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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9-1577
(집으로 돌아가는 길)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뿌듯하다. 하루 일 무사히 끝내고서 발걸음 옮길 때 더욱 그렇다. 회사일이든, 어딜 놀러 가든 감동의 부피가 커지면 커질수록 집으로 가는 길은 향기롭다. 물론 놀러 갔을 때의 그것이 더 커질 수밖에 없지만,
전국에서 다섯 번째로 높은 산을, 하얀 눈 뽀독뽀독 밟으며, 세상에서 가장 미더운 사람들과 함께 한다는 것은,
남 회장님이 단톡방에서 산행 참가 못한 장덕수선배에게 말했다. "약 오르지? ㅎ 오늘은 손에 꼽을 정도로 날씨도 좋았고. 풍성한 눈을 원 없이 봤걸랑."
모두에게 물어보았다. 오늘 산행 어땠는지, 하나같이 대답하였다. 굿! , 뷰리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다들 피곤했는지 노래방 가동도 없이 소곤소곤, 때론 차량 진행방향에 대한 작전회의로 회장님 종원이형의 여러 멘트들이 날아다닌다. 오후 5시 10분, 운두령에서 출발하여, 영동고속도로 버스전용 차로를 달리는 위엄을 뽐낸 덕에 저녁 8시 다되어 양재역 9번 출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총무님은 차를 인계하고 그러고 주변에서 유명하다는 주꾸미 철판요리를 먹으면서 지난했던 하루를 회상하기 바빴다. 작대기를 빌려주어, 본인은 불편했을, 행복한 산행을 마무리할 수 있었기에 종원이형께 감사드려요
(출발)
사당 양재 복정에서 각기 기다려 총무님이 운전하는 렌터카에 10명이 탑승하여, 마침내 아침 8시 기다리고 기다렸던 2월 산행과 시산제 행로에 올랐다. 가는 길은 순탄하여 광주 휴게소에 잠시 공복을 채우고 9시경 목적지를 향해 날라 운두령에 도착하니 오전 11시가 넘어 있었다. 차량이 너무 많아 운두령 한창 아래 갓길에 주차하고 여러 준비작업 끝에 오전 11시 30분 계방산으로 큰 발걸음을 내디뎠다.
(산행하다)
처음부터 급계단을 맞이하면서 험난한 행로를 예상했으나 웃으면서 넘겼다. 계방산은 운두령 1089 출발 후 잠시뒤 1157에 이를 때까지 줄곧 오르막을 유지하다 다시 1073 고지까지 내리막을 유지한다. 출발지보다 낮다니, 이때 알아보았어야 하는데, 고행의 시작이란 것을 느꼈어야 하는데, 다들 보들보들 하얀 눈에 정신이 반쯤 나가 있었다.
얼마나 그렸던 눈이던가, 얼마나 보고팠던 눈이던가,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정상까지 그 오르막 대행진을 별 거 아니게 생각했는지 모른다. 악마의 목구멍(숨구멍 혹은 콧구멍) 구간이 두 곳 있다. 끝없이 이어진 계단과, 완전 급경사 돌계단 구간이 그곳이다. 하산 시에 그 냉정함의 끝을 보았지만 오를 때는 흥겨워 힘든 줄도 몰랐다. 그만큼 하얀 눈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쉼터를 몇 개 지나고 점점 많은 사람들을 만나 나간다. 전망대 가는 오솔길에는, 정상가는 비좁은 길에는 산악인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크레파스, 크레바스인지, 엄청난 깊이의 발자국이 파여 있다. 누구의 것인지 몰라도, 아, 러셀이 이런 거구나, 다져진 길을 살짝이라도 벗어나면 풍풍 빠질 터였다. 환이형이 살짝 보여주기도 한다.
