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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게르하르트 마이어의 마가복음 번역이 8월에 출판됩니다: 토브북스/ 송다니엘 번역.
많은 관심을 가져주시기를 바랍니다.
번역의 한 부분을 보내드리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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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제자도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8:34-9:1)
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35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3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37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38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9:1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앞 사건, 즉 31절 이하 사건과 본 사건 사이에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에 대해 우리는 아는 바가 없다. 그런데 모든 복음서에서(참조: 마 16:24 이하; 눅 9:23 이하), 이것을 서로 연결하여 보도하므로, 우리는 이 두 보도 사이에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았음을 전제한다. 아마도 예수님은 아직도 빌립의 영토에서 계실 것이다.
그분은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셨다.” 메시아 고백은 단지 제자들 사이에서 일어난 일이었다(참조: 눅 9:18).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아마도 이 “무리”는 빌립보에서 거주하는 소수의 유대인에 속하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이들을 가르치셨는데,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이들에게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34). 그분의 제자뿐만 아니라 그 “무리”도 이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누구라도 제자가 되도록 강요당하지 않는다. 누구든지 자유롭게 결정을 내릴 수 있다(“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예수님은 몇 번이나 제자의 삶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명백히 밝히셨다(참조: 10:17 이하; 눅 9:57 이하). 다음과 같은 피상적인 초대와는 너무나도 다르다: “예수께 오기만 하시오. 그러면 모든 문제가 풀릴 것이오.” 우리가 그분의 제자도에 들어가게 되면, 이와 반대로 비로소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바로 자기부인이다(“자기를 부인하고”). 이것은, 바로 전에 베드로가 실수한 한 것처럼(32), 더는 인간적인 생각을 따르지 않는다는 의미에서의 자기부인이다. 이것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예수님이 자기를 다스리시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다스리는 자아를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자아로 바꾸는 것이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계속해서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너무나 무거운 것이라 우리가 질 수 없다. 우리가 세상을 구속할 수 없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은혜에 따라 우리 각자에게 알맞게 지어주시는 “십자가”를 의미한다. 그럼에도 이것은 “십자가”이다! 이 십자가는 제자들이 문자 그대로 십자가에서 못 박히는 데까지 갈 수 있다. 실제로 베드로는 64년에 바티칸 정원에서 그렇게 죽었다(요 21:18-19). 우리도 그럴 준비가 되어 있는가? 우리는 지금 매일 나를 찌르는 바늘이라는 십자가, 손해와 망신, 모략과 비웃음의 십자가를 질 자세가 되어 있는가?
“그리고 나를 따르라”라고 예수님은 듣는 사람들에게 외치신다. 이렇게 큰 부담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말로 다할 수 없이 귀중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영생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나를 따르라!”는 외침은 동시에 이것을 원하는 사람은 제자로 받아들인다는 약속을 포함한다(참조: 요 6:37).
“누구든지”부터 “나를 따를 것이니라”까지는 마태, 마가, 누가 복음서에서 단어까지 거의 같다(참조: 마 16:24; 눅 9:23). 벧전 2:21은 이 말씀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십자가를 두려워해야 하는가? 예수님은 그렇지 않다고 하신다. 그분은 수수께끼와같은 말씀으로 이것을 설명하신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35).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목숨(생명)”이라는 말은 이곳에서 이중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먼저 이 땅에서의 생명을,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영생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예수님 말씀은 다음과 같이 다시 표현할 수 있다: “누구든지 자기의 이땅에서의 생명을 구원코자 하면, 영생을 잃을 것이다. 그러나 나와 복음 때문에(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잃는 자는, 자기의 영생을 구원하리라.” 이제 우리는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자기 목숨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꺼려하면, 그는 스스로 자기 영생을 죽이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 때문에”, 혹은 “복음 때문에” 이 땅에서의 자기 생명을 바치면, 그 대신에 그는 그의 영생을 얻을 것이다. 영생은 이 세상의 삶보다 얼마나 더 고귀한 것인가! 그러므로 오늘날 가치관을 논할 때 그리스도인은 현세의 삶에 가장 가치를 두는 그러한 논조에 항상 부정적으로 대응한다. 이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영생이다(이와 비슷한 말씀이 있는 곳: 마 10:39; 눅 17:33; 요 12:25; 계 12:11). 이곳에서 “복음”이란 당연히 성경에서 가르치는 복음을 말한다. 위조된 복음이 아니다(참조: 1:15; 갈 1:6-9).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36). “자기 목숨을 잃으면” 온 천하를 얻는 것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오리엔탈 세계에서는 알렉산더 대제와 율리우스 시저가 이와 비근한 인상적인 예를 남겼다. 이 말씀이 세상적인 의미에서도 통한다면, 종교적 의미에서는 얼마나 더 큰 의미가 있을까? 우리가(혹은 목사가) “온 천하”(온 교회)를 정복하여 다스리고 존경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자기는 영원한 생명을 잃는다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도 바울은 빌 3:8에서 이 말씀을 다시 펼친다.
