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쓴다는 작가들까지도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만 제대로 썼지 대부분은 아무런 생각 없이 그냥 전쟁으로 쓰고 있다. 육이오 60주년에 맞추어 쏟아져 나온 대여섯 권의 문학 작품집과 동란 당시 학도병으로 참전했던 이들의 회고록에도 대부분 한국전쟁으로 표기하고 있다. 그런 측면에선 이곳 전쟁기념관 명칭도 잘못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하기야 기념관엔 육이오 말고도 연평해전이나 해외파병을 비롯하여 역사 속의 한산대첩 살수대첩 귀주대첩도 들어있긴 하다. 그러고 전쟁무기와 전투장비의 발달사까지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9할 이상은 육이오 동란 자료들이니 명칭 결정에 신중했어야 한다.
‘한국전쟁’으로 명칭이 잘못 붙여진 것은 아마도 전쟁을 주도한 미국이 붙인 ‘Korean War’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시 한반도가 긴장상태에 돌입했다. 그런데도 국회의 수장을 맡은 자까지도 사드반대를 외치고 나올 정도로 국론이 분열된 나라가 지금껏 지구상에 존재해 있다는 것이 기적이라면 기적이 아닐 수 없겠다. 어제 오찬회동을 주선한 재직 때의 원로도 나라를 걱정하는 말씀을 했다. “이렇게까지 된 마당에 딴 방법이 없지 않느냐, 우리도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하고 핵을 개발할 수밖에” 오히려 북한의 핵 위협은 우리의 NPT 탈퇴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자위적 핵무기 보유도 정당화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새삼 '국가 최고이익이 심대한 위협에 직면하면 3개월 전에 회원국들에게 통보하고 NPT를 탈퇴할 수 있다'는 규정이 떠올랐다. 사는 곳에서 가까운 유엔기념공원만 자주 드나들면서 전쟁기념관 소식은 가끔씩 티브이에서 뉴스로 전하는 영상을 접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다가 독일에서 나치의 수용소 시설을 둘러보면서 우리의 전쟁기념관이 떠올랐다. 귀국하면 꼭 한번 찾아보리라 생각했고 그런 기회가 의외로 빨리 찾아왔다. 용산 미8군 클럽에서 미팅을 끝내고 도로를 건넜다. 전쟁기념관이 바로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중순으로 치닫는 9월인데도 작열하는 태양은 뜨거웠다.
실내 전시관에서 만난 캐나다에서 온 젊은 커플. 여자를 비행기 트랩에 세우고 남자가 사진을 찍는데 완전 역광이었다. 사진이 까만 걸 카메라 탓으로 돌리면서 의아해하고 있었다. 방향을 반대로 틀어 두 사람을 한꺼번에 그곳에 올려 세우고 다시 찍어주었다. 이곳 기념관에서 자신들이 든 사진을 가지고 싶어 하는 외국인들이라면 십중팔구는 가족 중 육이오에 대한 사연이 있을 것 같아서 몇 팀을 더 찾아다니면서 찍어주었다. 전시관에는 군에서 지급받았던 개인화기인 M1소총과 뒤에 카투사에서 사용했던 M14까지 전시되어 있어서 감회가 새로웠다. 월남전에서 위력을 보인 M16까지도 선보이고 있었다.
단체로 방문한 우리 학생들이 왁자하게 시끄러운 건물 현관을 나섰다. 햇살은 여전히 따가웠고 광장으로 오르는 계단을 따라 조경용으로 심은 벼와 조 이삭이 황금빛을 띠었다. 육이오에 참전한 나라들을 기리는 조형물엔 월계관이 얹혔고 가슴 뭉클하게 고마움을 전하는 글도 그 안에 새겨져 있었다. 원형으로 만들어진 평화광장의 게양대에선 육이오 참전국들의 국기가 연신 다다닥 다다닥 소리를 내가며 힘차게 펄럭였다. 그런데도 그 옆으로 늘어선 베트남전에 참전한 국군 부대들의 사단기 깃발은 살랑살랑 나부낄 정도로 조용하여 대조를 보였다. 깃발마저도 사드배치가 어려운 나라의 현실을 걱정하는 것 같았다.