걷은 것이 걷는 게 아니었다. 나란히 일 미터도 안 되는 촘촘한 간격으로 오르고 또 올라야 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이곳 계방산을 찾아 주었다. 백 명, 이 백명, 아니 족히 오백은 넘어 보일 정도로 사람이 사람을 몰고, 물고 다녔다. 계방산 눈꽃 축제가 유명한 것은 사실인가 보다.
곳곳에서 단체 산악인들은 식사를 하고 행사를 하고 서로의 단합을 외치고 있었다. 다소 늦게 출발한 우리 팀의 전체 일정에 지장을 주지는 않았지만 쾌적한 산행은 아니었다. 그러나 저러나 찬찬히 천천히 걸음을 옮겨 오후 1시 되어서야 전망대 도착할 수 있었다. 더워서 겉옷을 모조리 벗어버렸는데 바람과 기온이 내려간다. 다시들 옷을 걸쳐 입는다.
아!, 왜 그 힘든 길을 걸어 걸어 이곳 오는지 알 것 같다. 눈앞에 다가오는 전경이, 경치가 가히 황홀을 넘어서고 있었다. 누가 이런 광경을 보내 주었을까, 하루 전에 이틀 전에 왔더라면 아마 더 깜짝 놀라 쓰러졌을지 모를 일이지만 지금도 충분히 좋았다.
태백의 산 부리 부리들이 형제같이 자매같이 나란히 보듬고 있다. 간혹 크기도 간혹 작기도, 어느 화가가 신의 명을 받아 어젯밤에 신나게 그림을 그려 둔 모양이다. 완벽한 채색화다. 신의 경지에 이른 화가의 역작이다. 눈을 뗄 수가 없다. 살아있는 한국화, 묵화의 극치이다. 단순하지만 붓의 터치가 저 멀리서도 느껴 온다. 그 화가의 이름은 정선일까요, 희용일까요, 인복일까요,
모든 산악인들 사진 찍기에 정신들이 나가 있다. 환이형이 내놓는 초코파이와 회장님이 주신 귤 한 조각 먹고서 다시 길을 나선다. 우리는 바쁘다. 정상으로 가는 길도 지체되기는 마찬가지다. 걷고 오르고 걷고, 마침내 정상 바로 잎에서 흥분되었는지 고함을 지르고 말았다. 순간 이 무슨 예의 없는 행동이냐며 총무님의 질책을 받는다. 오후 1 시 40분이다.
정상의 정말 멋있는 풍광은 잠시 뒤로 미루고 다시 주목나무 군락지로 발걸음을 옮긴다. 정말 힘들어 퍼지고 싶었는데 그럴 수도 없다. 그렇게 힘들게 시산제의 현장으로 떠났으나 길의 상황이 열악하여 돌아서고 말았다. 그곳이 최후의 만찬장소인지 전문 산악인들은 그쪽으로의 진행을 멈추지 않았다.
다시 계방산 정상 돌아오니 오후 2시다. 아직도 사람 많다. 정상석 사진은 찍을 엄두도 못 낸다. 정상 광장 한편에서 어찌어찌 산악회 펼침막을 내걸고 마침내 인증샷을 남긴다. 비로봉이, 대청봉이, 귀떼기청이 저만치서 불러대기에 머리 위 대청봉 걸친 사진을 환이형이 눌러준다. 눈꽃 없었지만, 상고대 없었지만, 그냥 좋았다. 길바닥에, 겨울나무 아래로, 저 멀리 그림 위로 하얀 솜사탕, 찹쌀가루들, 그냥 좋았다.
(시산제)
정상에서 10분쯤 내려오니 조금 전에 엄청난 산악인들이 머물렀던 넓은 터에 사람 한둘 있을 뿐이다. 여기다. 신께 고할 장소로는 여기가 딱이다. 회장님, 총무님, 특별히 알대장님 제수를 준비하고, 다들 준비해 온 음식물을 모아보니 대제를 지내기엔 부족함 없다.