생명은 일단 잃어버리면 되살릴 수 없다. 자기 생명을 다시 얻고자 그 대가를 지불할만한 것이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질문하신다: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예수님은 지금 시 49:7-8을 인용하시는 것이 분명하다: “아무도 자기의 형제를 구원하지 못하며 그를 위한 속전을 하나님께 바치지도 못할 것은, 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임이니라”(히 9:27과도 비교하라: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성경은 윤회사상이나, 인간이 사후에도 다른 삶을 산다는 그러한 환상을 배척한다. 인간은 단 한 번 살 뿐이고, 죽으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결산해야 한다. 그가 이 한 번의 삶을 잘못 살았다면, 다시 살아서 만회할 길이 없다. 36-37절의 예수님 질문은 물질주의적으로 되어버린 오늘날 유럽사람에게 대단히 강하게 도전하는 말씀이다.
우리가 죽으면 우리를 다시 속량하실 한분이 계시다. 이분은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시는 예수님이시다(5:22 이하. 참조: 마 11:5; 눅 7:11 이하; 요 11:1 이하). 그러나 예수님은 단지 그분을 좇는 사람들만 구원하신다. 그분이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메시아라는 이유로 그분을 부끄러워한다면, 그에게는 영생으로 가는 길이 막힌다. 이것이 38절의 의미이다: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이러한 연관성 하에서 부끄러워한다는 말은 자기 명예가 실추될 것을 염려하여 누구를 멀리하거나 모른체 한다는 의미이다. 당시에 많은 제자들이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님을 떠났다(요 6:60, 66). 이곳에 나온 „내 말을“은 35절에 나온 „복음“과 같은 의미이다(참조: 롬 1:16; 딤후 1:8). 예수님은 자기 동시대 유대인을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라고 하시는데, 그것은 그분을 메시아로 영접하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을 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은 남녀 사이의 혼인 언약과 같으므로, 언약을 어기는 것은, 구약에서 자주 간음이라고 한다(참조: 렘 1:21; 57:3 이하; 렘 2:1; 3:1 이하; 에스겔 16장과 23장; 호 1:2 이하; 2:4 이하). 예수님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와같은 표현을 자주 사용하셨다(참조: 마 12:39, 45; 16:4; 17:17; 눅 9:41). 이것은 차가운 비난이 아니라 선지자적인 고통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특별히 고통스러운 것은, 자기 자신의 제자들이 이러한 패역한 세대로 넘어가고, 이를 통해 이 하나님께 반역하는 이 세대의 태도를 더욱 강화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신실한 제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는, 당시 모든 유대인을 통털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예수님을 대적하는 지도자들과 이들을 따르는 큰 무리를 의미한다. 즉, 고난당하는 메시아의 제자가 되기를 부끄러워하는 자에게는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는 말씀이 해당한다. 예수님은 자신이 다시 오신다는 것을 매우 분명하게 선포하셨다. 왜냐하면, 자기가 바로 그 „인자“이기 때문이다(2, 10, 28; 8:31). „거룩한 천사들“은 사탄이 타락할 때 그 역모에 가담하지 않은 하나님의 천사를 의미한다. „아버지의 영광“은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둘러쌀 것이다. 그것은 그분이 하나님의 심판자로 다시 오시기 때문이다(참조: 13:27; 마 25:31; 살후 1:7). 이 하나님의 심판관을 부끄러워하는 자는, 최후의 심판대에서 유죄판결을 받는다. 38절을 요약한다: 예수님을 떠나는 자는 최후의 심판에서 판결을 받는다(참조: 마 10:33; 윧 4).
9:1은 한편으로는 8:34 이하와 관련이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라는 말로써 새로운 내용이 시작되므로 전 단락과 구분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하나의 독립된 구절로 보고 해석하는 것이 좋다.
„아멘(진실로)“이라는 말로 예수님은 학자들이 이해하기 매우 어려운 말씀을 하셨다: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이곳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포인트는, 하나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언제 볼 수 있는가 이다. 이것은 세상 종말에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것을 의미하는가? 이러한 해석은 8:38과 어울린다. 그런데 이것은 너무 좁게 해석한 것이다. 만약 예수님이 재림을 의미하셨다면, 그분은 착각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은 이미 죽었기 때문이다. 신약에서 찾아보면, 롬 1:4와같은 구절들이 눈에 들어오는데, 이에 따르면 예수님은 그분의 부활을 통해 „능력으로“ 하나님 아들로 선포되셨다(참조: 마 28:18). 다른 구절에서는 이 „능력“이 성령님을 통해 중생된 사람에게 선사된다고 한다(롬 15:13, 19; 고전 2:4; 고후 13:4; 딤전 1:7 등). 그러므로 오순절 이래로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이 있다. 따라서 이에 대한 가장 좋은 해석은 다음과 같다고 본다: 대다수 사람이 고통당하는 메시아를 보고 그분을 배척하지만, 이 고난당하시는 메시아는 자신의 속죄 죽음을 통해 죄인에게 성령님이 부어지시는 것과, 동시에 자신이 하나님 우편에서 다스리는 것을 가능케 한다. 바로 이것을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볼 자가 있을 것이다. 이것이 정말로 일어났다.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라는 표현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유다는 이것을 보지 못했다[1].
