ㅎㅎ
울트라보다 더 감동적인 글 잘 보왔네, 멋져
여인, 오랫만이네.
좋은 글 잘 읽고 가네.
쓰지않고 쓸수있었다면.....^^*
끼꽁아 까꽁^^*
양초로 써 봐 ㅎ
여전한 인생 멋쟁이군....
뛰지 않으면 느낄수 없고
읽지 않으면 감동할수 없는 인생의 후기..
감동이네..
잘보고 가네...
울트라 런너이기전에 대단한 글솜씨다.
완주 축하한다.
어디선가 본듯한 사람이 힘든 포즈로 사진을 찍고있는데.. 한 친구 한친구가 합쳐지면서
자꾸 자꾸 또 찍어달라 주문이 들어와 힘들게해도 무표정...
어떤 친구에게 누구냐고 물어보니 부산 여인이라네 헉~안산 정모때 내가 수원역 카풀한 기억~이 친구야 개복을 입자 ㅎㅎ
난 영동의 밤거리를 뛰면서 오늘의 나를 지우고 내일의 나를 맞이하고 싶었는데..후기가 너무 감동이라 내년이 기약된단다
자랑스러운 내 친구, 정이야, 울트라 무사완주 진심으로 축하해,,200 때는 꽃다발 들고 휘니쉬 라인에서 기다리고 싶다...^^
사랑스런 내친구~수아야~^^
한편의 멋진 수필을 읽은 듯, 글솜씨도 울트라네여,함다.^^
늦었지만 울트라 무사완주
여전하구나!
엄청나네. 이렇게 서정적 사색적인 글, 나는 까무러쳐도 못쓰지. 산행기나 대회 후기 말고도 긁적여놨던 것 끄집어내서 가끔 올려 주라.
정말감동적인글이네?이런 아름다운글을 쓰는 진구가있다니 자랑스럽구먼?잘 감상했네ㅡ이 멋진친구는 언제볼수있으려나?
감동이네...
울트라만 뛰면 시인되나보다, 구름채글보고깜짝 놀랬는데 이친구 역시시인이네
정말 영혼이 맑아지는 한소절들 읽고 또읽고,,,훌륭한 친구여~~~감사 감사
"도마령 정상에서 바라다 본
밤하늘의 별들은
낮에 보았던 수많은 들꽃들이
해가 지자 하늘에 올라 별이 된 것일까,
다시 해가 뜨면 별은 떨어져 꽃이 되는 것이고.... "
달리기를 제대로 즐길 줄 아는 친구일세....여전한인생~~~
여전한 고수의 발걸음이 영동 밤하늘을 사븐사븐 흔적을 남기고 왔구나 여전히 그대로 즐기고 있어 반갑고 언제함 주로에서 볼수 있겠지.
그렇구나 쌉싸레하고 달콤한. 나도 그런 느낌을 다시 가져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