초헌 아헌 종헌의 순서로 고유제를 지낸다. 회장님의 축문은 가히 명품이다. 이 땅의 노동형제와 세월호 이태원 아픈 이들을 위한 기도문이오, 종원이형의 건강한 산행과 우리 모두의 즐겁고도 무사사고를 비는 축원이었다. 다들 두 번 절하고, 다들 오만 원권 화폐를 계방산신께 바쳤다.
김밥, 유부초밥, 라면, 막걸리, 어묵, 시루떡, 인절미, 사과, 배, 귤, 커피, 초코파이 등등 무수히 많이 음식이 차려졌다. 원래 평창 속사 인근에서 송어회를 뒤풀이로 먹을 계획을 알대장님, 세웠는데 종원이형이 얼마 전 고등동창과 송어회를 먹어보니 세상 맛없는 생선이 송어라는, 그 말에 다들 끄떡끄떡, 송어회 뒤풀이는 서울 만찬으로 대체되고 말았다.
(하산길)
오후 3시 5분에 시산제와 맛있는 먹거리 파티를 마치고 이제 하산길에 접어든다. 든든히 먹고서 내려서니 그 많던 사람들 다 어디로 갔는지 없다. 한산하기 이를 데 없다. 오후 3시 23분 전망대를 통과하고 다시 3시 43분에 쉼터에 이른다. 악마의 목구멍이 남아 있다. 급경사를 내려갈 땐 난간 줄 붙잡고서야 겨우 발을 뗀다. 눈은 이제 녹아 버렸고 첨벙첨벙한다. 다시 또 나무계단이 나타난다. 무릎 좋지 않아 최악이다. 다들 성큼성큼 내려서는데 나는 왜 이런가,
내려서니 고지명 1073이다. 악명 높은 곳이다. 계속 오르는 길만이 남아 있다. 천천히 찬찬히 가야 하는데 치고 나간다. 부부인지 연인인지 두 사람이 뒤따른다. 마지막 겨울풍취를 즐긴다. 한참 걷고 걷고 지독히 오르막 길이다. 그렇게 홀로 예수같이 부처같이 세상을 여행하다 보니 어느새 끝이 보인다. 오후 4시 49분이다. 아이젠을 벗어젖힌다. 오후 4시 56분 일행들이 도착했다. 그리고 17시 10분에 서울로, 서울로 오늘의 영웅 총무님 이 시동을 걸었다.
(뒤풀이)
저녁, 다소 늦은 8시에 시작된 뒤풀이는 주꾸미 철판요리로 호사를 했다. 남 회장님 적극 추천집이다. 정말 맛있는 집이다. 모든 썰을 풀어낸다. 예의 사돈 얘기도 나왔다. 총무님은 완벽하게 차단하신다. 만석이형 주량이 예전 같지 않다. 용진이 형이 실력을 발휘한다. 종원이형은 뒤풀이를 주도해 나간다.
엊저녁 토영 상갓집서 새벽녘 올라와 바로 운전대를 잡은 총무님께 찬사가 이어진다. 소주와 맥주를 제법 먹었다. 선배와 후배가 한 달에 한번, 산이 아니더라도, 여행이더라도 맛있는 것 먹으면서 세월 낚아 가는 것이 더 없는 행복 아니겠냐고, 회장님 얘기한다.
종원이 형 사월의 네팔산행, 평산회의 7월의 일본 북알프스 산행도 잘 다녀오길 바랍니다.
회장님의 제안이다. 성신회의 이름을 시대에 맞게 짓자고 한다. 공모 수상자에 상금이 있을 것이다. 종원이 형 제안이다. 산행기를 모아 편찬하자고 한다. 그러고 강매하기, 무지 재밌는 얘기들을 나누고 저녁 9시 20분 미무리 하고서, 남 회장님은 버스로, 나머지 모두는 지하철로 대회전을 마무리지었다.