예수님 말씀이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치는 것은 무엇인가?
1) 예수님을 고난당하시는 메시아로 이해하고 믿기 위해서는 확고한 결단이 필요하다.
2) 그분을 따르려는 자는 제자가 됨으로써 따라오는 여러 가지 결과를 감당해야 한다.
3) 우리는 이 땅에서의 삶을 즐기는 것과 영생을 받는 것, 이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4) 예수님 편에 서지 않는 자는 최후의 심판대에서 심판받는다.
5) 예수님 세대의 사람들은 고난당하시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능력으로“ 동터오는 것을 체험할 수 있다.
그룹성경공부(8:34-9:1)
1. 이해를 위한 연구
1) 이곳에서 핵심적인 세 가지 주제를 항상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제자도)의 의미, 최후의 심판이 현실이라는 것, 하나님 나라가 곧 온다는 것.
2) 예수님의 십자가 길과 제자들의 십자가 길을 비교한다. 공통점과 차이점은 무엇인가?
3) 무엇보다 9:1은 우리를 어렵게 만든다. 예수님이 지금 착각하셨는가? 아니면 우리는 이 구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4) 성경공부와 설교를 위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제목을 정한다: “예수님을 따르면서 우리는 어떤 체험을 하게 되는가?”
2. 이해를 돕는 설명
주제: “예수님을 따르면서 우리는 어떤 체험을 하게 되는가?”
1) 고난을 체험한다
예수님이 이렇게 공개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이 놀랍다(참조: 32)! 우리 자신은 자주 이 구절에서 주저하거나 제자들이 겪어야 하는 고난에 대해 침묵하지 않는가?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신실하게 실천했던 사도들의 설교는 우리와 다르지 않는가(참조: 행 14:22)!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자기부인이며, 이것은 동시에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는 것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십자가이다! 그러나 각자에게 “자기” 십자가가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잘 아셔서 내가 질 수 있는 만큼 주시는 고난을 의미한다(참조: 고전 10:13). 누구든지 이 고난보다 세상이 주는 즐거움을 더 좋아하는 사람은 영생을 잃는다(35-37). 우리는 예수님을 위해 고난받을 각오가 되어 있는가?
2) 영생을 체험한다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자에게는 예수님도 그를 제자라고 고백하실 것이다. 이것은 현세에서도 유효하다(참조: 마 10:32-33). 그러나 이것은 최후의 심판대 앞에서 현실이 된다(38). 예수님은 다시 오실 것이다. 그러면 그분은 모든 영광으로 세상의 심판관으로 오실 것이다. 그분은 새로운 창조 세계에서 신실한 제자들에게 구원과 영생을 선물로 주실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 신실하게 살도록 기도하자!
3) 하나님 능력을 체험한다
많은 해석가 사이에서 9:1 해석을 두고 논쟁이 있다. 이것의 의미는, 성령님의 능력으로 하나님 나라가 시작하는 것으로서, 오순절에 이 일이 일어났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제자는 고난만 겪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도 체험한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항상 함께 한다. 하나님의 권능은 고난을, 고난은 하나님의 권능을 밀어내지 않는다. 심지어 이 두 가지는 비밀스럽게도 하나에 속한다(참조: 고후 4:7 이하). 오순절 이후에 하나님의 권능은 얼마나 영광스럽게 역사했는가! 그것은 선교를 위한 권능이고, 교회를 보존하는 권능이다! 또한 순교를 위한 능력이다. 우리도 이러한 하나님의 권능을 우리 개인적인 제자 삶에서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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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첨가:
제자도란 신자가 마땅히 항상 지녀야 할 기본 자세를 의미한다. 본문은 바로 이 제자도가 어떤 것인지를 가르치므로, 신앙생활에서 실제로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며 지침이다. 제자도의 핵심은 자기 부인과 십자가이다. 그 이유는 우리의 생각, 우리의 뜻, 품성, 기호, 원하는 것은 자주 하나님의 품성과 뜻에 맞지 않으므로, 항상 자기 것을 버려야 하고, 자기 계획을 좇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어 주신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론적으로 영생을 위해 매일 죽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예수님도 이곳에서 제자들과 심지어 무리들에게도 이것을 대단히 강력하고 진지하게 요구하신다. 구원을 얻으려면 누구도 이 요구를 피할 수 없다. 우리는 몸에 전률을 느끼며 이 말씀을 들어야 한다. 그러나 이 길이 바로 주께서 원하시는 길이므로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갈 수 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 이 길은 생각보다 그렇게 어렵지 않다.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선하신 분이시므로 우리에게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지 않으시고 늘 우리를 격려하시고 도우신다.
[1] 불신자들도 하나님 나라가 능력으로 임하는 것을 보지도 느끼지도 못한다. 예수님은 지금 무리에게 이 말씀을 하시므로 이중에서 이것을 보는 사람은 오히려 소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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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멘 아멘
귀한말씀에 큰은혜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목사님 늘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