<<별책부록>>
부록 1> 사롸있네, 사롸이서
내 나이 마흔아홉, 낼모레가 쉰이다. 눈꽃축제 간다길래 무척 설레었다. 이전에도 와 본 적 있지만 눈꽃은 상고대는 봐도 봐도 멋있다. 옷차림에 신경을 많이 썼다. 히얀 머리카락 삐죽 보일라 패션 모자를 눌러쓴다. 분홍색 가방을 어깨에 메고서 청춘열차 타듯 렌터카 올랐다. 그 힘든, 힘든 고갯길을 넘고 넘어 전망대 도착했다. 인파가 얼마나 많은지 걸려 넘어질 지경이다. 일행과 떨어져 잠시 풍광을 구경하고 있는데 젊은 남자 둘이서 다가온다. 계속 지켜보고 있지나 않았을까, 혹시 혼자 오셨어요?
(이게 뭔 작업질이지, 어젯밤 신경 쓴 보람이 있는 건가, 아니지 내 나이 아직 오십도 안되었잖아, 어떻게 대꾸하지, 두 남자는 썩 괜찮았다)
아네, 저기, 쩌기 일행이 있어요, 이만, 다음 기회에,
(사롸있네, 나도 사롸있어, 내가 누구여, 나 아직 사롸 있다구, 계속 외치고 있었다 ㅎㅎ)
부록 2> 사돈님, 우리 사돈어른
최근 들어 산행은 빠지지 않고 다니고 있다. 운두령 가는 렌터카에서 잠깐 들러오는 얘기에 눈이 확 떠진다. 호랭이의 아들과 총무님의 따님이 초등 교사 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어, 이거, 뭔가 되겠다, 양복이 많이 해져 있는 게 생각났다. 양가 사돈을 맺어주면 되겠다. 산행 내내, 쉴틈이나 시산제나 차속에서도, 양재동 뒤풀이에서도 끊임없이 거간을 계속했다. 반드시 양복을 얻어 입고 말리라, 총무님이 한사코 발을 뺀다. 어디 좋은 방법 없을까, 환이형의 고민이다
부록 3> 우리 회장님 시간
신행 목적지에 대한 회장님의 마이크가 불을 튄다. 운두령은 이승복과 뗄 수 없다. 생가와 기념관과 이승복 다녔던 속사초등이 바로 옆이다. 1968년 12월에 참변이 일어난다. 당시 국제정세는 베트남전에 푸에블로호 납북에 100여 명의 중대급 인원이 남파되고, 그 와중에 이승복사건이 일어난다. 아버지와 형만 살고 할머니 어머니 동생이 함께 화를 입는다. 현장에 있지도 않았던 조*일보 기자가 기사를 작성하여 대문짝 하게 보도된다.
그것이 오늘의 이승복 스토리를 만들어 내게 되었다. 이 연사, 회장님도 이 연사 했단다. 세월이 흘러 김종배기자가 가공된 스토리임을 알렸고, 결국 소송전까지 이어지고, 언개련 사무총장이 대표적 오보리스트에 넣어 전시를 하기도 한다. 김종배의 명예훼손은 무죄, 전시한 사무총장은 유죄가 되었다고, 우리의 아픈 가공된 현대사의 뒷간이다. 당시 콩사탕을 이승복 어린이에게 주었더니 콩사탕이 싫어요, 라고 했는데 조*일보에서 공산당이 싫어요, 라고 보도했다는, 이승복 사촌 얘기도 했다(베트콩).
아울러, 오대산의 우통수가 한강발원지라는 , 태백의 검룡소와 검증까지 받았다는, 위성실측하니 검룡소가 맞지만 평창은 우통수를 기념한다는 얘기, 계방산은 한라 1950 지리 1915 대청 1708 덕유 1614에 이은 1577의 남한 다섯 번째 산이라, 회장님의 백과사전은 끝도 없이 이어진다. 단, 가요무대가 없었다. 참 아쉬운 대목이었다. 중간에 용진이 형이 자전거로 운두령 올랐다는 얘기도 나온다. 자전거라니, 대단합니다요, 당시 사진으로 인증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